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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평론집 [☆자각의 문학☆]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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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의 문학]
신익선 평론집 / 문힘학술총서 03 / 도서출판 문화의 힘(2018.08.30) / 값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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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사유의 심층에서 분출하는 목숨
- 김종철 시집『못에 관한 명상』
신익선
1. 머리말
김종철의 시집『못에 관한 명상』은 ‘못’이라는 사물에 관한 관찰 기록이다. 철은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의 대변화를 가져온 광물이자, 씨족사회에서 부족국가로 성장하는 최대 힘의 원천이었다. 오늘 날에도 철광석은 산업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광석이다. 김종철은 바로 이 철로 된 ‘못’을 통하여 다양한 인간군의 실태와 현재적이고 잠재적인 심리적 상태를 조망해 낸다. 부단히 시적자아를 통하여 못을 박고 빼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그것이 일생일대의 필생의 업인 양, 못을 박고, 박혀진 못을 다시 빼고, 못 뺀 자리에 남는 흔적이라는 상처를 다독거리며, 아파하고 반성하기를 반복한다. 한 마디로 성찰의 연속이다. ‘못’이라는 ‘사물’에의 관찰기록이지만 실은 ‘인간’에의 관찰을 암유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이 『못에 관한 명상』은 또 ‘못’이라는 ‘사물의 상처’에의 기록이다. ‘못’이 박히는 대상이 사물이고, ‘못’역시 사물이며 이들의 박고 빼는 인간의 행위 역시 ‘못의 상처’를 매만지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일이면서 동시에 현실이 아닌 사유의 세계를 말하는 데서 다소의 혼돈과 모순을 내포한다. 시적화자는 끊임없이 처음부터 끝가지 여일하게, ‘못’을 물고 늘어진다. ‘못’ 따위야 박기도 하고, 뽑기도 하며, 구부러지기도 하고, 휘어지고 녹슬어 버리기도 하는, 별로 긴요하지 않는 건축물의 지극히 작은 한 역할을 감당할 뿐이다.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 같이 최고의 건축물은 원래 ‘못’을 사용하지 않았음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도 하찮은 이 ‘못’에 대한 시적 화자의 ‘못’이야기는 집요하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성된다.
도대체 그런 ‘못’을 시집의 첫 편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못’,‘못’,‘못’을 선창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시인은 그의 책머리 ‘자서’끝머리에서 이를 밝힌다. 이 말은 나와 내 시詩와의 계약이다. 못의 사제司祭로서라고. 주지하다시피 사제는 그리스도 교회에서 주교와 신부를 총칭하는 용어다 눈에 안 보이는 절대자를 대신하여 신과 인간의 교량 역할을 하는 중간자를 뜻한다. 여기에 견주어 본다면 김종철에게 있어 ‘못’은 단순히 ‘사물’로서의 ‘못’이 아닌 무언가 색다르거나, 유별난 인식의 표상임이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못’을 외치지만 시적화자가 실제로 사물에 ‘못’을 박는 행위는 없다. 집이나 저자거리에서 망치를 들고 일하는 노동현장이 없다. ‘못’을 박다가 때로 못을 잘못 박아 손가락을 내리쳐 손이 퉁퉁 붓고 피 흘리는 처절한 삶의 현장은 어느 시편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니까 김종철에게 있어 ‘못’은 ‘못의 사제’로서 신의 역할에 버금갈 특수한 물상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생의 현장에서 직접 피땀 흘리며 ‘못’을 박는 행위가 아닌, 어디까지나 ‘사유’에의 고찰이 분명하다. 단지 그 사유가 보편적 인간군의 고뇌와 번뇌를 함유하고 있다는 명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문학에의 사상성과 문학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시들과는 상이한 변별력을 예시하고 있다.
2. 사물의 상처, 그리고 인간의 상처
서정시가 내밀한 인간의 예민한 감성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인간의 내면에의 미적, 예술적 형상화에 감동적인 울림을 발현시켜 가는 하나의 주체라 본다면, 그 근저에 맨 먼저 그를 생산하는 시인 자신의 자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때의 자각은 일종의 경도傾倒다. 전심으로 사모하고 열중하는 이 경도야말로 사실 천길 벼랑에 가까운 무대책無對策의 경사지傾斜地로의 함몰이다. 무소득이지만 미치지[及〕못할지라도, 기꺼이 미치기[狂〕를 마다치 않는다. 불빛을 향하여 돌진하여 타 죽는 하루살이처럼, 시의 불길을 향하여 돌진하기를 주저치 않는다. 이는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위하여 오천축국五天竺國으로 향하던 중, 일명 원효암에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먹고 깨달은 해탈과 무관치 않다
깨달음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종철은 그의 시집 첫머리 자서에서 다시 이 부분을 확인케 하는 말을 한다. ‘삼 년 간 구도자의 묵상을 통해서/내 자신을 찾아 울며 헤맸’다가 결국에는 ‘녹슨 못 하나가 내 기도였음’을 깨닫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 자리다. 김종철이 ‘울며 헤맸던 자리’는 바로 깨달음의 자리다. 그리고 그 물상은 ‘못’이 분명하다. ‘못’은 그러니까 김종철에게 있어 원효대사가 진리를 찾기 위하여 오천축국으로 행하던 중 크게 때달음을 얻었던 소상의 ‘원효암’과 동일하다. 이 ‘깨달음’의 물상으로서의 ‘못’의 설정은 김종철의 이번 시집 『못에 관한 명상』의 거의 전부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철학적 성찰이다.
