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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선생과 네티즌과의 답변 모음 (3)
[ 목 록 ]
1. 고려 북쪽경계에 대하여
2. 신라방이 아니라 사로신라
3. 동이가 우리민족이라는 사서의 근거
4. 평양 및 경주 유적에 대한 답변
5. 구리시대의 철사용에 대한 답변
6. 한반도에 백제가 존재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답변
7. 단군은 진짜인가에 대한 답변
8. 기자조선에 대하여
9. 가야 또는 가라에 대하여
10. 한강에 대하여
11. 지나삼국과 우리삼국 무대
12. 조선에 대하여
13. 조선이 대륙에서 영토를 상실 ?
14. 적석목곽분에 대한 서지연구자의 소견
15. BC 또는 AD
16. 웅녀얘기
17. 재위기간에 질의에 대하여
18. 한족과 동이족과 우리민족에 대하여
19. 고대 언어 사용에 대하여
20. 언어로 민족구분은 시조중심 사관에 반하는 것
21. 고대의 일본과 일본열도의 일본
22. 새롭게 조명된 민족사는 만들어 질것입니다
23. 삼국사기와 중국25사에서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를 여러가지방면에서 살피면
24. 답답한 교과서가 된 이유는 대한민국가사관으로 편찬하기 때문
25. 삼국사기에서 왜는 우리역사 공통부분의 왜로써 사 로의 남쪽
26.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때 강해졌을까 ?
27. 고구려가 도읍한 평양은 해주의 서남쪽에 있다고 한다
28. 고려대군은 고려강역을 바르게 해야 답을 얻을수 있다
29. 단기의 기원에 대하여
30. 삼국이 요중심 동쪽에 있어도 한반도역사는 낙랑국 고구려 신라 고려로 계승된다
31. 고려강역은 만주에서 고구려 발해 신라에 이은 통치가 있은 것은 아닌지
32. 만주에 있는 호태왕비 등 왕능을 보는 견해
33. 사로신라 즉 대륙신라의 건국과 패망의 추정
34. 해동고기에 대해서
35. 백제사의 구대에 대하여
< 고려 북쪽경계에 대하여 >
고려사 권 46에 의하면 서북쪽은 압록강,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춘령에 대하여는 중앙도서관 소장 한61-77(고지도) 및 규장각소장 고 4709-89-2(고지도)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서북쪽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으로 볼수도 있지만 만주원류고 신라항목과 고려사 137권 철령위 및 고려사 권42권 동령부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요하가 압록강으로 불리웠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 신라방이 아니라 사로신라 >
현재까지 신라역사는 한반도에서 건국하고 통일한 이후 황해 서쪽에 신라인이 진출한신라방이 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신라방이라는 지역에는 고조선 이전 한웅시대의 치우 천자능이 있고 김유신의 선조이며 신라인의 선조인 소호금천씨 능이 있고 기자가 살던 서화와 기자총이 있는 몽성이 있는데
신라방 지역에는 김유신의 전쟁지명이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진출한 신라인의 지역인 신라방일까 아니면 한웅 그리고 소호금천씨 및 기자를 계승한 신라가 있었고 그 역사가 우리 한반도 신라와 연계되고 하나의 민족으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것 아닌지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
< 동이가 우리민족이라는 사서의 근거 >
중국의 정사인 25사에 보면
삼국시대를 나타내는 모든 기록에서 부여, 고구려, 예, 한, 백제, 신라, 가라는 동이의 각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 단군, 기자, 예, 한에 대한 기록이 동이전 속에 들어 있습니다
- 후한서, 위서, 송서, 남사, 북사, 신구당서 등 여러 사서에서도 상기 국가들이 동이의 각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평양 및 경주 유적에 대한 답변 >
북한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물은 32년 - 503년까지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치하였을 때 남긴 유물로 보아야 하며
경주의 유물은 503년 고구려연방의 지방"간"에서 독립한 신라의 유물로 보아야합니다
독립한 신라의 경계는 광령(지금의 요녕성 북진)에서 길림동쪽까지가 신라의 영토라고 만주원류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 만주원류고 : 18세기 청나라에서 기록한 역사서
< 구리시대의 철사용에 대한 답변 >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역사에 관심을 가져 주시니 고맙습니다
고조선만 있다고 배운 역사로서는 이해하기가 곤란한 구리시대에 대하여 질의하신 이재성님께 짤막하나마 대답을 드림니다
중국25사의 첫번째 사서인 사기에 단군조선이전인 속칭 한웅시대로 불리는 시대의 구리의 통치자에 치우천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치우는 '옛 천자'라고 하였고 그와 대적한 인물이 중국역사의 시조로 추앙하는 헌원은 소전이라는 제후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헌원과 대적했던 천자 치우는 사기에서 '동두철액'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철가면을 했다는 기록으로 풀이할수 있습니다(사기1권1-4쪽에 기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람니다)
동두철액이라는 기록이 있어 쇠붙이를 사용한 것으로 보고있고 그 이상의 기록을 소개할수가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감사합니다
< 한반도에 백제가 존재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답변 >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역사에 관심을 가져서 감사합니다
황용호님께 짤막하게 답변을 드림니다
사로신라 백제 왜가 중국에 있었다고 하니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므로 본 연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할수가 있습니다
한반도 유적으로 백제는 공주의 사마왕능이 발견되었는데 백제가 한반도에 없다고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제가 없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백제의 수도 한성 웅진이 한반도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것입니다
서울 석촌동 고분은 만주의 고구려 고분과 형태가 비슷하며 개로왕때 한성에 건설한 현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백제가 패망할때의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동명 덕안 동성 잠산 독산 평원 황산 백마하 주류자 침구 (당)항성 등 많은 지명이 있고
