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8
12월1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대림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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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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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Q18dSE5zuY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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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일의 회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은 수석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 시대 당시 로마 식민통치 하에서 비록 제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나름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관리, 각종 제사 의식 등을 감독하였으며 속죄의 날에는 속죄 제사를 거행했고 국정 전반의 중차대한 사항에 대해서 자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장 ‘가방끈’이 긴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나름 한 가닥씩 했던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깜짝 놀랄만한, 순식간에 심각한 구설에 오를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토록 강경한 예수님의 발언의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체화하고 있는 하느님 구원 사업,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도래 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 앞에서도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는 그들의 완고함과 경직됨을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 하고 잘 대답해놓고서는 포도밭으로 가지 않는 둘째 아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공부했고, 율법의 규정을 목숨처럼 중요시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무척이나 경건했으며, 생활도 굉장히 올바르고 정직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도래 이후 과거의 율법이 폐기되고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사랑의 율법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향수에만 묶여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외치고 부르짖어도 새로운 세상에 부합되는 새로운 사랑의 율법에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 그들은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비록 그들의 먼젓번 삶은 꽤나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율법에 어긋나는 생활이었고 그들 하루하루의 삶이 곧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되는 회개에로의 요청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크게 가슴을 쳤고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삶을 180도 바꾸기로. 대표적인 인물이 마태오요 자캐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활짝 마음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요 친구로 거듭납니다. 그간 착취로 모았던 막대한 돈뭉치는 동족들에게 과감히 되돌려줍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깜짝 놀랄 선언을 공개적으로 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요청에 언제라도 순종하고자 노력하는 적극성입니다. 내 인생을 내 뜻대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와 그분의 뜻에 맡기고자 하는 개방성입니다.
1년에 한번, 6개월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일상적으로 하느님께로 돌아서려는 항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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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UNeWaFv_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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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느님 뜻을 그냥 따르면 되지 굳이 요한을 만나서 그가 알려주는 방법을 믿고 따라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하느님 뜻을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이 무엇일까요?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발라져야 하고 살이 먹혀야 하는 운명입니다. 곧 이스라엘 집과 살과 피로 하나가 되는 운명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합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서는 율법, 곧 하느님 뜻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힘으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느님 뜻이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행위를 중요시하는 유다인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이 요한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스윙댄스의 대표주자인 김잔디 씨 이야기입니다. 스윙댄스는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악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내 몸으로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작정 배우면 될까요? 김잔디 씨는 처음에 남성들과 경쟁하는 업체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잘나가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여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친구는 몸치, 박치였던 잔디 씨를 믿어주며 “얘는 챔피언이 될 애예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거의 남성 혐오증에 시달리던 잔디 씨는 남성들과 땀을 흘리며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하는 스윙댄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믿음, 또 자신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3년 동안 댄스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증명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어 한 마디도 못하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윙댄스 대회에 참가합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복장도 있어야 하고 준비된 음악과 남성 파트너, 그리고 잘 짜진 안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자신과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납니다. 그 미국인은 김잔디 씨가 어떤 복장의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박자를 원하는지 딱 두 개만 묻습니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자신도 청바지를 입고 키 작은 김잔디 씨를 자기 코트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무작정 무대로 던져버립니다. 얼떨결에 무대로 튀어나온 김잔디 씨는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춥니다. 그리고 첫 국제대회에서 1위를 수상합니다.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려면 먼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체력장 5급 받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그랬고 처음 자신에게 용기 있게 춤을 춰 달라고 해도 믿어주고 함께 맞춰주었던 키다리 아저씨도 그러했습니다.
10년 차 때 돈이 안 되는 이 춤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90세가 넘은 스윙댄스의 전설인 노마 밀러라는 키 작은 흑인 댄서의 말도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며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자기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없으면 무아지경, 곧 나를 버리고 노마 밀러가 되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교회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서는 토르는 헬라라는 엄청난 힘을 지닌 여왕과 싸웁니다. 헬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토르를 압도합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가 망치를 부수어버립니다. 토르는 망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망치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기 망치에 의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헬라는 말합니다.