오늘도 못을 뽑습니다/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여간 어렵지 않습니다/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여간 흉하지 않습니다/오늘도 성당에서/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아내는 못 본 체 하였습니다/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아직도 뽑아내지 못한 못 하나가/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 못에 관한 명상․1」전부
절대자의 대리인인 신부를 매개로 하여 절대자께 드리는 ‘고백성사’는 김종철에게 있어, ‘못을 뽑는’ 행위이다. 널빤지나 벽에 박힌 ‘못’을 빼내는 일은 하향의 성격을 띤다. 일상의 소일거리 정도다. 그러나 김종철의 ‘못’은 상황이 다르다. 사유의 자리이면서 도덕적, 신성사적 위치로 전환되는 무겁고 중한 상향의 위를 점한다. 여기서 ‘고백성사’에서 빼내는 못은 상층 구조의 성격을 띤다. ‘못’을 널빤지나 나무가 아닌, 가슴과 영손에서 빼내는 일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못’ 빼내는 일을, 지상에서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구도의 현장인 ‘고백성사’에서 ‘고백’하는 일로 시작한다. 고백성사로 ‘못’이라는 심층적 복합체를 빼 내는 첫 페이지를 열며 ‘아내’를 등장시키지만, 어림없는 일이란 걸 금방 알게 된다. ‘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아내는 못 본 체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못’을 뺀 자국이 있는 가슴을 격한 통증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아내는 그를 알고 있으면서도 ‘못 본 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적화자는 왜 맨 먼저 아내를 거론하는가. 남자에게 있어 어떤 자리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아내는 한 남자에게 있어 어머니와 버금가는 자리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고 길러 주신 절대적인 지위에 있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김종철의 그의 시 「엄마 엄마 엄마, 못에 관한 명상 36」에서 ‘그래 그래, 엄마하면 밥 주고/엄마하면 업어 주고 씻겨 주고/아아 엄마 하면/그 부름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기도인 것을 이제야 깨닫나니!/내 몸뚱이 모든 것이 당신 것밖에 없다니’라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세상에, ‘엄마’라는 부름의 단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기도’라니, 이 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찾지 못한다.
이렇게 어머니의 따순 손길에 모르게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남자들은 어머니의 부재 대신에 그를 대체할 어머니 류의 이성을 취한다. 아내다. 이성에의 동경이라는 종족 본능의 욕구와 함께 사람이 살아가면서, 특히 남자가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스스로 분노하며, 배나지 않는 삶을 사는 유일무이한 첩경은 고매한 이상이나, 심오한 학문이나, 위대한 사상이나 신성한 종교에 있지 않다. 동반자에게 있다. 젊어서는 연인으로, 중년에는 반려자로, 노년에는 간호원으로 존재하는 어머니 부재 이후의 아내의 자리에 있다.
이광수는 ‘아내라 함은 오래 함께하는 사람이요’라고 정의하였지만, 이 ‘오래’라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광솔이다. 소나무 부러진 자리에 송진이 올라와 상처를 메꾸고 또 메꿔 단단하게 응고된 묵은 상처들의 집합체인 광솔, 송진의 분출이나 송진이 응고된 광솔은 다 부드러움의 원천인 여성성을 지닌다. 여성인 어머니나 아내에게 있어 이 부드러움만이 무기다. 여인은 부드러움으로서만이 남자를, 혹은 남편을 지배할 수 있다. 지배의 본성이란 그러기에 먼저 복종함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복종은 대체 불가능한, 이 부드러운 여성성에서 우러난다. 이럴 때만이 어머니의 무한한 울림과 아내의 부드러운 공명이 남자를 감화 감동시켜 순수무후한 합일체를 이루는 성체가 된다는 말이다. 즉 아내는 아내이면서 어머니이고, 연인이면서 반려자이며, 복종이면서 동시에 존귀하게 섬겨가는 또 다른 신의 이름이다.
