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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효대사(법안스님) 원문보기 글쓴이: 요석보현
[원효 찾아가는 길] : 대구->경산 ->자인면->제석사->하양->영천->수운유허지->경주분황사->골굴사->포항오어사 |
대구시내에서 남부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 남쪽으로 벗어나면 시민들이 식구와 벗들과 함께 찾아가 봄이면 딸기를 먹고, 여름이면 포도를 먹으며 즐거이 놀았던 고산 딸기밭, 포도밭이 나온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그때의 포도 팥은 지금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위한 종합경기장으로 우람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경산시를 지나면 넓은 압량벌판 가운데에 20층의 고층 건물과 여러 건물군들로 이루어진 영남대학교가 보인다. 영남대학교를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자인면으로 들어가면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제석사란 표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효스님의 탄생지라 이름난 제석사란 곳을 찾는데 찾을 길이 없다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행히 자인면사무소를 찾아 들어가 물으니 면사무소 담을 끼고 100여미터를 지나면 소방서가 있고 그곳에 제석사 입구 푯말을 볼 수 있다 한다. 내친 김에 원효스님을 위하고 자인읍을 위해 한마디 부탁을 드렸다. 그래도 이곳이 원효스님의 고향이며, 제석사가 탄생지라 찾아오는데 어찌 그렇게 소홀히 하였나싶어 행정당국이 보다 관심을 갖고 홍보하고 지켜달라고 청하였다.
한적한 곳에 숨어있는 산사와는 판이하게 달리 원효스님의 탄생지라는 제석사는 바로 스님의 원융무애(圓融無碍)사상을 닮은 듯 사바 속세 품에 깊이 안기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자인중학교와 경산공업고등학교 정문 맞은 편, 골목입구에 ‘원효성사 탄생지’라는 표지석은 보았건만 많은 집들과 4-5층의 아파트동 그리고 높은 교회의 첨탑에 가리웠나? 가슴을 두근거려보지만 금방 찾을 수가 없었다.
폐타이어를 이고 있는 대웅전
[폐타이어 이고 있는 제석사 대웅전] |
원효스님은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현재 경북 경산시 자인면인 이곳 서라벌 압량군 자인땅 불지촌에서 태어나셨다. 원효스님의 출생지인 불지촌 밤골이 어딘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곳 제석사가 원효의 탄생지라 믿으며 바로 스님께서 태어난 곳에 자신이 세웠다는 사라사가 바로 제석사라고 말한다. 일부에서는 확실한 유물이 없다는 이유로 원효스님의 탄생지가 아니라는 이견도 있으나, 주민들과 향토사학자들은 밤골(栗谷里) 아래에 위치한 이곳 제석사를 불땅절[佛地寺]로 부르며 원효스님의 탄생지로 믿고 있다. 한편 <한국사찰전서>에는 1625(인조 3년)년 유찬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다가 부처님 오신날을 준비하면서 달아놓은 연등을 보고서야 이제 찾았구나 싶었다.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이 형식적이나마 입구문 양편에 사천왕 그림을 붙여놓았다. 더더욱 찾는 이를 놀랜 것은 비닐천막을 덮고 폐타이어들을 이고 있는 법당의 모습이었다. 빗물이 새는가보구나.