“나는 죽음의 신이다. 너도 무슨 신이긴 했었지?” 그런데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망치의 신이었냐?” 토르는 사실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망치는 그저 그 힘을 제어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내 안에 계신 바로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총으로 나와 하나가 되시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각성하게 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가능한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은총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말씀이 되어야 하느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채로, 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신 채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면 엘리사벳에게 어떤 도움이 되셨을까요? 인간적인 도움을 되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 곧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드시는 그런 도움을 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이 노력으로 하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실을 그저 자기암시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레베카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을 감당한 능력이 있음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일하게 할 때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되어야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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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시각과 청각 장애를 겪으면서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는 만년을 술회하기를 “나의 인생은 아름다웠노라.”라고 했습니다. 반면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던 나폴레옹은 말년을 술회하기를 “내 일생을 통해 행복했었던 날은 엿새밖에 없었노라.”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능력으로 얻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뇌종양에 걸린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수술로 혹을 제거할 수 있지만 시력은 상실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신부님을 찾아가서 아이에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숨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찾아갔고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머리에 있는 혹은 없어질 거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너에게 시력(sight)을 가져가실 거란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통찰력(insight)을 주실 거란다.” 수술이 잘 끝났고, 아이의 부모님은 신부님께 다시 한 번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붕대를 풀지 않고 검은 안경을 쓰고 있던 아이를 부르자 아이는 신부님께 달려오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제게 시력을 가져가시고 통찰력을 주셨어요.” 아이는 신부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헬렌 켈러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불가능이 없다고 자신했던 나폴레옹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너희는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2022년을 보내면서 제게도 몇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물을 마시면 이가 시렸고, 음식을 먹기가 불편했습니다. 치과에 가보니 어금니 하나가 금이 갔다고 합니다. 60년을 함께 했으니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은 임플란트와 크라운 중에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했던 어금니가 고맙기도 했고, 가능하면 살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신경치료와 함께 크라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면역력이 약해졌는지 몸의 몇 군데에 포진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서 연고를 바르고 쉬니까 좋아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제게 잠시 쉴 기회를 주셨습니다. 산보가 유일한 운동인데 조금 지나쳤는지 발목이 저렸습니다. 매일 일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걸었더니 몸에 무리가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급한 저의 성격을 아셨는지 적당히 산보하라고 신호를 주셨습니다. 주변에서 신부님들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끼고 다니던 묵주반지를 포진 때문에 잠시 빼놓았습니다. 다시 반지를 찾으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놓았던 책상에도 없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도 없었고, 혹시나 해서 침대 아래를 보아도 없었습니다. 신문사에는 없었습니다. 매주 가는 브루클린 성당의 사제관엘 가보았습니다. 그곳 세면대 옆 테이블에서 묵주반지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되찾은 묵주반지를 통해서 묵상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축일입니다. 루치아는 ‘빛,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통찰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면 우리는 루치아 성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듯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눈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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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가 바빠서인지, 듣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성탄’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맘때면 성탄을 떠올리는 노래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고요한 밤, 화이트 크리스마스, 징글벨, 경사롭다.’ 주님의 성탄은 곧 다가오는데, 바쁜 일상 때문인지 다들 무심하게 보내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교구청에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당에 있으면 이 무렵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김장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본당 달력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성사표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판공을 보기도 하고, 성가대는 성탄미사곡 연습을 하고, 아이들도 성탄 연극을 준비하기도 하고, 노인대학, 레지오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도 여기저기 참견을 하며 성탄의 분위기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어제, 오늘 신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에 대한 ‘면접’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요구하는 ‘성적’을 받은 학생들을 면접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교리 시험 준비를 잘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성적이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과의 면접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인성이 좋지만 성적 때문에 신학교에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준비하도록 권하기도 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쉽게 작년에 지원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올해는 좋은 성적을 얻은 친구를 만나면 마치 제가 그런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저의 성격에는 잘 맞지 않는 일이기에 매번 ‘면접’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과 실기시험 그리고 연수를 통과해야 하듯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 또한 적절한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하기에 매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본당 출신이지만 한 학생은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고, 다른 학생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기에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준비해서 내년에는 함께 신학교에 다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의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생각은 실천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명의 발달이 되었고, 이것이 역사가 되었고, 이것이 생존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
