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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온통나무생태건축 원문보기 글쓴이: 머로
군자정
출렁거리는 물은 푸른 구슬처럼 빛나
정자 받치는 돌 모래는 백옥 상일세
벼랑에 핀 꽃은 꿈에 본 신선들 웃음
산에서 지는 잎은 곡수에 띄우는 술잔
반쯤 취해 보는 외로운 초승달 푸르고
삼신산 신선나라 예서 멀지 않을 듯
망아지는 향기로운 꽃길에서 가는 듯 조는 듯
새 옷 입은 숲은 서쪽을 가리고 누웠는데
君子亭
亭前염염碧파光 亭下盤陀白玉床
巖花似笑仙源夢 山葉堪成曲水觴
半醉靑華孤鶴月 朗吟玄圃六鼇霜
五馬遲遲芳草路 新林高土臥西壓
癸亥春日 知縣 尹守正
서원과 정자
박 중 현
1. 서원의 설립
중종 36년 5월 22일(정미) 주세붕(周世鵬)을 풍기 군수(豊基郡守)에 제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풍기는 안향(安珦)의 고향인데, 주세붕이 안향의 옛집 터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하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였다.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식을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당초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 경사(京師)에서 책을 사다 두었는데, 경서(經書)뿐만 아니라 무릇 정?주(程朱)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권과(勸課)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한국에서 서원이 생긴 것은 1542년(중종 37) 풍기 군수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安珦)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짓고, 안향을 제사지내며 선비의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비롯하였다. 이 서원이 백운동 서원이었다. 이미 세종 때에도 서원이라는 명칭을 쓰고 사사로이 후진을 양성하긴 하였으나 후진 양성과 선현봉사의 기능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므로 서원이라 불리진 않는다.
서원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리학적 고급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 중기에 주로 설립되었던 조선조 최고의 학당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사학으로서, 물론 서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서원의 설립자는 대 유학자나 그를 흠모하는 후학이 설립과 운영의 실질적인 주체였다.
서원은 유교적으로 뛰어난 모범을 보인 선현을 모심과 함께 후학을 교육하는 곳이다.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것도 그들의 큰 뜻을 배우고 따르고자 함에 있었다. 서원이 참교육의 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세기 사화가 큰 계기가 되었다. 향촌에서 나름대로 공부하던 사림들은 성종 이후 중앙 정계에 등장하였으나 훈구 세력과 충돌하였고, 이는 사화로 이어졌다.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벽지로 유배되었다. 이들은 정치 참여를 포기하고 향촌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되었다. 서경덕, 이언적, 이황, 조식 등 명망있는 이들이 가르치는 배움의 장에는 많은 후학들이 몰려 들었다.
퇴계는 16세기 조선교학상의 진단과 사회상의 통찰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이 새로운 전기를 이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으며, 이에 대한 해답이 서원교육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퇴계가 서원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관학교육의 문란을 보고 나서였다. 조선건국 100년 뒤 관학 아카데미즘의 붕괴를 통하여 공교육제도로서는 교육본연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고 보아 서원교육을 제창하였다. 유학자 가운데 덕망과 經術이 있는 사람을 골라 수령으로 삼고, 서원육성의 책임을 맡아야 하며 수령은 각 고을의 명망있는 선비를 초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재생을 교육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원의 건립은 사림의 발의에 의하여 수령이 비용을 돕거나 적당하게 비용을 염출해서 하라고 하였다.