[[제석사 칠성각에 모셔진 '해동초조 화쟁국사 원효성사 진영' 사본] : 진본은 일본 고산사에서 보관하다 현재 일본 박물관에 보관중이라 한다. |
경북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조계종 제10교구본사 은해사 말사인 제석사내에는 대웅전과 칠성전이 3년 전부터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져 지붕에 비닐을 덮어두고 있으며, 벽의 흙이 떨어져나가는 등 붕괴될 직전에 놓여 있으나 정부와 종단의 예산부족으로 방치되고 있으니, 이 곳이 바로 ‘해동초조(海東初祖)'로 일컬어지는 원효성사 탄생지란 말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때마침 원효스님 열반재를 드리고 법당을 나오시는 젊으신 주지 적연(寂然)스님을 만나 합장 인사드렸다. 스님께서는 반갑게 맞이하시며 이곳이 원효스님의 탄생지임이 틀림없으며 대웅전 바로 옆의 칠성전에는 원효스님의 영정을 모셔두었다고 전한다. 그 영정의 진본은 일본의 국보급으로 지금은 일본 고산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원효를 탄생시킨 밤나무
[제석사 칠성각 : 안에는 원효영정이 있다.] |
그 칠성전 바로 옆에 무척이나 오래된 밤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이 마을이 밤골인 율곡이며 원효스님께서는 밤나무 아래에서 탄생하셨다니, 행여 이 나무가 그때의 밤나무가 아닐까? 아님 그 밤나무의 씨알에서 씨알로 전해져 살아오다 이제 다 늙어 버린 그 때의 그 밤나무가 아닐까? 적연스님께 여쭈었더니 스님께서는 원효스님 그때의 밤나무라 믿고 싶다며 각별한 정을 보이셨다. 비록 밤알을 맺지 못하지만 그래도 봄이 되면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잎은 푸르러 원효성사 영정을 모셔둔 칠성전을 시원하게 드리우는 그늘이 되고 있다한다. 그렇다. 1400여 년 전의 그 때 밤나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강변(强辯)을 못하지만 그 밤나무의 후손일지라도 마치 스님을 직접 만나는 듯하여 감개가 무량하였다.
2천600여전 석가모니부처께서 이 세상 오실 적에도 나무 아래에서 태어나셨다더니, 우리 해동국의 큰 부처님이신 원효스님께서도 사라수 나무 밑에서 태어나셨다. 나무는 대체 무엇을 알고 전하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적연스님과의 점심(點心) 공양
제석사의 붕괴위험이 알려지자 경상북도와 경산시는 최근 잇달아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뒤늦게 대책마련에 나섰다한다. 그래서 경상북도에서는 전통사찰보전법에 의거하여 긴급보수비 1억8000만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경산시도 예산을 집행하여 제석사의 복원을 노력하고 있다고 적연스님은 소개하셨다. 적연스님께서는 원효를 찾아 나선 나의 순례를 격려하시며 기회가 닿으면 꼭 부산 기장에 있는 장안사와 주석하신 경주의 분황사 그리고 설총이 사셨고 원효스님이 돌아가신 곳으로 전해지는 혈사(穴寺)라 추정되는 경주 함월산의 골굴사에 들러 볼 것을 권하셨다.
적연주지스님께서는 이곳 제석사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증거라며 석등 연화대석을 보여주시며 보배처럼 감추어 두었던 작은 사자상을 꺼내 보여주셨다. 때마침 점심(點心)공양시간이라 주지 적연(寂然)스님과 총무 성인(成因)스님이 권하는 공양자리에 앉아 절밥으로 '마음에 큰 점'을 찍고 일어났다.
[신라시대의 증거인 석등연화대석과 사자상 |
원효 스님 그는 누구인가?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진 |
원효(617~686)는 진평왕 39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부친 설담날은 당시 신라 육두품으로서 관리의 열일곱 계급 중 열한번째인 내마(奈麻)의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조부는 잉피공(仍皮公)이라 하여 널리 공경을 받은 사람이었다. 청년 원효는 화랑이 되어 출중한 문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젊은 시절의 신라는 너무나 힘든 처지였다. 북에서는 고구려가, 서쪽에서는 백제가 쉴 사이없이 침공해 왔던 것이다.
전장을 누비던 원효는 전투에서 절친한 벗이 죽자 복수를 결심하며 통곡하던 중 지금까지 자신이 적군을 죽여 승리에 들떠 있을 때 상대편에서도 똑같이 복수의 칼을 갈며 애통해 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다 어머니의 죽음, 방울스님의 가르침을 겪고 배우면서 진정한 삶의 진리를 구해보자는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이차돈, 원광과 자장의 뒤를 이어 부처의 나라 신라를 더욱 평화스럽게 만들기 위한 길을 찾고자 결심하게 된다. 마침내 원효는 29살의 나이로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부처의 길에 나섰다.