위 지명이 있는 곳에는 치우천자능이 있다고 하였고 김유신 선조인 소호금천씨능이 있다고 하였으며 조선시대 기자총이 있다는 몽성도 같은 지역에 있으므로 동이족 역사의 연속성에 비중이 많이 가고 백제의 수도 웅진도 중국에서 찾아야 할것으로 보여집니다
백제가 고구려연방의 일부에 속하여 있을때 고구려태왕의 한반도 순행때 백제인이 동행하므로서 이땅을 알았고 백제가 고구려연방으로부터 광복하고 진출하여 금강유역을 통치한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백제의 한반도 진출은 고구려지방관으로 보이는 간(한) 즉 503년 마립간에서 왕으로 변경하여 한반도와 만주를 통치하던 신라가 독립하게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보여지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백제유물이 존재하는 한 백제와 무관하다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분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를 보는 시각으로 해법을 찾고 있는 중이므로 많은 도움을 주시기 바람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가 우리역사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한민족이라하고 만주에는 여진족 만주족이 있다고 하여 삼국민의 후예가 다른민족으로 보고있는 국사관에서 삼국민의 후예가 하나되는 민족사관으로 삼국시대를 재조명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단군은 진짜인가에 대한 답변 >
현재 눈으로 보고 있는 것도 어느것이 진실인가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물며 고조선이 있었고 단군이 있었다고 하는 것에 의심을 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족보라는 기록으로 가문의 역사를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족보에서 시조부터 본인을 찾아가라고 하면 몇분이나 자신있게 시조로부터 본인까지 도달하겠습니까? 그러나 본인에서 시작하여 시조를 찾아가라고 한다면 찾아가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역사에서 단군이 있었다고 기록하여 알수있습니다
야사라고 불리우는 삼국유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단군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국사에서는 단군이 우리역사의 첫장을 열었다 즉 개국했다고 하지만 중국25사에서는 단군조선 이전 치우 천자가 다스리던 '구리'라는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서는 치우는 여러 한웅 중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군은 찐짜있는가?' 라는 물음에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군의 능이 어디에 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북한에서 단군능을 조성한것은 얼마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단군 이전의 통치자 천자 치우능이 중국의 산동성 동평군에 있다는 기록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있으니 믿어야 연구가 될것입니다
만약 6.25 동란때 할아버지가 어디서 전사를 했는지 모르고 시신을 거둘수 없어서 묘를 만들지 못하고 증조할아버지는 고향에서 돌아가셔서 묘를 조성하였다고 기록으로 접하였을때 할아버지 묘가 없으니 인정할수 없고 또 증조할아버지는 인정할수 없다고 주장할수 없을 것입니다
단군 이전에 한웅의 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단군이 있다고 믿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사에서 중국인의 시조로 모셔지는 소전이라는 제후의 아들 헌원과 대적한 구리의 천자 치우능이 있다고 기록된 이상 야사를 근거로 한다고 하지만 단군은 있다고 하고 역사연구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기자조선에 대하여 >
기자조선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드립니다
현재까지 조선시대 기록된 여러 사서에 의하면 기자조선이 기자때부터 건국하여 있었던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25사와 야사에 의하면 기자의 후예로 기후부터 번조선왕으로 불리워지고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남으로 한(삼한)에 드러간 것으로 되어 있어 기후에서 기준까지가 기자조선으로 보아야 하며 선조 기자까지는 추존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기자가 건국한 조선이라고 하기 보다는 기자가 조선에 살았고 살던곳이 서화(중국 하남성)라고 하고 기자총이 몽성(중국 안휘성)에 있다고 하니 기자가 살던 시대의 조선땅 서쪽경계 즉 주나라와의 경계를 찾아낼 수있는 중요한 인물로 보여집니다
기자는 정치가 이기보다는 위대한 공자 5-6세기이전 동양사상을 정리한 분으로 소개하고져 합니다
< 가야 또는 가라에 대하여 >
우리역사에 관심이 많으신것 같습니다
국사에서는 인쇄술이 통일신라때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사를 배울때는 송나라 4대 발명품중에 인쇄술이 들어 있습니다 신라패망이후에 건국된 송나라인데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야도 동사강목에서는 가야와 임나가 같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체로 가야는 경상남도에 근거를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상도에서 출토된 말의 갑옷 즉 마갑은 현대전으로 비유한다면 전푹기 이상으로 보여지는데 경상남도 지역을 통치하는 가야의 유물일까요?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그림의 현물이 출토되어도 과연 가야의 유물로 주장하고 가야를 경상도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야의 후예로 유명한 분이 김유신장군입니다
한반도에는 김유신때 지명이 하나도 없는데 김유신의 조상 소호금천씨능이 있는 중국에는 의자왕능이 있고 주변에는 홍수가 말한 평원, 계백이 전사한 황산, 도독부인 동명 덕안, 그리고 김유신과 전쟁지명인 동성 잠산 독산이 있고, 주류성으로 보여지는 주류자도 있고, 백마강으로 보여지는 백마하도 있고, 침현으로 보여지는 침구도 있고, 당과의 경계인 (당)항성이 주와 조선때 기자가 살던 서화의 남쪽에 있으니 김유신의 신라나 과연 가야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중국 안휘성 황산이 있는 지역에는 김수로왕과 관계가 깊을수 있는 묘수 허촌 구지봉으로 보이는 구자산이 있고 황산이 있으니 황산강도 있을수 있으니 과연 가야는 어디에 있다고 연구되어야 할것인가요.
우리는 목화를 고려때 문익점이 씨앗을 가져와 퍼뜨린것으로 배웠으며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김유신이 살아 있을때 목화(면)을 고구려에 주었으니 김유신이 살던 신라와 그 선조들의 가야국은 어디인가를 연구해야 할것입니다.
