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몽진(蒙塵)과 재조산하(再造山河) 》
월드킹 위기에서 지도자가 내려야 하는 “현명한 결단력”은 중차대한 것이다.
우리 역사의 길목들에서 아이러니 했던 인연(人掾)들을 돌이켜 본다.
몽진(蒙塵) : 머리에 뒤집어 쓴 흙먼지를 털어낼 겨를도 없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임금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말짱 도루묵 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아들로서 명종이 죽기전에 세자 책봉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압박으로 어부지리로 왕이 되었는데, 쓸데없는 자존심은 높고 질투심 많고 무능했으나 잔머리를
굴리는데는 능했다.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을 불러서 익선관(왕관)을 써보라고 했을 때, 형들은 받아 썻지만, 하성군 이군
(훗날 선조)은 어떻게 감히 쓸 수가 있느냐고 답해 점수를 따게 되었다.

청나라를 세운 태조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만주)족의 추장으로 있을 때 당시였던,
425年前 1592年 임진년(선조25) 4月 13日 임진왜란(壬辰倭亂)과,
420年前 1597年 정유년(丁酉年) 8月 27日 정유재란(丁酉再亂)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신립 장군이 이끌던 8천 병력이 왜군의 4만 병력에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멸을 당한 후, 허겁지겁 의주까지 도망친 선조, 그가 당시 남겼던 詩 한 수.
국사창황일(國事蒼黃日) : 국사가 창황한 날에
수능곽이충(誰能郭李忠) : 누가 능히 곽 ․ 이(장군)의 충성을 다할 손가
거빈존대계(去邠存大計) : 도읍 떠남은 큰 계책 위함이라
회복장제공(恢復仗諸公) : 회복됨은 제공을 믿을 뿐
통곡관산월(慟哭關山月) : 관산의 달 보고 통곡하고
상심압수풍(傷心鴨水風) : 압록강 바람에 상심하노라
조신금일후(朝臣今日後) : 조정 신하들아 금일 이후에도
상가갱서동(尙可更選) : 오히려 다시금 서인이니 동인이니 할 거나

제하분주(濟河焚舟)
적을 치기위해 강을 건넌 다음에 다리를 불살라 버린다는 뜻으로, 목공(穆公)이 진(晉)나라 정벌에 나섰을때에
군대가 황하를 건넌 다음 배를 모두 불살라 버리면서 살아 돌아가기를 기약하지 않는 굳은 의지를 보였던 것이
계기가 된 말이다.
그러나 몽진길에 임진강을 건넌 후 배를 모두 불사른 선조는 싸움이 아닌 도망이었고 왜군의 추적을 방해
하고자는 의미였으나 피난길의 백성들이 뒤따르지 못하게 되었기에,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했으니 그 의미가 정반대였다.

삼도(三都: 한양, 개성, 평양)가 왜놈들의 만행에 짓밟혔던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조선은, 하늘과 신령이
돕는다는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이순신 장군의 맹활약이 이어지고, 때마침, 1598年 8月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가 사망하고, 9月 명량해전에 이어서 11月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과의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조선인 출신 이성량(李成梁)과 그의 아들 이여송 장군
청나라 만주족(여진)의 성씨 중에는 사는 지역에 따라서 서림각라, 격륜각라, 애신각라 등이 있다.
이중에서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일구었던 자신의 조상이 신라에서 건너 온 것을 알고, 유난히 조선을 같은 동본의 나라,
어버이의 나라, 형제의 나라로 알고 여러 경로로 그 표현을하며, 조선의 벼슬을 얻고 싶어했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명예뿐인 벼슬을 왜? 선조는 내리지 않았는지 지금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女眞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인 金씨의 후예 이기에 나라 이름을 金으로 정하였고,
그 또한 청나라를 세우고서 정통성을 잇기 위하여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고 정한 것은 결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니다고 본다.
고려에서 건너왔던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와 김씨들과 함께 금나라를 창업한 완안씨들 역시 시조가
고려인으로서, 백색을 숭상하는 겨례의 정신은 서로 이어져 있으며, 밝고 변치 않는 金의 고귀한 특성을 따서
나라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17세기 초, 300여년간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요동을 22년간 지켰던 이성량의 무공이 높아 명나라 2백년 동안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성량의 고조부가 우리나라 이산(理山)지역 독로강가(지금의 강계땅)에 살다가 살인사건으로 요동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갔고, 그의 부친은 변경을 수비한 공이 있어 유격(遊擊)이 되었고, 자신은 음직(蔭職)으로 소싯적에
오랑케를 공격해서 포획한 공이 많아 험산보 참장(險山堡 參將) 으로 기용 되었다.

