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추가합니다」에 답합니다
2026. 10. 24. 心工 라정호.
말씀 잘 읽었습니다.
1. 경(璥) 공의 있고 없음은 아무것도 가르지 못합니다
- 금성 쪽 『나씨고증문헌』⁽¹⁾ 의 피보변무 ⁽²⁾ (36쪽)는 경(璥)공을 「계통을 잃은 조상(失系祖)」으로, 총례 공을 「계통을 이어 닦은 시조(修系한 始祖)」로 적었습니다.- 경(璥)공 기록은 「나주라는 관을 언제 받았나」를 적은 것이지,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를 적은 것이 아닙니다.
- 말씀하신 대로 금성과 안정이 모두 지강(至强) 공⁽³⁾ 후계라면, 그 위의 사관(賜貫)⁽⁴⁾ 기록 한 줄이 한쪽 족보에 없다고 남이 되지는 않습니다.
2. 천부 공과 천서 공을 형제로 적은 기록은 총보보다 앞섭니다
- 1747년 정묘보가 나온 뒤 경원(景元) 공⁽⁵⁾이 쓴 변명록⁽⁶⁾(『나씨고증문헌』 25면)[政丞公 諱允의 下에 大將軍 諱天富와 安川君 諱天瑞와 商山伯 諱元瑞와 赤羅伯 諱文瑞가 있는데 彼譜에는 諱天瑞 以下로부터 다 絶系한 것은 다 無從을 因하여 궐제한 것이니 不可甚大하니라]
풀이: 정승공 윤 아래에 대장군 천부, 안천군 천서, 상산백 원서, 적라백 문서가 있는데, 저 족보가 천서 이하를 모두 끊은 것은 「따르지 않았다(無從)」는 까닭으로 빼 버린 것이니 매우 옳지 않다.
- 올려 달라고 하신 기록이 이것이고, 원본 사진은 끝에 적은 주소에 있습니다.
3. 「初諱 認」은 총보에서 처음 나온 이름이 아닙니다
- 1760년 『여지도서⁽⁷⁾』는 천서 공의 아버지를 「羅認」, 고려(前朝) 정승으로 적었습니다.- 1786년 『비안현읍지⁽⁸⁾』도 「羅天瑞 認之子」(나천서는 인의 아들)라 적었습니다.
- 모두 1930년 나씨총보보다 140년 넘게 앞선 나라와 고을의 기록입니다. 총보를 합리화하려고 認을 넣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4. 「현대 양쪽 족보에 공통된 부분이 없다」는 것은 근거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 1747년 정묘보⁽⁹⁾는 「안렴사 부군 위로 이어진 4대 세계는 옛 첩을 버리고 새로 정했다(捨舊牒用新定)」고 스스로 밝혔고, 윤 공 아래 천부 공 한 분만 남기고 천서 공 이하를 끊었습니다.
- 그 끊음을 같은 문중 안에서 「매우 옳지 않다」고 꾸짖은 기록이 위 변명록입니다.
- 이때 끊은 뒤로 두 족보가 따로 내려왔으니, 오늘의 족보끼리만 견주어 「공통점이 없으니 관련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5. 장자(障子)의 「시조 '業'」
- 한산 나경성 집에 전하던 장자⁽¹⁰⁾의 기록은 정묘보 편찬자 스스로 「여러 집 가승⁽¹¹⁾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다(各家諸乘無所槪見 今雖不敢遽爾取信)」고 적은 것입니다.
