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낙인이 찍히면 그것을 벗어나는 일은 대단히 힘듭니다. 문제는 그 낙인이 자신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피해를 혼자서 기나긴 시간을 당해야 합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겠습니까? 더 힘든 것은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아니 그 누구도 해결하려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냥 잊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싶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주변에는 몇 안 되는 내 편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삶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는 잘 아물지 않습니다. 소위 트라우마로 남아서 언제고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편파 판정은 경기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올림픽 펜싱 경기에서 길고도 긴 1초의 시간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편파판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뻔한 거짓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경기규칙 또한 분통을 배가시킵니다. 그런가 하면 확실한 편파판정을 기억합니다. 잘 아는 김연아 선수의 동계올림픽 은메달입니다. 소련을 두호하던 심판들의 편파판정입니다. 아마 금메달을 받던 선수 본인도 머쓱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관중 대부분이 야유를 보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누가 보아도 올림픽 개최국의 자국 편애에 따른 편파판정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 김연아 선수의 묵묵히 응한 태도가 더욱 성숙해보여 칭송을 들었습니다.
‘박시헌’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는 애매한 상황에서 편파판정의 시비에 희생됩니다. 차라리 은메달을 받았더라면 다시 기회를 바라볼 수 있었겠지만 억지 금메달은 그의 장래를 어둡게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운동을 포기하고 은퇴해버립니다. 그 후 고향 진해에서 체육선생으로 일하며 살아갑니다. 주변의 시선이 아직 곱지 않은 것을 느끼며 학생들에게는 오로지 옳은 길만을 고집하고 밀어붙입니다. 그 괴팍한 고집으로 ‘미친 개’소리까지 듣습니다. 누가 뭐라든 자기 길을 고집하며 갈 길을 가는 겁니다. 교장도 학부모도 못 말리는 괴짜 선생님, 학생들에게는 막가파 규율반장입니다. 지난날의 불미스러운(?) 경기로 그러려니 생각들 하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강자의 불공정에 당해야만 하는 약자, 어쩌면 자신도 비슷한 경우를 당했습니다. 저들은 돈과 권력으로 실력이 있어도 힘없는 사람을 제물로 하여 자기 길을 닦고 창창한 미래를 만듭니다.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했어도 이런 개 같은 환경은 뜯어고쳐야 하겠다는 의협심이 발동합니다. 경험한바 말로 아무리 항의해도 전혀 통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력으로 보여주는 길만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입니다. 해체했던 복싱부를 부활시킵니다. 언제는 죽어도 안 하겠다 하더니 이제 아무 지원도 후원도 없는데 다시 복싱부를 일으키겠다니 무슨 힘으로 합니까? 그 어려운 때 아내가 기꺼이 협조해줍니다.
<타고난 실력은 최고지만 불공평한 세상에 일찌감치 희망을 접은 복싱 유망주 '윤우', 양아치가 되기 싫어 복싱을 시작하는 '환주', 소심한 성격의 '복안', 그리고 문제적 3인방 '가오', '조디', '복코'까지 우연한 기회로 복싱부가 된 이들이 선생 '시헌'>과 한 팀을 이루어 복싱부를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소위 지옥훈련에 돌입합니다. 모든 운동경기에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기본 체력 아니겠습니까? 마음이나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가는 그 끝은 좌절과 포기입니다. 자존심도 내려놓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 기를 쓰며 묵묵히 전진해야 합니다. 이기는 것은 내 감정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인정해주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자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함께 식사하고 함께 고난의 행군을 하며 이겨내는 시간을 가짐으로 더욱 가까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오해도 하고 손가락질도 주고받고 아픔도 주고받으며 우리는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따라오는 제자나 부하들 또는 팀원들의 각자의 특성을 고려해서 그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어렵지요. 그러나 그래야 신뢰를 얻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신뢰는 철벽같은 장애물도 뛰어넘게 해줍니다. 사실 사람은 옳기 때문에 움직이는 특별한 사명감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감동이 올 때 움직입니다. 마음에 불을 지르면 가만두어도 내달립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에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쪽이 이깁니다.
조금은 애매하다 싶은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사실 선수 본인이 원하였던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국가가 자기 위신을 생각하여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 누구도 뇌물을 주고받거나 심사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국제적 판결이 나와서 한참 후에는 다시 공개 활동을 하였다는 설명이 부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당해야 했던 수모를 무엇으로 보상해줍니까? 보상해주는 사람도 기관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넘어간 줄 압니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뻔한 스포츠 영화의 결과를 알면서도 나름의 감동이 따라오는 것은 아마도 열정을 담은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카운트’를 보았습니다.
첫댓글 잘보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