출가 직후 그는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어 '초개사'라 부르고 도를 닦는 한편 설법도 부지런히 했다. 그러던 중 34살이 된 원효는 진덕여왕 4년 650년에 이르러 외국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보다 더 깊이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로 가려다가 국경선에서 고구려의 보초병에게 붙잡혀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금당했다가 한 달 가량 지난 후 겨우 풀려났다. 옥고를 겪은 이들은 그 길로 곧장 되돌아 왔다.
이후 그는 국내에서 공부도 하고 수도도 했다. 더러는 강단에 올라 설법도 했다. 그는 원래 워낙 설법을 잘했기 때문에 그 인기가 그야말로 높았다. 얼굴도 잘 생기고 화랑출신이라 기골은 장대했던 데다 목소리에 힘이 넘치고 그 내용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가 설법을 할 때에는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에서부터 무수한 신라인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설법을 경청했다. 또한 그는 <발심장(發心章)>이란 글을 지어 모두들 빨리 불도를 닦도록 권하기도 했다.
백제가 망한 이듬해인 661년 문무왕 원년에 45살이 된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다시금 당나라에 가고자 서해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원 근처에서 며칠 동안 묵으면서 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밤 해골바가지에 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노래하였다.
心生卽種種法生(심생즉종종법생)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心滅卽龕墳不二(심멸즉감분불이)
마음이 멸하면 龕과 墳이 다르지 않네
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유심 만법유식)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識에 기초한다.
心外無法 胡用別求(심외무법 호용별구)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즉 '모든 근본원리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또렷또렷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내 마음 외에 그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일은 나로부터 출발시켜야 한다.' 고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당나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미련 없이 홀로 서라벌로 되돌아 왔고 자기 스스로의 길로 나섰다. 그후 686년 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인간 구도의 길로 가는 처절하고도 험한 길을 걸었다. 형식과 규율을 싫어했던 원효는 요석공주와 파계하여 설총을 얻은 후 승복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낮추며 전쟁에 찌든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주로 수도 경주의 대사원에서 호화생활을 누렸으나 원효는 전국을 돌며 전쟁으로 인한 참화로 갈가리 찟긴 민중의 마음을 어루어만지며 갈등과 증오를 차단하여 원융회통의 하나 되는 경지로 이끌었다.
원효는 모두 90여 종 15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 중 대부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지고 부분적으로라도 전해지는 것은 20여 종에 불과하지만 저술 목록을 보면 그가 당시 중국 불교계에서 논의되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저술은 당시 불교문명권에 두루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대승기신론소’를 읽은 중국 화엄종의 3대 종조 법장은 큰 감동을 받았고 이후 불교 경전에서 의문나는 점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편지로 물어보았다고 한다.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은 8세기 말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금강삼매경론’에 흠뻑 빠져 있던 한 일본 고관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또 원효가 당시 불교문명권의 중요한 논쟁들에 대해 종합적 입장을 제시한 ‘십문화쟁론’은 인도에까지 전해져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러나 원효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런 교학 연구보다는 ‘대중교화’를 향한 그의 열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원효는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으로 꼽히는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쓰다가 제4권 ‘십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꺾고 말았다고 한다. 십회향품은 보살이 그 동안 닦은 여러 가지 공덕을 모두 중생에게 돌려주고 이를 바탕으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불경 연구의 절정에서 원효는 그 한계를 보았던 것일까? 이후 원효는 광대가 춤출 때 쓰는 커다란 박을하나 얻어 쓰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춤추고 노래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삼국유사는 그가 화엄경의 “일체의 걸림 없는 사람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는 구절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애’라 이름했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부처님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된 것은 원효의 공이 크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효는 자신의 사상을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을 이롭게 한다”'귀일심원 요익중생'고 표현했다.
