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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현대사진을 강의한지가 3개월이 지났습니다. 대략적으로 현대사진에 대한 소개는 끝이 났지만 비교적 빠른 속도의 강의와 강사의 지식부족으로 시원한 강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현대예술로서의 사진 강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코튼 분류를 중심으로 강의하다보면 정통 분류와 약간 혼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코튼의 분류와 정통 분류를 적절히 연결해주는 글입니다. 대부분 한번 이상 언급된 글이지만 조금 어려운 글로 설명을 해서 지루한 모양을 보이지만 도리어 정확한 용어 구사 등이 실제로 공부하는데는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올립니다.
■ 컨셉이란 무엇인가. 또 사진에서 어떤 의미인가.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예술은 역사 이래로 현실을 반영할 때 크나큰 원심력과 구심력을 가졌다. 때문에 현대예술이란 현대성을 반영하는 예술이며, 당연히 현대성을 인식해야 하며 또한 현대성을 반영할 방법론을 모색하는 예술이다. 현대사진도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내용과 사건의 경중을 떠나 현대성을 반영하는 사진이 현대사진이고, 그 현대성이 부단히 미학적 방법론으로 표출되는 사진이 현대사진이다.
컨셉(Conception)은 어떤 일관된 생각(idea) 혹은 사유(recognition)의 틀을 말한다. 즉흥성보다는 지속성을, 일회성보다는 연속성을, 또 순간성보다는 체계성을, 모호성보다는 명료성을 기반으로 하는 부단한 철학적 사유를 말한다. 사진에서 컨셉이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60년대 후반, 즉 개념미술이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부터이다. 이전에는 사진이 주로 단사진(a cut, one photo)개념이었고, 또 즉흥적이고 우연적으로 눈앞의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에 주제, 소재, 대상에 대한 사전 인식으로서 컨셉을 수용하지 못했다. 무엇을 찍을 것인지, 어떻게 찍을 것인지에 대한 생각(thinking)은 있었지만 “무엇과 어떤 것이” 바로 시대성과 현대성으로서 언어 체계라는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엄격히 구성된 언어적 내러티브로서 컨셉을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60년대 개념미술가들은 사진을 “Art & Language”로 생각했다. 예술이면서 동시에 실제 언어와 같이 지시하는 살아 있는 언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의 지시성(index)에 주목했고 또 사진을 아주 중요한 언어적 도큐멘트(documents)로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연작사진(serial photos)”이고 “연속사진(sequence photos)”의 방법론이다. 사진은 언어로 인식되면서 말하기 방식에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개념사진에서. 따라서 컨셉은 곧 개념이며, 개념은 언어성을 지시한다. 그곳에 이야기가 있고, 구성이 있고, 전개 방법이 있으며, 표현 방법이 있다.
사진에서 컨셉이 중요한 이유는 언어적 체계, 즉 언어적 전개방식을 고려햐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기에는 말하기 방식이 있다. 말하기 방식에 따라 효과는 물론이고 확실성과 투명성의 밀도가 달라진다. “컨셉이 없다는 것은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단어를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사진에서 컨셉이 없으면 주제가 흔들리고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현대사진이 언어적 체계, 언어적 컨셉을 강조하는 것도 컨셉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컨셉 없는 사진은 곧 언어체계가 부실하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증명한다.
■ 오브제 미학이란 무엇인가. 오브제 미학은 어떻게 사진에서 구현되는가.
예술은 선택에 그 묘미가 있다. 어떤 주제, 소재,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들이 어떤 범주(categories)에서 그리고 울타리(frame)를 칠 것인지 구획의 묘미가 바로 오브제 미학이고 대상 선택의 미학이다. 사진은 선택으로부터 출발하고 선택에 의해서 오브제 미학이 결정된다. 사실 사진이 여느 매체보다 선택에 의해서 살고 죽은 매체의 선택성이 있다. 사진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선택으로부터 구획되고, 선택으로부터 그 “차이(difference)”가 발생하고 인식된다. 그래서 사진이 언어가 되는 것이다. 언어의 생명은 차이에 있기 때문에 현대사진이 언어성에 주목하고 언어성을 강조하는 것도 언어의 선택적 나열 그리고 각종 단어, 문장, 문체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의미의 확장 혹은 의미의 힘으로부터 나타나는 지각과 인식의 변별성이 사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오브제 미학은 이렇듯 선택적 오브제, 혹은 차이의 오브제들이 나타내는 예술성의 밀도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선택된 오브제가 어떤 스타일을 갖는지, 얼마나 내용에 충실한 오브제인지를 판가름해주는 격의 층위이다. 사진은 “취해진(taken, made)” 오브제들이 얼마나 적절한지, 혹은 선택된 오브제들이 얼마나 내용에 부합한지 결정짓는 미학의 모습이다.
