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저우언라이의 한 수
답사여행 17일째 아침이 밝아왔다. 눈을 뜬 곳은 길이 통한다는 퉁다오(通道)였다. 퉁다오는 후난성 서남부 끝이지만, 남으로는 광시의 싼장(三江)과 룽성(龍勝)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구이저우 리핑(黎平)으로 통하는 지역이었다. 세 개의 성이 한데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대장정의 홍군으로서는 너무나 중차대하고 절실한 질문이었다. 국부군의 추격에 덜미를 잡혀 샹강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해 마오얼산으로 내몰렸고, 사투 끝에 아슬아슬한 산길을 넘어오니 바로 이곳 퉁다오였던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이냐는 질문은 행군 노선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리더쉽 자체에 대한 심각한 질문이었다.
심각한 질문 – 어디로 갈 것인가
활로를 찾아야 했다. 원래의 전략전이 계획은 샹강을 넘은 다음에는 강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서 후난성 서부의 홍군 제2방면군과 합치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이미 막혀버렸다. 코민테른도 통신조차 두절된 지 몇 개월이 흘렀다. 중앙홍군은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퉁다오에서 시작됐다.
첫 단추를 풀어낸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통하는 마당발이었고 조직 곳곳으로 통하는 신경세포의 결합체 같은 존재였다. 프랑스 유학을 통해 국제 정세에도 밝았고 난창봉기를 주도하는 등 조직과 무장투쟁 양면에 모두 경험이 많았다.
북벌전쟁이 한창인 1927년 초에는 노동자 봉기를 일으켜 상하이시 임시정부를 만들어 장제스의 북벌군이 무혈 입성하게도 했었다. 1927년 8월에는 장제스의 상하이쿠데타에 대항해 난창봉기를 주도했다. 장정의 준비와 실행의 지휘권을 위임받는 3인단의 한 사람이 될 만큼 코민테른의 신임도 있었다. 3인단에서는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결정하고 저우언라이는 당정군 전체 조직의 집행과정을 총괄하는 역할이었다.
저우언라이의 세밀한 네트워크의 한 가닥은 왕따 마오쩌둥에게도 연결돼 있었다. 마오쩌둥을 들것에 실어서라도 장정에 참가하게 했고, 마오쩌둥의 부탁을 받고는 장원톈, 왕자샹과 같은 종대에 속하게 손을 썼다.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내세우는 묘한 연출력을 발휘했다.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는 퉁다오에 진입한 다음날인 1934년 12월 12일 공산당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자신이 포함된 3인단 회의를 열 수도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핵심적인 최고 의사결정 조직인 정치국 회의를 대장정 이후 처음으로 소집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 1년 동안 당정의 중요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던 마오쩌둥을 참석시켰다. 조직의 분란을 야기하지 않고, 명분으로도 충실했고, 실질적 내용으로는 새로운 길을 끌어갈 새로운 리더십을 끌어내는, 절묘한 신의 한 수였다.
대장정을 시작할 당시 공산당 최고 책임자였던 보구(당시의 직명은 정치국 총부책 總負責)와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은 정치국 회의를 소집한 것도, 마오쩌둥을 참석시킨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장정에 대해서는 중국 공산당 정치국이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3인단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셋이서 회의하고 결정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경 기회주의로 수 차례 비판하여 숙청해버린 인물을 공식회의 석상에 대면하는 것도 거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정치국 위원이며 집행위원회 주석인 마오쩌둥을 당정의 중요회의에서 일부러 배제하는 것은 당규에도 어긋난다고 밀어 붙였던 것이다.
정치국 회의는 보구가 주재했다. 보구가 회의 목적을 설명하며 개회를 하자, 오토 브라운이 이어받았다. 오토 브라운은 샹강전투 이후 홍군이 상당히 피로하기 때문에 안정된 곳에서 휴식이 필요하며, 후난성 서부의 홍군 제2군단 제6군단과 합치기 위해 북으로 진군한다는 기존 방침을 재차 언명했다.
통다오 정치국 회의
그러나 마오쩌둥이 즉시 반대 의견을 꺼냈다. 왕따 마오쩌둥은 1년 만에 참가한 정치국 회의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서진입검(西進入黔, 黔은 구이저우의 약칭)으로 요약되는 전병(轉兵)을 주장했다.
즉 북쪽의 후난성이 아니라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구이저우성으로 가자는 것이다. 장제스가 이미 홍군의 행군 방향과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에 후난성 방향에서 매복하고 있을 것이니 국민당 통치력이 취약한 구이저우성으로 들어가 새로운 출구전략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서진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적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병하면 적들이 이미 구축하고 있는 수많은 콘크리트 토치카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둘째, 구이저우성은 국민당 통치력이 약한 곳이고 그나마도 1개 군단 병력밖에 없다. 셋째, 구이저우의 왕자례(王家烈)가 이끄는 국부군 25군은 장병들이 총과 함께 아편을 피우는 긴 담뱃대를 하나씩 더 갖고 다녀서 쌍창병(雙槍兵)이라 불릴 만큼 아편쟁이들이 많고 그만큼 전투력이 약해 홍군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와 장원톈 등이 마오쩌둥에게 찬성하는 의견을 이어갔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의견을 이미 수시로 듣고 있었다. 장원톈은 장정 이후 마오쩌둥과 같은 들것 신세로서 마오쩌둥과의 적지 않은 대화 속에서 당의 전략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서 교감이 두터워진 인물이었다.
마오쩌둥의 갑작스런 대안에 대해 오토 브라운은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을 뿐 반박논리를 제대로 펴지는 못했다. 보구는 제5차 반토벌전과 샹강전투 참패로 인해 심정적으로 크게 위축돼 있었다. 보구는 코민테른이 비준한 전략전이를 간단한 회의에서 바꿀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일단 서쪽으로 이동하여 홍군이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북상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기존 방침을 견지하면서도 마오쩌둥의 전병 주장도 적절하게 혼합한 셈이었다. 퉁다오 정치국 긴급회의가 끝나자 전선에서 들어온 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예상한 대로 후난성 서부로 향하는 길목에는 국부군 20~30개 사단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퉁다오회의는 발언록이나 결의문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숙청됐던 마오쩌둥이 1년 만에 정치국 회의에 참석했고, 첫 번째 참석한 회의에서 당 중앙의 기존 방침에 반하는 새로운 전략적 대안을 제시하여 상당한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정치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가 기존의 3인단 회의가 아닌 정치국 회의를 소집한 것은 3인단의 전권수임 체제를 스스로 깬 것이었다. 이것은 왕따 신세 마오쩌둥이 3인단이라는 공산당 영도그룹을 밀어내고 공산당의 실권과 홍군의 지휘권을 장악해가는 재기의 신호탄이었다.
