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 담긴 화가의 영혼, 자화상
신성화된 화가의 초상,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자화상(self-portrait)은 모델을 살 돈이 없는 화가들이 자신을 그린 것으로 그 유래를 찾기도 하지만,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 중에는 자화상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누구나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져 찬찬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경험이 한번 씩 있을 것이다. 사진이 일반화되기 오래전, 자신을 모델 삼아 그리는 자화상은 화가가 거울을 이용하여 그렸을 것이다.
잠시나마 들여다본 거울 속에서도 또 다른 나를 발견한 것 같은 경험을 하는데, 몇날며칠 자신의 얼굴을 들려다보며 자신의 얼굴을 그린 화가가 단순히 자신의 겉모습만을 그렸을 리 없다. 자화상은 화가의 삶이 가장 직접적으로 투영됨은 물론, 그림을 그리는 순간 화가가 가진 생각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화폭에 담긴 화가의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렘브란트가 등장하기 이전, 서양미술사상 처음으로 예술가로서의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자화상을 그려내어 자화상을 회화의 한 영역으로 개척한 화가가 있다. 바로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5.21. - 1528.4.6)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 <엉겅퀴를 든 화가의 초상>, 1493년, 유화, 56 x 44 cm,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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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의 3대 초상화중 첫 번째 작품인 <스물두 살의 자화상>은 뒤러가 도제로서의 수련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송아지 가죽에 그린 자화상이다.
서양예술 역사상 화가의 이미지를 이보다 더 강조한 작품이 없을 만큼 자화상을 독립적인 분야로 만든 첫 번째 유화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 뒤러는 술이 달린 재미있는 모자를 쓰고 주름 잡힌 상의에 검정색 외투를 입고 아직 어린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풋풋한 남성미를 자아내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엉겅퀴인데, 독일에서는 ‘충절’을 의미하는 식물로, 당시 약혼을 앞둔 뒤러가 약혼녀에게 선물하기위해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알브레히트 뒤러, <장갑을 낀 자화상>, 1498년, 유화, 41 x 52 cm,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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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을 낀 자화상>은 뒤러가 27살 때 그린 것이다.
당시 뒤러는 남유럽을 여행 다니며 이탈리아 미술을 익히던 시기였다. 그림 속 뒤러는 <스물두 살의 자화상>보다 좀 더 원숙해진 느낌으로 자신감 있는 시선과 확고한 듯 마주잡은 손으로 당당함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15세기 중반 남유럽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인 흑백의 줄무늬 의상과 모자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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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목판에 유채, 49 Ⅹ 67 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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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절정으로 드러난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은 곧 29살이 될 뒤러가 그린 것이다.
유럽회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에 속하는 이 작품은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작품의 크기가 실물과 거의 흡사하고 치밀하게 세부를 묘사하는 북유럽 화풍과 인체를 부드럽고 풍만하게 표현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풍을 접목시켰다.
작품 속 뒤러는 멋진 모피코트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눈동자에 창문이 반사된 모습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뒤러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의 깊은 응시에 눈을 피하게 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림 왼편 ‘AD 1500’이라 표현된 부분에는 라틴어로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살의 나이에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내 모습을 그렸다”라고 씌어있다.
이 작품은 뒤러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되는데, 당시 예수의 초상에서만 나타난 정면자세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두운 배경색, 왕이나 귀족 등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입었던 모피를 입은 모습 등이 그 이유이다.
실제로 뒤러는 자신의 예술적 사명이 예수의 사명과 같다고 믿었으며, 화가란 모름지기 신사이자 학자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예술가의 위치를 기능공에서 왕족과도 같은 지위로 격상 시 했다고 한다. 뒤러는 바로 이 그림에서 자신을 신성화된 모습으로 그려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화가의 상승된 지위를 보여주며 스스로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예술의 금자탑을 쌓아올리던 시절 북유럽의 거장으로 불리며 그들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 뒤러.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을 가진 뛰어난 자화상을 그려내고 판화로 자연을 묘사함에 있어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 뒤러는 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관심사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연구로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라 불렸다한다.
뒤러는 사실주의라는 북유럽 미술의 특성과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여행에서 익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혁신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남유럽의 미술을 북유럽에 전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탈리아의 선진화된 미술을 북유럽의 동료 화가에게 전파하기 위해 힘썼으며 원근법과 이상적인 비례에 대해 책을 펴내기도 했다.
미술은 정확한 관찰을 통해 그려져야 한다고 믿었던 뒤러는 평생 자연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네덜란드의 한 해안지방에 고래가 떠밀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연구를 하다가 풍토병으로 인한 열병으로 그의 나이 56세에 사망하고 만다.
참으로 ‘르네상스인간’ 다운 죽음이다. 세공사였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예리한 손끝으로 동시대 이탈리아 화가도 긴장시킬만한 실력과 열정으로 상승된 화가의 지위와 명예를 자화상에 담은 뒤러. 그의 자화상이 이토록 당당하게 보는 이를 압도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화가 자신의 이유 있는 자부심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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