그런 사유로 김종철은 시집 맨 앞자리 시편인 ‘고백성사’의 대지를 아내로 적셔간다. 내 옆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여 주고, 포근히 껴안아 주는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인 아내, 남자, 혹은 남편이 믿는 그 아내라는 소중한 울림은 그러나 나의 ‘못’빼는 ‘고백성사’의 진지한 심연을 ‘못 본 체’외면한다. 외면이라니, 이게 무엇인가. 신의 대리인인 신부 면전에서 행한 ‘못’을 빼 내는 간절한 ‘고백’은 실상 도로 ‘못’을 박는, ‘못’을 빼는 게 아니라 ‘목 박는’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고백성사’의 결론은 ‘못’을 뺀 것이 아니다. ‘못’을 빼고자 함이 아닌, ‘못을 박는다’라는 패러독스인 것이다. 만일 ‘못’을 빼려는 시적 화자의 의도대로 ‘못’이 빠졌다면, ‘고백성사’는 무의미해진다.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끝 행이 그를 증명한다. 이 역설로서만이 이 시는 시적 형상화에 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못’이라는 사물의 관계설정이다. ‘못’은 박힘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단순사물에 지나지 않는 ‘못’도 박히면서 얼마든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설정이다. ‘못’이 그냥 저절로 들어가는가. 망치로 맞으며 대가리가 얼얼하게 부서지고, 번갯불 일도록 얻어터져야만 제 몸을 들이미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일차적인 설정이라면, 그 다음은 역시 인간에 관한 설정이다. ‘못’만 대가리 터지며 박히는가. ‘못’만 그런가. 어머니의 아들, 아내의 남편이라는 이 ‘남자’들은 안 그런가. ‘남자’들만 그런가. ‘남자’로 함유하는 지상의 모든 인간들은 안 그런가. ‘인체’에서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관은 ‘머리’이고, ‘못’에게 있어서는 ‘못대라기’다. 사람 역시 사회라는 세상의 망치에 머리를 얼얼하게 얻어맞으며 평생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자신의 고단한 몸과 영혼을 그 어디론가 들이미는 것이라는 관계 설정. 못 대가리가 더러 망치에 잘려 불 튕기며 사라지듯이, 무수한 사람들 역시 사회라는 망치에 모가지 잘려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관계설정이 ‘못’이 함유하고 있는 은유다.
이렇게 볼 때 김종철의 ‘못에 관한 명상’의 그 첫 머리에 배치한 ‘고백성사’는 사물과 인간에의 관계설정을 통하여 사물의 상처와 인간의 상처를 암유하는 슬픈 묵시록이 틀림없어 보인다.
3. 사회와 신神에의 갈망, 또는 절망
‘못’이라는 물상을 통하여 다양한 가치를 제시하여 숨어 있는 삶의 다양한 상처들을 드러내 보이는 기술 양식인 ‘못’은 김종철의 미학적 예지의 한 지향점이다. ‘아내’를 시발로 첫 항해를 시작한 ‘못’의 일대기는, 개인적 층위와 개인사적 계단을 지나 점점 구비치는 파도를 타고 사회, 혹은 신神에로의 시선을 확장하는 정신적 변화의 과정을 드러내 보인다. 이는 문학, 특히 시에서 항용 노출되어지는 자각과 성찰이라는 순정한 덕목이기도 하다. ‘못’이 어떤 고생한 이상주의자의 담론이 아닌 아내와 함께 ‘소백성사’를 드리는 사회의 한 보통 사람, 보통 시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보통 사람에의 보통사람을 위한 보통의 이야기가 곧 ‘못’으로 대체되는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고통과 사랑과 상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며 어루만지고 있는가를 적시한 집요한 울림이란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김종철의 ‘못’은 ‘못’이라는 사건과 상처를 통하여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위안하며 조금씩 나아지게 하는 힘을 갖게 하는 갈망에의 시선을 던진다. 시편에서 시적화자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거나 현재의 일들에서 체들하는 ‘못’, 그 ‘못’에서 심리적, 사회적 시선으로서의 ‘못’을 드러내 보인다.
