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순성길 강북 삼성병원과 서울시교육청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다 만나는 월암근린공원이다.
서울 종로구 홍파동 한양도성 아래에 조성된 월암근린공원이다.산책길과 운동기구 의자 등이 마련되어있다.
그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 맞은편에 음악가 홍난파의 생가가 옛 모습을 복원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월암근린공원으로 올라가는 산책길이다. 걷기 아주 편하게 오르막에 계단을 설치했다.
서울 종로구 홍파동(紅把洞)이다.홍파동은 1914년 동명 제정 시 홍문동(紅門洞)의 <홍(紅)>자와
파발동(把撥洞)의 <파(把)>자를 따서 만든 동의 이름이다.홍파동은 홍문동, 신촌동, 어수정동,
월암동, 파발동, 천변동의 자연부락이 합쳐져 형성된 동으로 천변동은 개천께라고도 하였다.
파발동은 홍파동과 교북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홍파동 52, 56번지,교북동35, 50~52번지 일대다.
파발마가 있는 역참(驛站)이 있었기 때문에 파발골 혹은 파발동이라 하였다.
파발동에는 근방에 사는 농민들의 말을 빌리기 위해 세운 고마청(雇馬廳)이 있었다.
홍문동은 독립문 동쪽 행촌동에 있던 연향대(燕享臺) 아래에 있던 마을로 붉은 색깔의 효자 정문(旌門)이
있었으므로 홍문동 혹은 홍문골이라 하였다.
항일 언론인 베델(Ernest T. Bethell 裵說) 집터다.
홍파동 2-38번지 일대로 6,062㎡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지적도에는 홍난파의 집까지도 베델의 집터로 포함된다고 한다.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이 그린 서울에서 살던 '베델의 집 스케치'다.
그 집뒤에는 서울 성곽의 일부가 보인다.홍파동 월암근린공원 뒤쪽으로 성곽이 흐르고 있다.
그는 남편 베델이 죽은 후에 영국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사우스 벅 스탠더드' 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제공한 '베델의 집 스케치'로 전한다.베델 부부로 보이는 두 인물이 양기탁으로 보이는,
대문 쪽을 향하는 두루마기 한 인물을 배웅하는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베델의 서울 홍파동 자택의 2002년 당시 사진. 지금은 뉴타운 개발로 사라졌다.진성당거사 블로그 제공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은 남편 사망 뒤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데리고 결혼 전 살았던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베델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 대부분을 대한매일신보 발간에 쏟아부어
영국에서의 삶은 힘들고 곤궁했다.베델의 며느리 도러시 메리 베델이 한국대사관을 찾아왔을 때도
이들은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영국의 이웃들은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 가며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한국을 도운 베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메리 여사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며 홀로 아이를 키웠다."
-2018년 9월 21일자 서울신문 16면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에서
베델과 부인 메리 모드 게일은 한국을 몹시 사랑하였다.그 부부가 한국의 삶을 꾸려갔던 홍파동 그의 집 흔적은 없다.
그곳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곳곳에 홍난파의 노랫말을 새긴 알림판이 있다.그 공원 한쪽에 '어니스트 베델 집터' 표시판을 세웠다.
1968년 7월 15일. 영국의 ‘더타임스’ 16면에 조그마한 안내 광고 하나가 실렸다.
확대경을 대지 않으면 글자를 읽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1905년 서울에서 신문을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라는 분께
훈장을 드리려고 합니다. 연고자는 런던의 한국대사관으로 연락 바랍니다.”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리자 후손에게서 연락이 왔다.
베델의 며느리인 도러시 메리 베델(당시 52세·2002년 작고) 여사가 딸 수전 제인(당시 12세)과
아들 토머스 오언(당시 9세)을 데리고 한국대사관을 찾은 것이다. 베델 사후 반세기가 넘어
그의 가족과 한국이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한국정부는 이렇게 베델의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1968년 한국정부는 베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다.
중앙일보는 박중희특파원을 런던시에서 50리 떨어진 '우스터.크리센트'로 특파한다.
중앙일보는 1968년 7월 25일(일) '抗日 筆鋒 裵說' 특집기사를 싣는다.
베델의 가족을 만나 베델과 그의 가족들의 삶을 다룬 것이다.
박중희 특파원은 이 기사에서 베델을 이렇게 소개하고있다.
"<베델>,一名-이라고 하기 보다는 裵說,一名 <베델>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만큼
그는 영국인이라고 하기보다 우리나라를 더 사랑하고 위했던 <우리나라 사람>이었고
그 통에 끝내는 젊은 목숨까지를 바쳤다. 세상 떠나기 1909년(隆熙 3년) 5월 초하루.
卒年 37세.당시 직함은 大韓每日新報(Korea Daily News) 社長이었다.
지금도 그의 몸은 한국의 흙이 되어 楊花津外人 묘지에 묻혀있다."
박중희기자는 베델 가족의 집을 방문하는 순간,너무 한국적인 유물들이 너무 많아 놀란다.
마치 한국 땅 한곳을 방문한 것처럼 느껴지도 했다고 한다. 수만리 떨어진 영국이 아니라.
"동네를 둘러싼 아름드리 나무들이 거의 산림을 이루시피한 언덕바지.12번지는 그리 윤택할 거야
없어도 그대도 산뜻한 맛이 무슨 山荘과 같은 느낌마저 준다.바깥 가시문을 들어서 현관,<벨> 아랜
아직도 <허버트.베델>이란 문패가 붙어있다.<허버트>는 裵說의 세 아들중의 長男.벌써 오래전 세상을
떠난 두 아우들에 뒤를 이어 그도 3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나 이제 그의 미망인 <도로시 베델>女史,
그의 아홉살 난 딸 <수잔>과 일곱살 된 아들 <토머스>,이렇게 세 식구가 裵說의 유가족으로 전부다.
'이런 걸 두고 얼떨떨하다고 하나요?'
현관을 들어서 객실로 記者를 안내하면서 <도로시>여사는 이제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훈장을 받는다는 일들이 모두가 좀 예상 밖이고 꿈같기만 하다는 이야기다.객실로 발을 들여놓자 와작
<李朝>가 눈앞에 다가서 幾萬里 서양으로 나들이온 이 한국인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정말 이런 걸 두고
妙한 심정이라고 하는 것일까? 놋장식이 박힌 黑褐色의 한국장롱(필경 李朝때 것),여남은을 헤아리는 白磁들,
佛像,놋대접,이런 것들이 잠깐 記者로 하여금 "아차,여기가?"하게 시간과 空間의 감각을 잃게 해준다."
남편 베델과 사별한 메리여사는 먼저 간 남편 베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저 멀리 떨어진 한국을 몹시 사랑했고 그리워했다고 한다.
"지금도 서울에서 밤이면 인경인가를 치나요?"
며느리 <도로시>여사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하면서 들려준 게 '서울의 인경'이라고 했다.
박중희 특파원의 기사 중 눈에 드는 대목은 베델의 손자이야기다.
"그동안 객실로 내려온 꼬마들과 인사했다.'요건 <수잔> 요건 <토마스>.' 사진에서 본 <어니스트>를
수박 반쪽처럼 닮을 개구장이 <토머스>는 다짜고짜 '나,한국 깃대 그릴 줄 알아.'한다.
'어디서 배웠니?'그 유래를 알게 된 記者는 어처구니없이 콧날이 찡해진다."
7살짜리 영국 소년 토머스가 태극기를 그릴 줄 안다는 그 자랑에 베델과 그 유가족의 한국사랑을 실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