한반도에 있는 수로왕묘나 김유신묘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논할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음과같은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남하한 실향민들이 먹고 살만하니까 고향은 가지 못하고 묘나 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인들이 성묘를 다니지 못하고 몇세기가 흘러버리면 계속 관리한 묘가 진짜묘로 보일까요 아니면 관리되지 못한 북한에 남아 있을 묘가 진짜로 찾을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느 역사연구가 진짜인가 논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새롭게 밝혀보아야할 사명이 있으며 현대인들은 바르게 정리하려고 노력할수 있을 뿐입니다
자세한 것은 더 연구하여 다음 기회에 전하여 드리겠습니다
< 한강에 대하여 >
현재의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삼국이 영토전쟁을 벌여온 것으로 배우고 있으니 한강에 대하여 주목하게 됨니다 만약 그렇다면 2천년동안 이름이 변하지 않은 유일한 강일것입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에는 남천이라는 강이름이 등장합니다. 비에서 남천은 어디일까요
또 그 비에 한성은 현재 위치보다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제의 한성과 연관된 한강이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백제 한성과 관게된 한강은 한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다음과 같은 현장이 있어야 백제 한성이 있는 한강을 찾을수 있습니다
한강 서북쪽에 열병을 하였으니 한강은 대각선으로 흐르는 강일것이라는 점이며
연와로 성을 만든 흔적이 있어야 하고 물돌로 개로왕의 아버지묘를 만들었으니 그 현장이 발견될수 있고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으니 그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의자왕묘가 있고 소호금천씨능이 있는 중국에는 제방과 숭산과 하수로 불리운 강이 있으니 어디가 한강인가를 연구해야 될것입니다
< 지나삼국과 우리삼국 무대 >
중국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강역이 어디를 경계로 하였는지가 궁금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장안 낙양중심의 진과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나라와 우리3국의 강역의 경계는 현재 주나와와 고조선의 경계를 찾을수 있는데 바로 기자가 설던 서화가 경계지역의 조선땅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3국의 경계는 한과 고구려 전쟁지명인 북평 태원 상곡 어양중 북평과 태원이 있고 당과 고구려의 전쟁지명중 용도 신성 은산 등이 있으며 신라와 당의 경계에 있는 (당)항성이 서화 남쪽에 있으며 신라와 백제경계로 동성 잠산 독산 그리고 백제 패망때의 지명 평원 황산 동명 덕안 침현 주류성 등과 개로왕때의 지명이 숭산 등을 종합하면 산서성 요를 중심으로 동서 즉 태항산맥을 동서로 구분하여 한족3국과 우리삼국이 경계하고 있었던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밀운 은산 용도 북평 신성 석문 동명 숭산 서화 항성 독산 동성 잠산 독산 덕안의 서쪽은 장안중심국가의 강역이고 동쪽은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등의 강역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백제가 진출했다고 백제7군 및 진평2군이나 한반도 신라인이 진출하여 조성했했다는 신라방이 아니라 구리의 치우천자 소호금천씨, 기자가 살던 조선인의 후예의 3국이 있었다고 보여지고 있습니다
< 조선에 대하여 >
조선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중국25사를 인용하면 주나라와 경계를 하고 있는 서쪽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조선에 살았던 기자 그가 살던 서화의 동쪽은 다 조선강역으로 볼수 밖에 없다고 여겨짐니다
중국25사에서 나타내는 조선 강역을 무시하고 한반도만 있었다고 하면서 25사 동이관계 기록을 인용할수는 없습니다
다만 중국에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가 요 중심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여도 한반도인과 같은 민족이었고 하나의 민족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연구되고 있습니다
더 연구하여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조선이 대륙에서 영토를 상실 ? >
조선이 대륙에서 영토를 언제 상실했을까?
우리는 조선이나 삼국이 중국에 있었는데 언제 그 영토를 상실했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대륙에 영토를 상실했다는 개념은 한반도만이 우리역사 강역이라는현재의 역사상식 때문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 발해강역이라는 만주 현재 지리상식으로는 한족의 무대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여진족 또는 만주족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인이 여진족이나 만주족으로 불리울때 고구려 발해역사를 우리역사로 보는 상식으로 가능한 발상이다
우리는 대륙에서 조선 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의 무대를 상실하였다는 생각은 우리역사무대가 아닌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밑에 있을때는 형제의 재산은 바로 아버지라는 단위에서 하나로 계산되지만 자식이 분가하면 형제들간의 재산은 각 각이고 독립된 단위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이나 삼국의 중국무대를 상실한것이 아니고 서로 분가하였을 따름이니 상실한것이 아니라 통일되지 못한 민족사 때문인 것이다.
중국이나 몽고나 한국은 서로가 독립된 개체이지만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역사를 정립하면 결코 영토상실이라고 생각은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고조선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를 거쳐서 산서성 요의 동쪽이라는 요동에서 동이무대라고 하다가 요나라 건국으로 요나라의 동쪽(요하의 동쪽)이라는 개념으로 요동이 새롭게 불리워 지면서 마치 삼국시대나 고조선시대의 요동을 만주로 변질시켜서 한반도만의 역사무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도사관에서 벗어나 최초 국가 구리를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를 연구하고 아시아인이 하나의 민족으로 거듭나야 고대국가의 영토상실이라는 개념에서 벗어 날수가 있는 것입니다
< 적석목곽분에 대한 서지연구자의 소견 >
고고학에는 무례한인데 질문을 주셔서 미력하나마 서지연구로 본 소견을 드리니다
현대의 연방국가에도 미국은 모두 주지사로 명명되는 연합체의 연방국과 주지사와 대통령으로 연방국을 이룬 소련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리(고구려)는 여러부족들이 이룬 국가로 인식되고 있지만 고구리는 연방국가라는 점입니다. 지방관을 '한' '간'이라고 부른 지역과 '왕'이라고 하는 복속국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였음이 삼국사기와 호태왕비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김부식은 503년에 간에서 왕으로 통치자의 명칭이 변경되는 것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고구려연방의 지방관 '간'에서 신라왕으로 한다는 것은 독립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묘 축성이 적석목곽분에서 변경된 것이 한반도외 다른지역과 일치되는 것은 고구려연방국가일때 어떤 부족의 풍습이 관계가 이었던 것인 아닌가 생각되고 한반도의 신라독립 영향으로 묘제가 변경되지 않았나 하는 소견을 가지고 있으나 더욱 많은 연구가 된후에 결론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될것으로 미약하나마 답변드립니다
< BC 또는 AD >
점이 모여서 선이 되는데 선 상에서 어떤 점을 기준으로 하여 전후좌우를 표현한다.
