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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중일전쟁(中日戰爭, 1937년~1945년)
"萬一真到了無可避免的最後關頭,我們當然只有犧牲,只有抗戰!"
"만일 정말로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이른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과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
장제스, 1937년 7월 17일 루산성명(廬山聲明)에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 국민정부(이하 '중국')와 일본 제국(이하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만주사변)의 연장선에 있는 전쟁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역 중 하나이다.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전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Sino-Japanese War. 중국에서는 중국항일전쟁(中國抗日戰爭) 혹은 간단히 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당연히 일중전쟁(日中戦争: 닛츄센소)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기존에는 흔히 무능했던 중국군을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털고 또 중국군은 그냥 자신들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진 것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덕에 종결된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실증적, 수정주의적 재평가로 인하여 점차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러시아야 전후 서방 진영과 냉전을 벌였던 게 원인이었고 냉전 종식 후 재평가가 이뤄졌지만, 중화민국은 전후 국공내전에서 패해 본토에서 밀려나 버리고 중국 공산당의 사관이 주류가 되어 중국 국민당을 저평가하며 이것이 외국까지 퍼지면서 재평가가 굉장히 늦었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과 달리 공업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기대여법의 이득조차 거의 보지 못한 채 자력으로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심지어 인구가 4억 8천만에 달했음에도 이 인구 중에서 2%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했고, 영국이 300억 달러, 소련이 100억 달러 어치의 차관을 받았음에도 중국이 받은 차관은 겨우 10억 달러에 불과했다. 남아있던 대여분도 대부분이 영국령 버마 전선과 주중 미국 육군 항공대를 위해 소모되었다. 미국 측 일부 인사는 장제스 부부의 특성에 중국에 대한 관심을 주긴 했으나 대부분 중국 전선에 대해서 큰 관심을 주지 않았고 유럽 전선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루즈벨트조차 중국 전선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군을 동남아 전선에서 소모하고 공산당과의 무리한 합작을 강요하였으며 전후 개입에서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연합정부를 구성하라 해 놓고 국공내전의 패배 이후에 그 책임을 국민당에게 전가하는 행동을 하였다. 물론 비공식적으론 필리핀을 통해 중국을 돕고 있었고, 영국도 홍콩. 프랑스도 베트남을 통해 중국을 몰래 도왔다. 이에 뚜껑 열린 일본이 1941년 동시다발 공격으로 홍콩과 필리핀을 점령하려 하고, 영국 해군과 캐나다군, 미합중국 해병대가 지키던 두 섬은 간단히 나가 떨어지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호주로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군 사망자 150~200만 명 중 30%을 담당했다. 이러한 소모가 무기대여법의 이득을 거의 보지 못한 상황에서 순수한 자력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파멸시킨 직접적 원인은 미국에 있지만 그 이면에는 수천만명의 죽음과 (간접적 피해까지 합쳐) 6천억 달러의 피해를 감당하면서 8년 간의 장기 항전을 수행한 중국의 공로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전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전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전후 처리
"8년간의 항전은 양국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 양국 형제들은 머리를 싸받고 비통하게 울어야한다. 오늘 우리는 무기를 버리고 여러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언젠가는 우리는 양손에 옥과 수놓은 비단을 들고 당신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탕언보
8월 27일 난징에 중국군 병사 1백명과 탕언보 장군이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 이어 중국군 부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9월 8일 중화민국 국군 총참모장 허잉친이 난징에 도착, 난징의 중앙군관학교 강당에서 오카무라 야스지의 항복을 받아냈다. 중국, 타이완, 북베트남에 주둔한 전 일본군과 일본인은 이제 국민당에게 접수되었는데 그 수가 지나파견군 105만, 해군 7만, 기타 관동군을 비롯한 중국에 주둔한 총병력 128만을 합쳐 311만에 달했다. 미군의 협조를 얻어 이들을 일본에 송환하기 시작했지만 1946년 12월 일본 정부의 송환 완료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 중 돌아온 사람은 100만에 지나지 않았고 향후 1980년대까지 송환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귀환한 일본인들은 본토에서 차별을 당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
이후 11만 명의 미군이 중국에 상륙했으며 중국군은 서둘러 점령지를 탈환했으나 너무도 갑작스러운 승리는 웨드마이어의 경고대로 대혼란을 초래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에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아 중국이 자신들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컸지만 전근대적인 중국의 행정력과 부패 자체도 문제였다. 국민당은 점령지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한동안 한간들을 일시 등용했는데 이후 장제스가 고위 한간들의 대부분을 총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국민당이 한간들과 결탁했다는 악의적 선전이 곳곳에서 나돌게 된다. 일본인의 재산, 즉 적산가옥 등은 국고가 아닌 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고 전쟁 종료 이후 다시 촉발된 초인플레이션은 중국의 경제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향후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타이완에서 국민당이 현지 주민들과 충돌한 2.28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낳았으며 오늘날까지 장제스와 국민당의 흑역사로 남게 된다.