① 학교에 가려면/우리는 완월동을 지나다녀야 한다/(중략)/뭣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지만/입술은 물론 손톱 발톱까지 예쁘게 칠한 누나들이/떠들고 웃고 싸우는 것이 정말 보기 좋았다
-「완월동 누나, 못에 관한 명상․ 22」일부
② 주팔이가 완월동에서 콤돔을 사용해 보았다고/더듬거리며 말한 그날 밤/ 나는 한 잠도 자지 못했다/그러다가 주팔이는 외항선 청소부가 되어 어디론가 떠났다/바다 기슭 한 작은 학교에는/아직도 아이들이 왁자하게 떠들고/교정 유리창에 얼비친 바다 하나가/눈물처럼 매독처럼 번지고 있었다/내 사랑하는 친구, 살짝 곰보 주팔이는
-「주팔이와 콤돔, 못에 관한 명상․24」일부
③ Y세무서 소득세과에서 나온 노가리와 산낙지/지난 가을 폐업 신고한 손때묻은 장부 들추며/협박과 회유로 다섯 장을 요구하는 그의 손바닥에/나는 비굴하게 고개 숙였다/그 순간 내 가슴에 질려지는 새파란 대못 하나!
-「개는 짖는다, 못에 대한 명상․ 51」일부
①의 시는 한마디로 통곡의 ‘못’이다. ‘완월동’을 유년기의 성장 배경으로 갖는 시적화자는 ‘완월동 누나’로 호칭되어지는 매춘부라는 ‘못’을 꺼내 보인다. 음녀, 탕녀, 깔치 등등의 비속어와 함께 가장 천시당하는 계층에 놓이던 ‘누나들’은 실상 창녀들이다. 누구나 경시하는 이들은 그러나 원래 양갓집 규수였다. 푸른 꿈과 아름다운 미래를 그렸을 소녀들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양갓집 처녀가 창녀를 희망하였겠는가. 어느 양갓집 규수가 자신이 남자들의 노리개로 일생을 살 것을 염원하였겠는가. ‘완월동 누나들’이야말로 고단한 삶의 나락이 꽃다운 처녀들의 명줄을 옭죄어 내던져진 이 땅의 통곡들 아닌가. 이 시편은 그러므로 생생한 리얼리즘의 시편이다. 시적화자는 ‘누나들’의 애절한 일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통곡 대신에 ‘못’을 제시한다. ‘코쟁이’미군을 상대로 고단한 생애, 고달픈 육신의 사슬을 끌고 가다가 모두 운명하였을 ‘완월동 누가’는 김종철의 ‘못’철학의 사상이 개인에서 이웃과 사회에로의 그 외연을 넓혀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사유와 성찰에서 주변과 이웃,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로의 수평이동이다. 열심히 살기로 말한다면 이들, ‘완월동 누나들’보다 더 처절하고 진지하게 사는 이들이 있겠는가. 못 살고 가난하며 천대 받던 이 땅의 기층민들인 ‘완월동 누나들’은 김종철에게 있어서나, 우리 사회에 있어서 ‘못’이란 것의 환기는 이 시편으로 인하여 가능하다. 이를 어찌 김종철의 ‘못’으로만 인식할 수 있겠는가. 자주 독립국가로서의 튼튼한 국방력과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나라와 민족과 역사의 ‘못’이라 하여 과언이 아닌 것이고, 이는 총체적으로 슬픈 사회사적 슬픈 구조構造의 표시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②에서 ‘주팔이’이는 시적화자의 친구로 등장한다. 이를 세세히 풀어놓는다면 한 편의 장편소설이 될 터이다. 청운의 꿈을 가졌을 소년 ‘주팔이’는 청년이 되면서 예의 ‘완월동’에서 ‘콘돔’을 사용했다고 고백한다. ‘콘돔’의 의미는 성인 의식을 말한다. 어른들과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의 축복 받는 성인식이 아닌, 음습하고 칙칙한 뒷골목의 사창가에서 소년의 딱지를 떼고 성인으로 진입하는 첫 의식을 치렀다는 것은 고달픈 시대상의 단면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주팔이는 외항선 청소부가 되어 어디론가 떠나간 사연의 단상을 접한다. ‘청소부’라는 하층민, 겨우 초등학교 졸업만으로 어리디 어린 나이에 인생의 거친 항해를 떠나가는 하층민이 어디 ‘주팔이’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당시 고달픈 농어촌의 무수한 젊은이들을 지칭한 이 ‘주팔이’는 실존 이름이면서 모든 뼈아픈 이름을 대유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시적화자의 친구, ‘주팔이’는 허세를 부릴 줄 모르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중년에서 노년으로 살다 갈 것이다. 허세 없이 산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순정한 모습이며, 문학에 있어서의 바람직한 진정성 담긴 결정체가 틀림없다. 이렇게 김종철의 개인사적 ‘못’의 사유가 사회로 전환되어지는 특유의 ‘못’에의 기억이 표출되어진다. 즉, ①②는 각각 ‘못’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③의 ‘나는 비굴하게 고개 숙였다/그 순간 내 가슴에 질려지는 새파란 대못 하나!’에서의 ‘못’은 사회로부터 침탈당하는 개인사적 고통을 중시한 시편이다. 이 시편에서 등장하는 ‘노가리와 산낙지’는 바다에 사는 노가리와 낙지이면서 동시에 ‘세리’들이며, 그들로 요약되는 이 땅의 부패한 권력을 지칭한다. 거머리거나 독사에 버금갈 부패한 세리, 부패한 권력의 횡포는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사실적 구절이다. ‘손 때 묻은 장부를 들추며/협박과 회유로 다섯 장을 요구하는’ 구절은 권력이라는 폭압에 속절없이 당하는 시민의 고통스런 절규다. 