저우언라이나 마오쩌둥이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정치적 반격에 나섰다고 해도 상대를 단판승부로 몰아가지 않았다. 한 사람씩 설득하고 한 단계씩 추진해나갔다. 사실 새로운 전략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은 장정의 행군종대에 마오쩌둥을 장원톈, 왕자샹과 함께 배속시켜 ‘들것 3인단’이 만들어질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어느 날 갑자기’는 없는 법이다. 준비해온 것이 수면 위로 나타나면 그것을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착각할 뿐이다.
구이저우로 기수를 틀어라
답사일행은 퉁다오 시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북쪽 4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공성서원(恭城書院)을 찾아갔다. 중국의 일부 자료에는 왕 씨 민가에서 퉁다오회의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현지에서 확인해보니 민가가 아니라 서원에서였다.
공성서원 정문 기둥에는 ‘공농홍군 장정 퉁다오 전병회의 회지’라는 푯말이 번듯하게 걸려 있었다.
공성서원은 송나라 시대인 1105년에 세워진 것으로서 둥족(侗族)의 서원으로서는 가장 잘 보존된 것이다. 그러나 정문의 현판만 공성서원일 뿐, 내부는 퉁다오회의를 기념하고 대장정을 설명하는 전시관이 되어 있다. 9백년의 묵향이 80년의 혁명사에 눌려버린 것이었다.
공성서원
공성서원의 한 방에는 당시 회의실을 재현하고 있었다. 테이블 하나에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장원톈, 주더, 왕자샹, 마오쩌둥 등 일곱 명의 회의 참석자의 명패와 일곱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누군가의 회고에 의하면 퉁다오회의에서 마오쩌둥 혼자만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회의를 했다고 하는데, 전시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통다오회의 좌석 재현사진
공성서원 근처의 대로는 설날 대목을 앞두고 차량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시끌벅적한 장터가 되어 있었다. 폭죽과 장난감, 옷가지와 신발, 과자에서부터 설날 용품들이 노점상 좌판에 넘쳐났다.
게다가 이날이 길일이었는지 웬만한 식당은 전부 결혼식 단체손님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의 결혼식은, 따로 결혼식장이 있는 게 아니라 식당에 손님들을 초청해서 간단한 의례를 가진 뒤에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쥐라도 나올 것 같은 허름한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는 다음 답사지인 리핑으로 향했다.
후난성 퉁다오에서 구이저우성 리핑으로 가는 길은 한가한 시골길이었다. 노면이 많이 손상된 길이라 승차감은 나빴지만, 창 밖의 시골풍경은 여행객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퉁다오 회의의 무게감이나 긴박감과는 무관한 풍경이었다.
리핑으로 가는 중간에서 쪽배 예닐곱 척이 협동해서 물고기를 잡는 독특한 광경을 목격했다. 강의 아래 위 양쪽에서 그물을 쳐서 가로막고는, 가운데로 들어간 쪽배에서 긴 장대로 수면을 내리치자 놀란 물고기들이 빠르게 헤엄쳐 도망가가다 그물에 걸려들었다.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서 나름대로 설날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사진기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장대로 내리칠 때마다 튀기는 물방울이 멋지게 사진에 담겼다. 명절은 어디에서든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고 고향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법이다.
답사일행이 리핑에 도착하면서 숙소를 찾았으나 적당치 않았다. 교통경찰들이 최근에 오픈한 4성급 호텔을 알려주기에 그리로 찾아갔다. 현대식 호텔인데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비수기인 탓에 가격도 크게 할인해주었다.
중앙홍군은 국민당의 통치력이 취약하다는 이유로 퉁다오에서 북상하지 않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리핑에 도달했다. 홍군은 리핑을 손쉽게 점령했다. 홍군이 다가오자 왕자례의 구이저우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리핑 점령 3일째가 되는 1934년 12월 18일 리핑회의라고 하는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소집됐다. 보구, 저우언라이, 장원톈, 왕자샹, 리부춘 등이 참석했고, 오토 브라운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퉁다오회의가 기록을 남기지 않은 전초전으로서 마오쩌둥의 무대 재입장이었다면, 리핑회의는 보구, 오토 브라운의 기존 전략과 마오쩌둥의 서진입검 전병이 본격적으로 정책대결을 펼친 것이다.
이번 회의는 저우언라이가 주관했다. 보구가 먼저 발언했다. 퉁다오에 이어 리핑까지 점령하면서 현재의 전황은 상당히 호전되었으니 곧장 후난성으로 북상하여 홍군 제2군단 제6군단과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기존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코민테른이 결정한 전략방침이라고 강조하면서 거수로 표결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홍군의 전략전이는 이미 장제스가 전부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북상하여 후난성 서부로 들어가면 장제스가 20여 개 사단으로 펼쳐놓은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당초 후난성 서부로 가려는 계획은 포기하고, 일단은 쓰촨과 가까운 구이저우 북부의 쭌이(遵義)를 중심으로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구축하고, 적절한 시점에 홍군 간부들도 참여하는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제5차 반토벌전 패배의 원인과 교훈을 정립하자는 것이었다.
전략의 변경에만 머물지 않고, 패전의 원인과 책임을 분명히 규명하자고 함으로써 당정군을 지휘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리더쉽에 대한 날 선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정치국 성원 대다수가 마오쩌둥의 제안으로 기울자 소수로 밀린 보구는 코민테른 대표인 오토 브라운이 불참한 회의에서는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논쟁은 더 확대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국 회의는 그 자체로 아무 이상이 없고, 이번 회의가 군사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코민테른이 군사고문으로 파견한 오토 브라운이 불참한 것은 당연하다고 맞받아쳤다.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평가분석과 함께 책임론과 전략이 치열한 논쟁 속에 끓어올랐다. 그러나 종국에는 문건으로 결론이 만들어졌다. 후난성 서부로 옮겨가 혁명근거지를 만든다는 기존의 방침은 작금의 상황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제스 중앙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쓰촨 남부와 구이저우 북부에 걸치는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쭌이로 진군한다, 그리고 다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제5차 반토벌전의 실패 원인에 대해 규명한다고 결의했다.
사실상 보구와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3인단에 대해, 특히 보구와 오토 브라운에 대해 탄핵을 결의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사실 최고 책임자는 결과와 실적이 말할 뿐 과정에 대한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상식이다. 제5차 반토벌전에 밀린 끝에 탈주해야 했고, 탈주해서도 목표에 도달하기는커녕 샹강에서 끔찍한 참패를 당했으니 총수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우언라이는 3인단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탄핵의 장을 열어주었고, 마오쩌둥과 장원톈 등이 탄핵으로 몰아간 셈이었다. 결과에 대해 분석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는 것은 조직으로서 건강한 자기치유였다.