발효와 부패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발효의 과정에도 냄새가 나고, 음식이 상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발효된 음식은 더 오래 저장할 수 있고, 새로운 영양을 제공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으로 변화됩니다. 부패는 그 과정이 발효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부패된 음식은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 식중독에 걸리기도 하고,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오래되어 곰삭은 ‘묵은지, 된장, 간장’은 그 맛이 특별하고, 우리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부패하지 않고 발효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많이 배운 것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율법과 가까이 있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는 일의 직책에 따라서 더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키면 그 신앙은 성장하고, 은은한 영성의 향기가 이웃들을 기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겉이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의식과 마음이 부패하면 하느님께로 나갈 수 없습니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 보여도,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변화되면 주님의 정원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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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28절)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현세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맏아들은 “싫습니다.”(29절) 하였지만, 나중에 일하러 갔다. 아버지 앞에 “싫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과 그분의 정의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교인들의 모습과 같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싫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정의를 실천하러 포도밭으로 간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30절) 작은아들로 묘사되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와 세례자 요한에게 지시를 받았을 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 거짓말을 했다.
“이 둘 가운데에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 라는 물음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31절) 대답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이 비유의 뜻을 자기들한테 불리하게 해석하고 만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 맏아들은 다른 민족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하신다.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라고 하신 적이 많다. 우리도 잘못 살면 주님께 그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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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논쟁은 오늘 복음에서도 이어집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 21장 25절에서 언급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쟁점이 31ㄴ-32절에서 반대자들을 꾸짖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어제와 오늘 복음을 나누어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였는데, 그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과 그를 파견하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과 하신 논쟁에서 비유 하나를 소개하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한 부류는 특권적 지위에서 그에 따르는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런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소외 집단 가운데 대표적으로 세리와 창녀가 후자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를 전자에 속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하면서 그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소개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리와 창녀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각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우리는 ‘맏아들’에게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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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부정보다는 긍정이 낫다.>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부정과 긍정의 태도와 긍정과 부정의 태도를 비유로 말씀하시며 오묘한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부정적 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긍정적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시작은 부정적이지만 긍정적으로 행동한 아들과 시작은 긍정적이지만 부정적 행동을 해놓고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큰아들입니다.”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주님은 우리는 내가 이 일을 왜 하여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품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저 하루 있다고 서슴없이 행하려는 사람과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적 태도는 근거 없이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행동의 근거를 찾아 철학적 사고를 통해 행동하고 인간의 약점을 알고 극복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며 긍정적 태도는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자기 능력이 자신을 모르고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맹신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긍정적 사람보다 부정적 사람이 변화를 시킵니다. 해야 할 일을 알고 하는 사람과 그저 믿음으로 덮어놓고 시키는 일에 광신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창녀들과 세리들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살고 자신의 비천한 처지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나 겸손하게 가난한 마음으로 부정적 생각을 벗어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고 남을 가르치고 사랑하라고 하지만 자기들은 하지 않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미사 끝에 복음을 전하시오 하지만 미사 끝에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자기 위치만 지키려 하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회적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가져갑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다른 이들을 위하여 봉사 나눔 친교를 하지 않으면 작은아들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도 비록 처지는 힘들어도 남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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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함께 길을 걷는 사랑하는 벗에게>