국가 권력인 세무서의 폭력성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황당한 절대 폭력을 알기 어렵다. 국가를 지배하는 이들, 권력들은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데 익숙하다. 입법권을 가진 국화권력, 사법권을 가진 행정권력, 한국은행과 국영기업을 독점한 경제권력의 횡포는 그를 직접 당해보고,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상상을 못한다. 그 권력의 틀 안에서 권력을 집행하는 일선 공무원, 봉급 이외의 ‘다섯 장’. 그것이 오백만 원이든 오천만 원이든 요구할 때, 이를 거절하는 서민들은 거의 없다. 당장 제재가 가해져 생존을 위협받기 때문이다. 헌법에 보장된 자유와 인권, 그리고 행복추구권은 기층민들에게는 여의치 않은 용어다. 먹고 살아가는 고통, 거기다가 이런저런 협박에 덜미를 잡히며 사는 일이란 실로 만만치 않다. 곧 이 ‘다섯 장’으로 대별되는 ‘뇌물상납’에의 폭정을 암시하는 구절처럼, 서민들의 삶이란 시달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뭘 모르는 철부지들이 순진한 표정과 혈기왕성한 고함으로 사회정의와 인권, 자유, 인간의 기본적 권리 등을 외치면서 단호히 단상을 내려치고 있을 때, 이 땅의 기층민들은 가녀린 제 목숨 줄 하나를 연명해가기 위하여 국가로부터의 수탈에 다름 아닌 ‘협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신음해대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 겪은 것을 사실적으로 그린 시편이다. 이는 저명한 덴마크의 철학자 겸 신학자인 키르케고르Kierkegaard가 분자나 법률소식이나 제정소식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자각 또는 일종의 심리적, 도덕적 무감각에 빠지게 하는 자각의 부재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유도하면서, ‘확실히 모든 일이 개혁되어야만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더 강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와 같이 김종철은 ‘못’을 통하여 새로운 자각, 키르케고르의 실존철학과 변증법 신학에 가까운 예리하면서도 새로운 자각을 유도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해미마을에 갔습니다/낮에는 허리 굽혀 땅만 일구고/밤에는 하늘 보며 누운 죄뿐인 사람들이/꼿꼿이 선 채 파묻힌 땅을 보았습니다/요한아 요한아 일어나거라/이조시대 천주학쟁이들은/아직까지 요를 깔고 눕지 못했습니다/꼿꼿한 못이 되어 있었습니다/못은 망치가 정수리를 정확히 내려칠 때/더욱 못다워 집니다/순교는 가혹할수록/더욱 큰 사랑을 알게 합니다/겨자씨만 한 해미마을에서/분명히 보았습니다/십자가릐 손과 발등을 찍은/굵고 튼튼한 대못을/겨자씨보다 작은 이 마을이/두 손으로 들고 있었습니다
-「해미마을, 못에 관한 명상․5」전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현실이다. 살면서 피 토하는, 쓰라린 고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체득하는 이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일체는 모래성처럼 태풍이 불면 여지없이 사라져 버린다. 고달프고 외로울 지라도 현실이야말로 개개의 사람들이 지상에서 만나는 가장 위대한 이상향이다. 그러나 빵 만으로 사람이 살아갈 수 없듯이 현실이라는 실체적 사실만 중시하여 살아가기란 삶이 복잡다기하다. 신화mythology없는 민족이 없는 연유가 이에 기인한다. 더하여 신God없는 민족이 없는 경우도 이에 기인한다. 인간 이외에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닌 절대자의 존재에의 갈망에서 고래로부터 사람들은 신을 섬겨 왔다. 곰, 솟대, 장승 등을 섬겼던 토템사상에서 유일신인 히브리사상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의 삶의 경건성을 따질 때 으레 초월적 주재자로서의 신성神性을 말해 왔다. 이를 일러 융jung C.G은, ‘해리解理된 정신상태를 통합해 바람직한 삶을 살도록 하는 자기원형 기능의 인격화된 형상’이라 규정한다. 바야흐로 개인사적 층위와 사회적 층위를 거쳐 김종철의 ‘못’은 마침내「해미마을」에서 해리된 정신 상태를 통합하는 이른바 신성한 신의 영역에의 진입이 시작된 것이다. ‘순교는 가혹할수록/더 큰 사랑을 알게 합니다/겨자씨만한 해미마을에서/분명히 보았습니다/십자가의 손과 발등을 찍은/굵고 튼튼한 대못을/겨자씨보다 작은 이 마을이/두 손으로 들고 있었습니다’에서 보는 것처럼 ‘못’은 십자가로 연상되는 신의 자리, 십자가로 상징되는 순교의 자리에 위치한다. ‘못’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 손과 두 발을 꿰뚫어 고정시켜 놓는다. 창이 옆구리를 찔러 예수는 마침내 절명하였다고 성성엔 기록되어 있지만, ‘못’역시 예수의 손과 발에 무수한 피를 흘리게 한 주체다. 위 시에서의 ‘굵고 튼튼한 대못’이 바로 그를 말한다. ‘못’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의 대상인 예수를 더욱 믿고 따르게 하는, 소위 신앙의 불길을 확산시키는데 일조를 한다.
