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예수 복음의 10대 요소/ 요한복음 5:39
설교자: 마경훈목사(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CdbQA2EjRYg&t=7s
성경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두 제자는 주님의 부활은 믿지 못하고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미련함과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구약의 모든 성경으로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로 충만합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는 오셔서 함께 하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유다서까지는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막 1:15.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신 후에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εὐ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입니다. 뜻은 복된 소식이고 기쁜 소식(good news)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복음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라고 합니다. 롬 1:2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세 시간에 걸쳐서 ‘예수 복음의 10대 요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써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복음을 잘 이해하고, 복음을 잘 믿으시고, 복음을 삶에 잘 적용하셔서 복음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 시간에 네 살 먹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은 내가 식사 기도할게.”, “네가? 그래, 해 봐라.”, “하나님 아버지, 너무 슬퍼요. 우리 아빠 때문에 슬퍼요. 엄마랑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 가는데, 아빠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 지옥에 가요. 아빠는 바보예요. 예수님을 믿으라 해도 안 믿어요. 너무 너무 슬퍼요….” 네 살 먹은 외동아들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이걸 구경만 하고 있던 아빠의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울지 마라. 다음 주부터 교회에 따라가 줄게.” 그래서 그 아빠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네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복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충만했으면 아빠가 천국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봐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겠습니까?
예수 복음의 10대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의 복음, 2. 초림의 복음, 3. 고난의 복음, 4. 부활의 복음, 5. 승천의 복음, 6. 처소 예비의 복음, 7. 공중 강림의 복음, 8. 지상 재림의 복음, 9. 천년 왕국의 복음, 10. 심판의 복음입니다. 오늘은 창조의 복음과 초림의 복음 그리고 고난의 복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창조의 복음
창세기 1:1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אֱלֹהִים’(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이라는 이 단어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단일복수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창 1:26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기에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께서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골 1:16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창조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더 믿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 1:3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빛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말씀으로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 갈릴리 건넜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타신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서 배에 물이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더러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동안 이렇게 말씀으로 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도 살리셨고, 말씀으로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셨고, 말씀으로 병든 자도 고치셨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그 상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세요. 그 말씀이 여러분을 살리고, 여러분을 세우고, 여러분의 문제에 대한 열쇠를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 107:20입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107편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려움에서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그 사람을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줍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창조 사역을 보면 예수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4입니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빛이 만들어졌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창 1:31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심히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 1:28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사람에게 복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렘 29:11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지고 계셨던 생각은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안과 미래의 희망을 주시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가장 확실하며 강력한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얼마나 좋은 마음을 가지셨으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겠습니까?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이 위대하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우리를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좋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2. 초림의 복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초림이라고 합니다. 마 1:23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요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 중에서 선악과 하나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람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이 세상에서 고난의 삶을 살다가 죽어서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구나! 자기 목숨을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확신한 만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눈높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완전히 거룩하시며 흠과 티가 없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수준으로 올라오라고 하신다면 과연 누가 예수님의 수준에 오를 수 있을까요? 한 사람도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마치 개에게 사람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아내는 가끔 천재견 뭉이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궁금해서 유튜브를 찾아봤습니다. 정말 똑똑합니다. 그 집에는 여러 개의 버튼이 있는데 그 개는 그 버튼들로 주인과 대화를 합니다. 뭉이는 버튼을 눌러서 주인을 부릅니다. “엄마”, “왜?”, “사랑해요”, “엄마”, “왜”, “간식주세요” 참 대단합니다. 그 방송의 출연자들이 뭉이의 행동을 보면서 계속해서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와~”, “오~” 사람들이 뭉이의 행동을 보고 놀라는 이유는 개치고는 똑똑해서입니다. 하지만 개가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의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개보고 사람 수준으로 올라오라고 하면 어느 개가 사람의 수준에 이르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찾아오셔서 사람의 눈높이에서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집에서 살게 되고,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림이 복음입니다.
3. 고난의 복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만도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셨던 무소부재하시고 영원무궁 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시공 안으로 들어오셨으니 성육신이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당하신 모든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벧전 2:21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면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까?
