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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26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아브라함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삭에게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일이 하나님으로 가능하게 된 사건을 보게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얻기 위한 이삭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두 아이가 잉태되어 싸우니까 이 일도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 과정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는데 이들이 두 국민으로 예언되고 있습니다. 이 때가 이삭이 60세 되던 해입니다.
1. 본문 19-20절은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입니다.
교회의 발전을 기술하려는 모세의 목적에서 보면, 이스마엘 족속은 부수적인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제 모세께서는 역사의 주된 주체자들에게로 향합니다. 먼저 그는 이삭의 아내는 메소보다미아에서 데려왔다는 점을 반복합니다. 모세는 분명하게 그녀를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야곱의 외삼촌입니다. 그에 관해서 모세는 여러 가지 일을 말해줍니다. 모세는 리브가가 결혼 초기에는 불임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불임 기간은 3, 4년이 아니라 자그만치 20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 같은 자녀에 대한 그녀의 절망이 갑자기 주어지는 복을 보다 영광스럽게 해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생각해야 할 점은 교회의 번식이 처음에는 그렇게 작고 느리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도 고령에 있을 때 오랫동안 자손을 못 보다가 한 가닥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었습니다. 이삭도 이미 나이가 많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못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던 자손은 어디 있었던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군들 하나님이 말로에는 그렇게 번성하리라고 했던 그 집안을 이제 공허하게 만드실 작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시113:9)라고 한 시편의 말씀은 교회와 관련해서 실현되어진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이렇듯 속도가 느리고 미미한 진전을 지닌 미천한 기원이 그 후에 온 예상 밖의 번성을 더욱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단순히 자연적인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에 의해서 발전하고 번영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지나치게 집착하는 태도를 교정하시고 조절하실 의향은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행사에서 살펴야 할 주요 이유는 거룩한 자손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자연의 일반 질서에 따라서 산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부지런함에서 기원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배워야 됩니다.
2. 본문 21절은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아내의 목적에서 여호와께 간구하였다’ 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녀의 기도도 첨부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와 있는 구절은 보다 더 단순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기도를 했다는 것은, 이삭이 자기에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복 주시지 아니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는 또한 자녀를 가진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갖는 은혜가 온 인류에게 널리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우연에 의해서 출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정도로 출산력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복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또 그에게는 비상하고 돈독한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이상 그는 간절히 자손을 바랬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기도가 막연하지 않고 약속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십여 년 간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처음으로 기도할 생각을 해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단 한마디로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자식을 얻었다고 말했을지라도 생각해 보면 이 같은 기도는 여러 차례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인의 인내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 소망이 헛된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여전히 참 신앙인 이삭은 자기 신앙 열성을 식히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자기 본을 통해서 기도에 인내를 가질 것을 우리 모두에게 교훈 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로는 응답을 멀리 미루지만 결코 자기 신실한 백성의 소망에 대해 귀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3. 본문 22절은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새로운 유혹이 일어납니다. 아기들이 모태에서 서로 투쟁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이 투쟁이 어머니에게 큰 고통을 주기 때문에 어머니는 죽고 싶어하게까지도 됩니다.그리고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녀는 자기 뱃속에 무섭게도 비범한 쌍둥이 형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치루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백 번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불평이 여성의 약한 인내력 탓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고문으로 인한 아픔이라기보다는 자식의 비범성을 증오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 같은 투쟁이 자연적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쩌면 무서운 비극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어떤 비범성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그녀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노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대개 닥친 재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처음에는 그녀가 정도 이상으로 번민했고, 고뇌하며,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자기 고통을 치료하는 방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본을 통해서 곤란한 문제에 직면해서도 지나치게 슬픔에 빠지거나 고생의 은밀한 원인을 생각하노라고 마음을 애태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동요를 처음부터 막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절제할 수 없을 만큼 되기 전에 감정을 제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절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말한 대로 리브가는 주님의 뜻을 물으러 갔습니다. 사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신다는 확신 아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마음을 진정시킬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사태는 불리해 보이고 자기 뜻과는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전히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무엇인가 자기에게 만족을 줄 안정을 희망했습니다.
