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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묵상글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 조언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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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조언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드디어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 대한 긴 얘기의 끝부분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에 반응이 갈립니다.
사람들은 듣기 너무 거북하다며 주님을 떠나고,
베드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어딜 가냐고 합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서로 딴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그대로 갈립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되며,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북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달콤하며,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말이 되고 심지어 영원한 생명의 말이 됩니다.
이것은 어떤 차이일까요?
머리가 좋고 나쁨의 차이일까요?
심성이 좋고 나쁨의 차이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요?
머리가 좋고 나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심성이 좋고 착해도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습니까?
분명코 믿음에서 갈리고,
그리스도교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이고,
그러기에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요 생명이라고 믿고,
우리 인생 전부를 이 생명의 주님께 거는 우리지요.
이는 마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의 믿음과 같습니다.
이 길로 갈 수도 있고 저 길로 갈 수도 있는데
누구 말을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 길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작 이 세상 갈림길이 아니라
영원과 생명을 가르는 정말로 고민이 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요즘 주식 투자와 관련하여 작전꾼들의 말을 믿었다가
자기와 아는 이의 전 재산을 날리게 되는 일이 허다한데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식에서 대박과 쪽박이 갈리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거지요.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황천길이 될 수도 천당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신앙 역사를 보니 주님을 믿게 된 후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주님 말씀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언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주님 말씀이 점차 조언이 아니라
영원의 갈림길에서 듣는 구원의 말씀이 되어가고 그만큼 절실하게 받아들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나이 드신 분들은
마찬가지로 어떤 길을 선택할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절실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시는데,
그래서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베드로 사도처럼 대답할 수 있는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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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임을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키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여, ‘말씀의 영성체’를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하시며,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지성적인 작용이 아니라 개인적 친분, 곧 경험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인식으로 넘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점에서 예수님을 ‘떠난 제자’와 ‘남는 제자’가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왔고 그래서 친교를 맺는 이들은’은 남은 제자가 되었고, 반면에 ‘알고 믿고자 한 이들’은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알고 믿는 것’보다 ‘믿어서 친교를 맺는 삶’이 먼저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참 제자가 되는 길은 정보나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려진 아버지께 온전한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당신 장막에 머물게 하소서!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달려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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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렵다고 포기하면 안된다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하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순간은 당신이 저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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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 문화와 유적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저도 즐겨 읽었습니다. 최근에 내 고향 서울 이야기라는 주제로 11번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세검정 성당에 있었기에 유홍준 선생님의 고향 이야기가 더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옥인동, 통의동, 자하문, 궁정동, 효자동은 저도 자주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저는 전라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서울로 왔습니다. 저는 봉천동에서 살았습니다. 봉천동 주변에는 낙성대와 관악산이 있습니다. 관악산에는 서울대학교가 들어오면서 큰 길이 생겼습니다. 상도동을 넘어 동작동으로 가면 국립묘지가 있습니다. 어릴 때 그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7살에 봉천동에 와서 사제서품을 받았던 29살까지 살았으니 22년을 살았습니다. 제 삶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저는 봉천동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였고,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성당친구들과 어울렸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995년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8일에 시작해서 어제까지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유홍준 선생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썼다면 저는 ‘나의 성지순례 답사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자렛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나자렛 예수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에는 각 나라에서 보내온 아름다운 성모상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해서 아인카렘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어머니가 만났습니다. 성 요셉과 성모님은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태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순례해서 경배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의 문에는 성지순례의 자세를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세례터에서 세례갱신 예식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영, 혼, 육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셨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순례 중에 ‘광야’를 체험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도 도시라는 광야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기쁜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 귀머거리, 앉은뱅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에서 혼인잔치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가 사는 곳이 갈릴래아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의 승천 경당, 주님의 기도 경당, 주님의 눈물 성당, 겟세마니 성당, 베드로의 눈물 성당, 성모님의 영면 성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곳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조롱과 야유가 있었습니다. 모욕과 가시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걱정에서 기쁨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처럼 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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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 몸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생각하는 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뇌가 그리 똑똑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 복잡한 것 같지만 너무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뇌를 속이기가 쉽답니다.
우선 뇌는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가짜로 웃고 있는데도 뇌는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짜로 울고 있거나 자주 화를 내고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면, ‘지금 불행하구나’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 행복과 불행의 느낌은 평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뇌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든 웃고, 어떻게든 긍정적인 말을 행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뇌가 ‘지금 행복 중’이라고 표시합니다. 이렇게 웃음 짓는 사람 곁에 어떤 사람이 함께하고 있을까요?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함께하게 됩니다.
‘죽고 싶다. 환장하겠다. 미치겠다. 화가 너무 나.’
이런 말로 가장 힘들어지는 것은 결국 ‘나’뿐입니다. 뇌는 불행을 말하는 사람에게 ‘불행’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왜 부정적으로만 생각할까요? 진짜로 손해 보는 것 같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곧 사랑의 삶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무조건 내게 도움이 되는 삶입니다.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만을 보고 있기에 신앙 자체를 포기할 뿐입니다. 결국 손해는 온전히 자기 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의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육적인 말씀으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원한 생명을 본성으로 하고, 육적인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본성으로 합니다.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거북한 말씀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수준 낮음은 생각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완고함을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손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 손해가 온전히 돌아갈 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그 모든 것은 철저히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믿음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정적인 행복의 마음이 진짜 행복을 내게 전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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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최악이라고 말할 힘이 있다면 아직은 최악이 아니다(윌리엄 세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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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현역
-그리스도가 전부인 사람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116,12-13)
“영원한 현역”은 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우선 살아 있는 분으로 영원한 현역이라 할 수 있는 분을 소개합니다. 지금 41차(2023.4.28.-30) 항가리를 사목방문하고 계신 1936년생 우리나이로 고령의 88세,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영원한 현역입니다. 방문 모토인 ‘그리스도 우리의 미래’ 라는 말마디도 공감했습니다.