현대사진이 오브제 미학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택된 오브제가 컨셉의 밀도와 방향성을 판가름한다. 오늘의 사진은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는 방식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을 하는, 의도적 세팅과 구성적 리메이킹 방식이 주류인 오브제의 미학이다. 우연적, 발견적 선택이 아니라 각본에 따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구성미학, 메이킹 미학이기에 오브제 미학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 컨셉과 오브제 미학은 “Technology Aesthetic(기계 미학)"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컨셉과 오브제는 기계적인 것과 연관이 없다. 사진을 언어라고 한다면 말하려는 내용은 컨셉이고, 오브제는 문장이 된다. 이때 문장을 입으로 말하거나, 글로 쓰거나, 모니터에 텍스트로 나열해도 뜻은 변함없다. 문제는 환경, 컨셉과 오브제가 기계성, 기술성과 관계하는 것은 언어적 환경이다. 즉 어떤 이야기를 어떤 언어적 환경에서 전개할 때 더 유효적절하고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다. 사용된 언어가 딱딱한가 부드러운가, 선명한가 흐릿한가, 또 큰 가 작은가, 주변이 조용한가 시끄러운가 등등 언어 기술적 문제 또한 도구 및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사진이 점점 스케일이 커지고, 엄청나게 선명해지고, 그리고 디지털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도 기술적, 도구적 기계미학적 환경과 관련이 되어 있다..
사진이 오랫동안 도구적, 매체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왔으며 카메라, 렌즈, 필름, 인화지가 진보적 기술 영향을 받은 것도, 그리고 사진이 전달매체에 크게 종속된 것도 기술적 환경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계미학은 그 범위를 확장한다. 즉 오늘의 현대사진이 “기술미학”과 관계가 깊다고 하는 것은 전통적 사진의 기계적, 물질적 요소를 넘어서 철학적 요소로까지 이어진다. 기술문명과 기술사회적 세계에 대한 지각과 인식의 문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진가의 자세와 태도와 관련된 문제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재생산시대의 문제는 사진의 문제라고 했다. 이미지의 문제이고 인식과 지각방식의 문제라고 했다. 대량생산시대 사진은 문화양상의 모습이다. 서로 다른 코드들이 문화 속에서 자립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차용되고 혼성된다. 기계와 기술은 부단히 이미지를 남발하고 그 이미지들은 삶의 방식과 현대적 삶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기계 미학은 이제 냉혹함의 표상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아우라를 거세한 표백제의 모습이다. 사진은 기계미학 속에 있고 기계적 생산물과 교호 속에 있다. 기계미학을 바라보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는 따라서 예술적 태도와 시대성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자리하고 있다. 기술재생산시대를 바라보는 시대적 태도, 그에 대한 가치인식적 태도가 중요하다. 이것들이 컨셉과 오브제 그리고 재현의 방법틀을 결정한다. 현대사진이 기계미학을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현대사진의 “Neutral Aesthetic(중성 미학)”이란 무엇인가.
현대사진의 특징 중 하나는 중립적 거리두기이다. 이는 다분히 독일사진, 특히 뒤셀도르프 베허스쿨의 영향으로부터 온 것이다. 현대사진이 종축으로 시대성을, 횡축으로 현대성을 수용한다고 했을 때 현대사진의 정신성은 오브제의 선택, 오브제의 취득, 오브제 재현적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의 사진이 컨셉을 중요시하고 오브제 구성을 중요시하고, 오브제들의 재현 미학을 중요시하는 것도 연속성, 연결성이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중성미학은 현대사진의 대표적인 미학의 모습이다. 중성미학이 대두된 것은 후기산업사회의 사회문화적 상황들에 기인한다. 사진은 내적으로 기계적 산물이면서 외적으로 기계문화를 향한 이데올로기이다. 기계문명과 기술문화의 종속성이 사진의 모습이다. 때문에 사진은 사진가의 태도, 즉 기계와 기술 문명 앞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 물음은 디지털 사회, 사이버스페이스 문화 상황, 가상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과 의식 등 새로운 기계, 기술문명의 출현 앞에서 혹은 사회문화의 구조에 대해 당신은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갖고 있는 가로 요약된다.