탄핵의 장이 되어버린 리핑회의
또 한 가지 돋보이는 것은 보구가 기존 방침을 고수하면서도 반대의견을 용인했고, 탄핵조차 조직의 토론 속에 제기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구의 이런 조직 중심의 태도는 훗날 장궈타오가 보여준 권력 지향적이고 이기적인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었으니…….
리핑에 숙소를 잡고 나서 곧바로 리핑회의가 열렸던 곳을 찾아 차오가(翹街)로 걸어갔다. 차오가는 뱀의 몸통처럼 좌우로 슬쩍 휘어진 긴 거리로서 고풍이 많아 남아 있었다. 늦은 오후에 이 길을 걸으니 시간의 향기가 가슴에 와 닿는 거리였다. 리핑회의는 리핑 시중심지에 있는 청대 민가에 열렸다. 길가로는 상점을 내고 안쪽으로는 창고 겸 주거공간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상가주택이다. 근처에는 홍군이 리핑에 주둔할 당시 마오쩌둥 천윈 등이 묵었던 집에 하나하나에 누구누구의 고거라는 표지를 해두었다.
리핑회의 기념관도 차오가에 있었다. 입구 한쪽에 있는 표지석을 보니 예전의 강서회관을 기념관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기념관은 덩치가 컸다.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의 재등장과 함께 공산당의 부활 지점이라는 의미에는 어울리겠지만, 리핑의 인구와 소득, 경제에 비하면 기념관이 너무 커 보이는 느낌이었다.
기념관 주차장에 들어서니 ‘위대한 전환이 이곳에서 시작됐다(偉大轉折從這裡開始)’는 본관 정면의 커다란 문구가 손님들을 맞아주었다. 안에는 다른 기념관과 비슷하게 장정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늦은 오후에 입장하여 둘러보는 바람에 관람시간이 지났지만 기념관 직원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끝까지 둘러보고 나왔다.
답사일행은 리핑회의 기념관을 둘러보고는 오랜만에 호텔 식당의 밝은 조명 아래 풍성한 식탁에서 마주 앉았다. 결과론으로서 샹강의 참패가 있었기에 마오쩌둥이 회생할 기회가 생긴 것은 마오쩌둥에게는 천운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하늘이 틈새를 열어준다고 해서 누구나 일어서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또한 공감했다. 마오쩌둥은 과연 하늘이 낸 인물일까?
다음날 아침 기념관보다 더 생생할 것 같은 장정 유적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리핑의 호텔에 비치된 관광정보 소책자를 보니 리핑 시내를 조금 벗어난 시골에 꽤 유명한 홍군교가 있다는 것이다.
리핑 시내에서 23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가오툰진(高屯鎭) 인근의 사오자이(少寨)라는 마을에 있다는 것만 알고 찾아 나섰다. 가오툰에 도착하여 현지인들에게 물어봤지만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그런지 현지인들의 설명이 명료하지 않았다. 일행은 두 번이나 왔다갔다 반복하다가 겨우 찾아냈다. 두 명은 큰길에서 하차하여 걸어서 사오자이로 들어가 찾아보기로 하고, 필자는 멀리 돌아가는 찻길로 가기로 했다. 산신령 님과 정교수 님 두 명은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면서 들길을 걸어 찾아왔고, 필자도 차를 타고 접근하는 길을 찾아내 홍군교에서 다시 만났다.
그 동네 사람 아니면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는 게 쉽지도 않은 위치였다. 외관으로는 좌우 난간도 없는 시골마을의 작은 나무 다리였다. 폭은 1미터로 두 사람이 마주치면 조심스레 엇갈려야 하는데, 그래도 길이는 70미터 정도였다. 다리 아래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리 한쪽에 홍군교의 연원을 기록한 표지가 있었다.
1934년 12월 홍군이 이 지역에 접근해오자 이 지역의 국민당 군대가 홍군의 행군을 저지하려고 절단해버렸다. 홍군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개천 물을 건너려고 하자, 인근 주민들이 널빤지와 각목 등을 가져와서 추위를 무릅쓰고 밤새 다리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홍군은 고생을 덜어내고 겨울 강물에 건넜다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허름한 다리를 홍군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홍군교를 둘러보는데 한 젊은 농부가 다리 아래 강물에서 밭에서 거둔 무 몇 다발을 씻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빨간 무였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무 몇 개를 사서 날로 먹어보니 상큼한 맛이 그만이었다. 하나씩 더 먹으라고 건네는 농부의 손길에는 넉넉한 농부의 마음을 실려 있었다.
이때 정일섭 교수가 말을 꺼냈다. 무 하나 더 건네는 이 농부의 마음과 다리를 놓아주던 당시 농민이 마음은 같은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자신들도 힘겨운 삶을 감내하며 살지만, 남에게 작은 마음을 베푸는 것 같다는 것이다. 답사여행을 전부 마치고 뒤풀이를 하는 자리에서도 정 교수는 리핑의 홍군교가 가장 인상이 깊었다고 회고했다.
홍군교를 찾기 위해 논둑을 따라 이십여 분 걸어갈 때 맡았던 시골의 냄새도 그랬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홍군에게 자발적으로 협조한 농부의 마음도 그대로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소수인 홍군이 다수인 국부군을 극복해낸 동력이아니냐는 것이다.
정 교수가 느낀 대로 홍군의 규율은 국부군에 비해 월등하게 잘 세워져 있었다. 소비에트를 구축할 때나 장정 행군을 할 때나 현지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고, 폐를 끼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인심을 얻어갔다. 볼품없는 홍군교지만 필자에게는 인민과 홍군이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정서적 교감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가장 귀한 장정 유적의 하나로 다가왔다.
리핑회의 기념관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에서는 승리한 자가 승리한 다음에 세웠기 때문에 승자의 오만이 묻어 나오지만, 이런 소박한 홍군교에서는 백성과 전사의 은은한 교감이 햇살에 빛난다. 약간의 상상만 발동해도 진한 감동이 베어 나왔다.
정치는 주의주장을 내세우고 구호만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펼쳐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설득력이 있을 때 조금씩 축적되어 이루어지는 법이다. 홍군 전사들 역시 공산당의 이념에 감화된 것이지만, 소박한 이익이 작은 감동에 융합되어 전사로 나서는 큰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에 비하면 강제로 징집된 국민당의 병졸들은 많이 달랐다. 우선 촌락별로 징집 인원이 강제 할당되어 입대할 때, 도주를 우려해서 밧줄로 묶어 끌고 가기 일쑤였다. 입대 풍경이 범인 압송 풍경과 비슷했다. 입대해서는 장교와 사병의 차별이 심했고 구타가 일상적이었다.