우리역사교육은 단군을 기준으로 하고 단기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그리스도의 영향으로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예수탄생 이전을 BC.라고 표현하고 예수탄생 이후를 AD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대사에 대하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분류는 삼국시대까지를 고대사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웅녀얘기 >
고조선때의 웅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비롯됨니다
웅녀를 곰이 변신한 여자로 풀이 하여 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몽의 어머니 하백여 또한 현대인의 풀이로서는 물귀신의 딸입니다.
그러나 '하백녀'의 '하'는 발음이 '간'으로 북방계 지도자의 호칭입니다. 예로 징기스칸 마립간 거서간 그러므로 하백녀의 풀이는 '통치자의 맏딸'로 풀이가 되어집니다.
웅녀이야기로 돌아가서 삼국유사를 풀이함에 있어서 곰이 변한 여자로 풀이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 웅녀에 대한 기록을 답할수 있는 자료를 찾을수가 없습니다.
현재와같이 웅녀의 풀이를 곰이 변한 여자로 풀이 한다면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에 대한 댁호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택호는 안동댁 부산댁 서울댁 하면 안동 부산 서울이 짐승의 이름도 아닌 그 고장의 이름이며 처녀시절에 살던 고장을 붙여 댁호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대의 지역을 나타내는 방법에는 짐승을 그 부족의 상징으로 나타냈다고 볼수있습니다
웅녀를 곰여자로 푸리한다면 부여에서 마가는 말집, 우가는 소집, 저가는 돼지집, 구가는 개집으로 풀이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웅녀는 곰여자로 푸리한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웅녀 이전에 이미 치우 천자(한웅)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인간시대이므로 인간다웁게 풀이하여 봄이 바람직하다고 할것입니다
속시원히 답을 못드려 죄송합니다
< 재위기간에 질의에 대하여 >
왕들의 재위기간에 대하여 이렇게 심층깊게 연구를 하셨으니 시원한 해답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삼국시대 왕들의 재위기간이나 내용을 연구비교할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얼마나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자료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출생했다는 기록을 믿을수 밖에 도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도 그 시대에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기록을 믿고 연구할수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설사 그 시대에 살았다 해도 어느것이 진실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지점에 대해서 연연하는 것보다 전체를 보고 연구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언제나 일부분으로 논쟁을 하다보면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의문점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될때까지 유보하고 다음을 연구하는 것이 보다 실용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시원한 대답을 드리지 못하하여 죄송합니다
< 한족과 동이족과 우리민족에 대하여 >
한나라가 역사 기록을 하기 시작하면서 장안(서안)중심의 역사를 기록하였는데 시조는 황제 헌원으로 하였고 나라는 하나라가 최초 국호로 되어 있고 그 이후 주나라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는 장안중심의 역사를 정립하였는데 장안중심의 동쪽이고 요중심의 동쪽을 동이로 부르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하나라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최초의 황하 이름이 하수인 것이다
그리고 주나라를 계승하고 진나라를 이어 한나라에 이러렀는데 보통부르기를 하족 이나 주족도 아니고 한족이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중국이외에서는 지나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진시황의 진나라와 한나라를 합져서 진한족이 지나족으로 부르게 된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중국민족이라는 것은 현재의 중국인을 하나로 묶는 말이며 중국민족이라는 말에는 여러민족을 포함하는 다민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한족이라는 말보다는 중국인을 하나로 보는 중국민족이라는 말로 서적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여기서 한족이던 중국민족이던 한족이 시조로 하고 있는 황제헌원에 대해서 살펴보면 헌원의 7세손에 순임금이 있고 그는 동이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순이 동이인이면 헌원은 동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한족이라고 한던 중국민족이라고 하던 동이의 후예임을 감출수가 없다
그들이 세운 시조 헌원은 소전이라는 제후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턴 시조가 동이이므로 그들이 한족이라고 하던 중국민족이라고 하던 우리는 동이의 일파로 기록할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남한에서는 한민족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조선족이라고 한다
근세조선시대에서 일제시대까지는 조선족이라고 부렀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이전 소위 우리역사라고 배운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시대에는 동이의 각국가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 역사가 우리역사라면 우리는 동이의 후예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족이던 중국민족이던 한민족이던 조선족이던 동이의 후예임을 부정할수가 없다.
