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전후 일주일 동안 화룡현 이도구·삼도구 일대에서 아즈마 마사히코(東正彦) 소장이 지휘하던 일본군 주력부대를 맞아 白雲坪戰鬪를 시작으로 완루구·어랑촌·천수평·봉밀구·고동하 등지에서 벌인 대소 10여 회의 회전에서 독립군이 거둔 승첩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 최초의 전투인 백운평전투 교전지가 삼도구의 청산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곧이어 벌어진 여러 전투들까지도 ‘청산리’라는 지명으로 묶어 대첩의 이름으로 따오게 된 것이다. 간도를 침략한 일본군 가운데 청산리 일대로 들어온 東支隊는 용정과 무산 방면에 진출하여 安圖 남쪽, 和龍 북방에 위치한 天寶山에 주력을 두고 있었다. 독립군이 백두산록에 자리잡은 안도현이나 그 북쪽의 敦化縣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임무를 맡은 이 부대는 10월 20일을 기하여 야마타(山田) 대좌가 지휘하는 이른바 야마타聯隊를 선두로 독립군에 대한 소위 토벌작전에 들어갔다.470) 이에 따라 야마타연대는 두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는 삼도구에서부터, 그리고 다른 한 부대는 이도구 蜂蜜溝에서부터 각각 老嶺 방면으로 진출토록 하였다. 그리고 무산수비대 역시 石人溝를 거쳐 老嶺 방면으로 진출케 함으로써 대한군정서 독립군을 사방에서 포위하려 하였던 것이다. 한편 아즈마 마사히코 소장이 직접 인솔하는 주력부대는 이도구 서북방에 있던 홍범도 지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즉 아즈마支隊 주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그 가운데 한 부대를 천보산 방면으로 출동시켜 남하케 하고, 다른 한 부대를 이도구로부터 서진케 함으로써 독립군 연합부대를 앞뒤에서 포위 공격하려 한 것이다. 청산리 일대로 투입된 동지대의 병력 규모는 중화기로 무장한 정예기병과 포병을 포함해 약 5천명으로 추산되었다. 곧 이와 같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은 10월 20일을 기해 대한군정서 및 독립군 연합부대에 대해 총공격을 가한다는 작전을 수립해 놓았던 것이다. 이상의 작전계획에 따라 야마타연대의 주력은 20일부터 대한군정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삼도구에서 청산리를 향해 진군해 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군정서의 김좌진 사령관은 적과 대전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을 갖춘 백운평 고지에다 독립군을 전투편제로 이중 매복시켜 놓은 뒤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 이 때 대한군정서의 부대 배치는 2개의 ‘梯隊’로 이루어졌다. 우선 평소에 훈련이 적은 보병의 일부와 비전투원으로 제1제대를 편성한 뒤 총사령관 김좌진의 지휘하에 후방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사관연성소 졸업생으로 구성된 연성대를 중심으로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정예부대로 제2제대를 편성한 뒤 연성대장 李範奭의 지휘하에 최전선을 맡게 하였다. 교전지를 기준으로 우측 산허리의 1개 중대는 李敏華, 좌측 산허리의 1개 중대는 韓根源이 각각 지휘를 맡았으며, 정면 우측의 1개 중대는 金勳, 좌측의 1개 중대는 李敎成, 그리고 정면 중앙에는 이범석이 직접 지휘를 맡아 매복 대기하고 있었다. 독립군이 매복한 지점은 청산리 골짜기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은 곳이었다. 그 사이에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어 청산리계곡을 통과하는 단 하나의 오솔길이 나 있었다.475) 백운평의 독립군 매복지는 그 공지를 바로 내려다보는 깎아지른 절벽 위였다. 이민화 부대가 매복한 백운평 우측 지대는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 부대가 매복한 정면 우측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야마타연대의 전위부대인 야스카와(安川) 소좌 인솔하의 1개 중대는 독립군의 매복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21일 아침 백운평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이 독립군 매복지점으로부터 불과 10여 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근접하자, 김좌진 장군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600여 명의 독립군은 계곡 중앙의 공지에 다다른 일본군을 향해 일시에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일순간에 기습을 당한 야스카와 전위부대는 독립군의 매복지점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30여분 간의 집중공격 끝에 독립군은 200여 명의 전위부대 전원을 섬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야스카와전위부대의 전멸에 뒤이어 뒤따르던 야마타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과 山砲 등의 중화기를 앞세우고 백운평 교전지를 향해 돌격해 왔다. 그러나 주력부대 역시 절대적으로 우세한 지형를 확보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자 사상자만 속출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협공하기 위해 고지를 따라 돌격하면서 우회하였으나 절벽 위를 선점한 독립군의 화력를 당할 수가 없었다. 야마타연대는 최후로 부대를 약간 후퇴시켜 전열을 재정비한 뒤 산포와 기관총의 엄호하에 정면과 측면에서 마지막 돌격을 시도하였다. 독립군은 고지 위의 완전히 은폐된 지점에서 이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끝내 백운평에다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퇴각하였다. 결국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일본군 2∼3백명을 사살하는 공전의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퇴각하는 야마타부대를 추격하지 않고 이도구 방면으로 길을 떠나 밤을 새워 甲山村으로 행군하였다. 이도구 북쪽 천보산 방면에서 안도현으로 돌아 청산리로 침입해 오는 야마타연대의 별동 기병대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