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라헬, 현실은 레아(2)
창29:15~30
야곱은 어수룩한 형과 눈이 먼 아버지를 속여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안 형은 분노하며 야곱에게 이를 갈았다. 이런 사실을 안 야곱은 “걸음아 나 살려라”며 멀고 먼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쳤다.
야곱의 형편을 보자. 장래가 불안하다. 인간적으로 외롭다. 언제 부모님께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다. 장래가 불안한 사람, 인간적으로 외로운 사람은 잘 속는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속고 그다음에는 타인에게 속는다. 야곱이 그랬다.
외삼촌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 딸 라헬은 무척이나 예뻤다. 하루는 외삼촌이 야곱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야곱아. 네가 비록 내 생질이지만 어떻게 공짜로 일할 수 있겠느냐? 네 품삯이 무엇이냐”
야곱은 너무나 흥분되었다. “외삼촌, 라헬과 결혼을 시켜주시면 외삼촌에게 7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겠습니다”라고 제안했다. 당시에는 한 여성을 얻기 위해서 1년 동안 머슴살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야곱은 7배인 7년을 제시했다. 왜 그랬을까? 미쳤기 때문일까? 맞다. 야곱은 한 여자에게 미쳐있었다. 창29:20을 보자.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녀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7년은 문제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7년의 흐른 후 야곱은 꿈에 그리던 라헬과 결혼식을 올렸다.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만족스럽고 기뻤겠는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밤에 결혼식을 했다(마25:1~10). 꿀 같은 첫날 밤을 보낸 야곱이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다. 그 순간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옆에 누워있는 여인은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레아였기 때문이다. 7년의 수고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창29:16~17을 보자.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언니 레아는 “시력이 약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베에네 레아 라코트(וְעֵינֵי לֵאָה רַכֹּות)”라고 되어있는데 그 뜻은 “레아는 낙심케 하는 눈동자를 가졌다”는 뜻이다.
여성의 매력은 눈동자에 있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레아의 눈동자는 사람들을 낙심케 하는 눈동자였다. 어떤 눈동자였기에 그랬을까? 창29:31을 보자.
“여호와께서 레아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레아의 눈동자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히브리어 성경은 “쉐누아”(שְׂנוּאָה)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뜻은 “가증이 여긴다. 미워한다”는 뜻이다. 야곱은 레아의 눈을 볼 때마다 가증스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가증스럽게 여겼을까?
그러나 레아의 입장을 보자. 레아의 눈동자는 자기 잘못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부모가 그렇게 낳았으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삼상16:7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中心을 보느니라”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한다. 사람들은 껍데기를 보지만 하나님은 속을 보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셨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의 껍데기를 보지 않으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