(이성량 부자가 다스렸던 요동의 광활한 땅)
1567년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우리나라를 왔다가 돌아갈 때에 압록강가에 까지 전송하면서 법으로 정해놓은
호위군사의 수효를 줄이고 남게 되는 말을 가져버렸고, 청렴했던 허영량은 국가재정을 사유화했던 것을 문제
삼아 이성량을 탄핵하려고 했다.
조선의 역관 곽지원이 북경을 왕래할 때마다 이성량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그 인연으로 곽지원은 성량의
부탁을 받고 허영양을 찾아가 잘 무마 시켜주었다.
첩의 아들이라 서자였던 이성량은, 그 후 두어 해가 못되어서 공을 세우고 요동 총병(摠兵)이 되어
지역을 천 리나 개척해서 다섯 곳에 보(堡)를 세워 백(伯)으로 봉함을 받았고, 아들과 사위 중에 고관으로 된
자가 수십 명이었으며 이들의 위세가 동쪽 지역을 덮어 사십 년 가량 부귀와 영화를 누렸는데 겨룰 데가
없었다고 한다.

이성량은 전투중에 길안내를 하던 부자를 잘못 죽였는데 그들이 바로 누루하치의 조부와 부친이다.
이에 미안한 생각에서 루루하치가 15세때에 거두어 길렀고 산해관을 지킬때에 호위병으로 썼다.
그가 이성량의 발을 씻겨주다 발바닥에 세 개의 붉은 점을 발견하고 자신도 발바닥에 점이 7개가 있다고 말하자
이성량은 누루하지가 천자의 운을 타고 났다고 여기고 죽이려고 했으나, 다행히 이성량의 첩인 화란의 귀뜸으로,
누르하치는 기르던 개와 함께 야밤에 말을 타고 도망쳤으나 그 말도 지쳐 죽었고, 누르하치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성량의 추격군이 산에 불을 놓아 위험에 닥치자 개가 개울가에서 몸에 물을 묻혀와서 주인의 주위에 타 들어
오는 불을 꺼주고 까마귀떼가 날아와 그의 몸을 덮어서 감추어 주었다고 하여, 지금도 만주족들에게는
개와 말 그리고 까마귀가 신성시 되고 있다.
이성량의 밑에 부총병(副摠兵)이었던 조승훈이 3천 병력으로 고니시의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에
돌입했다가 거의 전멸 당하고 도망갔고, 명나라 조정도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이번에는, 냥샤에서 위구르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와 실전으로 단련되어 전투력이 우수한 4만3천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던
장군이 바로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이었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 명군이 죽인자의 절반이 평양성의 백성이었다고 한다.

서로가 티격태격 하다가 결국 성을 비워주기로 협상을 보았으나, 처음 입성했을 때의 고니시 왜군은
1만8천여명 이었으나 평양성을 퇴각 할 때에는, 협상에서 배제된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이여송의 참모장
이녕에게도 358명이 또 죽어, 불과 6천여명만 살아서 도망갔다.

계사년 정월에 (1593, 선조26)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한 왜군이 부산 동래 해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에,
10月에 영의정에 오른 서애 류성룡에게는, 피폐해진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책무가 있었다. 취임 다음달인
11月에 찾아 온 명나라 사신은 양위를 하든지, 분할역치(分割易置)하라며 협박하였으나, 류성룡은 이를
잘 설득하여 보냈고, 돌아간 사신이 선조에게 보내 온 편지다.

“이위위임류모필유 재조산하
(以爲委任柳某必有 再造山河)”
류성룡의 난국수습 능력을 본 사신은, “류성룡에게 일을 맡기면 나라를 반드시 중흥케 하리라!”는 당부였다.
철저한 기회주의자, 친미. 친일파, 깽단 두목노릇하며 하와이 동포들의 피를 빨아 재산을 갈취했고, 임시정부의
등에 칼을 꼽고, 독립자금을 빼돌려 착복하며 탕진했던 민족반역자는 맥아더에게 줄기차게 구애편지를 보내서
접촉하여 온갖 반칙으로 급기야 대통령을 차지했으나, 1950年 6.25가 터지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6.27 기차로 대구로 도망갔다가 다시 또 대전으로 올라와서. 뒤따라 온 3부요인과 합류했다.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고 방송국의 빈테이프만 외롭게 돌아가게 만들고서,
6.28 새벽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4천여명 중에 800명이 즉시하게 만들었다. 인민군과 전투를
하고 있던 이북의 국군 3개 사단은 이 소식에 당황하여 무너졌고, 한국군 주력부대는 조기에 퇴로를 차단 당하여
파죽지세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무너졌다.
7.1 새벽 3시에 전북 이리까지 승용차로 갔다가 7시간을 기다려 다시 기차로 목포까지 간 후에 작은 소해정을
타고 부산으로 건너갔다.

