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의 초원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본격적 시베리아 벌판
몽골의땅 '울란우테'
또 하룻밤을 달려왔다. 비가 내리고 있다. 여전히 마타리 꽃이 피어있고 술패랭이, 부처꽃, 구절초가 초원에 수를 놓고 있다. 10시경에 ‘치타’란 중소 도시에 도착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상큼한 공기와 담배 냄새가 여독에 찌든 때를 밀어내는 듯하다. 오후2시가 돼서야 블라디보스톡으로 부터 3천키로가 넘는 '브랴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테'에 도착했다. 1949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이어지는 철길이 건설돼 크게 성장한 도시가 됐다고 한다. 울란우테는 '붉은 강'이란 몽골의 말로 본래 몽골의 땅이었으나 청나라와 러시아간의 조약에 의해 러시아로 편입된 땅이 라고 한다. 세계를 제패했던 몰골제국이 근세에 와서 그힘이 빠지고 약소국이 되었다. 두 거대제국 사이에서 러시아에 넘겨줘도 속수무책 중구으로 넘어가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몽골민족이 어쩐지 모습만큼이나 짠해보이는건 무었 때문인가. 울란우테역 플랫폼에는 우리와 많이 닮은 몽골인들이 보이긴 한다. 그러나 몽골인보다 백계러시안인들이 대다수인 것 같다. 울란우테는 한인공산당이 창당된 곳으로 항일투쟁의 거점이다. 울란우테의 서쪽은 바이칼 호수다. 그러니까 바이칼 호수의 동쪽은 울란우테, 서쪽은 이루크츠크가 자리하고 있다. 바이칼 호수의 동쪽과 서쪽은 경제나 자연 생태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이곳에서부터는 그 많던 금마타리가 보이지 않고 대신 분홍바늘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있다.
달리는 기차에서 잡은 백자작나무의 도열과 금마타리꽃의 모습인데 잘 찍히지 않았디.
기차는 헉헉 거리며 달린다. 초원을 지나고 백자작나무와 소나무 숲을 지난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넌다.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는 초원은 물이 넘쳐난다. 우기라서 그런지 앞 다투어 피어나는 들꽃들과 간혹 보이는 목초지와 온갖 색의 소와 말들, 지붕이 하얀 작은 마을과 도시인들에게 나누어줬다는 ‘다차’주말농장들이 눈앞을 스쳐지난다. 민가주변에는 주로 감자가 꽃을 하얗게 피우고 있으나 감자줄기가 시원찮아 보인다. 거름이 없는 것 같은데 거름은 주로 풀을 베어 두엄을 해두었다가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엄무더기가 간혹 눈에 띄기도 한다.
주민들이 잡아서 염장한 연어알젓갈 100g에 우리돈 4000원이다.
일행들은 상당수가 농업관련자 들이라서 자연스럽게 해외농업에 대한 예기가 오갔다. 해외농업의 역사에서 현재상황까지 꿰뚫고 계시는 분이 게시기에 가능 한 일이다. 결론은 해외농업에대한 부정적 견해가 더 많았다. 이미 경험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정계에서 은퇴하신 한분이 필자에게드넓은초원을 보며 러시아 당국으로 부터 땅을 임대해 줄테니 농사를 지어 보라고 한다. 충분한 해외농업개발의 경험들을 가지고 계신 분들임에도 쉽게 그런 말이 나온다. 땅에 대한 포한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란다. “자갈논이라도 좋으니 내 땅 한마지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하는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다. 우리 농민들에게 땅은 그야말로 포한이었다. 그러나 이 초원은 긴 겨울과 짧은 여름 때문에 목초생산량이 많지 않아 목축업도 마땅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감자농사도 상업적 시도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우리민족이 이동한 경로보다 북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하는 브랴트주민들은 몽골계라서 그런지 우리와 많은 것들이 닮아있다. 명란젓같은 연어알젓, 그리고 멥쌀로 만든 서양의케익 같지만 두텁떡과 더 가까운 떡을 파는 여인네들의 모습은 고향역에 내려와 있는듯한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나중에 브랴트 원주민 식당에서 만난 러시아 스프와는 확연하게 다른 된장국 비슷한 국물과 그것을 담은 뚝배기가 또 한 우리와 닮아있다. 게다가 음식점을 장식한 목각장식들이 그냥 스치기에는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듯 해서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특히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목각조형물은 마치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 목각조형물이나 이지역 승마형동상들을 보면 '등자'가 없다. 눈여겨 본사람들은 안다. 무용총수렵도를 눈여겨 보면 분명 거기엔 등자가 있다. 등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전투능력에서 천지차이가 난다. 요즘 문제되고 있는 초현대무기체제라고 하는 사드와 같은 전천후 전쟁수행능력을 갖춘것이 '등자'라고 한다. 말위에서 두손으로 활을 쏘거나 무기를 다루는데 등자는 필수요건이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말발굽으로 정복할 수있던 가장큰 요인이 등자와 육포라고 하지 않던가.
