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율례와 법도를 통해 말씀하신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수많은 백성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앞에 줄을 서있는 것이었다. 모세도 백성도 너무나도 지쳐보이고 힘겨워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고 있는가? 거의 두달째 이러고 있는가보다. 그래서 이드로는 모세에게 이들이 하루종일 줄서있는 이유에대해 물어보았다. 모세는 이웃과 선악간에 판단을 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판을 하고 그분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광야에서 모세는 율법학자였고 재판관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율법대로 재판을 받고 율법대로 사는 것이 광야에서 요구되는 삶이었다. (출18:14~18)
2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가 리더이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할 수 없다. 반드시 동역자가 필요하다. 이때 이드로가 조언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자를 리더로 세우라고 말한다. 여기서 리더의 기본 소양인 진실함은 거짓말하지 않고 진리에 서야함을 이야기 하며, 불의한 일은 탐욕스럽게 얻거나 돈에 몰두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을 미워하는 즉, 원수같이 여기고 가증히 여기는 자여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토라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일하시는 이때 우리가 준비되기 위해서는 진리위에 서서 돈에 몰두하지 않고 몰두하게 되는 것을 가증히 여기는 기본 소양이 필요하다. 이러한 리더들이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분의 가치관으로 세우기 위한 꿈을 더 빨리 이루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건 우리가 얼마나 준비되었느냐에 있다.(출18:18~22)
3 아브라함도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
모세가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조언한 것은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기 전이다. 율법을 받기 전에 어떻게 모세가 율법을 알고 가르쳤을까? 사실 율법과 계명은 모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써서 주시는 성문으로 받음으로서 실질적으로 가르쳐지기 시작한 것이 모세때이다. 성문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더해지고 빠질 수 있으므로 기본이 보는 성문은 중요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브라함에게 있다. 우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그 믿음은 쉐마의 믿음이었다. 즉,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여호와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는 믿음이었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창26:5 22:18)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누구에게 배웠을까? 야샬의 책을 보면 멜기세덱인 셈에게 배웠고 셈은 무드셀라에게서 무드셀라는 휴거한 에녹에게서 에녹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주시기도하고 아담에게서도 배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태초부터 있었다. 첫째날 빛이 있으라하실 때 이미 빛이신 말씀이 있었고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는 율법이며 그대로 사심으로 증명하신 분이 예슈아시다. 그래서 예슈아처럼 진리대로 사는 것이 부활의 복음이다.
4. 왜 셋째날을 기념하지 않는가?
광야에서 삼개월이 되던 날 시내산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장막을 치고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갔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지킬 맘이 있는지 먼저 물으라고 하셨다. 모세가 '준행하겠다'는 백성의 대답을 가지고 다시 여호와께 갔을 때 모세에게 셋째 날을 기다리라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셋째 날에 직접 창조하신 세상에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셋째날을 위해 몸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라고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방문하시는 그 날에 산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거라고 경고하신다. 이렇게 중요한 셋째날을 왜 지키지 않는걸까? 왜 여호와께서는 7번째 날 만나자고 하지 않으신 걸까? 그 이유는 삼개월이 되던 날에 힌트가 있다. 여기서 개월의 원어는 월삭, 달의 시작이다. 그러나 삼개월이라고 번역함으로 만 삼개월이라고 오해하여 더욱 절기와 연결할 수 없었다. 유월절부터 계산하면 월삭부터 5일후가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셋째날이 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여호와의 질문을 가지고 내려가고 지키겠다는 대답을 가지고 다시 올라가는 2틀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셋째날은 오순절을 말한다. 오순절은 안식후 첫날 즉, 초실절이고 부활절이기도 한 당일부터 세서 50일째 되는 날이다 이 처럼 오순절을 지키면 여호와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토라를 주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출19:1~18)
5. 여호와의 강림하심을 누가 견디겠는가?
쇼파르 소리가 점점 커질때 여호와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부르시고 백성에게 시내산에 올라오지 말라고 경고하게 하시며 제사장들은 몸을 성결히 하고 산에 경계를 세워 아무도 못 올라오게 함으로 산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우린 거룩함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분리하는 것이다. 경계를 세워 분리하는 것이고 다른 때와는 다르게 씻고 정결한 몸으로 그 날을 맞이하는 것이 거룩함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씻어도 그분의 거룩함 앞에서는 죄인이고 더럽기에 우리의 육체로는 그분을 대면할 수 없다. 한없이 죄인인 우리에게 왜 직접 방문하셨을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지만 더럽힌 인간에게 왜 굳이 오셨을까? 왜 그냥 모세에게 주지 않으셨을까?