이렇게 몸에 밴 폭력성 때문인가,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면 하급 병졸조차 주민에게 행패 부리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었으니, 홍군교는 있어도 국민교는 없었던 것이다.
(4-2) 소수민족의 향기 - 둥족과 먀오족
퉁다오나 리핑 등 후난 광시 구이저우가 서로 인접하는 지역은 소수민족으로 둥족(侗族)의 터전이다. 둥족은 인구 3백만 정도로 중국 55개 소수민족에서도 인구 11위에 지나지 않지만, 소수민족의 문화라는 측면에서는 국가대표 급이라 할 만하다. 풍우교(風雨橋)와 고루(鼓樓)와 같이 처마가 촘촘한 둥족의 특유의 전통 건축, 수십 명이 등장하여 반주나 지휘자 없이 독특한 음색의 화음으로만 부르는 둥족의 전통적 합창인 대가(大歌)는 이 지역을 처음 여행하는 동반자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자오싱의 둥자이를 건너뛸 순 없다
그리하여 리핑에서 쭌이로 갈 때 홍군은 서북 방향으로 험한 산지를 직선으로 통과했지만, 우리는 리핑 80킬로미터 남쪽의 자오싱(肇興)에서 둥족 마을을 들러보고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크게 돌아 카이리(凯里) 인근의 먀오족까지 돌아보고 쭌이로 가기로 했다.
자오싱의 둥자이(侗寨)는 중국에서도 대표적인 둥족 마을이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포근한 분지 안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여행객들이 많아 마을 외곽의 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전용 전동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마을로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둥족 특유의 멋지고 화려한 풍우교가 외지인들을 맞아주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둥족의 진한 향기가 온몸을 적셔왔다. 이 마을은 원래 육(陸) 씨 집성촌인데 다섯 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구역마다 고루가 화려하고도 날렵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가는 개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조차 풍우교로 돼 있고 마을 곳곳의 고루는 동네 사랑방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모여 담소와 간식을 즐기고 있었다. 밤이 되면 경관조명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황색 기운이 도는 나트륨 조명등이 촘촘한 처마를 비추니 환상의 전설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음날 자오싱을 출발하여 카이리 인근의 시장첸후(西江千戶) 먀오족(苗族) 마을로 향했다. 시장첸후까지는 일반도로를 타면 240킬로미터이고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로는 340킬로미터나 돌아가게 되지만 실제 도착시간은 훨씬 빠르게 갈 수 있었다.
시장첸후 먀오족 마을은 주민이 9천여 명으로 먀오족이 모여 사는 마을로는 가장 큰 마을이다. 산기슭에 각각 생성된 작은 마을들이 커지면서 서로 연접해서 하나의 커다란 마을이 된 것이다. 낮에는 골목골목 먀오족 향기가 진하게 풍겨 나오고 밤이면 아주 독특한 야경이 너무 멋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2층 처마 밑에 바깥을 향해 백열등을 하나씩 켜둔다. 이것을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부챗살을 펼친 것 같은 아름다운 야경이다. 관광지나 대도시에서 흔히 보는 경관조명과는 아주 다르다. 산등성이 높은 객잔의 평상에서 이 야경을 내려다 보면서 닭백숙 비슷한 통닭 훠궈에 향기가 진한 백주 한 잔을 곁들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시장첸후는 먀오족 문화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와 전통생활을 보여주는 박물관도 있었다. 먀오족은 중국 내 인구가 9백만으로 중국에서는 좡족, 만족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이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후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것은 중원의 역사기록이나 먀오족의 전설에 비추어 보면 억지로 꿰어 맞춘 것 같다.
오히려 당나라에 끌려 간 고구려 유민이 남하하여 현지인과 결합하면서 형성된 저항적인 민족이란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김인희 저,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푸른역사) 조선시대 후기부터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간 우리 조선족 동포는 중국에 심어진 모세관이라 한다면 먀오족은 고구려 시대에 미리 갈래를 쳐둔 우리 역사의 머나먼 신경세포인지도 모른다.
중앙홍군은 리핑을 떠나 신속하게 쭌이를 향해 서북으로 진군하여 1935년 1월 1일 우강(烏江) 남안의 웡안현(瓮安縣)을 점령하고 있었다. 선발대를 파견해서 쭌이로 가기 위해 우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동안 본대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때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홍군 지휘부가 있는 허우창진(猴場鎭)으로 와서 저우언라이에게 강을 건너지 말고 강변을 따라 북상하여 후난성 서부로 갈 것을 또다시 요구했다. 우강의 양안이 절벽처럼 가팔랐고 강물의 유속이 빨라 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 샹강에서와 마찬가지로 큰 위험에 빠진다는 이유였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저우언라이에게 말한 것은, 세 사람이 모이면 3인단 회의가 되기 때문에 셋이서 합의하면 바로 당의 결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3인단이 리핑에서의 정치국 확대회의 결의를 번복할 권한이 없다고 거절했다. 당의 화합을 잘 유지해온 저우언라이는 보구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당내 정치국 성원들 사이의 이견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이것을 허우창회의라고 한다.
회의에서는 보구의 요구를 다수의 의견으로 덮어버렸다. 샹강을 건널 때에는 장제스 군대가 먼저 포위망을 구축하고 압박해 들어오는 틈새를 뚫어야 했기 때문에 손실이 컸지만 우강을 건너는 것은 추격군이 3일 거리 뒤에 있기 때문에 그때와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우강을 따라 북상하는 것 역시 장제스가 쳐놓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라고 반박했다. 허우창회의는 리핑회의의 결의를 재확인하면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3인단이란 이름으로 휘둘러오던 군사지휘권을 포박해버린 셈이다.
중앙홍군이 우강의 도강지점을 확보하는 것은 지형이 워낙 험한 탓에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쌍창병이라는 소리를 듣던 구이저구군은 해가 지자 초소 안에서 아편에 취해 늘어져 있었고, 대나무 뗏목을 타고 우강을 건넌 특공대에게 맥없이 생포되고 말았다. 우강 북안의 초소를 점령한 홍군은 부교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도강했고, 중앙종대까지 도강을 완료한 것이 1월 4일이었다.
쌍창병을 뚫고 우강을 건너다
답사일행은 시장첸후 먀오족 마을에서 나와 쭌이로 가기 전에 구이양으로 들어갔다. 미식가 최치영 님과 정일섭 교수가 귀국하고 엄문희 님과 일곱 살짜리 아들 동섭 군 그리고 교육계 출신인 삼청골 김영준 님이 새로 합류하기 때문이었다.