역 인근마을 아주머니가 직접 만들어온 두텁떡
오! 생명의 시원 바이칼 호수
바이칼호
오후 9시가 되어서 바이칼 호수가 보이기 시작 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이칼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였다. 한반도의 삼분지일이 넘는 면적이란다. 사방250여개의 강과 하천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바아칼 호를 채우고 단 한 곳 앙가라강으로 흘러 예니세이강으로 빠져나간다. 오래전 해방투쟁과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다룬 라디오 드라마에서 주제곡으로 나오는 노래에 “예니세이강 어쩌구 바이칼 호에 해가 뜬다”. 뭐 그런 노래가 기억나는데 여기 와 보니 이해가 된다. 바이칼호는 시베리아의 갈라파고스라고 일컬을 만큼 생태계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있다. 대륙 깊숙이 내수면을 만들고 있어 생태계의 변화와 고립된 식생으로 인한 토종동식물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잠깐 서는 간이역엔 이곳에서 나는 청어 비슷한 '오믈' 이라는 물고기 절임을 파는 아주머니가 지나간다. 한 마리 사서 맛을 보려고 했으나 기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바이칼이 가까워 지니 그동안 보이던 '마타리꽃'이 보이지 않고 '분홍바늘꽃'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변화는 목초를 만들어 놓은 농장들과 얼룩배기 소들이 보이는 것이 동시베리아와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백자작 나무와 황금빛 소나무는 여전히 이들의 콧대처럼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9시 반 쯤 되니 바이칼호에 해가진다. 붉은 노을을 온통호수에 던지며 내일을 기약 하듯 수면 아래로 내려 않는다. 보통의 해넘이나 다를 바 없지만 생명의 시원이라는 생각이 깔린 탓인지 해넘이도 예사롭지가 않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해넘이를 하자니 참 고약하긴 하다. 그래도 흥분된 마음으로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다.
무용총의 수렵도를 연상케하는 목각조형물
이루쿠츠크까지 다시 3시간을 넘게 달려야한단다. 남북의 길이가 670km인데 환바이칼 철도의 한쪽 끝을 붙들고 마지막 숨을 헐떡거려야 한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일본군에게 참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러시아군은 환바이칼 구간철도가 완성되지 않은 탓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전쟁에 패한 것이라고 한다. 보급이 중단된 러시아군은 만주에서 나는 콩을 먹게 되고, 콩은 단백질은 우수하지만 '이소플라본'이라는 여성홀몬과 유사한 물질이 있어 여성화된 병사들이 전쟁에 지게 됐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삼일간의 기차여행 72시간을 꼬박 달려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루크츠크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내내 달려온 3일 동안 비가 무척이나 내렸다고 한다.
된장국과 뚝배기를 생각나게하는 점심식사.
조선공산당 창당의 秘錄을 엿보다.