요컨대, 신앙의 핵심은 영성靈性,Spirituality이다. 이를 혹은 신의 눈Eye of God이라고도 한다. 한마디로 영적인 성정, 영적인 감동을 말한다. ‘굵고 튼튼한 대못’은 예수를 못 박는데 쓰였지만, 신앙의 영성은 더욱 불타올랐던 것이다. ‘이조시대 천주학쟁이들은/아직까지 요를 깔고 눕지 못했’지만 ‘눕지 않을’수록 그들의 영성은 깨어 있다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못’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천주쟁이들은 기꺼이 순교를 한다. 실제로 ‘해미마을’이 소재하는 충남 서산시 해미읍에 가보면 해미읍성 안 형장터에 회화나무가 있다. 제 몸 구석구석에 철조망 가시를 박고 사는 이 회화나무는 안다. 제 몸에 깊숙이 박혀 있는 쇠 철조망, ‘못’의 또 다른 연결고리인 쇠 철조망이 흡입하던 천주쟁이들의 목을 파고 들어가 질식사 시키던 사실을 안다.
신앙이란 그리하여 세상의 비웃음과 따돌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목 잘려, 혹은 목매달려 회화나무에서 절명한다할지라도 세상과 타협하여 미적지근하게 살지 않는다. 이것이 신앙의 요체이며, 동시에 신앙의 가치이다. 하여, 김종철은 그의 「눈물골짜기, 못에 관한 명상․7」에서 ‘나는 못으로 기도한다/못 박는 일에서부터 못 뽑는 일까지’를 신앙의 절대 가치인 기도로 ‘못’이라는 상처, ‘못’이라는 아픔, ‘못’이라는 갈망을 모두 용해시킨다.
절대자인 신과의 호흡이자 대화인 이 기도의 매개체는 결국 ‘못’인 셈이다. 그러나 기도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염원이라는 특성이 있다. 찾아내야 할 신천지인 것이다. 결국 기도는 갈망이다. 여기서 ‘못’은 ‘갈망’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갈망은 어떤 형태인가. ‘빼내려는, 뽑아내려는’ 빼내어 버려야 할 성격을 띤다. 실제는 어떠한가. 시원하게 ‘못’이 빠지는가? ‘아아, 만일 내가 그분을 모시고 가지 않았던들/그분이 입성한 지 불과 여섯째 날/죽여라 죽여, 십자가에 못 박아라/저 언덕 위에는 비가 오고 천둥소리가 들렸어’(「나귀의 사․1, 못에 관한 명상․63」일부)나, ‘식탁에 앉아서는 그분께 감사기도 드리고/교회에서는 자기들 죄 땜에 돌아가셨다고/참회하고 또 구원을 청하고/이런 우라질! 정말 우리는 그분을 들먹일 때마다/(중략)/우리는 말뚝과 막일에서 해방되지 않을 것이니’(「나귀의 시․2, 못에 관한 명상․64」일부)의 시편을 보면, ‘못’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 ‘못’으로서의 성격을 굳히고 있다. 이들 시편에서 공통의 시적화자인 ‘나귀’는 제 몸으로 태워들인 이를 ‘못’박혀 죽게 한 일에 대한 참회를 하지만 이 참회는 영원히 계속되는 또 다른 ‘못’일 뿐이다. 도저히 빠지질 않는다. 이 밖에도 ‘어머니는 새벽마다/조선간장을 몰래 마셨다/만삭된 배를 쓰다듬으며/하혈을 기다렸다’(「조선간장」『못에 관한 명상․37』)에서처럼, ‘조선간장’을 마시며 유산하길 바랐던 절절한 갈망에서 참담한 절망으로 귀결되어지고 있다. 결국 ‘못’이란 빼려는 노력에 비하여, 처음 장부터 끝페이지까지 이어져 온 심각한 갈증에 비하여 결국엔 그대로 놔두거나 아니면 처음보다도 더 깊이 박아버리는 절망을 심층 깊숙이 안고 있다는 역설이 곧 김종철의 ‘못’인 것이다.