최치영 님이 귀국하기 전날 나머지 답사일행을 위해 미식가답게 구이양의 고급식당을 찾아 일행들에게 만찬을 베풀었다.
대장정 노선에서는 소수민족을 포함해 산간 마을들을 거쳐 오면서 음식으로는 시골의 다소 거친 메뉴를 주로 먹었던 탓에 대도시 구이양의 고급식당이 더욱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만찬이었다.
최치영 님의 음식 취향은 참 다양하고 음식을 즐기는 취향도 좋았다. 음식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싸든 비싸든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기꺼이 즐겁게 맛보곤 했었다. 음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는 매끼마다 가지로 만든 요리 하나씩은 꼭 먹어보자고 했다. 필자도 재미있겠다 싶어 식사할 때마다 가지 요리를 하나씩 주문해 주었는데, 가지로 만든 요리가 식당마다 완전히 제각각이어서 중국음식이 얼마나 다양한지 일행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값도 싸고 맛도 좋았지만, 식당마다 다른 가지 요리를 매끼마다 체험해보는 것은 보통 수준의 식도락 감각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었다.
여행에서는 음식이 하루 세 끼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낯선 것의 체험이고 그곳 사람들의 삶을 가장 직접 공감하는 기회다. 이런 면에서 답사여행의 주제인 장정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미식가가 동반해 주었다는 것도 훌륭한 동반자 인원구성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답사팀은 구이양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쭌이로 향했다. 중간쯤 지날 때 큼지막한 다리가 하나 나오고 교통표지판에 우강이라고 쓰여 있었다. 홍군이 건넌 지점은 아니었지만 홍군이 우강을 건너 쭌이를 향할 때에는 어떤 사정이었을까.
홍군이 우강을 건너자 우강 북쪽의 쭌이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구이저우군 부군장인 허우즈단(侯之担)은 우강 방어선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금은보화를 챙겨서 군대를 끌고 충칭으로 도주해버렸다. 장제스는 구이저우군의 허약한 대처에 격노했다. 허우즈단을 구금해버리고 그의 군대는 전부 중앙군에 흡수해버렸다. 장제스로서는 홍군 추격이란 홍군 토벌이든지 아니면 군벌 흡수든지 어느 쪽으로든 항상 남는 장사였다.
우강을 건넌 홍군은 쭌이 인근까지 파죽지세였다. 이제 후난과 구이저우의 경계에 가까운 구이저우 제2의 도시 쭌이를 공략할 단계까지 전개해온 것이었다. 홍군은 쭌이에 명승고적이 많은 것을 고려하여 강공을 펴기보다는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우선 쭌이의 방어를 위해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 하나를 야간에 습격했다. 대대장을 포함해 십 수 명의 지휘부 장졸들은 마작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들이닥친 홍군에게 통째로 포로가 됐다.
홍군은 이들을 대상으로 홍군의 포로 정책부터 설명했다. 홍군은 국부군 포로에 대해 공산당 이념에 대해 교육을 한 다음에, 귀향을 원하면 여비를 주고 돌려보냈고 홍군으로 전향하는 자들은 그대로 받아주었던 것이다. 부대장은 홍군의 선전과 사상교육에 감화되어 예하의 다른 부대원들에게 홍군에게 협력토록 했다.
홍군은 이들에게서 탈취한 구이저우군 복장으로 일개 대대를 위장시켜서 포로 십 오 명과 함께 쭌이의 성벽으로 접근했다. 밤 열한 시 경 성문 밖에 도착하자 앞세운 포로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성문을 두드렸다. 자신들은 홍군에 포위되었다가 겨우 탈출해 왔다고 하면서 관등성명을 밝혔다. 쭌이 성의 수비군은 의심 없이 성문을 열어줬다. 홍군은 일개 대대 전체가 무사히 진입해서는 돌연 총칼을 들이대자 수비군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성문을 점령한 홍군은 곳곳의 전선을 절단해 성내의 전등을 모두 꺼버렸다. 곧이어 성문을 열어 홍군 본대가 들이닥치자 쭌이는 끓는 솥을 엎지른 듯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홍군은 허둥지둥하는 구이저우군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들였다.
홍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쭌이를 점령했다. 병력과 무기를 제외하고 정신력이나 전투력을 비교하자면, 돈을 걸고 마작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던 구이저우군과, 혁명을 걸고 목숨을 던져 공격하는 홍군은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병력이 비슷한 수준의 일대일 전투에서는 거의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규율과 사기와 같은 정신적인 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단면이다.
1935년 1월 8일 쭌이는 완전히 홍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구이저우군 군단장 왕자례는 쭌이 북쪽 30킬로미터의 러우산관(婁山關)으로 도주했다. 러우산관을 국부군이 장악하고 있는 한, 쭌이의 안전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홍군은 계속해서 러우산관으로 치달았다. 러우산관은 해발 1,400미터의 가파른 산으로 구이저우에서 쓰촨과 충칭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홍군은 3시간의 격전 끝에 러우산관을 함락시키고 다시 20킬로미터를 더 북진했다. 이로써 홍군은 쭌이의 북쪽 대문까지 완전히 걸어 잠금으로써 안온한 거처를 확보한 것이었다.
답사일행도 22일차에 쭌이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시내의 쭌이회의 회지와 인근의 혁명 유지들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장정 당시의 홍군의 자취가 쭌이 시의 중심지를 화려하고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1935년 1월 8일 쭌이의 지하당 책임자의 지휘 아래 군중의 환영을 받으면서 중앙홍군이 입성했다. 1월 9일에는 공산당 중앙과 군사위원회 종대가 군중 만여 명의 환영을 받으면서 남문으로 입성했다. 지도부는 왕자례 등 구이저우군 군벌 장군들이 중서합벽(中西合壁)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은 공관들을 접수하여 지도부의 사무실과 거처로 사용했다. 1월 12일에는 만인대회라는 군중집회를 열고 쭌이혁명위원회 구성을 선포했다.
쭌이 혁명위원회 선포와 함께 쭌이를 혁명근거지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지주와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해 토지는 빈농들에게 나눠주고 기타 재산은 공화국 국고로 입고시켰다. 한쪽에서는 공산당 선전활동에 열을 올리면서 지원자들을 홍군 전사로 받아들였다. 국가은행이 문을 열고 공산당 화폐를 유통시키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풀기도 하고 홍군의 필요 물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장정에서 이동한 것은 단순한 군대가 아니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라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4-3) 쭌이에서 재탄생한 마오
쭌이를 점령한 중국 공산당은 내부적으로는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역사에서 쭌이회의라고 불리는 이 회의는 퉁다오회의와 리핑회의 그리고 허우창회의 연속선상에서 열리는 것으로서 마오쩌둥 부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35년 1월 15일, 위두에서 시작한 장정이 91일째 되는 날, 보구가 25세의 나이로 중국 공산당의 최고 책임자(정치국 상임위원 또는 정치국 총부책)가 된 지 3년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첫날 회의는 밤 2시가 되어서야 산회하면서 다음날까지 이어져 2박 3일 만에 끝이 났다.