한편 세력을 백만으로 키운 공산당은 국민당에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걷어차고 황허 이북의 영토를 통제하려 시도했다. 곳곳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장제스는 중국 중공업의 90%를 차지하는 공업지역인 만주를 확보할 것을 명령했지만 중국의 부실한 병참능력으로 인하여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웨드마이어는 만리장성 이남의 교통망과 통신망을 먼저 회복하고 만주는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신탁통치를 맡긴 다음에 나중에 찾으라고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또 다시 만주를 외세에 넘기는 행위라고 거부했다. 장제스는 충칭에 있던 반면 공산당은 진작부터 화베이, 만주에 지하조직을 침투시켜 민심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중심지가 옌안이었던터라 훨씬 만주에 접근하기 용이했다. 결국 공산당은 만주의 90%를 장악했다. 장제스는 쑨리런 산하의 신1군을 만주에 파견했으나 병참능력의 부족과 소련의 비협조로 일부 대도시만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은 여기서 막대한 일본군 무기를 노획하여 이것으로 린뱌오의 동북인민자치군을 무장시켰는데 실제로 린뱌오는 국공내전 발발 이후 만주의 요양-심양 회전에서 중화민국 국군을 크게 격파한다.
결국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중일전쟁에서 크게 타격을 입은 국민당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다시 전국구 규모의 내전에 돌입했다가 허망하게 패배하여 대만으로 밀려나게 된다.
3.1. 사상자 논란
8년간의 전쟁에서 중국은 1950년 발표한 중국백감을 통해 전사자 103만을 포함한 321만 명의 군인 사상자를 발표했으며 일본군의 경우, 후생성 통계를 통해 공식 전사자가 40만 5천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수치는 너무 축소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중국의 경우, 학계의 추가연구 결과 최소 2천만 명을 상회하는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역사서인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당사연구실에서 편찬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는 총 35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 입장이다. 군인 사상자 역시 국민정부 관방이 처음 발표한 321만명 설은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1959년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내놓은 <Studies on the Population of China(1396~1951)>에서는 군인 사망자가 124만, 부상자가 167만, 실종자가 13만에 달한다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으며 민간인 사상자의 경우에도 중화민국 행정원배상위원회는 처음에 총 사상자 913만명을 발표했지만 1988년, 이를 훨씬 상회하는, 사망자 930만, 부상자 950만 등 2천만 이상이라는 추론이 나왔다. 이후 중화민국 군사작전국은 전사자를 131만 224명, 부상자를 175만 2591명, 행방불명자를 11만 5158명으로 발표하여 총 피해가 317만이라고 주장했다.
극단적인 경우, 군인만 최대 1000만명의 사상자를 내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는 최대 사망자 5천만명설까지도 제기된다.
일본 역시 공식적 전사자는 40만 5천명 수준이지만 일본 후생성이 지나치게 많은 수의 행방불명자를 기록하였으며 전후에 일본이 중일전쟁 관련 기밀문서를 많이 폐기한 것등이 지적된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일본군 전사자를 47만 명 정도로 보았으며, 허잉친도 <팔년항전사>에서 일본군 전사자가 48만 3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허잉친은 부상자까지 합치면 일본군이 241만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이 섬멸한 일본군만 52만 7천명, 왕징웨이 정권의 괴뢰군을 합치면 171만 4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하지만 개구라다.
한국 국방대학교의 기세찬 교수의 경우, 일본군 전사자가 172만명에 달하여 일본군 전체 전사자의 55%를 차지한다는 수치를 인용했고 중국사회과학원 류다녠 교수는 일본군 전사자가 198만 4천명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군 전사자가 100만이 넘는다는 주장 역시도 중국군 전사자가 1000만을 넘긴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라나 미터의 <Forgotten Ally>에 따르면, 서구 학계의 정설은 중국의 군민 총 사망자는 최소 1400만이며 최대 2000만에 이른다고 본다고 한다.
4. 중일전쟁 관련 편견에 대한 고찰과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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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에서의 비중
중일전쟁은 엄청난 역경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처한 정부와 인민이 적에게 맞서 "최후까지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기자들과 외교관들이 중국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고 거듭해서 내놓은 예측이 틀렸음을 증명한 영웅적인 저항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은 일본에 맞서 사실상 홀로 싸웠다. 이 시기에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되고 기술적으로 발달된 나라 중 하나의 80만 병력을 저지했다. 이후의 또 다른 4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 연합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중화민국이 전쟁에 남아 분명한 역할을 수행한 덕분이었다.
