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서별 |
교우인원 |
참 석 인 원 |
회 비 |
도서류 |
기 증 물 품 | ||||||
계 |
성인 |
어린이 |
전․의경 |
계 |
- |
- |
기타 | ||||
계 |
361 |
114 |
88 |
15 |
11 |
173만 |
|||||
지방청 |
39 |
4 |
4 |
7 |
|||||||
중 부 |
23 |
2 |
2 |
4 |
|||||||
남 부 |
51 |
9 |
6 |
2 |
1 |
13 |
|||||
남 동 |
43 |
17 |
13 |
4 |
23 |
||||||
부 평 |
33 |
10 |
10 |
20 |
|||||||
서 부 |
17 |
0 |
0 |
0 |
0 |
0 |
|||||
계 양 |
20 |
7 |
5 |
2 |
10 |
||||||
강 화 |
- |
- |
- |
- |
- |
- |
|||||
연 수 |
29 |
8 |
8 |
13 |
2 |
14 |
소주 1상자 |
메모장 4 지우개 5 |
Usb 4 (256MB) | ||
삼 산 |
31 |
6 |
6 |
11 |
|||||||
공 항 |
- |
6 |
4 |
2 |
7 |
||||||
종합학교 |
18 |
30 |
15 |
5 |
10 |
25 |
|||||
김 포 |
19 |
5 |
5 |
10 |
|||||||
해경청 |
38 |
10 |
10 |
30 |
5 |
|
|||||
기 타 |
-차량비(퍼팩트관광011-390-5490 이용후):450,000×3=1,350,000원(45인승/정원 135명)
차량1대 07:00 종합학교(앰프등준비)/ 2대 07:20까지 지방청앞도로/지방청메가폰1개준비
- 성지식당(부페식):최요한요셉(01194475618):5,000×130=650,000원/위치 : 주차장 아래
※ 식사비외 음료수 및 주류대 미포함(관서별 준비바랍니다. / 식당과 협의 됨)
- 레크레이션 강사료 : 300,000원(장소 : 식당 아래편 캠프장, 전기인입 가능)
강사 : 정동철 요셉(018-245-6595) 등 2명
- 선물용품 구입비 : 505,100원
- 이상 합계 2,805,100원
※ 교구청 지원은 계상치 않은 액수임
- 배티성지(사무실043-533-5710,사제관043-533-0691,이승용 신부님010-4239-0629)
4-1. 차량 배차 및 차량별 인솔자(연락처)
가. 관서별 차량배차
차 량 호 수 |
총 계 |
1호차 (지방청 앞) |
2호차 (지방청 앞) |
3호차 (학교 경유 → 지방청) | ||||||||||||
관서별 |
12개 관 서 |
계 |
부평 |
계양 |
삼산 |
김포 |
해경 |
계 |
남부 |
남동 |
연수 |
공항 |
계 |
종합 학교 |
지방청 |
중부 |
114명 |
38 |
10 |
7 |
6 |
5 |
10 |
40 |
9 |
17 |
8 |
6 |
36 |
30 |
4 |
2 |
나. 차량별 인솔자 연락처
차 량 별 |
관서별 |
성 명 |
전 화 번 호 |
비 고 |
1호차 선두 인솔 이경일 토마스 신부님 016-424-2158 |
부 평 |
고재득 프란치스코 회장 |
010-4778-4018 |
보조 심지영 이레네 계양서 총무 011-473-4910 |
계 양 |
심지영 이레네 총무 |
011-473-4910 | ||
삼 산 |
이용우 사도 요한 회장 |
011-9902-8270 | ||
김 포 |
공복흥 마리아 부회장 |
010-6799-8048 | ||
해경청 |
김철환 도미니코 회장 |
011-478-0262 | ||
2호차 중간 인솔 홍광일 토마스 남동서 회장 011-329-5587 |
남 부 |
안상욱 미카엘 총무 |
018-332-8399 |
보조 안상욱 미카엘 남부서 총무 018-332-8399 |
남 동 |
홍광일 토마스 회장 |
011-329-5587 | ||
연 수 |
장상순 도비아 회장 |
011-296-8351 | ||
공 항 |
윤상원 베드로 경무과장 |
010-9256-9103 | ||
3차호 후미 인솔 세실리아 수녀님 010-7335-4845 |
종합학교 |
서민 미카엘 회장 |
010-2708-2692 |
보조 박명규 루카 인천청 회장 011-9826-8805 |
지방청 |
박명규 루카 회장 |
011-9826-8805 | ||
중 부 |
강행석 요셉 총무 |
017-290-2685 |
4-2. 행사 일정표
07:30 집결
08:00 인원점검 후 출발
10:30 배티성지 도착
11:00 ~ 12:00 미사
12:00 ~ 13:00 식사
13:00 ~ 14:30 레크레이션
14:30 ~ 16:00 십자가의 길
16:00 ~ 17:00 성지탐방 및 무명인 묘지 참배 등(자유롭게)
17:00 출발
19:30 인천 도착
※ 식사이후 일정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와 숨은 꽃들의 보금자리
우병원 토마스
배티성지의 오늘
진천에 있는 배티성지는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가 있었고,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며, 천주가사의 탄생지이자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이기도 하다.