6. 안정나씨 쪽도 나주를 관으로 적었습니다
- 1709년 나양좌⁽¹²⁾가 지은 안천군⁽¹³⁾ 묘비: 「羅氏世貫羅州」(나씨는 대대로 나주를 관으로 하였다)- 1797년 안정 첫 족보 정사보⁽¹⁴⁾ 서문: 「夫羅之大本 出於羅州」(무릇 나씨의 큰 근본은 나주에서 나왔다)
- 1908년 『증보문헌비고⁽¹⁵⁾』: 「安定羅氏始祖天瑞 系出羅州」(안정나씨 시조 천서는 나주에서 나왔다)
7. 답변일 뿐, 논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 이 글은 물으신 데 대한 답변일 뿐입니다. 말꼬리를 잡는 논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 옛 족보를 보지 못해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서를 뺀다」, 「경계선이 있다」는 결론도 옛 기록을 본 뒤로 미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옛 기록은 금성 쪽, 안정 쪽, 나라 문헌이 한목소리로 「나주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 증거가 눈앞에 다 없어도, 남은 기록을 차례로 놓고 보면 누구나 「아,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만든 문헌이 백 퍼센트 옳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나라 문헌입니다.
- 족보를 증거로 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족보도 믿지 않는 마음이라면, 옛 족보가 나온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재는 잣대는 양쪽이 같아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증거는 서로 함께 찾아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금성으로 관을 옮긴 정묘보로 말미암아, 오늘 후손들이 하지 않아도 될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벽 공이나 수암 공을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누구를 탓한다고 풀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함께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성과 안정 사이에 경계선은 원래 없습니다.
원문과 원본 사진: https://guemsungnac.github.io/gyeonggyeseon.html
(1) 『나씨고증문헌(羅氏攷證文獻)』: 1963년에 금성나씨 옛 문헌을 모아 낸 책.
(2) 피보변무(彼譜辨誣): 「저 족보의 잘못을 가려 밝힌다」는 뜻으로, 『나씨고증문헌』 제9장이다. 피보(彼譜)는 「저 족보」, 곧 천서 공 이하를 끊은 1747년 정묘보를 가리킨다.
(3) 지강(至强) 공: 나주에 처음 와서 정착한 나씨 선조. 『나씨고증문헌』 변명록(24면)에 「처음 至强公이 와서 居住한 후로부터 子孫이 代代로 이 땅에 살고」라 하였다.
(4) 사관(賜貫): 나라에서 본관을 내림.
(5) 경원(景元) 공: 1716~1787. 자 원숙(元淑), 호 양졸재(養拙齋). 이삼(以參, 1645~1729) 공의 손자이고 송곡 재강(載綱) 공의 아들이며, 청주·성천 훈도를 지냈다. 『나씨지장록』 갑진본에 실린 행적에 따름.
(6) 변명록(辨明錄): 정묘보의 잘못을 가려 밝힌 기록. 『나씨고증문헌』 24~25면에 실려 있다. 정묘보를 「저 족보(彼譜)」라 불렀으니 1747년 뒤에 쓴 글이다.
(7)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조 때 나라에서 고을마다 올린 기록(읍지)을 모은 책.
(8) 『비안현읍지(比安縣邑誌)』: 비안 고을(지금 경북 의성 일대)의 기록. 규장각 奎17454.
(9) 정묘보(丁卯譜): 1747년(정묘년)에 낸 금성나씨 족보. [구정묘보]라고도 불림. 나수암(羅壽嵒)공이 엮었다.
(10) 장자(障子): 원문은 「一大障子」. 단자(單子)를 모아 묶은 장부를 장자(帳子 혹은 障子)라 하였다. 정묘보는 나경성 등이 「세계를 적은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큰 장자」를 가져왔는데, 그 맨 윗층에 시조 업을, 둘째 층에 4대손 총례를 적었다고 하였다.
(11) 가승(家乘): 집안에 전하는 계보와 내력의 기록.
(12) 나양좌(羅良佐): 1638~1710. 호 명촌(明村). 나만갑(羅萬甲)의 손자.
(13) 안천군(安川君): 안정나씨 시조 천서(天瑞) 공의 봉호.
(14) 정사보(丁巳譜): 1797년(정사년)에 낸 안정나씨 첫 족보.
(15)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년 나라에서 엮은 제도·문물 백과. 권50(장서각 K2-2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