그는 백운동 서원의 사액을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중국에서 書院 崇尙이 그와 같은 것은 무엇이겠옵니까. 隱居하여 뜻을 구하는 선비와 道學을 講明하고 業을 익히는 무리가. 흔히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하여 많는 墳策을 싸짊어지고 생각하기에 한적한 들과 고요한 물가로 도피하여 선왕의 道를 노래하고, 고요한 中에 천하의 의리를 두루 살펴서그 덕을 쌓고 仁을 익혀 이것으로써 낙을 삼는지라. 그 때문에 서원에 나아가기를 즐기니, 저 국학이나 향교는 중앙 또는 지방의 도시 성곽 안에 있어서, 한편으로 학령에 구애됨이 많고, 한편에는 번화한 환경에 유혹되어 뜻을 바꾸게 하여,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어찌 功效를 書院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선비의 학문이 오직 서원에서 득세할 뿐만아니라, 나라에서 현명한 인재를 얻는 것도 또한 이 서원에서 구하니 저 國學이니 鄕校보다 우월할 것입니다.<국역 퇴계집>186
그러나 퇴계시대 이후에는 서원교육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퇴계시대의 서원은 근본적으로 학문의 진흥과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강학위주의 기능을 지녔으나, 17세기의 중기 서원은 강학 대신에 제향위주였고 이것은 서원이 남설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자파의 학문적인 정통성이 곧 서원 수에 의하여 과시되고 문묘종사(文廟從祠)와 서원향사(書院享祠)는 바로 당권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고 양반 계층은 향풍규찰을 앞세워 향권을 장악하는 수단으로서 서원을 경쟁적으로 확장하였다. 당벌과 지벌에 인연을 맺으려면 우선 그들 양반 자신들의 문벌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문벌은 향촌지배층으로 존속하기 위한 포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벌유지책이 강구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문벌의 상징조작을 위해서는 자기 조상을 발천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여기에 서원의 증설 남설이 불가피하였고 일단 형성된 문벌은 상호간의 통혼권의 유지와 확대로 계속적인 지위유지책이 도모되었다.
2. 서원의 목표
서원의 학칙이라 할 수 있는 원규에 의하면 교육 목표는 ‘법성현(法聖賢:성현을 모범으로 삼는 것), 양리(養吏:능력있는 관리를 기르는 것)’에 있었다. 서원의 주요 교육 목표인 법성현은 성리학 본래의 도덕적 인물의 양성에 있었다. 이를 위해 서원의 원생은 <소학>부터 읽기 시작하여 <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을 배웠다. 서원의 교육은 성리학 중심으로 그것을 근거로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천적 덕목으로 유교의례를 익혀 나갔다. 서원은 정쟁에서 쫓겨난 선비들의 재기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는 결국 조선 후기 붕당 간의 타툼이 치열해지는 공급원의 역할을 하는 역기능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황이 “국가에서 현인을 얻는 것은 서원에서”라고 하였던 것은 ‘양리’ 또한 서원의 중요한 교육 목표였던 것이다.
서원은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교육 기능보다 사묘(祠廟)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문중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제향되면서 학덕이 있는 인물보다는 충절로 이름이 높은 인물을 배향하였다. 이에 따라 서원은 교육의 기능보다 이들을 받들어 모시는 기능이 중시되었다. 충효를 중시여기는 조선 사회에서 특정 위인이나 선현을 받들어 모시고자 하는 崇賢思想은 사묘제도를 낳았다. 사묘는 생사(生祠), 사우(祠宇), 영당(影堂) 등의 형태가 있다. 생사는 업적이 뛰어난 인물을 기리는 사당의 형태이며, 사우는 국가 발전에 공이 큰 인물을 모시는 것이다. 조선 후기 일부 사림은 문중 또는 향촌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정당화하고, 우세화하기 위하여 문중의 인물, 향촌의 인물을 기준도 없이 선정하였다. 또 별다른 연고도 없는 사람을 빌려 오거나 배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서원의 격이 떨어지기도 하였으나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손이나 문중에서 다투어 건립하였다.