여기서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때는 하나라보다 150여년이 빠르다. 그런데 제후의 아들인 헌원과 대적한 한웅이라는 치우를 사기에서 구리나라의 천자라고 하였으니 하나라보다 고조선보다 먼저 구리라는 나라속에 헌원도 소호금천씨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단군을 시조로 하던 중국인이 헌원을 시조로 하던 동이의 후예이므로 한족이나 한민족으로 분리하기전 구리를 최초 국가로 하고 그 백성은 하나로 하는 민족사를 복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여 원수로 생각하여 다른민족이라고 생각하여 현재의 국가사관으로 민족을 구분하여 분열할것이 아니라 국가를 연방국가의 연방으로 생각하고 연방국가의 백성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역사를 재정립한다면 아무래도 분쟁보다는 화합의 방향으로 모색될것이고 백성들의 행복을 추구할수 있을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재정립하려는 역사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밝혀진우리역사를 발행하여 재정립을 위한 기초 즉 역사사료를 새로이 규명하고 가치관을 재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력하나마 더욱연구하여 좋은 회신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대 언어 사용에 대하여 >
고대 언어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대하여 자세한 답변은 어려웁지만 간단히 생각을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한국이나 구리시대나 조선시대나 삼국시대나 동물과 달리 언어로서 표현을 하였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림문자던 기호문자던 그래서 지금 소전이나 한자나 상형문자가 남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자는 유물에 남았으나 소리는 저장 방법을 몰라서 남아있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인이 어떤 소리를 하였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한나라이후 한자는 반절법이니 절운법이니하여 자전을 만들어 표기하여 왔으므로 현재의 소리로 역추정하여 진나라시대까지는 소리의 방법을 알수가 있습니다
한자는 반절법에 의하여 소리방식을 나타내다가 지금은 발음부호를 만들어서 소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글은 한자의 반절법을 대신하여 발음부호가 만들어지고 문자로 사용하게 된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현재까지 한자는 한족들이 만든것으로 이해하여 왔으나 한자는 동이문자입니다. 동이중에서서도 변두리에 속하여 있던 우리들만이 분명한 소리를 할수 있습니다
즉 입성은 우리들만 할수 있다면 한자를 만든 조상이 누구인가는 말할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요중심(태행산맥 중심의 동쪽)에서 동이역사를 바로하면 한자를 만든 조상들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갑골문자가 발견된 안양의 근처에는 치우천자의 능이 있다는 동평군이 있고 백제시대 요서에 있다는 진평2군의 흔적으로 보여지는 진성과 고평이 요중심(안양)의 서쪽에 있고 안양 동쪽에는 평원 황산 백마하 동명가 있도 안양남쪽에는 주류자 항성 동성 잠산 덕안 등이 있으며 안양의 북쪽에는 신라시대의 독산성 석문 석성이 있고 남쪽에는 항성 등이 있어 치우대부터 백제신라까지 동이의 무대였음이 밝혀지고 있으니 한자가 누가 만들었나를 짐작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자가 있는데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반절법에 의한 소리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발음부호를 만들었다고 할수있으며 한글이 가까운조상이 만들었다면 한자는 먼조상이 만들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또한가지 문자로서 의사소통을 할때 고대인들은 시차순서와 행동순으로 문자를 나열하였을 것이며 현재의 한글의 방법이 가장고대의 소통방법을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현재의 중국언어는 영어와같은 방법으로 한글사용방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이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현재 중국어의 해석방법으로는 많은 불편이 있으나 우리식 아니 고대방식으로 풀이하면 많은 부분이 바르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단고기에 고조선때 한글과 닮은꼴 가림토문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10세기 이전에 쓰여진 유물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더욱연구과재로 삼고자 합니다. 어찌하던 우리는 모양을 닮은꼴에서 문자를 시작하여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문자로 발전시킨 위대한민족임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영어를 비롯한 서양문자는 반드시 발음부호를 기록하여 자기들도 전승되고 있으나 한글은 그 자체가 문자이고 발음부호로 사용되고 있으니 이보다 발전된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조상들이 이룩한 역사를 재발견하기 위하여 한글을 토대로 한자에서 영어대신 발음부호로 하여 동양문자의 소리를 통일시키는 역할을 연구해야 할과재로 삼고져합니다
감사합니다
< 언어로 민족구분은 시조중심 사관에 반하는 것 >
우리의 교육에서는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해야 우리민족이라고 배워왔으며 현대 민족구분에서도 언어를 민족구분의 요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글과 우리말을 사용해야 우리민족이라는 공식으로 가르쳐왔습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이전 한글을 사용하지 못할수 밖에 없는 고조선 및 삼국의 후예중 한반도에 있지 못하면 우리민족이 아니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현재 만주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17세기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민족의 기준이 말로는 고조선으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세종대왕시대가 기준으로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만약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해야 우리민족이라고 한다면 세종대왕 이전에 우리말과 글을 사용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것이고 사용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나다면 그들은 우리민족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모순에 빠질것이다
또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해야 우리민족이라고 고집한다면 해외입양아와 우리말과글을 모르는 해외동포 자손들은 우리민족이 아니라는 모순에 부닥치고 말것이다
우리는 단군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그 이전도 밝혀지고 있고 한웅 치우능도 발견할수가 잇을 것이므로 치우나 단군의 후예는 어떤 언어를 구사하고 풍습이 다르다 하여도 우리민족으로 보는 시조중심 사관으로 역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바로 시조중심사관의 대표적인 역사는 바로 유대민족일것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를 달리 구사한다해도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민족이라는 정의로 역사와 민족을 구분하는 사상이 바로 동양식 시조중심사관에 의한 민족사의 정립이다
우리도 한글과 우리말을 쓰던 한자와 중국말을 사용하던 시조중심사상으로 역사와 민족과 민족사을 재정립해야 할것이라고 믿고 연구 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고대의 일본과 일본열도의 일본 >
고대 일본과 일본열도 일본관계를 이렇게 살펴보았습니다
고대 670년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한 일본은 25사 및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나 일본은 조선의 일부였으며 동이의 일부였습니다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한것은 양자강 이남에 있엇던 왜가 국토를 당과 사로신라에 의하여 평정되므로 대만으로 이주하여 본토회복을 노리던 행위가 바로 왜구침범이라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고 일본열도는 한반도를 거쳐간 동이 즉 낙랑국때 낙랑인, 고구려때 고구려인, 신라가 독립할때 백제점령지에서 축출된 백제인 등과 양자강 이남에있던 왜가 본토회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흘러들어온 왜인, 양자강유역의 가라멸망으로 이주한 가라인 등이 새롭게 개척한 곳이 일본열도의 일본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일본서기 등에서 나타나는 일식집중관축지가 8세기 이전은 양자강 이남으로 나타나고 10세기 이후에는 현재의 일본으로 나타나는 것을 참고 하여 더욱연구되어야 할것입니다
10세기 이전에 중국의 동해안까지 진출한 왜구가 일본열도에서 진출했다고 볼수가 없고 대만에서 진출했다고 보아야 될것같습니다
10세기 이전 일본열도에서 중국까지 항해를 마음대로 하였다면 그러한 항해술이라면 세계사에서 유럽인의 신대륙 개척은 이루어 질수 없었을 것이니 이점도 참고가 되어 연구를 계속하여야 할것입니다
8세기 이전을 나타내는 중국25사 왜전에 등장하는 왜나 일본은 우적도와 사서가 있는 한 결코 영원히 황해 동쪽 나라로 숨겨질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 새롭게 조명된 민족사는 만들어 질것입니다 >
현재의 국가사관으로 쓰여진 역사책이 아니라 시조중심주의에 의한 민족사는 우리들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정립되고 편찬될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사가 만들어진다 하여도 국가사관으로 만들어진 역사가 배척되지는 않을것입니다
국가사관으로 만들어진 국사가 모여서 민족사를 이루고 있으므로 사관을 바꾸고 연구되면 가능할것입니다
만약에 다음과 같은 비유상황이 되면 어쩔수 없는 때가 올것으로 믿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주민등록에도 호적에도 족보에도 '해주오가'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임종때 너는 '김해김씨"라고 쓰여진 봉투와 함께 입양되었다고 유언하셨다면 아무리 부정해도 양부모의 성씨 오씨에서 친부모의 성씨 김씨로 찾지 않을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김씨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사실이 아니므로 언젠가는 밝힐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될것입니다 이와같은 상황이 바로 민족사가 복원되리라 믿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 삼국사기와 중국25사에서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를 여러가지방면에서 살피면 >
670년 왜가 국호를 변경한 일본과 1403년 명으로부터 일본국호를 받은 나라의 구별을 못마땅하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의 활동무대를 각방면으로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 유적의 연속성 >
치우천자능, 소호금천씨능 기자총 의자왕능 흑치상지묘비가 같은 중국의 요중심의 동쪽에서 연속적으로 있다. 먼저 조상의 후예가 멸종하고 한반도에서 진출한 것은 아니겠지요???