마태오 21,28-32 (두 아들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함께 길을 걷는 사랑하는 벗에게>
함께 길을 걷는
사랑하는 벗이여
이리 함께 걸으니
얼마나 좋은가
바른 처음에서
바른 끝까지
바른 길
기꺼이 따라나선
그대와 나
서로의 길이 되어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더이상 그 무엇을
우리 바랄 겐가
그러니 우리
하나가 멈추면
힘내라고
북돋아 주게나
그러니 우리
하나가 뒷걸음치면
정성스럽게
이끌어주게나
그러니 우리
하나가 곁길로 가면
제 길로 오라고
다그치게나
그러하여 우리
처음부터 끝까지
부풀리지 않은
순결한 발걸음으로
덧칠하지 않은
깨끗한 발걸음으로
무디어지지 않은
굳건한 발걸음으로
흐트러지지 않은
올곧은 발걸음으로
부르신 길 잇는
따르는 길이 되게나
함께 길을 걷는
사랑하는 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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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의와 불의>
모든 사람 안에는 정의와 불의가 함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정의만을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불의는 감추고 자신의 정의는 드러내려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불의마저 정의라고 강변합니다. 정의는 명예이지만 불의는 수치임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자신이 불의가 아니라 자신이 정의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자신의 불의를 정의라고 강변한다고 자신의 불의를 애써 감춘다고 자신이 정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가슴 찢으며 자신의 불의를 고백하고 뼈 깎는 고통으로 자신의 불의와 단절할 때 정의로 자신을 채울 수 있습니다.
수석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 정의와 불의를 한 몸에 지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수석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 자신의 불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정의만을 강변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 자신의 정의마저 숨기고 자신의 불의에 속죄의 눈물 흘렸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 수석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수석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 나는 누구인지 묻습니다. 믿음의 벗님들은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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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을 들어라>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였을 때 말을 들은 사람은 포도밭에 가서 일한 사람입니다. 대답은 하고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그러므로 언제나 삶으로 말하십시오. 사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소위 한자리하는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한 말씀은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라는 요한의 말을 들었고, 들은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내로라하는 사람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부름은 주어졌고,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이들은 받아들였고 똑똑한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끝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아는 게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29-30)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이상 하늘 문은 늘 닫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루치아 성녀는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고 결혼준비로 장만한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루치아를 취할 생각을 하고 있던 귀족은 이것에 분개하여 그가 가톨릭 신자임을 밀고하여 재판정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 서서 “성스러운 신앙을 지닌 순결한 마음속은 곧 성령의 궁전입니다.” 하며 꿋꿋이 믿음을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치아 성녀의 상본은 ‘쟁반에 두 눈이 담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루치아의 이름은 광명, 또는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데 그 빛을 말합니다. 루치아가 신앙의 빛이 되었듯이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맑고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먼저 회개의 요청에 응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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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봉사팀이 티베트 오지 마을로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그곳 어린이에게 방한용품, 의류, 생필품 등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물품을 준비하던 중에 한 여학생이 막대사탕을 사자는 것입니다. 팀원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 돈으로 다른 유용한 물건을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 이 여학생은 사비를 털어 막대사탕을 사서 갔습니다.
이 오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의류와 생필품, 그리고 방한용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여학생이 사비를 털어 준비한 막대사탕이었습니다. 의류, 생필품, 방한용품을 받고서는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막대사탕을 받아 사탕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을 때까지 계속 웃고 있는 것입니다. 막대사탕으로 추위를 피할 수도 없고 또 굶주림을 해결하지도 못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는 모든 봉사자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만 있으면 그만일까요?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행복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행복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두 아들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맏아들은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말에 싫다고 하고서는 마음을 바꿔서 일하러 가고,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냐고 하면 당연히 맏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맏아들 같은 이가 세리나 창녀라는 것이지요. 그들의 처음 모습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당시 종교 지도자인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로만 할 뿐 행동으로는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만 주시는 하느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강조하신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맏아들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다른 아들의 모습인가요? 세리나 창녀의 변화된 모습인가요? 아니면 변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인가요? 지금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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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귀와 입은?>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오늘 독서는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고, 복음의 주님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아들의 비유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주시며 이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꼬집으십니다.