중성미학이 유독 유형학적 사진에 반영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초고층 아파트를 찍는다고 했을 때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찍는가? 무엇 때문에 찍는가? 어떤 생각으로 찍는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찍는가?로 물음을 확장하면 사진가의 태도, 즉 이데올로기가 표명된다. 그냥 찍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성미학이 유형학적 사진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이런 질문에 대한 태도 표명이다. 유형학적 사진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표현적으로 가치중립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현대문화풍경과 사회적 지형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가치중립적으로, 최대한 중성적으로 현대성을 반영(중계)할 뿐이다.
기술 중심의 사회에 대한 이런 사진적 태도는 어제 오늘이 아니다. 역사적 뿌리는 멀리 1880년대 티모시 오설리반의 서부개척시대의 일련의 도큐멘트 사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근자에는 1975년 <New Topographics, 신 지형학> 사진에서 일련의 가치중립적 태도가 나타난다. 도시화, 산업화에 대한 시대 풍경 앞에서 니콜라스 닉슨, 로버트 애덤스, 루이스 발츠 등의 사진가들이 보여준 중성미학적 태도가 그것이다.
중성미학은 90년대 이후, 디지털 시대에 더욱 확장된 현대사진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기계문명, 기술미학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중간에 선 자기증식의 생물체이다. 스스로 진보하고 스스로 확대 발전한다. 자본주의 사회, 기술 중심의 현대사회는 이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회시스템, 프로그램된 사회의 구조를 이룬다. 중성미학적 현대사진은 이러한 물질문명, 기술문명에 대한 이데올로기 표명이다.
■ 현대사진의 “Deadpan Aesthetic(무표정 미학)"이란 무엇인가.
“무표정의 미학(Deadpan Aesthetic)”은 현대사진의 주요 스타일중의 하나이다. 1980년대 후반에 나타나 90년대 중반에 현대사진의 유형으로 자리한 대표적인 현대사진의 모습이다. 인물이든, 풍경이든, 혹은 정물이든 사진 속의 오브제(또는 모델)는 하나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표정이 없다는 것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어적으로 가치중립적인 중성화의 모습이다. 오늘의 현대사진은 감정 없이 사건을 중계하고 현실을 묘사하는 미메시스(mimesis)적인 모습을 띤다. 이러한 스타일은 중성미학과 잘 어울린다. 이데올로기를 표명하는 말하기의 방법, 말하기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표정의 미학”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또 왜 이런 스타일이 유형이 되어 국제양식으로 자리 잡을까. 그 원천은 기계시대의 개막을 알린 1920-30년대 독일 신즉물주의 사진에서, 그리고 하이테크놀로지시대의 개막을 알린 80년대 신표현주의이다. 현대사회의 기술재생산구조는 기계적 시스템 구조이다. 이것들은 생산 지대(Manufactured locations)로 불리는 산업 공간(industrial site), 건축 공간(architectual site), 환경 공간(ecological site), 레저 공간(leisure site)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바로 그곳에서 앨버트 랭거파취(industry), 아우구스트 잔더(human), 어윈 블루멘펠트(architecture), 칼 브로스펠트(nature)는 감정이 배제된 오브제 미학과 만났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무표정의 미학을 그 시대 현대성의 모습으로서 하나의 유형(Typology)으로 창조했다.
무표정의 미학은 인물사진과 건축적 주제에서 두드러진다. 인물에서 감정을 제거한다. 인물에 진실의 의복을 입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현실처럼 보이는 가상의 무대에 서 있다. 사진속의 존재들은 가공되고 재해석된 연극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다. 무표정의 미학이 현대사진의 주요 미학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런 현대성 때문이다. 무표정이 중성적 이데올로기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볼프강 벨쉬는 이런 미학적 태도를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아우르는 “가로지르기 이성”, 또는 “중도적 구상”이라고 했다. 벨쉬의 말을 무표정의 미학에 대입하게 되면 감정 없음은 현대성에 대한 중도적 구상의 모습이다.
오늘의 사진은 컨셉과 오브제 미학에서 이전과 다른 현대성을 요구하고 있다. 분명한 태도를 요구하고, 해석을 요구하고, 이데올로기 표명을 요구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기계, 기술 중심의 사회”에 대한 철학적 방향성이다. 현대사진은 이런 현대성 앞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말하기 방식, 말하기 모습, 말하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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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음에는 해외작가들이나 우리나라 젋은 작가들의 작품을 월간지에서 보면서 시각적 신선함과 아울러 '중성적이며 무표정한, 의도된 분위기'에 다소 당황했습니다만 요즈음은 정말 '중성적이고 무표정하게' 바라봅니다.^^ 위의 내용은 참 맛깔스럽게 쓴 글이네요. 저는 이런 글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