분황사 앞에서 - 황룡사터와 당간지주
[분황사 앞 당간지주] |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선생님의 용담정과 가정리를 뒤로하고 927번 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나는 경주시내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황성공원을 끼면서 우회전하여 북천을 건너가면 나지막한 기와지붕의 경주 역이 왼쪽에 나타난다. 경주 역에서 좌회전하여 원효스님의 본격적인 무대였던 분황사를 찾아온 것이다. 예전에도 몇 번은 들렀건만 그때는 느낄 수 없었던 설렘과 벅찬 감격이 끌어 올랐다. 위대한 스승을 만날 수 있다는 감격인가보다.
분황사 맞은 편에는 그 옛날 찬란한 신라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숨겨진 황룡사지가 있다. 발굴작업인지 복원작업인지 황룡사지로 들어가는 덤프트럭을 따라 일어나는 희뿌연 먼지는 그야말로 황룡이 승천하듯 아님 승천의모습을 감추는 연기와도 같았다. 먼 눈길을 황룡사 터에서 가까이 분황사 입구로 옮겨오면 키높이의 당간지주가 벌판에 서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경내 전면에 법당(法幢)을 10미터 가까이높이 달아 세우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중간에 2~3개소와 꼭대기에 구멍이 뚫려 있어 양쪽에 세운 2개의 받침대를 말하는 것으로 대체적인 형태는 지주(支柱) 밑에 사각형의 대석(臺石)이 마련되고 지주 사이에 원형 간대(竿臺)를 놓아 지주를 고정시켰다. 분황사의 당간지주는 특이하게도 당간을 받치는 간대를 거북이로 만들어 놓았다 한다.
분황사
[분황사 정문] |
황룡사와 담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薛聰) (자는 聰智, 원효의 아들로 신라 3문장(强首, 薛聰, 崔致遠)중 한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고 이두를 집대성하였다.)은 그의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소상(塑像)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항상 공경사모하며 예배를 올렸다한다. 아들 설총이 예배할 때마다 소상은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하여 그 소상을 고상(顧像)이라고 불렀다. 일연(一然, 1206 - 1289, 고려 때 스님. 이름은 견명(見明). 호는 무극(無極), 뒤에 일연(一然)이라고 개명함. 생계불감 불계부증(生界不減佛界不增)이라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활연대오하여 "오늘에야 3계가 몽환(夢幻)같고 대지가 무극(無極)함을 보았노라."하였다. 세수 84세 때 손으로 금강인을 맺고 입적. 삼국유사5권, 어록 등 많은 저서를 남김.)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말에도 그 고상은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조>
고상 이야기는 설총이 아버지를 얼마나 극진히 사모했느냐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그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향해서나 돌아다보는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고상이 없다. 그러나 원효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관련하여 한결 그의 따스한 인품을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이다. 원효는 신라 지역의 명산을 두루 편력하고 경관이 좋은 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저술들은 분황사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한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분황사 경내 북쪽 담결에 있는 대원심보살 사리탑, 1933년 대원심보살 살아계실적 치아에서 백옥 부처님 모양의 사리가 나와 온 세상이 경탄하여 그 불도 정성을 기리고자 사리함을 모셨다한다. |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입구 오른쪽 담벽에 쌓여 있다. |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 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인 분황사는 이 시대 원효대사의 위대한 생애와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원효학 연구원]을 설립하여 스님의 교학과 사상을 발현하고 진작시켜 나가고 있다. 