4. 결어
김종철의 ‘못에 관한 명상’ 연작시는 ‘못’의 개인사에서 출발하여, ‘못’의 사회사, 그리고 ‘못’의 신성사까지 섭렵하는 역작이다. ‘못’이라는 철광석의 날카롭고 뾰족한 물건에 찔리거나, 찌른 인간군들이 벌이는 대 파노라마다. 이를 통하여 무심히 지나쳐 버린 무수한 일들을 반성해 보고 성찰하면서 인생과 삶을 관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못’이라는 광물을 들어 우리는 누구이며, 누구를 찌르며 혹은 찔리며 살아가고 있는가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관찰을 유도해낸다. 곧 개인과 사회와 세계로 인식되어지는 신에의 성찰을 하면서 어떻게 삶의 고통과 사랑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가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일견 김종철의 ‘못’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접점에 머물러 있는 점이 아쉽다. 생이라는 현실, 인생이라는 현실, 현실이라는 현실은 우아한 교향악이 아니다. 밤중에 들리는 덜커덩거리는 기차소리이며,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의 사투가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게 삶이다. 망치로 ‘못’을 박는 일은, 무언가 새로운 ‘일’의 착수를 뜻하지만 어떤가. 그로 인하여 ‘못’이 튕겨 실명하고 머리가 터져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삶이라는 더러운, 그리고 신비로운 세계의 설정엔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철의 ‘못’은 회심回心을 생성시켜, 세상의 부패와 불의와 부정과 맞서거나 ‘충돌’케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시의 역사, 시인의 삶의 궁극은 결국 세상과의 충돌에 있다.
시, 또는 시인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충돌하지 않고 적절하게 또는 사악하게 세상과 타협하여 이기적 욕망에 몸부림친다면 그 시, 시인은 생존해 있을지라도 이미 그 영혼이 소멸 내지는 사멸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의 ‘못에 대한 명상’ 연작시는 집요하게 ‘못’을 내세우는 만큼이나, 집요하게 세상과 충돌하며 살 것을 권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이 설혹 갈망이거나 절망일지라도 못대가리가 받아내는 망치의 불꽃처럼 강렬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세상과 충돌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충돌해야 하는가. 거기에서만 이 회심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종철의 ‘못’은 사유의 심층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목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삶과 문학과 시의 청정함, 시인의 순수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드시 시와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신의 위대한 생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에의 격한 충돌을 고무하는 ‘못’의 일대기가 분명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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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문학의 궁극은 창조에 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사상과 문학이론 생성 이래, 각 시대마다 다양한 표상과 문학적 상상력의 현상학을 통하여 발현된 문예사조는 문학이라는 화염분사기애 각양각색의 사상과 예술성의 동기를 융합하려는 불꽃을 장전하여 발사하길 멈추지 않고 있다. 여기서 파생하는 원소의 불꽃은 연극, 영화를 비롯하여 인간의 감동, 눈물, 회한, 아름다움, 행복에 깊이 관여한다.
이것이다. 글을 쓰는 일이란, 그리고 글을 읽는 일이란 화염을 내재한 잠재적 폭발성의 전율이다. 한 편의 탁월한 문학작품아 한 생애가 겪어내는 폭풍 뇌우의 삶을 능가하는 절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순간들의 무의미를 유의미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키르케고르의 말을 빌려 인간의 의식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여 삶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다. 이때에 자각에는 심리적 도덕적 무감각에 빠져 문단 및 사회지도층으로 군림하면서도 태연히 사회적 일탈행동을 하는 자각의 무너져 내리는 부재에서부터 계급과 인종, 이웃과 사회적 지위에 관한 자각이 일괄 포함한다.