이렇듯 이승만이 도주하자 전쟁지휘부는 수원 야전사령부, 대전의 정부, 부산의 이승만, 도쿄 맥아더 사령관
4개로 쪼개져 중구난방이었다.
이승만의 몽진(蒙塵)은 너무나도 치졸했다. 그래도 선조는 몽진 계획을 부하들의 건의를 받은 형식이라도 거쳤다.

구치소로 향하던 박근혜는 뒤집어쓴 흙먼지를 털어낼 겨를도 없었던 것일까?
올림머리는 풀어져 있었고, 표정은 밀납인형과 흡사하여 보기에도 징그러웠던 몰골은 나도 모르게
몽진(蒙塵)을 연상케 했다.
청일전쟁(淸日戰爭 )
1894년(갑오년) 동학농민혁명때에 민주화를 거부했던 명성황후는 청과 일본의 왜세를 끌여들여 백성의 귀한
목숨들을 쓸어버린 만행을 저질렀고, 최재우 전봉준 등이 이끄는 혁명군이 진정된 후, 양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무시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청군을 공격하여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여 청군은 후퇴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경기도
여주 출신의 민자경 살해사건
국정농단의 원흉 민비의 처참한 죽음은 엇나간 과욕의 자승자박과 일본의 침략 야욕이 버무러진 결과였고,
우리 민족은 12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폐해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10년 경술년의 국치(庚戌國恥)
2월 22일 일본제국, 독도를 병합하여 '다케시마(竹島)로 이름을 고치고, 5월 27일 쓰시마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대승하였고,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새와 짐승마져 슬피 울었다.

18세에 동학농민 혁명에 참여했던 백범 김구 선생은,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메달려 잡은 손마저 놓은다면 가히 대장부다”며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 고능선으로부터 부족한 과단성을
키워 결단력이 생겼고, 24세 떄에 조선인으로 위장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던 일본군 중위인 쓰치다 죠오로오를
죽이고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유랑하던 중에 완도 삼두리에 들러서 우리 할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셨고
(믿거나 말거나), 고금도에도 들렀다고 한다.
백범은 감옥에서 일본순사에게 고문 당하는 고통속에서도, 저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구나”라는 생각에서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성량에게 누르하치가 죽었다면? 후금과 청나라는 태어날 수 없없고,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때에 개망나니 인조가 쿠테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리와 친하게 지내자는 후금의 구애를 인조가 뿌리치고 후금의 군사와 백성을 붙잡을 때마다 명나라에
바치며 아부를 떨지 않고, 적절하게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1627年 1月 (정묘년, 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과
1636年 12月 (병자년, 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때의 삼전도의 굴욕 없었고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볼모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선조 – 광해군 – 인조로 이어지는 역사의 데목에서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2017年 정유년은 육십갑자로 (六十甲子)로 헤아려 34번째이며, '정’은 적이므로 ‘빨간 닭의 해’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위기가 닦칠때마다 그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뒤 따랐고, 나라를 망친 간신이 있으면,
슬기롭게 국난을 극복해왔던 충신 영웅들이 있었다.

사드와 같은 중대한 문제의 결정을 오락가락 하거나, 차분하고 냉정해야만 하는 순간에 붉으락 푸르락 안색이
변하고 손이나 떨고 있거나,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듭하여 틀리게 호명하는 정도의 정신력과
강단으로 어찌 나라를 올바로 이끌 수가 있겠는가?
이런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바라본 국민들은 안정감을 찾을 수가 없다. 정신들 똑바로 차려야 한다.
993년 80만 대군으로 으름장을 놓던 거란의 적장 소손녕의 진군을 찾아 슬기롭게 담판을 지어 풍전등화
(風前燈火)의 처지가 된 고려를 구했던 서희와 임진왜란 때의 류성룡과 이순신 장군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서
재조산하(再造山河)가 필요한 때다.
과연 누가 이 나라를 구해낼 것인가? 그 영웅을 기다려 본다는 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