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선이라는 감독이 있다. 과거 광주(光州)의 희생자와 기지촌 사람들의 얘기('오 꿈의 나라'), 비전향 장기수('선택')에 관한 영화를 만든 이력이 있다. 젊었을 때는 영화 때문에 구속되기도 했었다. 운동권 감독이라 불러도 무방할 경력이다. 그가 오랜만에 영화를 만들어 개봉 중이다. 이번 영화는 1997년 이태원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 사건 얘기다. 영화 제목이 '이태원 살인 사건'이다.
영화 내용은 이렇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열심히 살던 대학생이 이태원 햄버거집 화장실에서 9군데나 찔려 죽는다. 담당 검사는 멕시코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미군과 무늬만 한국인인 교포 청년, 두 명의 용의자 사이에서 고민한다. 결국 그는 후자를 범인으로 확신해 기소한다. 재판에서는 "재미삼아 죽였다"는 증언이 나오고 피의자에겐 사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피의자는 무죄 석방되고, 나머지 한 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우리가 죽였어요. 하지만 난 아냐"라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분명 죽은 사람이 있고 범인은 둘 중 하난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정도에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영화를 보지 않고도 대략 감(感)을 잡을 것이다. "아, 운동권 감독이 만든 반미 영화로구나. 미국은 자기네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소파(SOPA) 협정을 들어 시시콜콜 한국 정부를 압박할 것이며, 한국 정부는 대충 사건을 얼버무리려 했겠지."
하지만 영화는 철저히 기대 혹은 예상을 배반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감정을 배제하고 영상으로 수사기록을 들춰 보여준다(이 점 때문에 범죄드라마로서의 긴장은 좀 떨어진다). 미군범죄수사대(CID)는 사건 직후 용의자를 검거해 한국에 넘겨준다. "미군 때문에 범인을 못 잡았다"는 얘기는 못하게 돼 있다. 혼혈아 미군과 교포 청년은 미국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영화는 "미국이 이 괴물을 만들었다"고 우기지도 않는다.
하긴 반미(反美) 코드를 넣고 싶었다면, 미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동두천 윤금이씨 사건(1992)이 더 맞춤한 소재였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미국인이 범인인 사건을 다루되, 그저 '양키 고 홈' 같은 1차원적 감정 배설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감독이 묘사한 사건 당시 대한민국 수준은 이렇다. 사건 현장 보존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나라, 영어로 심문할 경찰이 없어 의경이 피의자를 심문하는 나라, 수사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나라. 그러니까 이 사건이 미제로 남은 건,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허술한 체계 때문이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반미 영화를 가장 잘 다룰 것 같고, 다룰 '자격'이 있는 감독이 자신의 장기(長技)를 버렸다는 건 일종의 충격이었다. 반미 정서는 요즘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흥행 영화에서 나타난 미국의 이미지는 대개 부정적이다. 영화 속 그 나라는 쑥대밭이 된 한국 땅에서 바비큐파티나 벌이고(영화 '괴물'), 주먹을 부르는 얄미운 운동선수들이 많은(영화 '국가대표') 그런 나라다.
재미있는 건, 반미 영화가 많은 것 같아도 "미국은 우리에게 대체 뭔가" 하는 주제를 제대로 따져 물은 영화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가 지적(知的) 액세서리가 되고, 돈도 되는 시대. 그러나 '이태원 살인 사건'은 뻔한 반미 방식을 버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공허한 반미 구호를 버리고 대신 우리 안의 모순을 들여다보고, 해결을 촉구한다.
며칠 전, 이 영화에 자극받아 '검찰이 12년 전 이태원 사건의 수사기록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감독은 죽은 자의 해원을 위한 작은 걸음 하나를 내디딘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팝콘 같은 반미 영화에 식상한 관객들에겐 작지 않은 선물이다. 이런 게 바로 진보적 영화만들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