서원의 설립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 서원의 본래 목적과 어긋나게 향사 중심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상감사 임담이 치계하기를
우리나라에 서원을 세운 것이 가정연간에 시작되었는데 맨 처음 창건된 것은 열 군데에 불과하고, 또 모두 조정에 보고하여 향사의 예전을 밝게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력 이후에는, 사당을 세운 것이 해마다 더욱 많이 불어나서 고을마다 즐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폐단이 널리 퍼져 심지어는 논의가 공정하지 못한 데 까지 이르러, 혹 벼슬이 높은 사람이면 향사하고, 혹 세력있는 집안 사람이면 향사하여, 서로 다투어 제사지내는 것을 일삼아 이것을 가지고 서로 자랑하며, 또 그를 인하여 사사로이 명예를 세움으로써 배척과 훼방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선비들이 옛 성현의 도를 본받지 않아서 세도가 날로 무너져 감으로써, 어진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의리가 사당으로 바뀌는데도, 조정에서는 묻지도 않고 관리들은 금하지도 못하며, 습속이 점점 투박해지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중국에서는 유현이나 명신으로 향사의 예전을 베풀기에 합당한 자에 대해서, 독삭관이 자세히 조사하여 반드시 먼저 조정에 보고한 다음에야 사당을 세워서 향사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새로 사당을 창건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도의 선비들이 함께 의논한다음, 본관에서 서장을 바처 낱낱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다시 조정에 상주하여 비준을 얻어야만 허가를 해주서서, 그들로 하여금 사적으로 서로 다투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데, 이런 폐단은 다른 도에서도 모두 그러하니, 한 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여기에 관한 일을 성헌으로 만들어서, 각도 각읍이 일체 이 법을 준행하게 하도록 예조에 내리소서
하였다. 예조판서 이식등이 회계하기를,
서원을 설치하는 것은 당초에 학문을 하고 심신을 수양하는 선비들을 대우하기 위한 것이니, 사당을 세우고 높이 받들어 향사할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 시대에 밝게 알려져서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을 해당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선비라는 사람들은 학문을 인삼지 않고, 향사되는 사람은 혹 당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여, 사원은 많으나 사문은 더욱 침체해지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지금 이 장계에서 논한 것이 실로 일리가 있으니, 지금부터 새로 창설하는 곳에 대해서는, 모두 본조에 보고하여 조정에서 함께 의논해서 공론이 허가를 내린 다음에 창설허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또 각조의 사원에 대하여 일찍이 본조에서 공문을 보내어 물어보았던 것은 향사되고 있는 선현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였는데, 시골 사람들이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서 많이 기피해버리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하여 향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타당합니다. 타도의 감사들에게도 일체 이런 내용을 주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실록> 인조 22년 8월 4일
3. 서원의 변질
서원에 향사되는 것은 <先生>으로 표시되는, 만인이 수긍하는 교육적 인간상이었다. 적어도 초기의 서원은 그 향사하는 인물이 이러한 기준아래 선택되었다. 후세의 서원남설은 이러한 기준이 무너진 것이고 國士의 서원시대가 사라지고 鄕士의 서원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학통이나 도통 대신 지연 학연 당연으로 인물이 선택되었다. 儒生들은 앞 다투어 별 연고도 없는 ‘主享’을 빌어오고 별로 내세울 만도 못한 ‘從享’을 두어 추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유생들은 인격을 받들기 보다는 서원 그 자체의 존재를 ‘향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림공회’를 열고 때로는 중앙 정계의 상황에 따라 '淸議'라고 하는 일종의 정치여론을 조작하거나 '是非'라는 형식으로 문중간의 파벌싸움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또 儒通이라는 글을 돌려 유림간의 분파를 조장하였다. 이것은 숙종 이래 성행하여 드디어 국정을 좌우하는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서원의 성격이 변질된 것은 조선왕조체제의 해체상과 함께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여러 가치의 변화, 사회?경제적 변화는 서원만의 고유성을 보존할 수 없게 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조가 500 여 년 간 유지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서원을 중심으로 한 도덕 윤리적인 학문분위기가 있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서원은 선비의 집단이었음으로 엄격한 ‘禮의 질서’와 까다로우나 정의로운 문화적 동류의식을 필요로 하였다. 여기에 독특한 서원문화, 서원풍속지(書院風俗誌)가 생겨났다. 이들은 무엇보다 가치동일시의 인물설정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수요충족에서 생산된 것이 학통이다. 사류가 된다는 것은 향촌사회에서의 지배층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배층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도 서원배경은 필요하였다. 그러나 양반은 탄생하는 것이지만 사류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류로서 신분 우위를 재생산할 수 있는 길이 학문이다. 이들의 학문은 과거나 벼슬을 하지 못하여도 지배계층으로서의 신분을 영속화시키는 방법이다. 서원은 중심으로 하여 더욱 긴밀하고 유대있는 조직기반을 형성하였다. 좋은 서원문화가 꽃필 때는 이러한 서원기능이 순조로울 때였으나 전기의 서원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정신생산이 빈곤하였던 것 사실이다.