여기서 어떤 식으로 리브가가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까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녀는 이 비범한 일의 성질이 무엇인가를 어떤 예언자에게 가서 알아 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수긍된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그녀가 하나님 말씀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갔었다고 암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추론은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해석을 내립니다. 그녀는 조용히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를 받기 위해서 더욱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인근에는 물론이고 그녀의 남편이나 시아버지를 빼놓고는 예언자를 찾아볼 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자기 뜻을 계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일의 중대성을 감안한다면 그 비밀은 어떤 인간의 증언보다는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듣는 것이 보다 적합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다른 방법이 사용됩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적을 통해서 미래사를 알려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율법서의 교훈과 예언자들의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들과 잠언, 전도, 아가 등이 지혜의 완전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와 주의 사도들의 서신이 있는데 이것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도 성경 자체를 통해서 계시의 종결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4. 본문 23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입니다.
1) 여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별이 있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쌍둥이의 싸움이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 이상의 어떤 일에 관계된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후손들 간에 불화가 있을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국민이 있다’ 라고 한 말은 그 표현 방법이 강조법 입니다. 그들은 형제요 쌍둥이므로 한 핏줄이고 따라서 그 어머니는 저들이 서로 다른 민족의 두령이 될 정도로 분리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가 하나이던 자들간에 이 같은 불화가 일어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2)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서로 다른 처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승리는 이들 중 어느 하나에게 속하며 이것 때문에 싸웠습니다. 한쪽은 선택을 받고 다른 한쪽은 버림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길은 가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택을 받은 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수많은 난관과 경쟁을 만나야 합니다.
(3) 셋째로 자연적인 순서가 역전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더 못난 동생이 승리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승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봅시다.
그 승리를 땅의 부귀에다가 국한시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런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이삭과 리브가는 구원 계약이 두 백성에게 공통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야곱의 후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약속이 분명히 모든 자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 중 일부에게만 국한됩니다. 하나님이 조건이 같아 보이는 야곱의 자손들을 둘로 나누사 한쪽은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거절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투쟁이 생겨난 것입니다. 한편은 교회의 이름과 교회의 특권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이방인으로 취급됩니다. 한편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그것을 빼앗깁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인들은 교회 조직에서 단절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계약은 야곱의 집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2) 이 같은 구별의 이유를 찾아본다면, 자연적 조건에서는 발견치 못할 것입니다.
두 민족의 기원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공적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싸움이 시작될 때는 두 민족의 두령이 자기들의 어머니 모태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나중에 그들 스스로 육체의 자랑을 갖추기 위해서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온갖 자신과 자랑의 구실을 제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에는 열등한 자가 되고 말 자를 먼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정해 놓으신 순서를 일부러 뒤바꾸셨습니까? 그 이유는 야곱은 아무런 존귀성도 없었지만 그가 약속된 복의 상속자가 되고 선택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자신의 은총에 의한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이 형 에서보다 야곱에게 우선권을 주어 교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결코 그의 노력에 의한 공로의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 그의 부지런함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은총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전 백성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때는 별로 믿고 있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외형적 전파처럼 아주 널리 알려져 있는 일반적 양자설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주제는 너무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으므로 다소 분명치 못한 데가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이 17장 주석에서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양자로 삼으시는 그분의 은총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모든 아들들을 포용하시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그들 모두와 계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구원 약속이 무차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육체에 할례를 통해서 입증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전체 민족에서 특별히 선택해 낸 씨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이들만이 아브라함의 합법적 아들로 인정됩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은밀하신 작정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진실로 신령한 씨와 육욕적 씨를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하는 문제는 그 같은 구별지어진 그 ‘원리’이지 그것을 외부적으로 입증해 주는 상징이나 표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 나와 있는 대로 예외 없이 야곱의 전 자손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은총의 동일한 증거를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서 모두에게 똑같이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특별한 선택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멸망하는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남기시려 하셨습니다.