이루크츠크 또한 해방투쟁과 독립운동가들의 핏방울이 떨어진 도시다. 우리에게는 별반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젊은 귀족장교들의 파리여행으로 러시아에도 경험주의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혁명의 기운이 고조된다. 농노들의 반란과 봉기를 이해하고 봉건제도를 타파하겠다는 젊은 혁명가들의 12월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그들은 유형의 도시 이르크츠크에 보내졌다. 그들을 '데카프리스트'라고 한다. 젊은 혁명가들을 따라온 그들의 여인11명에 의해 이르크츠크는 문화의 도시로 발전해 푸시킨에 의해 ‘시배리아의 파리’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런 문명의 도시에 혈기왕성한 조선의 지식인과 혁명운동가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1919년 항일무장투쟁과 한국공산당창당을 협의하고 이끌었던 것이다. 이후 22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이르게 된다. 중국보다 무려 7년이나 앞서 창당이 된 것이다.지금도 남아있는 당사 건물은 붉은 벽돌과 흰칠로 깨끗하게 단장돼 오페라음악당으로 사용중이란다. (이창주. 조선공산당 비사)
앙가라 강변에는 공원과 박물관들이 섞여있고 거리에는 레닌동상보다는 카자크인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카작크인이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 ‘스텐카 라진’이 생각난다. 볼가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 진격하는 농민군들에게반란의 당위성과 아름다운 공주와의 사랑을 그린 노래로 러시아 민요가 됐다고 한다. 학민사 대표 김학민에 따르면 유인태 전의원이 잘 불렀다고 한다. 1690년 카자크 농민군과 1980년 한반도 남쪽의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어떻게 동일하며 어떻게 달랐을까. 무엇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불렀을까. 더군다나 러시아에서는 데카프리스트 들의 혁명은 혁명으로 인정하지만 15~16세기 농민반란은 혁명사에 포함하지도 않는다는데 말이다. 어쩻든 이르크츠크를 개발한 사람들이 카자크인들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어떤 연유로 이곳으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아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한국공산당이 있던 건물
또 하나는 블라디보스툭에서 출발한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이루크츠크를 거쳐 갔다. 이르크츠크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자들은 해방투쟁으로 뛰어들었고 실패한 사람들은 죽음으로 대신 했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때의 기억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기차바닥을 뜯어내기 시작 한지 며칠 드디어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 구멍이 뚫렸다. 젊은 청년들이 기차속도가 나기전에 철로로 안전하게 내려야 한다. 첫 번째 사람이 잘못돼 팔과 다리가 잘려져 나간다. 그래도 탈출은 시도된다. 열차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그래도 뛰어내린다. 한 명, 두 명, 간신히 주인공도 뛰어내리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이르쿠츠크’와 ‘바이칼’ 그리고 ‘예니세이강’은 어린 내게 각인되었다. 그 현장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이 땅에 뛰어 내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의 후손들은 여기에 살고 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다 힘에 부쳐 그대로 수레바퀴에 깔려버린 사람들은 누구도 기억 하지 않는다. 역사는 때론 무심하다.
앙가라강변의 공원
앙가라강에 뛰어들다.
민속촌 구경을 마친 일행들은 저녁도 먹을 겸 ‘반야’라고 하는 이곳 전통식 사우나탕에 들렀다. 사우나탕은 달궈진 돌에 물을 부어 증기를 만들어 자작나무 가지로 몸을 두들겨 혈액순환을 촉진해주는 방식이다. 그리곤 몸이 더워지면 앙가라강으로 뛰어 드는 것이다. 기온이 18도 밖에 나가지 않아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막상 몸이 달구어지고 나니 강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무조건 강으로 뛰어들고 나니 나이 지긋 하신 분들도 따라 나와 강에 몸을 던진다. 몇 차례하고 나니 출출해져 ‘사슬릭’이라는 돼지고기 꼬치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낮에 ‘오믈구이’ 타령을 좀 했더니 주최측에서 오믈을 사주었다. 오믈은 청어과의 물고기인데 민물화 된 생선이다. 맛은 그렇고 그런데 한 마리를 다 먹었더니 저녁 먹기가 불편했다. 그런데도 사우나 바람에 사슬릭도 즐길 수 있었다. 밤에는 피곤했는지 그만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부르한바위