<중국, 잊혀진 연합국>(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 2013년도 출판, 라나 미터(Rana Mitter,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 중국연구센터 주임), 서문 6페이지.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 진보적 지식인들과 예술가, 정치가, 혁명가들에게 파시즘에 맞서는 영웅적인 항쟁으로 기록되면서 찬사를 받으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중일전쟁이었지만 정작 중일전쟁이 종결된 다음에는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지다시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전쟁사 연구에서도 대부분 누락되어, 1980년대에 나온 타임라이프사의 제2차 세계 대전사의 경우는 아예 중일전쟁을 2차 대전의 배경 중 하나로 간주해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만을 다루고 있고 충칭 대공습과 대륙타통 작전을 제외하고는 버마 전선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당사자인 중화민국이 패배하여 대륙에서 쫓겨났고 그 뒤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일전쟁 담론을 깨끗이 무시했으며 냉전의 결과로 서방에서는 국공내전에서 중국을 잃었던 이유를 추궁하기에 바빴던 탓이다.
연구에도 오랫동안 난황을 겪었는데 기본적인 사료가 그렇게 빈약하지는 않으나 객관성의 문제가 있어서 검증이 어려운 탓이 크다. 일단 일본군의 1차 자료는 일제 패망 이후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조직적으로 파기한데다가 전쟁 합리화, 선전을 위해 사상자 누락, 왜곡 등 조작이나 자화자찬이 많고, 중국군의 경우에는 중화민국측 자료는 양은 많으나 대만 밖을 나가질 못했는데다가 이 또한 객관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국공내전의 승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목소리에 묻혀버렸고 장제스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을 고용해서 조작한 자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중일전쟁 극초기와 백단대전을 빼면 거의 싸우지 않았는데도 집권 정당성을 위해 이를 숨기고 전쟁의 주역 국민당을 깔아뭉갰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과장성으로 인해 사료에 기재된 전황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으며 애초에 중일전쟁 자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감이 크다. 80년대 이후로 중일전쟁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유격전과 전면전을 분리해 국민당의 역할도 조명했으나 장제스 비하 등이 사라지는덴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상당히 전향적으로 재평가하는 편이지만 공산당 독재 치하의 연구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 등 기타 연합국의 자료는 애초에 버마 전선이나 대륙타통작전 정도만 빼면 관심도 없고 스틸웰과 장제스의 불화에 집중했는데다가 당시 미국의 중국통이 패트릭 헐리나 앨버트 웨드마이어, 조지프 앨솝 정도만 빼면 마오빠가 되어서 공산당을 '농촌 민주주의자' 정도로 인식한 낙관적 옹호와 국민당을 항일을 회피하는 부패정당으로 묘사하는 악의적인 보고를 많이 올렸으며 국공내전 이후 중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은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화살을 국민당에게 돌리는 통에 이후 미국 쪽의 기록들은 국민당 정권 비난 일색에다가 역시 제3자라 자료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외로 일본에서 전후에 발간된 자료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을 정도이다. 난징대학살 부정론자들은 예외 게다가 전투가 크게 벌어지고 사상자도 많은데 실제 전쟁에 끼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인식 또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중국을 정복할 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와 크기를 자랑하는 중국은 끝까지 버티면서 일본에 맞섰고 일본은 결국 이 수렁에 빠져 피해가 커지자 더욱 군국주의를 밀어붙이고, 손해를 메꾸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치기로 결정, 본격적으로 미국과 마찰이 일어난다.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달라졌을게 뻔하기에 동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 발발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발발 이후에도 태평양 전쟁의 일부이자, 일본 육군의 절대 다수를 붙잡아둔 중요 전선으로 기능하였다. 일본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다. 당연히 일본 육군의 주 관심은 중원, 만주 일대였지, 듣도 보도 못한 저~어기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초, 중반에 지상군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 대해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중원과 만주에 투입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의 진행 경과만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병력이 연합군 지상병력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며,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연합군(사실상 미군) vs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의 패배는 그 일대의 제해권, 제공권 영구 상실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데 한몫 하였다. 그리고, 전개 항목에 언급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들 중 일부는 중국 전역의 경과에 적게나마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을 폴란드 침공이 아닌 중일전쟁 발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국제적으로 번져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2차대전과 중일전쟁은 별개의 전쟁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어차피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반공학자의 일부는 적백내전 기원설까지 주장하니 그리 이상할 것이 없는 현상이긴 하다.