3) 이렇게 볼 때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모세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일반 선택인가 아니면 특별 선택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말을 나중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육체적으로 유대인이라 해서 모두가 생명의 상속자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야곱의 후손이라 하여 모두가 참 이스라엘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자를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증언을 인용했습니다(롬9:7, 8, 12). 은혜로 주시는 선택 교리를 말살하려는 자들은 바울의 말 역시 형식상의 소명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모든 논지는 그 같은 주석들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얼빠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뚜렷이 빛나는 광명을 어둡게 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뻔뻔스러움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에서의 직권이 그의 동생에게로 넘어간 것은 그가 육체를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에게 새로운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도 약간의 일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 나와있는 차이점을 해명함에 있어서 그 외형적 소명의 주요한 내용적 원리를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계약을 무용지물로 만들 생각이 없다면 에서와 야곱이 그 외형적 소명에는 똑같이 참여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소명이 허락되었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에 의해서 구별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논증의 성질과 목적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교회에 대한 상속권을 자랑하여 복음을 배척했을 때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서 약속된 구원이 선민,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참 아들들에 의해서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란 점을 생각함으로써 그 같은 단순한 신앙은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에 의해서 야곱의 자손이 된 모든 자들이 참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선택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일반 선택에서 특수 양자설로 나아간 것은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모두 교회의 참 회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바울이 ‘양자권에 속한’자들을 자녀의 계열에서는 명백히 구별시켰다는 것을 확실합니다. 따라서 그가 이 같은 입장을 증거하기 위해 모세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아들들 중에서 몇몇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영원하고 확실한 양자의 은총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모세의 말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자손을 에서의 종족과 구별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야곱의 후손 속에 내포되어 있던 교회를 예상하고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 백성의 일반 선택은 이 목적을 위해서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과 교회를 구별하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모세의 말을 특별 선택에 적용시켜 교회가 야곱의 자손에게서부터 연유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보았다 해서 부조리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지적된 하나의 사례가 두 민족의 두령이 될 자들의 처지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형은 간과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여호와의 외형적 음성에 의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상속자로 선택된 것입니다. 모세가 야곱에게서만 말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바울사도는 적당하게 확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민족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구별된 후에는 선택이 야곱의 모든 자손에게 무차별하게 귀속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들 있을까 염려하여 바울사도는 그 반대 입장에 서서 또 다른 말씀을 끌어들입니다.
즉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이 모든 종족 중 일정한 수효만이 하나님의 특별선택을 얻어 구원에 이르는 승리를 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현명하게 간취한 셈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형에게서 동생에게로 시조가 되는 영예를 이전시켰고 그것은 자기의 뜻대로 야곱의 자손에게서 자기를 위해 한 교회를 선택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선택은 인간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은총의 문제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모집하는 수단이 온 백성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께서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 목적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순수한 신앙으로 찾고 또 끝까지 보존될 일단의 무리들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 중 어떤 자는 망하고 흑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정해진 교리로써 존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모두 똑같은 특전을 갖지 않는다 해서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상황의 불균형은 한 사람의 덕성이나 다른 한 사람의 악덕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인류의 공통된 감정이 이런 교회를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는 하나님의 선택론을 명렬히 배격하는 예민한 자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의 중상을 논박하거나 악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바울 사도의 해석에서 내린 결론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같은 멸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저주 아래 놓여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는 무상의 자비에 의해서 구원되고 어떤 자는 합당하게도 그들의 파멸로 내버려집니다.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은 다른 자들보다 나을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거룩해 ‘지고자 함’ 을 예상해서가 아니라, 거룩해 ‘지도록’ 목적하신 조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결의 첫 근원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달려 있는 그 구별을 인간들에게서 찾는 일은 헛된 일입니다. 이 문제를 신비적으로 해석하고 싶다면 이렇게 말해 줄 주 있습니다. 많은 위선자들이 잠시동안 교회라는 회중에 들어서 공허한 권한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망령된 자랑에 빠져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에게 거만하게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내적 투쟁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어미 자신에게 괴로운 고통을 줄 것입니다.
5. 본문 24-26절은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입니다.
모세는 리브가의 모태에서 극렬한 투쟁이 해산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야곱이 자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먼저 나오려고 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는 이 표징을 통해서 자기의 선택의 효력이 즉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길은 온통 역경과 고생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이름은 그의 꺼칠꺼칠한 살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어린아이 시절부터 그를 사내다운 모습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름은 그 자랑스런 힘으로써 헛되이 싸우는 이 거인을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를 궁극적인 승리자로 만들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이것이 옛부터 교회의 이름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감사와 찬송과 순종이며 즐거운 헌신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