또한 매년 음력 3월 29일이면 경내에서 원효성사대재를 열며 금년 10월과 11월중에는 원효 예술제와 원효학 연구학술 발표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m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파손시켜 1915년 다시 수리를 하였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한 변 약13m, 높이 약l.06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물개,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사자가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인왕산은 불탑이나 사찰의 문 양쪽에서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써 금강역사라고도 하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에는 동서남북 네면에 있는 8명의 인왕상은 모두 반라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7세기 삼국시대의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의 1층 네 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동] |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남] |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서] |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북] |
삼룡변어정
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는 관광객의 목을 축여주는 2단의 연화 식수대가 있고 그 옆에 팔각의 석정(石井)이 있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의 유물로 안은 둥글고 바깥은 팔각으로 다듬어져 있는데 둥근 모양은 부처님의 원융(圓融)한 가르침이며, 팔각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의식, 바른 명상인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으로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삼룡변어정] |
원성왕 11년(795) 여름에 온 나라가 가뭄이 들어 여러 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후 간신히 비가 와 한시름 놓고 있던 왕은 당에서 온 사신을 맞았다. 한 달이나 묵고 있던 사신을 전송한 왕은 `이번 사신은 아무래도 이상해. 당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 경사가 있어 축하하러 보내든지, 당나라 왕의 글을 보내기 위해 사신을 파견해 왔는데, 이번에는 별 볼일 없이 한 달이나 묵고 황급히 떠나니 무슨 영문인가'하고 근심을 하였다. 한편 당나라 사신이 간 후부터는 신라에 때아닌 서리가 내려 곡식들이 얼어붙었다. 근심스런 심정을 달래 보려고 산책을 하고 있던 왕 앞에 문득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두 여인은 공손히 절을 올린 후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 저희들은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입니다. 어제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사람들을 데려와서 우리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어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한 후 통 속에 넣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폐하께서 급히 하서국 주술사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 호국용이 다시 청지와 동지 그리고 분황사 팔각정에 살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신라인들은 이들 세 호국용이 있는 한 신라는 번성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제야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 까닭을 알았다. `세 호국룡이 있는 한 신라가 당나라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훔쳐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왕은 "알았으니 돌아가 있거라"하여 두 여자를 보내고 날랜 기마병 50명을 몸소 거느리고 당나라 사신을 뒤쫓아갔다. 쉬지 않고 달려서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려 할 때야 사신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에 이르렀다. 왕은 이 곳 객사에 잔치를 베풀어 놓고 당나라 사신에게 말했다.
"한달 동안이나 계시다가 이렇게 이별하게 되니 너무 섭섭하여 단 한시간이라도 더 즐겁게 석별의 정을 나누고 떠나시게 하기 위해 이렇게 뒤를 쫓아왔습니다"하며 술을 권하였다. 당나라 사신은 조금 마음이 불안하였으나 왕이 용의 사건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으므로 안심하고 하서국 사람들과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권하는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다음 왕은 부드럽게 당나라 사신에게 말을 하였다.
"풍토가 다르고 풍속이 다른 나라에 가면 무엇이나 기념으로 갖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상정일 것입니다. 귀관께서 우리나라의 용을 갖고 싶은 것은 이해하겠으나..."하고 노기를 띠고 언성을 높여 호령하였다. "하서국 네놈들은 호국용을 저주하여 훔쳐다가 팔아먹다니 네놈들은 이 자리에서 사형에 처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에 하서국 사람들은 물고기가 들어 있는 대통을 내어놓고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다.