①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요 20:19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난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가장 먼저 평강의 복을 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적인 평화와 외적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어느 장로님의 간증이 잡지에 실렸습니다. 그 장로님은 평소 늘 전도하는 분이신데, 어느 날 택시를 탔습니다. 기사분이 젊은 나이인데 얼굴이 너무 어둡고 말도 퉁명스럽게 하더랍니다. 이야기를 걸어 전도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데,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자기는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이 있나 살살 달래면서 이야기를 걸었습니다. 마음이 서서히 열리며 자기 사연을 말하는데, 정말 자살할 생각을 가질 만했습니다. 큰 교통사고가 나서 누워있는데 부인이 도망을 갔답니다. 그리고 누님은 중풍으로 누워있어 대소변을 받아내야 되고, 여동생은 정신 이상으로 격리 수용되어 있어서 조금만 틈나면 면회 가서 돌봐줘야 하고..., 당장 죽고 싶어도 자기가 죽고 나면 누님과 동생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면 차마 자살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집 나간 부인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누님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동생의 정신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셨는지 솔깃해져서 말씀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 못가요! 먹고 살아야 되는데 시간이 있나요? 게다가 헌금할 돈도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은 교회 가고 헌금 하는 게 당연하고 좋은 일이지만, 교회 못 나가고 헌금 못 해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방송을 듣고 설교 테이프 들으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주소를 묻고 설교 테이프를 보내준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있는데, 멀리서 택시가 총알같이 달려와 끽~하고 서는 것입니다. 그 기사분입니다. 택시를 탔는데 영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모든 환경은 그대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마음이 왠지 기쁘고 평안하니까 너무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손님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때로는 예수 믿어도 주변 환경이 바뀌지 않고 문제가 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화되면 그 어떤 고난도 이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먼저 내적인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더딜 수 있지만 외적인 평화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②예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치료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벧전 2:24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몸이 아프신 분들은 이 말씀을 하루에 천 번씩만 해보세요. 믿음으로 고백할 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임갑열목사님은 강경화로 죽어가는 불신자 친척을 병문안 가서 하루에 천 번만 예수님을 찾으라고 권면했는데 그분이 그대로 실천했는데 갑자기 호전 되어서 병원에서 퇴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몸이 아픈 분들은 믿음으로 쉬지 말고 고백하셔서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③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로써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가난하게 사시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가난하게 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후 8:9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나를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음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딤전 6:17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우리는 재물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④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히 13:12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 되었고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미국 포틀랜드에 있는 한인교회의 장로님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는 포틀랜드에서 유명한 재벌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장로님이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자꾸 아파 병원에 가서 진단하니 골수염이라는 결과가 나왔답니다. 온몸의 뼈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썩어 들어가고 있는 양팔과 양다리를 잘라 보았자 몸통만으로도 조금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병을 진단한 의사는 친구였는데, 재벌 친구에게 팔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말을 못했습니다. “여보게, 별 병 아니니 마음 편하게 살아. 그저 먹고 싶은 것이나 먹으면서 돈도 좀 쓰면서 살게나.” 그리고는 진통제를 주면서 매일 한 알씩만 먹으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진통이 심해져 진통제 열 알을 먹어도 통증이 멎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그때서야 의사가 사실대로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의사 친구에게 “이 사람아, 1년만 더 살게 해 주게. 그러면 자네에게 내 재산을 다 주겠네. 1년만 더 살게 해 주면 자네에게 내 재산을 다 주겠네.”라며 애걸했습니다. 며칠 후,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재산을 다 주고 1년을 더 산들 무엇 하겠습니까? 다시 금방 끝나고 마는 게 인생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죽는 사람에게는 1년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얻은 구원은 1년 더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몽테스키외입니다. 몽테스키외가 여행을 하다가 배를 탔습니다. 뱃사공을 보니, 아직 어린 두 소년이었습니다. 몽테스키외가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형제냐?”, “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사공 노릇을 하느냐?”
형제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상인인 그들의 아버지가 아프리카 북쪽을 지나가다가 해적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돈 4천 냥을 보내어 주면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형제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돈이었지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낮에는 사공으로,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며 두 형제가 막 울었습니다. 그 형제의 효성에 감동을 받은 몽테스키외는 집으로 가서 그 형제에게 4천 냥을 보내어 주었습니다. 형제는 그 돈을 아버지가 노예로 있는 집에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노예로 있다가 구원 받은 정도가 아닙니다. 영원한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사탄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갈 3:13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속량은 ἐ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노예를 값을 지불하고 구해낼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고난당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를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고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 복음의 10대 요소’ 중에서 창조의 복음과 초림의 복음 그리고 고난의 복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복음을 잘 깨달으시고 복음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