정치국 확대회의의 뜨거운 논쟁
장소는 쭌이 시중심의 인쯔로(尹子路)에 있는 2층 대저택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구이저우의 국부군 25군 2사단장의 사저였으나, 홍군이 사령부 용도로 접수한 곳이었다.
참석자 면면을 보면 중국 공산당과 홍군 수뇌부 전부가 모였다. 당과 정부에서 중국 공산당 최고 책임자 보구, 중앙정부 집행위 주석 마오쩌둥, 인민위원회 주석 장원톈, 전국총공회(노총) 위원장 류샤오치, 전국총공회 서기 천윈, 정치보위국장 덩파(鄧發), 청년단 중앙서기 카이펑(凯豊)이 참석했다. 홍군에서는 홍군 총사령관 주더, 군사위 부주석 겸 홍군 총정치위원 저우언라이, 군사위 부주석 왕자샹, 총참모장 류보청(劉伯承), 1군단 군단장 린뱌오(林彪)와 정치위원 녜룽친(聶榮臻), 3군단 군단장 펑더화이와 정치위원 양상쿤, 5군단 정치위원 리줘란(李卓然)과 총정치부 대리주임 리푸춘(李富春)이 참석했다.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은 표결권 없이 통역과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정부기관지인 홍성(紅星)의 편집주간 덩샤오핑(鄧小平)이 회의 기록자로 참석했다. 모두 20명이었다.
퉁다오나 리핑에서 열린 정치국 회의에 비해 홍군 지휘부의 참석자가 늘어났다. 보구가 먼저 당의 총수로서 지금까지의 전략 등을 보고했다. 보구는 당 중앙이 코민테른의 국제주의적 영도 하에 올바른 정치노선을 견지하여 적지 않은 성공을 쌓아왔으나 최근의 제5차 반토벌전과 샹강전투는 적의 50만 병력 대 홍군 8만 병력이라는 현격한 전력의 차이와, 소비에트 지역의 경제력 열세로 인해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제3자가 설명했다면 객관적 분석으로 들릴 수 있었겠지만, 최고 책임자의 입으로 말하면 변명으로 들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 저우언라이가 보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논쟁으로 들어갔다. 저우언라이는 1930년 12월부터 시작돼 네 차례에 걸쳐 계속된 장제스의 홍군 토벌전에 대항해서는 병력과 무기와 경제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했었지만, 제5차 반토벌전과 샹강전투에서 참패한 것은 자신을 포함한 지휘부 3인단의 중대한 착오에 의한 것이라고 자폭과 다름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적군을 끌어들여 분산시킨 다음 아군의 전력을 집중해서 각개격파로 격파하던 기존의 유격전 전술을 버리고, 진지전 대 진지전으로 정면대결을 함으로써 소모적인 전투를 했다는 것이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지휘 결정이 착오였고 자신은 그 잘못된 지휘를 그대로 집행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에게 홍군 지휘를 맡기자는 제안으로 자신의 보고를 마무리했다.
이에 대한 반대의견이 바로 튀어나왔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으로 보구의 지지자인 카이펑이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전술은 러시아혁명의 귀중한 가르침을 배워보지도 못한 채 겨우 ≪삼국지연의≫와 ≪손자병법≫에서 배워온 구닥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카이펑에 대한 반박의견이 꼬리를 물었다. 구체적으로 마오쩌둥의 전술이 어떤 면에서 잘못됐는지를 따져 물었고, 심지어 ≪손자병법≫이 몇 장 몇 절로 됐는지는 아느냐는 면박까지 쏟아져 나왔다. 카이펑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이때 ‘붉은 교수’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학자풍의 장원톈이 일어났다. 장원톈은 홍군의 전략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이미 1만 자 분량(200자 원고지 150장 정도)의 메모로 준비해왔다. 장원톈은 장장 2시간 동안 발언을 이어가면서 조목조목 세밀하게 분석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미 벌어진 참패에 대해 분석을 했으니 보구와 오토 브라운은 장원톈의 비판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싸움으로 치면 잘근잘근 씹힌 것이었다. 요즘말로 하면 이게 바로 끝장토론이었다고나 할까.
장원톈
장원톈이 발언을 끝내자 아직도 몸이 편치 않았던 왕자샹이 들것에서 몸을 일으켜 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단상 위에 꽂아버렸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지휘부에서 하차시키고 마오쩌둥에게 홍군의 지휘권을 맡기자는 것이었다. 왕자샹이나 장원톈 두 사람 모두 모스크바 유학파 출신이었고 장정 이전에는 강력한 왕밍노선 지지자였고 마오쩌둥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던 인물이었으니 보구에게는 더더욱 날카로운 비판이 되었다. 뜨거운 논쟁이 계속 이어졌다. 이날 회의는 새벽 두 시가 되어서 산회하고 다음날 이어갔다.
왕자샹
다음날 다시 회의가 속개되면서 이번에는 마오쩌둥이 발언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책임지는 자세를 치켜세우면서 군사적인 문제에서 오토 브라운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지휘자로서 조사연구를 하지 않고 주관적 추측에 의존한다, 지피지기여야 하는데 적정도 제대로 모르고 외국인으로 홍군도 제대로 모르니 어떻게 이기겠는가, 부정확한 지도 위에 직선으로 작전 노선을 그어놓고는 전사들이 잠자고 밥 먹을 시간도 고려하지 않고 언제까지 완수하라는 일방적 명령을 내리기 일쑤였다는 것이었다.
꽤나 영특한 네 가지 결정
마오쩌둥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중국 공산당이 몇 년간 지속된 무장투쟁 속에서 군사지휘 역량을 갖춘 간부들을 많이 배출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지휘권을 맡긴 것 자체가 중대한 실책이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코민테른의 실책까지 찔러 들어간 것이었다.
다시 왕자샹의 까칠한 발언이 이어지고 다른 참석자들의 발언도 마오쩌둥과 같은 방향으로 쏠려갔다. 집중적으로 공격 목표가 되어버린 오토 브라운은 비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아무 반박 발언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어댔다.
쭌이회의는 장시간 토론과 논쟁 끝에 네 가지를 결의했다.
첫째, 마오쩌둥을 정치국 위원에서 상임위원으로 신분을 변경하고, 왕자샹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한다.