< 역사의 연속성 >
소호금천씨--김유신, 기자--김유신--장보고
< 지명이 중국에만 있다 >
치우능 동평군, 기자대의 서화(기) 몽성, 장보고의 저간원 서주 사 연수 진해
모본왕때 북평 태원, 보장왕때 용도 신성 은산 밀운
의자왕때 평원 황산 백마하 동명 항성 동성 잠산 덕안 독산 등이 중국에는 있다.
위 지명이 중국지도에는 현재도 있으나 한반도 지도에는 역사지도에만 등장한다.
< 조공일정 >
근세조선때 연경이나 북경에서 한성까지 2개월 이상 소요되었으나 장안이나 낙양에서 삼국수도까지 같은 달로 표기되었다 그렇다면 1개월이내 소요거리????
< 조공품목 >
김유신때 자석과 바늘을 당나라에, 목화를 고구려에 주었다 그런데 나침반은 송나라 4대 발명품중 하나, 고려땅에 목화는 문익점때 전래.
쇠뇌를 신라에서 생산, 나전칠기고장 섭라를 500년대 고구려가 백제에 빼앗김
특산물인 조공품목으로 김유신 신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 인구 >
조선초기 인구가 약 50만명 백제인구는 76만호에 약620만명
조선초기와 비슷한 명나라때 백제지명(평원 황산 동명 백마하)가 있는 산동성인구가 77만호
< 명절 >
8.15.은 당나라에도 없는 신라고유명절, 당이후 명절로 했다는 기록없어도 중국에는 8.15있다. 9.9.신라명절이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 기상 >
신라의 5월이전 홍수 기록 한국땅에는 6월이후에 홍수시기이다
< 유행병 >
11월부터 2월사이 신라의 수도에서 유행병 기록--농경시대 겨울에 경주에서 유행병 ???
< 일식관측지 >
신라 백제의 5세기 이전 일식관측지가 중국 중국 기록에는 없는 금성관측이라면 일식은 너무쉬운것
< 삼국지 후한서 동이위치배열도와 지명 >
동이 각나라의 지명과 위치배열도를 합하여 고지도와 현지도에 대입하면 중국 요중심의 동쪽에는 있는데 황해 동쪽에는 없다
이와같은 여러 상황에서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의 위치가 어디에 있다고 연구되어야 하겠는가??????
동명 평원 황산 주류자 항성의 동남쪽에는 함산과 독산이 있다 이 지명이 왜와 신라의 전쟁 지명은 아닐까 ?
한반도와 일치하지 않는 삼국사기내용을 버리고 무엇으로 삼국을 나타낼수가 있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진실을 찾아야 할것이다
< 답답한 교과서가 된 이유는 대한민국가사관으로 편찬하기 때문>
교과서가 답답하다고 하는데 정말그렇습니다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기본으로 하는 헌법에 의하여 위임받은 법률에 근거하여 교과서를 만들기 때문에 국가사관으로 만들어 질수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바로 고구려 발해는 우리역사라고 하고 고구려 발해 후예들을 우리와 다른 여진족 만주족으로 불리우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국가사관(대한제국국가사관이나 조선국가사관도 동일)으로 편제를 하면 언제나 이를 이상은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이던 유감스런 업적이던 바르게 최초 국가의 백성의후예는 하나되는 민족사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후배들에게 지금의 답답한 심정을 물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연구하고 모든 기록을 인정하고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하고 이를 하나되는 사관으로 정리하고 과학적인 사고력으로 비교검토하여 바른 가치기준을 역사에서 찾아서 미래로 지향하는 역사를 물려주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삼국사기에서 왜는 우리역사 공통부분의 왜로써 사 로의 남쪽>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의 왜는 현재 한반도 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지만
사로신라의 위치와 왜에 대한 관계를 밝혀야 한다
금성이 현재의 경주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현재의 역사인식이다
왜가 출몰한던 신라 초기의 일식집중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의 황하 이남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식집중관측지에서는 바람이 동풍이 불어오기도 한다
5월이전에 홍수 지역도 이지역이다
신라만의 명절 8.15이 이지역에도 현재 있다.
사로국의 사로는 강소성의 '사'와 안휘성의 '로' 지역에서 있었던 나라로 보여진다
신라와 당과의 교역항인 (당)항성이 기자가 살던 서화 근처에 있다
항성의 동쪽에는 1666년 발간 지도를 보면 덕안 동쪽에 경주가 있다
경상도 경주와 이름이 같다
금성이 경주로 변경하였다면 어떤 경주가 금성이었을까 ?