외국 사신 앞이라 특별히 살려주는 것이니 돌아가라 하고 왕은 대통을 받아 들고 돌아와서 세 곳에 놓아주자 물 속에서 제각기 한길이나 뛰고 기뻐하며 뛰놀다가 가 버렸다. 당나라 사신은 원성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용을 훔칠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하고 저의 임금께 아뢰었다 한다. 이때부터 분황사 우물을 팔각정이 아닌 삼룡변어정이라 했다 한다. <삼국유사 권2 원성대왕조> 남아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화쟁국사비편
대성사 화쟁국사 원효의 비편, 비신을 사라지고 비신을 받쳤던 비대만 남아있다. |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 나무밑에 화쟁국사비편이 있어 소홀한 사람은 그냥 치지기가 쉽다. |
모전석탑과 삼룡변어정 사이의 시원한 나무그늘아래에는 관광객의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기에 안성맞춤인 대좌가 놓여져 있다. 다행히 걸터앉은 사람은 없지만 한편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대좌를 무심하게 그냥 지나친다. 이 대좌는 바로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스님의 화쟁국사 비대좌이다. 숙종6년(1101) 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A.D.)은 숙종에게 권하여 숙종은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로 하여금 주처에 비석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린다. 하지만 이 조서가 바로 시행되지 않은 듯하고, 이곳에 건립된 비문은 명종대의 한문준에 의해 지어졌다 한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은 듯 비신(碑身)은 사라지고 비신을 받쳤던 비대(碑臺)만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조선시대의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준비 없이 찾아온 관광객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보광전
분황사 경내 유일한 전각인 보광전에는 약사여래불과 원효영정이 모셔져 있다. |
정면3칸 측면2칸, 맞배지붕을 가진 분황사경내의 유일한 전각인 보광전은 강희 19년(1680년) 경신년 5월 초3일 중건하였다한다. 며칠후면 부처님 오신날이어서 홍청황의 연등으로 장식된 지금의 보광전을 1998년 3월 13일(음 戊寅 2.14) 개축을 해체하던 중 3월 24일 상량문과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약사여래상은 만력 기유년(1609년)에 동(銅) 5,360근으로 조성되었다 한다. 보광전 안의 약사여래상 오른쪽에는 원효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경산 자인의 제석사에 모셔진 원효 영정은 일본 고산사 영정의 사본이라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분황사 원효 영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 영정으로 해방 직전 한 거사가 200일 기도를 올리던 중 원효의 모습이 화폭에 나타나 그대로 따라 그렸다고 전해진다.
위대한 사상가이시며 우리민중의 스승이신 원효대사 영정 앞에 삼배를 올리고 칠칠일(사십구일)전에 돌아가신 선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연등 하나를 달아주실 것을 보살님께 부탁드리고 늦지 않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장항사지 5층석탑 - 석굴암을 넘어 토함산을 내려가는 새길
[장항사지 5층석탑] |
분황사주차장에서 우회전하여 4번 국도를 달리면 보문 관광단지를 지나 추령고개를 넘어 감포 쪽으로 가지만 나는 생각도 없이 좌회전하여 울산으로 내려가는 7번국도를 달렸다. 마침 불국사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여 992번 지방국도를 계속 올라가니 석굴암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가지 않았는데....하면서도 토함산 정상까지 가는 듯 올라가니 감포로 내려가는 길이 새로 나있었다. 참으로 기분 좋게 새롭게 난 길을 따라 토함산을 굽이굽이 내려오다가 길 건너 산 중턱에 석탑이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 차를 세워놓고 여행 중에 계획 없이 마주친 석탑이라 남모르게 보배를 줍듯 사진에 담았다. 돌아와 여러 답사길라잡이 책을 뒤지자 바로 그 유명한 장항사지 오층석탑임을 알았다.
예전 감포앞바다 대왕암을 보고 포항으로 올라가던 929번 지방도를 만나지 못하고 장항리를 길을 계속 따라 가니 여전히 깨끗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달리고 있었다. 이 길도 새롭게 생겨난 14번 도로였다. 오늘은 원효대사의 성은으로 시원스레 새 길을 달리니 운이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골굴사 - 원효대사가 열반하신 곳으로 알려진 한국의 돈황석굴
[골굴사 일주문] |
[골굴사의 암벽동굴 법당] : 원효스님께서는 이러한 혈사에서 돌아가셨다는데...] |
안동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달리니 달을 머금었다는 함월산(含月山) 골굴사(骨屈寺)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좌회전하여 조금만 올라가니 함월산 기슭에 한국의 돈황석굴 격인 골굴사를 만나게 되었다. 골굴사는 돌로 돔을 쌓고 흙을 덮어 굴처럼 만든 석굴암과는 달리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석굴사원이다. 문화재로서의 귀중함과 석굴사원으로서의 희귀성에 반해 일반에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지만 요즈음에는 선무도(禪武道)의 수행도량으로 알려지면서 동양무술에 대해 관심 많은 서양인들과 방학중 학생들의 관심이 고조되고있는 가운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들고 있다. 선무도는 불가에서 비롯해, 중국 소림사와 신라 화랑도에 이어 태권도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전통 수행법이다.