반면에 그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한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일까 생각하게 되는데 문득 훈장 기질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저를 많이 반성하는 것이 바로 훈장 기질인데 훈장 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가르치는 것이 기질이 되어버려 노상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훈장 기질이 나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르치려고 드는 것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나쁩니까?
제 생각엔 가르치려고 드는 것보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쁜데 특히 오늘 주님의 나무람과 관련지어 보면 듣지 않는 것이 더 나쁩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하느님 말씀까지 듣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훈장 기질의 사람은 가르침을 줄 사람하고만 상대하지 가르침을 받을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가르치는 것만 좋아하지 가르침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르침도 잘 받고 가르치기도 한다면 그것을 훈장 기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르침을 잘 받아 잘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나 성인들은 훈장 기질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먼저 실천하고, 들은 것을 이웃에게 전달하거나 나누는 분들이지요.
사실 그들의 귀와 입은 다 하느님의 귀이고 입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귀와 입을 자기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귀와 입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않으며 자기를 내세우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가르치고 명령만 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나무라시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공자는 나이 예순이 넘으면 耳順 곧 귀가 순하고 착해야 한다고 하고 칠십이 넘으면 從心所欲不踰矩 곧 욕심 자체가 하느님 욕심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전보다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점점 더 잘 실천하는 저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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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빛나라!”>
-루멘체치스(Lumen Caecis;맹인에게 빛을!)-
-만나라! 초연하라! 기뻐하여라!-
오늘은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입니다. 루멘체치스, 맹인에게 빛을! 바로 우리 연합회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선교 수도원의 특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눈떴다 하나 무지에 눈먼 영적 맹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함으로 눈이 열려 주님으로 빛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빛이신 주님과 만남뿐입니다.
이 모토의 기원은 성녀의 생애에 기인합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성녀는 673년 레겐스부르크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중에 바른 성유가 그녀의 눈에 닿자마자 눈이 열려 시력이 온전하게 되는 기적이 발생합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겪은후, 성녀는 두 번째로 세운 니더뮌스터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고 수녀원 옆에는 신자들을 위한 병원도 세웠습니다. 여기서 성녀는 아버지의 변화에 기뻐하며 남은 생을 봉사하며 지내다가 720년 선종해 몽생트오딜 수녀원에 묻힙니다.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맹인들, 그리고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침내 교황 비오 7세는 공식적으로 오딜리아 성녀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그후 성녀가 살던 몽생트오딜 수녀원의 샘물은 눈병을 치료한다고 여겨지면서 샤르트르와 루르드와 함께 프랑스의 유명한 순례지가 됩니다. 그러니 “루멘체치스”(맹인에게 빛을!)는 그대로 성녀의 삶을 요약할뿐 아니라, 우리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 선교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모토가 됩니다.
오늘은 성녀 오딜리아와 더불어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빛을 의미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성녀 루치아는 313년경 순교했으며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도 받았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녀 루치아는 이름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동정순교자로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으니 성녀 오딜리아와 아주 흡사합니다.
똑같은 날 축일을 지내는 두 성녀에게 이름을 붙여드린다면 오늘 강론 제목 그대로 “빛나라!”가 되겠습니다. 지난 토요일 아름다운 본기도가 생각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히시어, 밤의 어둠을 모두 몰아내시고, 외아드님께서 오실 때에 저희가 빛의 자녀로 드러나게 하소서.”
성녀 오딜리아와 성녀 루치아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의 대림시기 “빛의 자녀”로 “빛나라!”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시기 바라며 그 구체적 처방을 나눕니다.