서원의 교육 목표는 성리학의 교육 목표에서 우선 찾아 볼 수 있다. 현상윤은 조선 유학사에서 성리학의 학풍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 ‘存養’ 은 尊心養成을 힘쓰는 것이다. 선량한 마음을 보존하고 천부의 본성을 기르는 것으로 수양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처함에 도로지 ‘不目欺’를 위주하였고 몸을 가지며 일을 행함에 한결같이 ‘誠敬’을 힘썼던 것이다. 당시의 유학자들의 학문은 ‘爲人之學’ 즉, 남을 위한 학문이었는데 비하여 이들 理學者의 학문을 ‘爲己之學’ 즉,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한 학문을 가장 특색으로 하였다.
둘째로, ‘窮理’ 는 道理를 窮究하는 것이다. 인식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지식을 확실하게 하는 것으로 우주의 根本原理를 탐구하며 또 天人의 관계를 간파하고 人生當爲의 본분을 발견코저 하였던 것이다.<조선유학사, p.2>
서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교육 과정과 같은 것으로 퇴계는 ‘이산원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퇴계의 가르침은 후에 서원의 필수 교육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유생들이 독서하는 데는 四書?五經으로 본원으로 삼고, 小學?家禮로 門戶를 삼아서,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을 좇고, 성현의 친절한 교훈을 지킨다. 마가지 착한 것이 본래 내게 갖추어 있는 것임을 알고, 옛 도리가 오늘날에도 실현될 수 있음을 믿어서 모두 다 힘써 몸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 할 것이다. 體를 밝히고 用을 적합하게 하는 학문을 할 것이며, 諸史子集, 文章, 科擧의 業 또한 역시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옆으로 널리 통하도록 힘 쓸 것이지만 마땅히 內外, 本末, 輕重, 緩急의 차례를 알아서 항상 스스로 격려하여 타락하지 않게 하고, 그 나머지 간사하고 요망하고 음탕한 글은 모두 院內에 들어가거나 눈에 가까이하여 도를 어지럽히고 뜻을 미혹하게 하지 못한다.’ <이산원규>
서원에서의 유생들의 학습방법은 자발적인 공부와 함께 이들에 대한 교수와 정기적으로 개설되었던 강회가 있다. 또 사우 간에는 편지의 형식을 빌어 교환된다. 이 때의 <편지>는 철학논문일 수 있다. 당시는 서로 마주하여 지식을 교환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고자 편지를 사용하였다. 편지는 사우 간이나 선배가 후진을 계도하고 평배간에는 상호 절차탁마하는 진지한 정의를 나누는 수단이었으며 학풍진작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교수는 강(講)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강이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義理로 문답을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암송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리를 터득하는 일에 중점을 두는 활동이다. 암기력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문답활동 등을 통하여 기계적 암기로 그치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강은 일대일의 대면학습이기 때문에 능력별 수업이 가능하고, 인격적 교류가 전개될 수 있다. 강을 받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는데 이를 講儀라 한다. 대표적인 '강석(講席)의 배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여숙강규(閭塾講規)와 강규는 강에 관한 짜임새 있는 저술이다. 이 중 서송(序誦) 면강(面講) 궤식(饋食) 행상(行賞) 강계(講誡) 파강(罷講)의 순으로 약기하면 다음과 같다.
가) 서송: 강장이 먼저 일편을 읽고 청강이나 중빈 가운데서 희망하면 읽게한다.
- 사강은 성명을 적고 읽은 편명을 강기에 적는다.
- 사례가 諸生가운데 한 사람을 호명하여 응강 토록 한다.