이 중일전쟁 덕분에 일본은 1940년 동계(삿포로) 올림픽/ 1944년 하계(도쿄)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인 셈이지만 당시의 숙원이 있었는지 전후 그곳에서 다시 개최했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로 중화민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 중 하나가 되어 UN 상임이사국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직후 발발한 국공내전에 패해 타이완으로 이동하고 대륙을 중국 공산당이 접수하면서 극동 질서를 담당할 상임이사국, 즉 정통 중국이 누구냐에 대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1971년 중화민국이 형식적으로 자진 탈퇴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그 권리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에게 어찌어찌 승리하긴 했으나 일본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생체실험, 신멸작전(특히 난징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로 인해 지금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6. 기타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침공해왔는데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확대되어 교전이 발생했다는 일본측 시각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중사변' 또는 '지나사변'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명칭을 낮춘 이유는 꽤 여러가지 추론이 있다. 당시 1차대전 이후로 전쟁이 국제법상 금지되었기에 "나 전쟁 안했소" 하여 국제적 추궁과 국내의 국민의 신뢰추락을 피하고 싶었던 것 등이 있다. 결국엔 눈가리고 아웅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버릇은 계속 유지되어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했다.
여기서 일본이 나중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일단 선전포고 문제는 의외로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엮여들어간 문제였다. 전쟁 내내 중국은 선전포고를 안했다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기에는 일본이 하더라도 선전포고로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미국에 타진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게 미국의 중립법이었는데, 국내 기업이 전쟁을 벌이는 쌍방과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이었다. 따라서 선전포고가 공식으로 받아들여져 공식적인 전쟁이 되면 중국은 미국에게 물자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몰래하려다가 일본에게 나포당할 수도 있으며 미국이 이 나포문제와 한창 노리고 있던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에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가 우려되어 껄끄러워 했고 일본도 당시 경제의 태반을 미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경제교류가 전쟁기간 동안 정지되던 상황이었다. 전후는 어쨌든 전쟁 시작 시에는 공식적인 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침공군 중 고참급 인사들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부류가 꽤 많아 비선전포고파와 아웅다웅했는데, 경제문제 따위가 뭔 상관이냐며 경시하는 시각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는 편이 전후 패전국에게서 영토와 물자를 더 뜯어내고 점령시의 절차가 간단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선전포고파의 경우는 손해없이 이득을 끌어내자, 즉 어떤 방식으로 중국을 침략하는가에 대한 방법론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변명을 100% 인정해주더라도 엄연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개전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만행이다. 특히 이 변명에서 중국이 선전포고에 관련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랍시고 대는데, 범죄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중 하나다. 피해자가 이론을 제기하던 안하건 간에 범죄로 엄연하게 성립되는 내용을 가지고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니 감안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 덤으로 일본은 앞서 언급했듯이 선전포고 안하고 기습을 해서 개전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녀석들인데다가 그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는데 끝까지 안했으니... 당장 선전포고가 정당하게 전쟁하니 타국은 교전국의 뒤통수를 치지마시오에 가깝기 때문에 선전포고를 안하면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서 똑같이 교전국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기만 해도 일본의 변명이 말같지도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는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을 감행한 적이 있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2 폭격기 2대가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 상공까지 온 것.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 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미지북스(2015) -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블로거가 쓴 대중서적. 부흥 카페, 밀군카 등에서 활동하는 역덕 '욱이님'이 연재한 중일전쟁사 시리즈를 편집, 수정하여 내놓은 단행본이다. 연재 때부터 역덕계에서 상당한 관심과 호응을 받아왔고 출판 후에 여러 역덕들에게서 인식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혁명사관이나 국공내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려는 미국식 사관이 주류이던 시점에서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대한 재평가 경향을 소개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 근현대사를 파는 역덕들은 손에 꼽을 정도고 다른 분야에서 박식한 역덕들도 중일전쟁과 근현대 중국 전쟁사에 대해선 피상적으로 알거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정부군에 대한 실체는 한국 인터넷에선 블루오션이었던 점이 크겠다. 하지만 해당 블로거는 오로지 본인이 개인적으로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쓴 작가이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 저서인 중일전쟁에서도 여러 오류나 주관적 해석이 많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만한 물건은 아니며 여러 비판도 있다. 입문을 넘어서 중일전쟁 시절 국민정부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알고싶다면 위의 기세찬 박사의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
• Forgotten Ally, Rana Mitter, Mariner(2013년): 지금까지 중일전쟁을 다룬 서구 학계의 최신 담론이자 가장 고평가되는 책 중 하나. 만약 영어가 된다면 중일전쟁을 알기 위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2017년): 스탈린그라드, 디데이, 스페인 내전으로 유명한 2차 세계대전 연구가 앤터니 비버의 저작. 엄청난 분량 가운데서 지금까지 출판된 2차 세계대전 관련 서구 학계의 저서들 중에서 중일전쟁의 비중을 가장 많이 할애한 저서로, 개전부터 종전까지 꽤나 자세히 다루었으며 국민정부와 장제스의 분투 및 정책에 대해서도 재평가 담론을 실었다. 다만 집필 과정에서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유명한 장융과 교류하면서 장융이 제기한 공산당 음모론 역시 상당히 인용하였는데 이는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해서 주의해서 읽어볼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