둘째로 장원톈이 회의 결의문을 작성한 뒤 정치국 상임위원의 심사를 거쳐 예하 부서와 홍군에게 보내 각급 지휘관을 교육한다.
셋째 정치국 상임위원의 업무를 새로 분장하되, 마오쩌둥은 군사지휘권을 행사하는 저우언라이의 조력자로 한다.
끝으로 기존의 3인단에 대한 이사결정 위임을 취소하고, 최고사령관 주더와 당의 위임을 받은 저우언라이가 홍군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보구와 오토 브라운, 카이펑 세 사람만이 반대했을 뿐 나머지의 참석자들의 지지 속에 통과됐다. 기존 3인단이라는 당 중앙을 해체하되 그 가운데 저우언라이를 존속시킴으로서 리더십의 연결성을 유지하고, 마오쩌둥을 지휘선에 끌어올리되 저우언라이의 조력자로 규정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유화적인 안배를 한 것이다. 지도부 인적 구성을 변경하는 데 있어서 꽤나 영악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지속되어 온 코민테른의 지배의 틀을 벗어버리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만일 코민테른과의 무선통신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쭌이회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는 알 수 없었다. 소련과 코민테른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주요 자금줄이자 상급기관이란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쭌이회의가 끝나갈 무렵 류보청이 또 하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했다. 구이저우는 전반적으로 농업생산도 충분치 않아 혁명근거지로 일으켜 세우기에는 한계가 있고, 쭌이는 북으로 창강으로 남으로는 우강으로 막혀있어 국부군의 포위공격에 취약한 점이 있으니 쓰촨성으로 북진하여 제4방면군과 합치자는 것이었다.
쓰촨성 지역은 청두 평원의 농업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장제스의 국민당과 쓰촨의 군벌 세력이 충분히 통합되지 않은 탓에 홍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에 공감을 표시하고 회의 참석자들도 동의했다. 이로써 후난성에 있던 제2군단 제6군단(훗날의 제2방면군)과 합쳐서 후난성 서부에 혁명근거지를 세우자는 대장정의 목표가 쓰촨성에 있던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합쳐 쓰촨성 서부에 혁명근거지를 세우자는 것으로 바뀐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왕따 신세에서 홍군 지휘부로 부활한 쭌이의 오늘날 모습은 어떨까. 앞서 찾아보았지만 쭌이회의 회지는 중서합벽 양식으로 지은 멋진 이층 건물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고급스럽게 지은 것이다. 원래는 구이저우군 사단장의 사저였으나 홍군이 쭌이를 점령하기 직전 줄행랑치는 바람에 홍군 총사령부가 접수한 건물이었다.
인근에는 국가은행 유지, 홍군 총정치부 구지 등 대장정 유적지가 많았다. 그런데도 쭌이회의 전시관을 쭌이회의 회지 옆에 대규모로 새로 짓고 있었다. 조감도를 보니 상당한 규모였다. 마오쩌둥 입장에서는 쭌이가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쭌이회의 회지’라는 편액도 직접 붓글씨로 써줄 만큼 애착과 자부심이 깊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할 만도 했다.
필자에게는 국가은행 유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대장정은 공산당 또는 홍군이라는 무장집단의 군사작전으로만 인식하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다. 대장정은 한 나라의 공산당과 공산당의 정부가 공산당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전한 것이었다. 공산혁명이란 단순한 무장투쟁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민의 밥그릇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에서 출발하여 밥그릇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과정이다. 그 밥그릇을 보호하기 위해 홍군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물질적 토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국가은행이다.
중국 공산당은 1927년 상하이쿠데타 이후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곳곳에서 해방구, 즉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그것은 홍군의 배후지며 근거지였지만 하나의 독립적인 경제 단위이기도 했다.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선포하면서 그 구체적인 조치의 하나로 할 국가은행 설치가 포함되어 있었고, 설립준비 업무는 마오쩌둥의 친동생인 마오쩌민에게 부여됐다.
마오쩌민은 1932년 국가은행을 창설했다. 창설에 동원된 인원은 고작 다섯 명, 창설인원의 경험이래야 은행창구에서의 입출금이 고작이었다. 은행 경력이라지만 금융업무가 아닌 육체노동을 했던 이도 있었다. 지폐 발행은 구경조차 못한 사람들이었다. 은행설립은 조직구성도 구성이지만 화폐 발행을 위한 대규모 자금이 필수적이었으나, 이 또한 빈손으로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하나 스스로 연구하고 배우면서 소비에트 경제의 동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당시 국가은행의 인력과 자금과 지식을 영국 미국의 금융가들이 들여다보았다면 발가락 사이의 때만도 못했겠지만 이들의 국가은행은 성공적이었다. 루이진이나 옌안에서뿐만이 아니라 대장정이라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들은 국가은행 역할을 수행해냈다. 쭌이에서도 그랬다.
국가은행은 장정 이후 3개월 만에 쭌이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공산당이 발행하는 홍색 화폐로 식량을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구매하는 동시에, 공매소를 통해 소금을 판매하되 홍색 화폐만을 받게 했다. 이 간단한 유통구조를 통해 짧은 시간 안에 홍색 화폐로 쭌이의 시장경제가 돌아가게끔 했다.
공산당이 발행하는 화폐가 신용을 갖고 순환되는 것은 공산당과 군중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군대의 존재는 총이라는 물리적 강제력으로 지지를 강요하게 되지만, 화폐가 군중의 신용을 얻으면 일상의 경제생활 속에서 더욱 광범위한 신뢰를 얻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군중들의 자발적 지지를 더 크게 끌어냈다. 인민들의 자발적인 지지는 기부금의 출연이나 홍군 자원입대와 같은 한 단계 더 높은 지지를 포함해서 국가체제를 공고하게 했던 것이다. 결국 밥이 하늘이고 혁명은 밥그릇에서 시작해 밥그릇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쭌이에서 열었던 국가은행 구지는 쭌이회의 회지 뒤편에 남아 있었다. 인민위원회의 재정 인민위원(재무부 장관) 린보취(林伯渠)와 국가은행 은행장이었던 마오쩌민이 담화를 나누는 동상(22)6952&&이 마당에 세워져 있었다. 그 외의 전시물이라야 당시 사무실을 재현한 책상과 의자, 그 위에 구식 주판과 붓, 각 지역에서 발했됐던 홍색 화폐 정도다. 이렇게 소박한 소비에트의 국가은행은 장제스의 쟁쟁한 금융가 인맥 내지 상하이 와이탄의 화려한 은행건물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규모나 세련됨의 차이는 두 번째 문제였다. 그것을 통해 국가가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은 마오쩌둥의 성공과 장제스의 실패라는 결과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장제스의 은행과는 달랐던 홍색 국가은행
장제스 쪽에서의 은행이란, 겉은 번지르르했지만 속으로는 장제스를 비롯한 쿵샹시(孔祥熙 장제스의 손위 동서), 쑹쯔원(宋子文 장제스의 처남), 천궈푸(陳果夫), 천리푸(陳立夫) 등 이른바 중화민국 사대가문이 중국 전체의 부를 무한정 빨아먹는 도구였다. 심지어 미국의 원조자금까지 은행에 넣어두고는 은행에서 마구잡이로 빼돌렸고, 빼돌린 돈은 은행의 채무로 남겨둠으로써 국민 전체에게 전가시켜버렸다. 훗날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중화민국에게 제공한 전시지원금 38억 달러 가운데 7억5천만 달러를 장제스와 그 일가가 가로챘다고 폭로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공산당의 국가은행은 통치지역 내의 경제와 재정 운용하는 작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인민을 위한 은행’과 ‘사대가문의 치부용 은행’이 그 차이였다. 은행과 금융을 통해 국민의 재산을 착취한 장제스의 은행 시스템과, 소박하고 어설프기까지 했지만 자급경제를 뒷받침한 홍색은행의 차이가 곧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성패를 갈랐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은 눈에 보이고 발등에 떨어지는 문제라 명쾌하게 보이지만, 경제 특히 은행과 금융이 문제가 되면 소리 없는 해일이고 외상 없는 당뇨병처럼 국가 전체를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장제스의 중화민국 은행들의 문제는 20세기 전반의 낙후한 중국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니다.