6 왜 여호와께서 직접 강림하셨는가?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모세를 영원히 믿게 하기 위함이다.
두번째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범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주신 것이 계명과 율법이다.(출19:9,19-20)
우리에게 모세에 대한 신뢰가 아직 있는가? 모세의 말을 청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끝났다고 믿는가? 범죄해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가?
7 범죄하지 않도록 주신 것이 율법과 계명이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것은 율법과 계명이 써있는 돌판을 주셨다. 이유는 백성에게 가르쳐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출24:12 요일3:4)
우리는 혹시 계명과 율법을 너무 열심히? 지키는것을 죄라고 생각하진 않는가? 열심히 지키는 것은 무엇이고 대충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기준일 때 우린 그것을 인본주의라고 부른다.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가 맞추는 것이지 그분이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반율법주의는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
속지마라.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너무 열심히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사람의 전통을 너무 열심히 지켜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슈아께 책망을 들은 자들이었다. 심지어 지옥에 간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증언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특정 행위에 치우쳐 육체를 자랑하므로 책망했으나 율법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것을 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8 내 백성아 내 율법을 들으라
광야에서 훈련받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법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법도이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틀릴 수 있으나 아버지의 판단은 진리이고 공의이며 영원하다. 우리에게 광야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판단의 법도를 배우고 그분을 신뢰함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다. (시78:1) 쉐마도 계명을 주신 후 하신 말씀이다. 쉐마라는 말은 아는데 무엇을 쉐마하라는 말씀인가? 바로 계명과 율법을 청종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쉐마가 온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는 방법이다.(신6;4)
9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위에 임하신다.
여호와께서 이 땅에 거하시기 위해 지은 장소가 있다. 그건 성전이며 성전중에서도 지성소이며 지성소중에서도 증거궤위이다. 증거궤안에는 시내산에서 직접 오셔서 주신 두 돌판과 계명이 있다. 우린 이러한 하나님 앞에 약간에 당혹감이 생긴다. 왜 굳이 장소를 정하셨을까? 그냥 우리 마음에 오시면 되지 않는가? 물론 그런 날이 오긴 한다. 장소가 필요없는 날, 왜냐하면 모든 곳이 지성소가 되므로...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까 시내산처럼 구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죄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그분에게는 아직 성소가 필요하다. 성소가 필요없을 때에는 우리의 육체가 폐하여진 영원한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왜 굳이 십계명과 맛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있는 증거궤 위일까? 아론의 지팡이의 뜻은 레위지파의 직분이 영원히 폐하지 않는다는 언약이다. 만나는 명령들을 준행하는지 하늘의 양식으로 시험하셨다. 또한 이제는 하늘 양식으로 사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명과 율법위에서 만나기 원하신다. 구원과 영원한 직분과 명령들... 그것이 증거가 되는 곳에서 만나시기 원하신다. 그곳에 그분께서 임하시는 곳이다. (출25:8)
10 샤밧은 여호와의 영원한 표징이다
안식일은 인자의 것이다. 그러나 인자를 위해 주신 날이라는 뜻이지 인자가 마음대로 안지켜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안식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분은 따로 있기 때문이고 창조자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창조주의 것을 감히 폐하고도 괜찮다고 말한다면 그게 신성모독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 여호와께서는 마치 샤밧을 폐할 무리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아신 것 처럼 그리고 샤밧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하시는 것 처럼 반드시 죽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두 문장에 세번이나 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돌판에 친히 쓰신 여호와와 그 백성사이의 영원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셨다. 샤밧은 여호와의 표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표를 입는 것은 샤밧을 사는 것이고 절기를 사는 것이다. 즉,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샤밧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의미로만 샤밧이 중요하다 말할 수 있다. 육체를 구별함이 없이, 날을 구별함이 없이 마음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날에는 우리가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분께서 진리대로 평가하신다. 그분께서 마음만 보실까? 육체만 보실까? 함께 보지 않겠는가?(출31:13-18)
11 의로운 규례와 진리인 율법과 선한 계명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주신 것은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이다. 원어로 보면 의로운 규례와 진리인 율법과 선한 계명이다. 우리가 의로움을 폐할 수 없고 진리를 폐할 수 없고 선하심을 폐할 수 없는 것처럼 율법과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지키는 것이 세우는 것이고 지키지 않는 것이 폐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안식일을 주셨다. 우린 어느날을 지켜도 좋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샤밧을 지키지 말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거룩함은 구별함이다. 6일과 7일째를 구별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며 광야에서 샤밧을 가르치기 위해 친히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들은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선한 영인 성령을 주셔서 그들에게 율례를 가르쳤다. 선한 영이 선한 율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시말해 아버지의 영이 아버지의 율례와 계명을 지키게 하는건 당연하지 않겠는냐 말이다.(느9:13~20)