성지입구를 거쳐 대성당과 사제관으로 오르는 산길 맨 앞에 ‘순교 현양’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순례객을 맞는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았던 선조들의 굳은 정신이 단단한 비석을 통해 느껴진다. 왼쪽으로 대성당과 사제관을 끼고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당시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성당 터와 무명 순교자의 묘를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따라 무명 순교자 6인 묘를 지나야 한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오솔길을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400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길가 오른쪽으로 집이 몇 채 보이는데, 그 뒤가 바로 최양업 신부가 여름 장마철이면 머물던 성당 터이다.
여기서 고갯길을 따라 900미터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무명의 숨은 꽃’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순교자 묘가 안장되어 있다.
교우촌의 역사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경이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배티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그 후 1830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으며, 성 다블뤼(안 안토니오)주교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고 요한) 주교의 명에 따라 설립한 조선 최초의 교구 신학교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 다블뤼 주교는 아직 신부였을 때인 1850년에 조선교구 소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고 같은 해 9월경에는 배티 교우촌에서 방이 두 칸인 큰집을 사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851년 말부터 1853년 여름까지는 완전히 배티에 정착해서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이후 배티 신학교 건물은 신학교 겸 성당, 사제관으로 이용되었으며, 1853년 여름부터는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가 배티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854년 3월 최양업 신부가 배티 신학생 3명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면서 폐쇄 되었고, 1856년 무렵 최양업 신부가 사목중심지를 배티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로는 프리니콜라(박 미카엘),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등이 배티 교우촌을 사목중심지로 삼고 이전의 신학교 건물인 성당 겸 사제관에 거처하면서 각처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교회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의 순교자 55여명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가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와 사목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어렵게 터전을 잡은 이곳에서도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었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감추어진 상태였고, 교회 서적이나 성물도 충분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죽는 날까지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신자들은 1850년 초에 최양업 신부를 모시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이때 최양업 신부가 거처로 정한 곳이 바로 배티 이웃에 있는 동골 교우촌 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이후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2년 동안 배티의 동굴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장마철의 휴식 기간에는 다시 이곳에 들러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고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신자들을 위해 한글로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최초의 공식기도서인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를 직접 지었으며, 다블뤼 주교님과 함께 공식 한글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도 지었다.
이처럼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년 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진천 배티 공소(혹자는 문경)에서 선종하였으니, 만 40세의 한창 때였다. 그의 시신은 배티(혹자는 문경)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신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백색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이곳 배티에 거처를 정하고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일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칼래 신부가 삼박골에 와서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곤 하였는데,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문경에서 쫓겨와 삼박골, 북면의 소학골을 거쳐 내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오랜 박해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신자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새 복음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용진골, 삼박골은 공소로 승격되었고, 배티에는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1895년 6월에는 아산 공세리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고, 1900년 6월에는 안성 구포동본당 소속 공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부터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얻기 위해 하나 둘 이곳을 떠남으로써 어느 교우촌은 단 한 명의 신자, 단 하나의 가옥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는 순교자들의 보금자리요, 최양업 신부나 선교사들의 고난어린 발자취가 스며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1956년 6월 진천본당 소속 공소가 되어 현재에 이르는 동안 1976년 9월 진천본당 주임 장봉훈(가브리엘) 신부가 배티성지의 개발을 시작하여 1987년 5월 배티성지 초기 경당을 완공하였고, 1993년 4월에는 배티성지 초대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장봉훈 신부는 1997년 4월 현재의 성당(대성당, 소성당, 사제관, 사무실 등)을 완공한 후에 1999년 6월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2002년 12월 양업 영성관 축복식에 이어 2004년 3월 최양업 신부의 동상건립 축복식을 하고, 2007년 6월에 이르러 성지 양업 전시관을 완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최양업 신부의 현양 운동에 동참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를 통해 그분의 삶과 신앙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참고 : 차기진, 사목 246호(1999.7),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가톨릭출판사(1996년)
배티성지 홈페이지, 청주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