안휘성 경주의 동쪽에는 함산(토함산??)이 있고 항성 함산 남쪽으로 왜와 전쟁한던 지명인 독산이 있다.
관연 삼국사기 초기 신라위치가 어디인가 도한 신라와 전쟁을 하던 왜가 어디인가를 다시 살펴야 할것이다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모두다 옳다. 그러나 전체에 맞추면 어떻게 될까
부분에 매이지말고 전체를 보고 또 부분을 보아서 정리하여 보시기 바람니다
우리는 정리할뿐 결정을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때 강해졌을까 ? >
고구려가 광개토태왕때 강성하였을까?
146년에 고구려가 요동군 서안평을 평정한 기록이 있다.
56년에 창해군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요동군 서안평과 창해가 어디인가를 새로이 밝히지 않고 요동군이나 황해도에 있다고 본다면 아무말도 할수가 없다
그러나 용동군 서안평이나 창해가 하북성에 있다면 문제는 달라질수 있다
49년 고구려가 북평과 태원을 평정한 기록이 있으며 북평과 태원 근처에는 654년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지명이 있다
현재알고 있는 호태왕 강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 새롭게 사서를 보면 진짜 호태왕시대 강역을 새롭게 알수 있을 것이니 더욱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고구려가 도읍한 평양은 해주의 서남쪽에 있다고 한다 >
요사에 보면 암연현 동쪽에 해주가 있고 동쪽은 신라이고 서남쪽에 평양성이 있다고 한다
고구려가 도읍한 평양을 현재의 평안도 평양으로 보면 위의 기록은 절대로 이해할수가 없다. 해주의 서남쪽은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주가 황해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연해주도 있고 여령성 금주북쪽에 장성이 있는 곳에 해주가 있다
이 해주의 서쪽에는 북평도 태원도 은산도 신성 고대인성도 석문도 있으나 한반도쪽에는 지명도 없습니다.
이것은 고조선때 연때 요동과 조선, 진장성과 요동. 백제 고구려시대 요동과 요서를 분명히 밝혀서 한족국가와 조선후예국가의 국경지역을 찾아야 고구려 평양성을 바르게 찾을수가 있고 대답을 드릴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아서 고구려 평양을 사서에 일치되는 곳을 찾아야 귀하의 답변을 분명히 할수 있습니다ㅣ
사서에 일치하는 평양을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고려대군은 고려강역을 바르게 해야 답을 얻을수 있다 >
고려대군이 어떻게 그리많을수 있을까
조선시대 군대를 보면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고려나 그 이전 역사을 바르게 해야 밝힐수 있는 부분이다
고구려 백제의 백만대군 지금도 이만한 군대라면 인구가 따라주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강역과는 다르게 고려가 만주를 통치한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만약 고려가 만주까지 통치했다면 가능할까 ?
고구려 백제가 요중심의 동쪽 중국에 있었다면 그 군대도 가능할수가 있지 않을까 ?
그 가능성을 사서에서 찾아보도록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 단기의 기원에 대하여 >
단기의 기준에 대하여 삼국유사 해석을 빌린다면 분명이 이해 할수가 없다
단기를 책정하게 된 것을 밝혀 보시면 어떨까
지금부터 역추적하면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밝힐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군을 시조로 하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니 능이 없는 고조선에서 머물지 말고 능이 있는 한웅시대를 기준으로 하여 단기와 같은 기준을 마련할 필요는 없을까?
본인은 출판물에 호태왕비와 삼국사기는 1년차이 밖에 없으므로 비를 중심으로 전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기기원에 대하여 추적하여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고려강역은 만주에서 고구려 발해 신라에 이은 통치가 있은 것은 아닌지 >
우리는 역사를 배울때 고려가 한반도를 모두 통치하지 못한 것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성계가 고려장군일때 심양일대를 평정하는 길고을 볼수가 있습니다
만주원류고에는 신라가 길림 철령 광령을 거치는 만주땅을 다스린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고려사에 의한 선춘령을 고지도에서 찾고 고려사에서 요양과 심양 근처를 평정한 기록과 고지도에서 장성의 축성을 어디에서 하였을까를 재검토하면 밝혀질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서 10만 양병도 못하였는데 고려에서는 대군을 동원한 이유를 밝히면서 그 만한 인구가 있을 고려강역을 찾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만주를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를 이어서 고려도 통치했을 가능성이 고려사나 옛 지도에서 보이므로 현재 교과서를 신봉하지 말고 사서와 일치하는가를 대조하고 비교하여 살펴보아야 할것입니다
사서와 일치되는 고려 강역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 삼국이 요중심 동쪽에 있어도 한반도역사는 낙랑국 고구려 신라 고려로 계승된다 >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가 중국의 요중심의 동쪽에 있다고 삼국사기와 중국25사의 공통부분으로 인용하여 밝히니 한반도에는 역사가 없는 공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시는 것이 무리아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왜 역사 기록이 없겟습니까 ?