- 응강자는 강석 앞으로 나아가서 읍(揖)하며 이에 강장은 좌읍(坐揖)한다.
- 사례가 강장 앞에 나아가서 강서본권(講書本券)을 책상 위에 가려 올린다.
- 講長이 일편을 뽑아 송할 것을 명한다.
- 강생이 다 읽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講長에게 의의를 청문한다. 司講이 이를 강기에 기 록한다. 그리고 강사의 강록에서 강의의 대지를 기록한다
- 司禮가 과목을 환수한다.
- 응강자가 강석에서 물러나 읍하고 講長이 이에 답한다.
- 응강자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절차를 다른 한 사람이 반복한다.(...)
- 제생의 진강이 끝나면 司禮는 추첨통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뽑아 강석으로 나오게 한 다.
- 응강자가 이 대목을 외운다. 외우기를 마치면 다시 일어나 북향하여 앉아서 講長의 질 문을 받는다.
- 응강자가 공대한다(글을 잘 지을 경우에는 墨義로 대신할 수 있다).
- 講長이 강평한다. 司講이 강기에 이를 수록한다.
- 司禮가 과목을 환수한다./응강자가 자리에서 물러나서 읍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나) <面講> : 司禮가 面講書冊을 정하고(書史나 선현의 문집에서 전기하여 정한다) 이를 講長의 책상 위에 놓는다.
- 講長이 제생 가운데서 선독자 한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한다.
- 한두 단원을 뽑아 읽게 것 같으면 앞으로 나오게 하여 질문처를 읽게 하고 질문한다.
- 좌중에 질문자가 있을 것 같으면 앞으로 나오게 하여 질문처를 읽게 하고 질문 한다. (스스로 차록하여 가지고 올 경우에는 정름한다.)
다) : 司禮가 進食할 것을 청한다.
- 司設이 書案과 硏貝를 치우고 서적을 치운다.
- 司禮가 童蒙 2인을 거느리고 講長과 제위 앞으로 진찬한다. 제생이 회식한다.
- 식사가 끝나면 다시 강설로 환원한다.
라) <行賞> : 司禮가 행상할 것을 청하면 사상이 상을 받들고 司正의 오른쪽에 동향하여 앉는다. 講記에 의하여 音義가 俱通한 자 1 인을 호명하고 講長 앞에 북면하여 꿇어 앉게 한다(2-3人이 될 수도 있다).
- 시상하면 제자리로 돌아간다.
- 행상을 마치면 司賞은 '不通'자 1인을 호명하여 앞으로 불러 施罰한다.(撻三度이다.)
- 행실이 바르지 않는 자 역시 벌하고 司講은 '罰籍'에 기록한다.
마) <讀誡> : 司禮가 '講誡'를 청하면 司講이 나와서 높은 소리로 이를 읽는다.
- 四孟朔會 때에는 다같이 <강계>와 <향약>을 읽는다.
- 司禮가 한 사람을 추첨 호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주자의 <백록동서원강규>를 읽게 한 뒤 제자리로 물러나게 한다.
바) <罷講> : 司禮가 파강할 것을 청하며 강장이 강석에서 일어난다. 모든 함께 일어나 講 長에게 읍하고, 講長이 이에 답읍하면 곧 파한다(만약 講長이 무재하면 講長 자리에 '虛座' 를 만들고 다른 곳에 司講자리를 마련하여 그가 임시로 강의를 대행한다)
서원은 물론 학교 교육에서는 도달해야하는 교육의 목표가 있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평가를 실시한다. 다음은 교육의 수준과 이를 평가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讀書>
- 먼저 글 뜻을 明白히 應用에 通達 할 것.
- 한갖 章句에 얽매어 文義를 견제하지 말 것.
- 늘 四書?五經과 經史를 읽되 莊?老?佛?雜流 및 百家?子集은 읽지 말 것.
<製述> : 科擧準備敎育이 아니기 때문에 書院에서 드러내놓고 강조하지는 않았다.