오늘날에도 월스트리트만을 초고도 비만환자로 만들고 미국의 중하층을 비롯한 전 세계를 빈곤에 빠뜨리는 현상으로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오죽하면 미국에서조차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시민운동이 터져 나왔겠는가. 전시에는 총이고 평시에는 돈이다. 이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제도화하는가는 국가운영의 핵심이다. 쭌이에 남아있는 국가은행의 흔적은 이런 측면에서 국가가 무엇인지, 금융이 무엇인지를 더욱 진지하게 음미하게 한다.
오늘날의 쭌이라는 도시는 도시 전체를 쭌이회의라는 혁명역사로 포장한 느낌이었다. 곳곳에 혁명과 마오쩌둥으로 치장돼 있었다. 쭌이회의가 중국 공산혁명에서 마오쩌둥을 부동의 권력자로 부활시킨 일대 전환점이라는 뜻에서 ‘전절(轉折)’이란 구호도 많이 보였다. 그렇다고 장정 유적지가 모여 있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4성급 호텔의 이름까지도 대전절(大轉折)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답사일행은 객실료가 좀 비싸더라도 의미 있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이 호텔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차량은 통행할 수 없는 홍군가 끝에 있는 3층짜리 고즈넉한 호텔이었다.
대전절 호텔 근처를 흐르는 샹강(우강의 지류로 샹강전투의 샹강과는 다른 강) 건너에는 쭌이 혁명열사능원이 있었다. 늦은 오후에 산보를 겸해서 걸음을 옮겨갔다. 시내 중심의 작은 산 중턱에 높은 기념탑이 있는데 다른 곳의 열사능원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그런데 기념탑 근처에 홍군 여전사가 아이를 보살피는 동상과 함께 홍군분(紅軍墳)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기록된 사연을 읽어보니 자못 감동적이었다.
쭌이에 입성한 홍군 가운데 젊은 위생병 하나가 있었다. 쭌이에 주둔하는 동안 홍군 치료뿐 아니라 민간인도 치료를 했는데, 이 위생병에 대한 주민들의 평판이 좋았다. 어느 날 밤 웨링(月嶺)이라는 고개를 넘어 산골 마을에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진을 갔다. 진료가 늦어져 그 다음날 아침 귀대했으나 소속 부대는 밤새 급히 이동해버린 뒤였다. 위생병은 부리나케 부대를 좇아갔으나 도중에 적군에게 체포돼 죽임을 당했다.
마을 주민들은 국부군에게 해를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묻어주었으나 위생병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홍군분이라는 조그만 비석을 세워주고는, ‘샤오홍(小紅)’이나 ‘홍군 보살’이라 부르면서 제사도 지내주었다. 신중국의 해방 이후 1953년에 쭌이에 열사능원을 세우면서 홍군분을 이곳으로 이장해왔다. 그리고 여성 홍군 위생병이라고 전해지던 이야기대로 어린 아이를 진료하는 여성전사의 동상을 세웠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5년 중유황(鐘有煌)이라고 하는 인민해방군 소속 의과대학 학장이 학생들을 인솔하고 이곳까지 왔다가 홍군분을 보게 됐다. 중유황은 장정 당시 홍3군단 5사단 13연대 군의관으로 이곳 쭌이를 거쳐 갔었다. 그는 당시에 실종된 위생병이 누군지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인민해방군과 쭌이 시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여러 자료와 당시 전우들의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서 홍군분의 주인은 바로 2대대 위생병이었던 룽쓰취안(龍思泉)이라고 확인해냈다. 그는 광시의 바이써(白色) 출신으로 부친에게 의술을 배웠으나 1929년 고향의 무장봉기에 참여하면서 홍군으로 들어온,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그는 1935년 1월 19일 부대이동 와중에 따로 떨어졌고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적군에게 희생당했던 것이다.
홍군분 앞에는 홍군 여전사가 어린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훗날 그가 누군지를 규명하기까지의 스토리가 담담하게 기록된 비석이 함께 서 있었다. 대장정에서 홍군이 주민들과 ‘어수정심(魚水情深)’ 즉 물에 담긴 채 살아가는 물고기처럼 교감했다는, 그래서 결국은 민심과 유리된 장제스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작은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긋이 쳐다보던 삼청골 님이 영국 BBC가 제작하고 EBS에서 방영한 3부작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한 대목을 이야기했다. 오늘날 현대 중국의 발전은 결코 모택동이나 그들 지휘부가 아닌, 오래 전부터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바로 그 '풀뿌리 중국 공산당 조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홍군분의 이러한 일화가 바로 BBC가 주목했던 현대 중국의 근간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훗날의 결과일 뿐이고, 쭌이회의에서 홍군 지휘권을 부여받아 부활한 마오쩌둥은 과연 장제스에 대항하여 수세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마오쩌둥의 첫 번째 시험대는 열렸으나 쓰촨으로 북상하는 길목의 츠수이(赤水)에서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츠수이에서는 국부군의 추격과 포위를 뿌리치기 위해 같은 강을 네 번이나 건너기까지 하는 일대 혼전 속을 헤집어야 했다. 이것을 사도적수(四渡赤水)라고 하는데, 그 혼전의 현장을 찾아갈 차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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