삼국사기와 25사의 공통부분의 태수 낙랑군이 있을때 한반도쪽에는 최씨(최숭--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다고 비공통부분으로 밝힐수 있습니다
낙랑국은 적이 오면 저절로 울어서 경고하고 알려주는 자명고각 즉 한쪽은 뿔처럼 다른쪽은 평면처럼 자명고각이란 북이 있어서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낙랑국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낙랑국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때문에 패망하고 32년부터 고구려의 직할지와 지방관 '---간'을 두고 다스렸다고 보여지는 것이 호태왕비와 진흥왕비가 밝힐수 있습니다
고구려 연방에 속하여 있을때 태왕과 순행하여 한반도가 있엇음을 알고 있던 백제인이 고구려로부터 광복하여 한반도 공주부여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백제의 진출은 한반도 ---간들에게는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왕으로 불리는 신라가 있었고 631년까지 만주의 길림 철령 광령까지 통치하는 국가가 있었고 그리고 고려로 이어져 온 역사가 밝힐수 있는 것이다
결코 사서의 내용을 밝혀도 비공통부분만의 역사만 우리역사가 아니고 공통부분의 역사까지도 포함하는 하나의 역사를 밝힐수 있는 것이다
유적으로 보아도 북한에서 500년 이후 고구려왕능이 없다. 또 500년 이후에 관무역이 성행하였음에도 그러한 흔적이 없다 바로 500년 이전의 연호가 새겨진 것만 출토되고 있다
신라의 무덤도 중앙아시아의 묘제와 비슷한데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왜일까
백제는 삼국중 수도에 대하여 가장많은 자료를 남겼다. 바로 사서와 일치되는 백제수도를 찾아야 하는데 공주 부여는 백제의 진출지로서 인정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상남도에서 출토된 마갑은 북한 벽화의 실물이니 고구려유물이 아닐까
지금의 병기로 비교한다면 아마도 전투기 이상으로 보아야 하는데 가야것이라고 우길생각만 할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고조선도 중국의 서적으로 입증하고 있고 기자도 조선에 살았다고 하니 주와 조선 삼국과 장안중심의 국와의 경계인 시대별 요동 요서를 찾아서 동이가 아니되는 역사를 밝힐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가 중국에 있다고 하여도 결코 한반도 역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우려할것이 못된다
동이강역이 하나되는 작업은 바로 사서와 일치되는 편찬자의 위치에서 재검토하여 보아야 왜 치우나 기자나 장보고가 우리역사인물이 되었는지가 밝힐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씨의 대다수가 중국 성씨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의문을 알수 잇는 것이 된다
아무리 현재의 교과서가 옳타고 우겨도 치우능 소호능 의자왕능 흑치상지묘가 동이역사를 같이 하는 인물이 같은 지역에 있는 이유를 설명할수가 없다,
결코 겁낼필요가 없다. 그리고 주저할 필요도 없다
사서에 있는대로 소개하고 그것을 사심없이 꾸밈없이 정리할뿐 주장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당시 살아보지 않았으니 정리를 할뿐이고 소개할분이니 나무만 보지말고 숲도보고 나무도 보는 자세로 우리역사를 살펴주고 당시 상황에 접근할수 있는 많은 자료를 주시기를 고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만주에 있는 호태왕비 등 왕능을 보는 견해 >
고구려왕능으로 추정되는 묘와 함께 호태왕비가 만주에 있다.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가 요중심의 동쪽에 있었다면 어찌하여 변두로 보이는 만주에 호태왕비가 있느냐 하는 의문은 당연하다 할것입니다
만주는 고구려강역에서 결코 변두리가 아닙니다. 만주를 통치하는 나라는 아시아를 호령합니다
사람의 형태와 비교하면 만주에서 유연제노오월는 오른쪽 다리로 보면 한반도는 왼쪽 다리로 볼수 있고 만주는 배로 볼수 있고 발해만은 사타구니와 같은 형태인데 한반도에 있었던 별도 한성과 북평 태원 용도 신성 등에 가까이에 있을 고구려 수도와 중앙지점이 바로 만주이며 묘들이 있는 지역인 것입니다
호태왕비는 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 기상이 어린 기념비입니다
한반도쪽으로 순행할때 참배할수 있고 또 유연제노오월로 순행할때 참배할수 있는 아주 적절한 위치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묘가 있으면 그 근처가 수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려 초기에 고려에서 높은 벼슬을 한 모 종중의 3대의 묘가 전라도에 있는데 높은 벼슬을 개성에서 했다면 당연히 개성 근처에 있을 것인데 전라도에 있다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호태왕비나 주인을 알수 없는 능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고구려가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게 된 것이 어떤 원인이 있었나를 살피고자 노력할것입니다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가 중국에 있었다 하여도 한반도는 32-503년까지 고구려강역이었고 신라의 독립으로 631년경 만주까지 신라에게 병합되므로 만주에서 고구려 세력이 물러나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공통부분을 유연제노오월쪽에 놓고 비공통부분으로 한반도에 놓고 전체를 고구려강역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더 노력하여 좋은 결과를 보내 드릴수 있기를 희망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 사로신라 즉 대륙신라의 건국과 패망의 추정 >
대륙신라는 중국25사와 삼국사기의 공통부분으로 복원이 가능한데 건국에 대해서는 다음과같다
삼국사기에서는 22대 지증왕이 마립간에서 신라왕으로 변경하니 진평이 26대이다
그런데 북사에서 진평은 30대이니 4대의 오차가 있다
간에서 왕으로 변경한 동쪽 신라는 21대까지는 간으로서 22대 지증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대륙신라는 30대 진평이니 사로의 건국은 현재의 서기전57년보다 4대를 더한 년대가 건국년대로 추정해야 한다
동쪽 신라는 936년에 패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륙신라는 663년에 당나라의 속국으로 계림도독부로 되었으며 당나라 연방의 1국으로 존재하였다고 보여지는데 장보고 최치원에 의하여 진평10년까지는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하지만 당나라 패망과 함께 패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더 존재하였는지는 앞으로 계속하여 연구해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시원한 답을 못드려 미안합니다. 그러나 모두 합리적 해석과 진실이 규명되도록 연구하면 패망년대를 규명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 해동고기에 대해서 >
해동고기에 대해서 알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 사료를 연구하여 좋은 답이 나올수 있도록 검토를 계속하겠습니다
< 백제사의 구대에 대하여 >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도조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본기에도 구대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것은 책계왕편을 참고하고 생각하여 보면 25사에서는 예로들면 환영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통에서는 환영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환제 연제는 있습니다 이를 합하여 환영이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구대는 구이라고 발음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자가 들어가는 왕과 '이'자를 쓰는 왕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면 구수왕과 고이왕을 합하여 구이 즉 구대라고 기록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수왕과 고이왕은 백제의 국가를 공고히 한 왕들입니다
본인은 구이 즉 구대를 구수왕과 고이왕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대방왕이라는 기록이 있고 책계왕때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더 연구하여 바른 답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출처] '오재성'선생과 네티즌과의 답변 모음 (3)|작성자 kossko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