알혼섬 부르한 바위에서 평화를 기원하다. 이루크츠크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야 알혼섬 선착장이다. 내내 스텝지역인데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많은 탓인지 목초지와 소떼들이 자주 보인다. 가끔은 소떼들이 길을 막아 다 지나간 다음에야 차가 지나가는 진풍경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알혼섬의 부르알 바위는 기가 센곳이라고 한다. 기가 약한 사람은 기가차서 말을 못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다. 그래선지 기가세기로 하면 무당들인데 전세계 샤면들의 성지라고 한다. 샤먼 이라면 우리네 어미들이 늘 생활에 같이하던 민속종교 아닌가. 모든 지상의 것들이 정령이 깃들었다고 생각하며 주술을 외우며 그들과 소통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가는 곳마다 서낭당이 보이고 나무마다에도 오방색 천을 둘러 어렸을 때 본 서낭당과 너무도 닮아 있다. 오는 길에 보이는 풀꽃들은 우리마당에도 있 것들이고 호텔 마당에는 해당화와 봉숭아가 피어있어 내 마당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곳은 우리민족의 시원으로 보기도 한다. 아직 정확한 학설이 정립된 바는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를 정리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아시아에서 동으로 이동한 무리가 알혼섬에 도착해 볍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으려 했으나 단초스텝과 툰드라에 농사가 될 리가 없지 않는가. 목축과 짐승을 사냥하며 동으로 다시 이동 했을 것이다. ‘알혼섬’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알온섬‘, 알논섬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민족의 난생설화의 오랜 버전이다. 알이 왔던지 알을 낳았던지 하는 말이 ’알혼‘이 되었을 것이다. ’부르한‘ 바위는 ’불알‘ 바위 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부랄’ ’부르알‘ ’부르한‘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르한 바위는 두 쪽으로 마치 음낭과 같은 형상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어떤 상당한 기운은 사람을 압도한다고 한다. ’조상‘이란 말이 ’좃‘에서 나온 것 같이 ’부르한‘은 ’좃‘을 말하며 ’종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선지 ‘부르한’ 바위 일정부분에는 ‘소도와’ 같이 여자와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광사업 목적으로 이 금기는 사라졌다고 한다. 광복절 기념식과 평화기원제를 올리다. 일행들은 가져간 제수를 차리고 광복절 기념식과 평화기원제를 올렸다. 행사는 비가오는 가운데 진행돼 정신이 없었지만 평화기원제 헌시를 쓰고 낭송했다. 바이칼이여, 우리의 시원이여 (동북아 평화기원제에 바쳐) 한 도 숙 바람이 불고 눈 날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라 누가 너의 등을 떠밀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벽을 뚫고 빛이 쏱아지는 곳으로 진군하라 동트는 안개속으로 들려오는 알혼의 거친 숨소리 콧속을 얼리는 툰트라의 칼바람으로 시베리아의 지축을 울리며 진군하라 그리하여 그리하여 바이칼 호수에 깃발을 올리고 유라시아 벌판에 말채찍을 휘두르자 이제 패랭이꽃 피어나는 땅에 우리 영혼의 육화를 위해 하늘 ,바람, 우레 그리고 땅의 신 앞에 향기로운 술을 올려라 그리하여 그리하여 우리 돌고 돌아온 시간이 바래어 시작과 끝이 하나가 된 그 시원을 뜨겁게 하라 그 뜨거움으로 자작나무 음습한 그늘을 벗겨내고 이끼에도 햋볕을 나누는 세상을 밝히리라 고된 걸음으로 진한 고통으로 뜨거운 열망으로 또 다시 하나가 되어라 우리가 만나는 돌하나, 풀꽃하나 그 어디에도 밝은 빛이 되리라 오! 바이칼이여 숨어있는 땅별의 영혼이여!!! 헌시를 낭송중인 필자
바이칼 호수와 알혼섬과 부르한바위
태고의 숨소리가 들리는가?
바이칼뷰호텔은 마치 현대가 금강산에 꾸며놓은 컨테이너 하우스 비슷하다. 그러나 재료는 나무로 되어있고 지붕은 갈바륨을 올렸다. 그래도 샤워실과 침대는 아늑한 편이다. 저녁을 먹고 '바냐'를 하러 들어갔다. 달궈진 돌에 물을 뿌리고 땀을 내고 있는데 묘령의 아가씨가 비키니 차림으로 들어 온다. 러시아의 삼대보물이 무엇인가. 첫재가 보드카다. 많은 사람이 즐겼지만 그로인해 사망자도 부지기 수지만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사랑받는 술이다. 두번째가 불곰이라고 했나? 러시아인들의 속을 모르겠다고 할때 곰이라고 했다. 러시아하면 상징이 붉은 곰이다. 나폴레옹과 싸움, 히틀러와의 싸움을 가당치 않게 물리친 러시아인들의 음흉한 모습을 불곰을 빗대 말하고 있다. 세번째가 러시아 아가씨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러시아보물이 내앞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앉아있는 눈호사(?)를 했다. 하기야 내가 눈 둘 곳이 없어 쩔쩔매고 그 아가씨는 애인과 쫑알대느라 이방인에겐 관심도 없었다. 새벽 5시에 깨어 호텔바로 앞의 언덕을 오른다. 이렇게 초원을 밟아보는 것이 이 땅을 이해하는 방법이리라. 스스로 몽골식으로 지은 ‘바람이 모이는 산’을 올랐다. 길이 없어도 좋은 꼭대기만 오로지 보고 오른다. 사막의 쥐로 불리는 '몽구스'가 구덩이들을 여기저기 파놓고 삶을 유지하고 있는 듯 했다. 짧은 사초들은 이미 꽃을 피우고 열매를 퍼트렸다. 두메양귀비 노란 꽃들이 인사한다. 바위솔도 아침이슬에 반짝인다. 용담꽃도 얼른 피우고 겨울을 맞아야지... 약 40분에 걸쳐 오른 꼭대기에는 지붕이 뜯겨나간 정자가 정적 속에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하고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바이칼 호수로 내려간다. 오오 ! 귀한 것 오직 노고단에 예약하고 올라야 볼 수 있는 물매화가 무리를 이루고 피어있다. 물매화가 하얀 꽃잎을 펼치고 세속의 때를 정화하시라고 반짝거려 인사한다. 호수는 고요하다. 아침햇발을 받으며 환하게 주위를 비춰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탄성으로 화답한다. 저 깊고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태고의 숨소리를 함께 한다.