- 달 마다 製述을 한다. 서원에서는 이를 ‘朔會’ 라고 하여 그동안의 學問的 所得을 서 로 講論하고 直月을 改定하였다.
- 初旬에는 疑?義?論을, 中旬에는 辭?表?頌?銘을, 下旬에는 對策?記를 짓는다.
- 製述은 簡嚴하고 精功하게 辭意를 達하면 되고 浮靡한 文體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글 씨는 楷書로 하여야 한다.
<講의 評價> : ‘大通’?‘通’?‘略通’?‘粗通’?‘不’의 5단계 또는 ‘通’?‘略’?‘粗’?‘不’ 의 4단계 評價尺度로 하였다.
- 大通 : 句讀에 밝고, 說明에 막힘이 없어서 一書의 趣旨를 두루 알고, 다른 책에까지 미치어 매우 밝게 알고 철저하게 通하는 경우.
-通 : 더할 수 없는 경지에 까지 이르지 못하여도 句讀에 詳明하고 說明에 막힘이 없는 경우.
-略通 : 밝게 알고 철저하게 通하지는 못하나 귀두가 분명하고 辭意가 通割한 경우
-粗通 : 句讀에 詳白하고 辭意는 깨달아 一章의 大旨는 알기는 하나 설명이 미진한 경우.
-不 : 낙제.
서원에 있는 모든 교수와 원생들은 서원에서 행동지침인 원규에 의해 규제되었다. 이들이 서원 내에서 생활하면서 지켜야 하는 내용 중 중요한 것을 다음과 같다.
첫째, 제사를 정성으로 받들 것. 정성으로 받들지 않으면 운감하지 않는다.
둘째, 어진 이를 예우할 것. 예우하지 않으면 어진 이가 오지 않는다.
세째, 사당을 수리할 것. 수리하지 않으면 보전하지 못한다.
네째, 창고를 잘 수비할 것. 수비하지 않으면 물자가 떨어진다.
다섯째, 서책을 점검할 것. 점검하지 않으면 책이 흩어진다.
(이 다섯가지에 하나라도 소홀히 해선 안된다.)
4. 서원의 조직
서원의 임원은 원규에 의하여 엄격히 조직되어 있었다. 전라도 정읍 무성서원의 원규에 따르면 원장 1인, 원이(院貳) 1인, 강장(講長) 1인, 훈장(訓長) 4인, 재장(齋長) 4인, 집강(執綱) 4인, 도유사(都有事) 2인, 부유사(副有事) 2인, 직월(直月) 2인, 직일(直日) 2인, 그 밖에 색장(色掌), 장의(掌議), 유사(有司)가 몇 사람 있어서 서원의 교육과 제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서원의 중요한 것은 원생들이다. 향촌의 교육기관으로 서원은 성균관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소수서원에서는 사마시 초시 합격자는 생원, 진사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 입학자는 幼學이었다. 이는 향촌에 존재하는 서원에서 전국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성균관처럼 많은 자격자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원의 남설 이후에는 대부분 유학이거나 자격 미달자도 등록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서원의 원생 정원은 확실히 정해진 바는 없다. 소수 서원의 경우 10인 내외로 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인원을 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원이 인정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국역 문제와 직결되므로 정원 문제가 국가적으로 논의를 일게 하였다. 많은 논의들이 있었으나 확정하지를 못하고, 숙종 36년에 사액서원 20인, 문묘종사유현서원 30인, 미사액서원 15인으로 결정을 내리고, 속대전에는 사액서원 20인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원생만이 아닌 서원의 노복으로 포함되어 국역을 면하는 자가 많아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영조 때 박문수는 간사한 백성들이 군역을 피하여 서원에 투속하는 자가 수 백에 달한다고 폐단을 논하였다.
5. 서원의 건축
서원 기능의 핵인 사당과 강당은 서원건축의 시작이다. 이는 서원의 설립이 선현을 봉사하고 아울러 유학강론에 주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사당과 현세적인 강당은 사원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서원에서 건립되었다.