문인에게 있어 자각은 최고의 황금률이다. 자각의 정도에 따라 글쟁이의 가치가 변화한다. 단적인 예로 단 한 번도 글쓰거나 학교 수업을 받은 일이 없는 찰스 디킨스는 그의 자각에 의하여 글을 썼고 이제는 미국 전역의 대학교에서 그의 글을 가르치고 있다.『무명의 주드』를 쓴 토마스 하디 역시 자각의 결실이 결국 그를 웨스트 민스터 대성당에 묻히게 했다. 시인 보들레르, 이상, 백석, 소월 등등 일군의 문인들의 작품들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진실, 혹은 물리적 세계 이면의 의미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는 인식론적 관점의 형이상학을 설파한 기점도 자각에 의해서이다.
내가 문학평론에의 자각을 하게 된 동기는 월간 <조선문학>을 창간하신 박진환 선생의 일깨움에서 비롯되었다. 선생이 한서대학교 대학원장으로 근무할 때에 나에게 밤 새면서까지 평론 집필을 강권하였다. 그리곤 평론의 평자도 모르고 나는 평론을 써댔다. 청장년 시절 내내 주야장창 술도가니에 빠져 잘 놀고 잘 먹고 온갖 기행을 일삼던 내가 무식한 채로 평론을 쓴 것은 그러니까 시인 20여 년이 훌쩍 지난 셈이다, 책으로 묶어 펼쳐내기엔 너무나 유치하다.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이 책은 나에게 있어 특별하다. 이유인즉 순전히 유치했던 이들 평론 덕분에 내가 평설 써드린 시인들의 고희연, 팔순, 미수에 불려나가 축사를 하는 호사를 누렸으므로 그 문인들을 눈물겹게 사모하게 되었다. 부언하면 이 글들은 이미 활자화하여 내 품을 떠난지 오래된 글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문인들과의 그 만남, 그 인연, 그 추억들을 내심 몹시 그리워하다가 이 책 출간을 결심하였다.
이미 이 책에서 동등장하는 시인들 상당수는 운명하셨지만 나의 첫 평론집이 되는 이 책 출간은 자못 의미가 없다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경희대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이 글들이 모태가 되어 주었음을 회상할 때 나의 문학여정에서 이 책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향후 철학과 사상을 재정립하여 더 치열하게 글 쓸 것을 다짐하면서 끝으로 이 책 펴내기까지 문학 동지이자 문학도반인 도서출판 문화의힘 대표 이순 시인의 묵묵한 성원과 애정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2018년 8월 30일
흰솔 신익선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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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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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문학평론집
자각의 문학
한 편의 탁월한 문학작품아 한 생애가 겪어내는 폭풍 뇌우의 삶을 능가하는 절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순간들의 무의미를 유의미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키르케고르의 말을 빌려 인간의 의식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여 삶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다. 이때에 자각에는 심리적 도덕적 무감각에 빠져 문단 및 사회지도층으로 군림하면서도 태연히 사회적 일탈행동을 하는 자각의 무너져 내리는 부재에서부터 계급과 인종, 이웃과 사회적 지위에 관한 자각이 일괄 포함한다.
문인에게 있어 자각은 최고의 황금률이다. 자각의 정도에 따라 글쟁이의 가치가 변화한다. 단적인 예로 단 한 번도 글쓰거나 학교 수업을 받은 일이 없는 찰스 디킨스는 그의 자각에 의하여 글을 썼고 이제는 미국 전역의 대학교에서 그의 글을 가르치고 있다. 『무명의 주드』를 쓴 토마스 하디 역시 자각의 결실이 결국 그를 웨스트 민스터 대성당에 묻히게 했다. 시인 보들레르, 이상, 백석, 소월 등등 일군의 문인들의 작품들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진실, 혹은 물리적 세계 이면의 의미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는 인식론적 관점의 형이상학을 설파한 기점도 자각에 의해서이다.
― 저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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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선 시인∥
∙ 충남 예산 출생
∙ 경희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 충남문인협회 회장 역임
∙ 현재 충남문인협회 고문, 국제펜충남지역위원화 고문, 예산문인협회 고문
∙ 시집『사람들은 소라를 낸다』『씨가 있는 풍경』『우리들의 덩굴』『풀무불의 노래』『울음의 끝자락애 꽃이 핀다』『얼굴 없는 자화상』『신하멜표류기』『예산 아리랑』『예산 임존성』『예산의 문화산수화』『도미부인』『예산의 문화 산수화2』『삶에 관한 백가지 팡세』『만세보령의 문화교향악』『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영한대역 상, 중, 하)』『고요한 기쁨』『충청수영성의 쇠북소리』『칠월의 호적』
∙ 소설집 『남자의 은장도』
∙ 수필집 『얼굴 없는 자화상』『운명이여 불을 켜라』『옆 사람이 신이다』『달빛의포옹』『산안개와 살다』
∙ 문학평론집 『백석의 동시와 동화시 연구』『자각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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