바로 영원한 현역이라 칭할 수 있는 분들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저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저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제 서품 25주년 은경축 상본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성구는 제 평생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방금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항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나라 지도자들에 대한 연설이 실시간으로 중개되고 있었고 내용도 멋졌습니다. “국경을 넘어 바라보며 평화를 추구하라”는 요지의 강론에 “역사의 도시, 가교의 도시, 성인들의 도시”라며 부다페스를 찬양하며 항가리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시의적절한 명연설이었습니다. 항가리 주재 교황대사의 “항가리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쁨(joy)과 성실(sincerity)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우리나이로 82세, 저보다 7세 연상의 역대 최고령의 미합중국 제46대 대통령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역시 영원한 현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 바이든은 놀랍게도 지난 25일, “지금은 안주할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미국의 영혼을 위해 싸우겠다”며 내년 치러지는 재선 도전을 공식선언하며 기염을 토했습니다. 만일 재선에 성공하여 임기를 채운다면 미역대 최고령 대통령으로 우리나이 88세입니다.
지난 삼척에서의 수도 공동체 봄소풍시, 시종여일 열정적으로 안내를 맡았던 분, 김일동 루가 형제도 영원한 현역이었습니다. 저보다 11세 연상의 86세의 고령인데 정말 저보다 젊어 보여 놀랐습니다. 저와 악수시 좋아하며 “예수님과 악수하는 것” 같다며 신앙고백적 유머도 멋졌습니다. 그대로 믿음의 표현, 겸손의 표현같은 말마디입니다. 후에 알고 보니 제13대 국회의원에 3선 삼척시장을 역임한 명실공히 삼척시의 유지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봄소풍을 함께 했던 아랫집 87세 고령의 서 마리레몽 수녀님 역시 노인티가 전혀 안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젊은이 같은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날마다의 아침미사때도 수녀님들중 신자석에 1등으로 들어오는 참으로 부지런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답습니다.
묵상해 보니 생몰연대에 관계없이 영원히 살아 계신 성인들이야 말로 영원한 현역들이라는 생각이듭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33세 단명한 성녀 시에나의 가타리나 역시 놀라운 영원한 현역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25자녀들중 23번째가 바로 성녀 가타리나입니다. 성녀의 업적은 정말 불가사의로 100% 연소시킨 불꽃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성녀는 1380년 33세로 선종한후 1461년 시성되었고, 1866년부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이 되었고,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학자로 선언했으며,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녀를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 스웨덴의 비르짓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와 함께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지정했습니다.
교회의 영원한 현역의 성인들에게는 공통적 특징이 있습니다. 제가 방금 고백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들의 미래이자 현재이자 과거인 분들로 그리스도가 그들의 전부가 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아버지가 그의 미래, 현재, 과거, 모두가 되었듯이, 성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미래, 현재, 과거, 모두가 된 분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빛나는, 영원한 전사들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생애가 전부가 된 분이기에,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된 삶이기에 그가 행하는 오늘 복음의 기적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를 통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던 애네아스의 치유 기적 장면도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이어 야포에 타비타라는, 그리스말로 하면 ‘도르카스’라하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한 자매였는데 병이들어 죽었고 소식을 들은 베드로는 지체없이 달려와 자매를 살려냅니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같은 장면이라 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다.-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나, 일어나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애네아스와 타비타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 신록의 삶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듯이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단하나의 삶은 언제나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영적 탄력좋은,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로서의 파스카의 삶뿐이겠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가, 미래와 현재와 과거된 분임이 이미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시종여일, 한결같이 주님을 따랐던 영원한 현역의 빛나는 모범 베드로 수제자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란 말씀을 깊이 깨달아 알았던 베드로였고, 바로 다음 장면이 결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께 실망한 제자들이 하나 둘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의 응답입니다. 우리의 대답도 이와 같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명답이 예수님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깊이 깨달아 안 베드로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이자 현재이자 과거가, 모두가 되는 분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미래,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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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 이러한 내용은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직 그들의 눈은 영적인 것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떠나가는 제자들을 보시며 열두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떠나감’은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멀어진다는 뜻은 함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병원에서 잠시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모든 환자가 소망은 한가지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은 단순한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의 품으로,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의 품으로,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열두 제자는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더 이상 단순한 스승님이 아닌 함께 하는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빵과 술을 함께 나누는 사람, 밥과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을 우리는 식구라고 부릅니다. 열두 제자는 주님과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좋을 때는 따르고 나쁠 때는 떠나는 모습을 보이나요. 기쁨 중에도 행여 고통이 닥쳐도 주님과 함께 걷고 있나요.
영적인 가족, 우리의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우고 싶은 순간
요즘 말로 흑역사라고 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 속에
지우고 싶은 순간들을….
모자라 보여서 지우고 싶고
고통스러워서 지우고 싶고
치욕스러워서 지우고 싶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지우고 싶고
물론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우고 싶은 마음 여전합니다.
어쩌면 지우고 싶은 그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지우고 싶은 그 순간들은
오늘도 나를 살게 하고
조금 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지는 안을까요?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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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남은 이와 떠나는 이>
당신에게
차고 넘치게 받아
조금씩
당신처럼 되어
당신 그러하듯
기꺼이 주려는 이는
당신 곁에
끝까지 남겠지요
당신에게
차고 넘치게 받음에도
조금도
당신처럼 되지 않고
당신과 다르게
오직 받으려는 이는
당신 곁을
언젠가 떠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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