골굴사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 12개의 석굴이 나 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는 돋을 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이라는 그림에는 목조 전실이 묘사되었고, 숙종 12년(1686)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의하면, 이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하였으며, 법당굴이니 설법굴이니 하는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뿐이며 다른 굴은 모두 허물어지고 겨우 소나기만 피할 수 있는 형체로 남아 약사굴, 산신당, 지장굴, 라한굴, 신중단으로 불리며 일반 절과 같이 전각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11교구 골굴사는 안에는 세계선무도 협회 선무도 대학이 있으며 연중 수시로 선무도 수련회에 참가할 수 있으며, 방학기간에는 청소년을 위해 특별수련회가 개설된다.
원효스님 열반지 대한 불교 조계종 11교구 골굴사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산304-1번지
총본원 전화 : 054-744-1689
세계선무도협회 선무도 대학 수련회 안내 054-745-0246
골굴사 마애석불
한국판 돈황석굴인 골굴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애석불 가까이 가려면 가파른 석회암벽을 올라가야한다. |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폭 2.2m 정도의 마애불상(보물 제581호)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서진다한다. 지금은 더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둥근 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이 설치하였다. 오랜 비바람에 의해 오른쪽 귀와 오른 손, 가슴 등의 조각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나 뚜렷한 얼굴 윤곽과 이 산의 이름같이 '초승달을 입안에 머금은 듯'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은 가파른 암벽을 기어올라 온 방문객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있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 만큼의 소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는데, 원효대사가 돌아가신 곳이 '구멍 절', 혈사(穴寺)라고 하며,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골굴사는 일반적으로 원효의 열반지로 알려져 있다. 49일 재를 앞두고 한국사상 순례를 떠난 불효자는 선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마애불상전에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지장보살, 나무 원효성사'를 부르면서 삼배를 드렸다.
새롭게 난 14번 국도를 시원스럽게 따라 올라오면서 원효스님과 혜공스님의 재미난 일화를 보듬고 있는 오어사를 찾아갔다. 아침 일찍 대구를 떠나 원효스님과 수운 최제우선생님을 찾아서 경산 제석사와 경주의 용담정 그리고 분황사를 거치고 토함산 석굴암을 넘어 함월산 골굴사를 지나 이제 마지막으로 포항 오천의 오어사를 찾은 시각은 거의 저녁 7시가 가까웠다. 포항시에서 내려오려면 포항에서 포항제철소를 지나 청림삼거리에 가면 직전하면 구룡포, 우회전하면 오천 가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오천읍까지 계속 직진하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오어사 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오어사 - 원효스님의 기이한 일화가 서려있는 절.
[원효교와 혜공교] |
오어사! 절 이름이 재미있다. 나 '오(吾)', 고기 '어(魚)', 절 '사(寺)', 곧 '내 물고기'라는 오어사는 일찍이 신라 4대 聖人이라 불리는 자장율사, 원효대사, 혜공대사, 의상대사가 함께 머물러 수도했던 곳으로 특히 원효대사와 혜공대사의 재미있는 설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오어사는 신라26대 진평왕때 자장율사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였는데 오어사로 개명된 데 대해서는 원효와 혜공의 일화가 전해진다.
오어지(吾魚池)를 왼쪽에 끼고 지나가면 새로 만들어진 다리를 두 개 건너는데 그 다리의 이름이 원효교와 혜공교이다. 오어사는 바로 그 저수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절 바로 앞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절 바로 뒤에는 가파른 경사의 아름다운 운제산이 있다. 호수와 산과 절의 모습은 선경(仙境)을 자아내고 있다. 오어사에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조선 영조17년 (1741)에 중건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종각(가학루), 삼성각, 응진전, 산령각이 있다. 절 옆에 있는 깎아지른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절 뒤편 바위 위에 올라 있는 암자 역시 선경처럼 아름답다. 절 안 쪽 뒤에 있는 구름다리를 지나 오어지를 건너 10여분 걸어가면 바위 밑에서 솟아오르는 약수를 만나게 되고 조금 더가면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던 고기모양의 특이한 현판을 한 원효암을 보게된다.