첫째, “만나라!”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언젠가의 결정적 만남에 앞서 매일 우리를 찾아 오시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에서 주님과 만남의 그때를 오늘 여기서 지금 앞당겨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도와줍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전인적 치유입니다. 우리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우리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는 몸도 어둡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온몸이 환하면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우리를 비출 때처럼 우리 몸이 온통 환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그대로 빛이신 주님과 만남을 통해 이뤄짐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순수요 마음이 밝을 때 눈도 몸도 저절로 밝아지기 마련입니다. 마음의 치유에 이어 눈도 몸도 치유되어 온 마음이,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초연하라!”
오늘 제2독서 코린토전서에서 바오로는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수 있도록 독신을 권하는 경향입니다만 중요한 본질적인 것은 삶의 초연함입니다. 기혼자든 미혼자든 삶에 애착하지 말고, 무집착의 이탈의 초연한 삶, 지유로운 삶, 종말론적 삶을 살라는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아픈 사람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쪽같이 평범한 일상에 지극히 충실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세상 것들의 무시가 아니라 오히려 욕심을 비운 초연한 마음일 때 내적자유를 누리며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인 세상 것을 소중히 여기고 선용하며 이탈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12월6일 영성체 후 기도 중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대목도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셋째, “기뻐하여라!”
빛의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초연한 삶, 지혜로운 삶, 자유로운 삶에 저절로 샘솟는 순수한 기쁨입니다. 순수한 마음의 샘에서 샘솟듯 순수한 기쁨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전반부가 이런 주님과 만남에서 오는 기쁨을 쏟아냅니다. 기쁨은 힘이자 빛입니다. 기쁨의 빛입니다. 저절로 두려움은 사라지고 빛으로 충만한 삶, “빛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 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주님을 만날 때 초연함과 더불어 샘솟는 순수한 기쁨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 평생 만나야 하는, 살아 계신 빛의 주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온몸과 온 맘을 빛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초연한 삶, 기쁨으로 빛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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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21,32)
오늘 복음(마태 21,28-32)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두 아들 중 '맏아들'은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는 아버지의 말에,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하지만 또 다른 아들은 아버지 말에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둘 가운데 마음을 바꾸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맏아들의 모습을 비유로 드시면서,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부족함을 지적하십니다. 반대로 세례자 요한의 말을 믿었던 세리와 창녀들의 모습을 칭찬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회개'였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시니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고 있었던 기득권 세력들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학대받고 있었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두 부류'만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회개하는 일'입니다. 어제의 부족함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오늘 내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 회개가 참으로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내가 이제와 영원히 살고 싶으면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내이시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는 '인내'이시옵니다. 이런 하느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주님께 돌아가려고…. 어제와 내일은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오늘 회개하려고, 함께 노력해 봅시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루치아(루시아/빛.광명)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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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XHoaIy8pl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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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 32)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는
믿음입니다.
믿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향할 곳은
믿음이라는 삶의
포도밭입니다.
포도밭은 치열하고
믿음은 치열한 삶을
다독입니다.
믿음의 포도밭에는
오직 믿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바꾸는
우리의
회개를
원합니다.
믿음의 핵심은
그래서 회개입니다.
회개하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교회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선물은
회개와 실천이라는
복음의 선물이었습니다.
믿음은 특정한 계층의
소유물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풍요로운
관계입니다.
관계에 충실해지는
삶이란 회개로
다시 하느님을
향하는 삶입니다.
삶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회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진실되고
회개는
그릇된 삶을
바꾸는 기쁜
실천입니다.
믿음은 기쁨을
향합니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가르쳐 줍니다.
기쁘게 생각을
바꾸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은
빛을 향하는
생활의 변화입니다.
믿으면
믿을수록 깊어지는
회개이며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더 기뻐지는
기쁨의 삶
빛의 삶입니다.
믿음의 빛은
어둠을 밝히며
포도밭을 밝힙니다.
빛에 감사하는
회개의
오늘입니다.
뜻과 실천은
다시 포도밭을
기쁨으로
영글게 합니다.
기쁜 믿음
기쁜 대림
기쁜 회개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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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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