12 성령은 생명을 주는 법으로 살게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왜 정죄함이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 자세히 말하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므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성령님만 따르면 율법의 요구가 저절로 이루어지므로 율법을 지키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우선 1절에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가 있다. kjv영어 성경을 보면 이제는 그리스도 예슈아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데 조건이 있다. 육체를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예슈아 안에 있는 자이다. 이런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 갈라디아서에 이미 육체의 일이 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자를 정죄하지 않는 이유는 생명을 주는 영의 법이 죄로 사망하게 하는 법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냈기 때문이다. 즉, 불순종으로부터 건져낸 것이고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에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율법으로부터 건져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린 성령을 통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순종하게 됨으로 율법에서 말하는 의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에서 요구는 원어로 의로움, 공의를 뜻한다.(롬8:1-4)
13 탐심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이 강처럼 흐르게 하셨다. 그럼에도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리의 먹거리를 해결해 주실 수 있겠냐? 빵을 주시겠냐? 고기를 주시겠냐?라며 탐욕의 마음을 가졌다. 여호와께서 그때마다 반석에서 물을, 만나를, 메추라기를 주셨으나 이들은 여호와를 믿지 않았다. 여기서 배반하다의 뜻은 불순종하다. 거역하다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그분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를 배반하고 모든 것을 불평하고 그분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그들이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가 계신 것이 아니기에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없다. 여기서 버리다는 히브리어로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즉 욕심으로부터 이방인이 되지 않아서... 다시 말해, 이방인과 같은 욕심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고 그분이 원하시는 거룩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시78:16~30)
14 이방인의 탐심이 무엇인가?
눈은 우리 몸의 등불이다. 그런데 이 빛이 어두어지는 이유가 있다 그건 두 주인을 섬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 주인에게는 소홀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주인은 재물이다. 그럼 재물을 어떻게 섬긴다는 것인가? 우리가 뭐 돈에다가 절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기서 섬기는 의미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염려하는 사람은 이방인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감사하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인 계명과 율법을 구하고 찾을때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 더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요셉의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마6:22-33)
15 율법을 버리면 악인을 칭찬한다
지혜의 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율법을 버린자는 악인을 칭찬한다. 율법을 버린 자의 뜻은 율법을 없이 만들거나 거절한 자를 말한다. 성경은 언제나 순종 아니면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버린자라는 뜻은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가르침을 받았든지 심지어 완성했으므로 안지켜도 된다고 속았든지 결론적으로 불순종한다면 그는 율법을 버린 자이다. 잠언은 율법을 버린 자는 의인을 칭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악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그러나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면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자이다. 율법을 준행하는 것과 음식을 탐하는게 무슨 관련이 있어서 이렇게 대조적으로 썼을까? 율법의 반대는 탐심인가? 원어를 살펴보면 음식을 탐하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 제어하지 못하고 먹는 대식가등의 뜻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해이하여 방종하는 사람으로 번역하는 게 더 가깝게 보인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는 지혜로우나 방종하는 자는 부끄럽게 하는 자다. 또한 율법을 듣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가증하다고 말한다. 율법을 쉐마하지 않는다면 그의 기도는 가증하다. 가증하다의 뜻은 우상숭배, 가증한 관습, 구역질 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법도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법도를 버린 기도는 우상 숭배이고 가증할 뿐이다. 이방인의 탐욕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섬기는 것이다. (잠28:4,7,9)
16 이방인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방인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분의 거룩함을 구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다운 삶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독수리처럼 훈련하시는 그분을 신뢰한다면 반드시 우린 예슈아의 믿음처럼 장성하게 성장할 것이다. 의식주를 위해 살지 말자. 진정한 가치인 의로움을 위해 살고 잠깐 있는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그렇게 만드실 것이다.(마6:33 신3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