똥으로 물고기를 살려내다. - "저 물고기는 내 고기야!"
오어지를 바로 앞에 둔 오어사는 운제산과 오어지와 만나는 곳에 선경을 만들고 있다. |
삼국유사 제4권 [의해편]에 나타난 오어사는 고승 혜공의 흥미진진한 행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날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 가기 위하여 운제산 계곡에서 원효암이라는 초가를 짓고, 불철주야 열심히 정진하던 차에 혜공선사는 중국에서 부처님의 전업을 이어받은 인가를 받아와서 70명의 대중을 공부를 시키고 오어사에 거주하던 중 하루는 두사람이 운제산 계곡 맥반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정진하던 중 혜공이 마음이 동하여 원효에게 물었다.
"대사는 중국에 가서 인가를 받아 오려면 부처님의 대법을 이을 수 있는 신통한 여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법력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세" 그러니 원효가 "그럼 무엇이든지 법력을 겨루어보세" 라고 해서 명경지수가 흐르는 계곡에 산고기가 노니는데 그 고기를 한 마리씩 산채로 삼켜서 바위 끝에 앉아 대변을 봐서 산채로 고기가 나오면 이기는 걸로 했다. 그리고는 팔을 걷어 부치고 계곡에 뛰어들어가 서로 한 마리씩 고기를 나누어 삼켰는데 두 마리 고기중 한 마리는 살아서 나오고 다른 한 마리는 죽어서 나오게 됐다. 그런데 살아있는 고기가 활기차게 상류로 올라갔다. 그 고기를 보고 대사가 서로 떠밀면서 " 저 고기가 내 고기야" 라는 말에서 오어사 라는 말이 삼국유사를 썼던 일연스님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분주한 저녁의 절 마당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나 합장 인사드리고 여쭈었다.
"저는 고등학교 윤리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윤리사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침 원효스님의 현장을 찾아오다가 이곳까지 들렀는데 원효스님과 혜공선사께서 삼킨 물고기를 대변으로 살려냈다는 전설이 이 오어사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두 스님께서는 이 절이 있기 전에 그런 신통을 부렸습니까? 신통을 부린 후에 이 절이 생겼습니까?"
[오어사에 있는 원효스님가 쓰던 삿갓] |
[오어사에 있는 원효스님가 쓰던 수저] |
내가 만난 스님들은 항시 친절하셨는데 오어사의 그 스님은 퉁명스럽게 대답하신다.
"그런 신통부리는 이야기는 선생님만 아시고 아이들에게는 갈치지 마소. 어린 아들이 스님들은 요술이나 부리는 사람으로 알 꺼 아잉교? 요술 같은 이야기 집어치우고 그저 자기 마음 구하는 일에 전념토록 가르치소."
무안을 당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얀 스님일세' 속내를 들어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듣자하니 그 말씀이 백 번 옳았다. 나는 무엇을 찾으러 아침 일찍부터 대구에서 경산 제석사로 경주 분황사, 함월산 골굴사 그리고 이곳 포항 오어사까지 왔던가? 원효를 찾았는가? 내 마음을 찾았는가? 성불하시라는 합장 인사를 드리며 원효암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너무 늦은 시간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기다리신다. 오어사에서 나와 오어지 둑에서 오어사를 다시 돌아보았다.
[원효암 가는 길] : 오어사 경내 뒤뜰에서 오어지를 건너면 원효스님이 기도하고 살았다는 원효암으로 갈 수 있다. |
"궁 --- 궁 ------" 범종소리가 들려온다. 저녁 7시이다.
원효도 찾지 못하고 내 마음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시는 어머니를 찾으러 나는 가야만 한다. 오어지에는 잔물결이 일어나고 내 마음에는 평화로움이 젖어든다.
[출처]한국사상현장순례http://korearoot.net/sasang/index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