바이칼과 알혼섬은 유네스코지정 자연 유산이란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300여개의 강과 내가 호수로 흘러드는데 흘러나가는 곳은 앙가라 강하나 뿐이란다. 그런데도 수위에는 변동이 없어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고 있단다. 속설에는 몽골에 있는 흡수골호수와 땅밑으로 연결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이루쿠츠크 카레이스키
조선인이 우스리스크에 거주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온 것은 1863년13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를 근거로 조선인의 우수리스크 이주의 역사가 시작 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인 165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신유장군을 파병, 러시아군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다.(북정일기) 이때부터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땅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삼정이 문란해짐과 홍경래란. 탐관오리의 학정을 피해 불법월경한 조선인이 농사를 지으며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러시아 여행가 프로체발키의 기록에도 1869년1800여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이후 조선인 정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조,러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그러면서도 결과적으로 벼농사를 성공시킨 조선인들은 1923년 벼농사조합을 결성할 정도로 성장하고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노력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 건설한 신한촌은 6만3천여 명이 거주하게 되었고 학교와 권업신문, 해조신문,대동공보 등 우리말 신문을 발행했다.
1920년4월 일제에 의한 신한촌 만행이 저질러지고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 되어 이곳의 조선인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된다.
이곳이루크츠크역에 도착한 고려인은 17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다시 노보시브르스크까지 보내지고 거기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에 9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7만6천여명과 키르키스탄으로 나누어 보내진다. 운명의 앞날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그중일부가 이루크츠크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그들은 과연 이곳에 정착 했을까. 아니면 여기서 항일운동에 뛰어들고 대부분이 그렇듯 언제 어디서 죽은 줄도 모르게 사라져 갔을가.
점심시간을 이용한 특강으로는 상태베테르부르크 대학 석좌교수인 이창주박사의 한반도와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 들었다. 답답하기만 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진 않은 것 같다. 러시아는 대북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우리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뱃는 외교이상의 진척이 있을 수 없다. 북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동북아진출과 러시아와의 경제협력도 가능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르크츠크시내 카페거리
여행은 계속되지만 이제 눈을 붙이고 싶다.
이번 여행은 농업계의 '호병계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 농특위 위원장이셨던 분이 농민들 중심으로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동북아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미래평화를 그려보자는 제안으로 함께 하게 됐다. 일정이 너무길어서 여러 가지 걱정들이 있기는 했으나기회가 좋은 기회인지라 큰맘 먹고 함께 했다.
마지막 빙하기말기쯤에 바이칼 호 부근에서 살았을 것이라 추정되는 민족의 시원을 찻아서, 거꾸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회귀된 조선족들의 고통과 분노,회한을 들여다보고 또한 나라를 잃어버린 저간의 세월을 오로지 나라를 되찻을 각오로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싸우다 죽어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선열들의 흔적을 찻아서 그렇게 길을 나섰다.
긴장이 더해지고 있는 한반도에 삶을 꾸려가는 장삼이사로 할 수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현재를 ㅂ준석하고 행동하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중요한 의무이지 아닐까 싶다. 이번 여행이 그런것들을 충족했다고 보이진 않는다. 더많은 여행의 이야기로 살들이 붙고 서로의 생각을 덜고 보태는 것들도 여행의 의미를 깊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광야'에서를 부르며, '선구자'를 부르며 가도가도 끝이 날것 같지 않은 '텡그리'신의 땅, '당골'의 땅, '단군'의 땅이 다르지 않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농사를 통한 인류의 이동을 추측해 보기도 했다.
이제 눈을 붙이고 싶다. 아련히 망막속으로 사라져버린 벌판에 이를 드러내고 웃는 '브랴트' 아주머니가 오래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분홍바늘꽃' 한줌도......
백두산에서 본 두메양귀비가 호수주변에 지천으로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