또한 서원건축의 기본적인 배치구도는 서원이 입지한 지형이나 건립시기, 기타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전면에 강학구역을 두고 후면에 제향구역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으로 일관된다.
서원은 교육을 위한 장임과 동시에 자연과 벗삼아 생활하는 곳임므로 계곡이나 강을 낀 지역에 많이 자리잡았다.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정자를 지어 더운 여름에는 이곳에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도동서원처럼 경사지에 건설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1> 그러나 서원의 건축은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사진 2>를 통해서 알 수 있다.
6. 정자
정자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산수간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는 정(亭)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 잠시 머무는 장소인데, 산수간에 머문다는 의미에 더 큰 무게가 실려있다. 정자는 대(臺)나 루(樓)에 비해 구조가 간결하고 소박하며 규모가 작다. 그러나 정자의 가장 큰 특징은 사방이 트여있어 주변의 자연 경관을 막힘없이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천태만상이 털끝만한 것도 시야에서 도망하지 못하니 무릇 먼 경치를 바라보는 데는 정자만한 것이 없다.”고 되어 있다. 이 때 정자에서 보면 그 주변의 환경은 바로 정원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연경관 자체를 인문경관화하여 정원으로 삼게 된다. 이규보는 능파정기(凌派亭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물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물결 밑에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정자를 걸쳐 지은 다음 띠풀로 지붕을 덮었으니,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그림으로 장식한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다. 봄철 맑은 물에 일광이 내리비칠 때에는 수백 마리쯤 되는 물고기가 떼를 지어 에엄을치는데, 굽어보면 환히 보여 셀 수가 있으며, 가을 8~9월쯤 되어 나뭇잎이 반쯤 떨어지고 서리는 내리고 물은 맑은데, 단풍나무가 언덕에 늘어서서 물결 위에 비치매, 찬란하기가 마치 강 가운데 비단을 빠는 것과 같으니, 이런 것들 때문에 물 위에 있는 정자가 승경이 되는 것이다.
대자연은 근본적으로 소유자가 없다. 바람이건 달이건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것이다. 대자연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장소가 정자이다. 사방 트여있는 정자는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곳이면서 심신의 수양처이기도 하고, 술 잔을 들며 즐거움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의 <四輪亭記>에 네 바퀴 달린 정자 이야기가 나온다. 정자에 바퀴를 달아 이리저리 옮겨다니게 만든 것으로 건축미보다 그 위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규보는 바퀴를 넷으로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되 사방을 여섯 자로 하고, 들보를 둘, 기둥을 넷을 세우며, 대나무로 서까래를 삼고 대자리를 구 위에 덮도록 구상하였다.
이 정자의 의미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 것은 사람이 다 아는 바이지만 음양을 말하는 자가 수레를 비유하니 가로?세로의 보와 척까지 모두 들어 말한 것은 만물이 모나고 둥근데 들어가는 것이 모두 형기(形器)에 응한다는 것을 논하려 함이다. 또한 밑을 바퀴로 하고 위는 정자로 한 것은 바퀴가 굴러가게 하고, 정자로 멈추게 한 것이다. 행할 때가 되면 행하고, 그칠 때가 되면 그친다는 뜻이다. 또한 바퀴를 넷으로 한 것은 사시(四時)를 상징한 것이고, 정자를 여섯 자로 한 것은 육기(六氣)를 상징하는 것이며, 두 들보와 네 기둥을 한 것은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의 기둥이 된다는 뜻이다.”
한편 정자는 쉼터로서의 기능도 하였다. 넓은 논밭 가운데 서있는 모정이나 동구의 정자가 그 기능을 하고 있다. 논밭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잠시 쉬거나 새참을 먹을 때도 정자가 있으면 아주 쓸모가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시대에 험한 길을 걷노라면 발바닥이 부르트고, 더운 날 산길을 가노라면 갈증이 난다. 그러 때에 정자의 역할이 돋보일 것이다. 옛사람들이 산수 간에 정자를 세웠던 것은 자연 회귀의 심성을 나타낸 것이고, 자연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정신적인 즐거움을 찾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