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학회에는 이병도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의 동창들과, 경성제대 출신 등 다양한 인맥과 성향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병도를 비롯한 진단학회의 주요구성원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진단학회' 활동을 했다는 것은 진단학회가 일제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난 단체가 아님을 입증시켜 주는 것이다.
이병도가 진단학회 창설에 발벗고 나선 직접적인 동기는 일인 학자들과의 마찰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기반으로 중국 등지로 침략 범위를 확대시켜 나감에 따라 그들의 조사, 연구 사업도 확대되어 갔다. 조선사편수회가 설립된 지 얼마 후 서울에서는 일인 학자 중심의 청구학회(靑丘學會)가 생겨나면서 일본 학계의 학술지가 호를 거듭하여 발행되고 있었다.
이마니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학보}가 발간되었는데, 이때 이병도는 {조선학보}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게 된다. 이병도는 '삼한 문제의 신고찰'이라는 원고를 써주었으나 청탁자가 다시 찾아와 다른 원고로 바꿔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이병도의 학설이 이마니시의 설에 반해 저축되는 바가 많아 이마니시가 보면 학보 경영상 지장이 있을 우려가 있다는 일인 회원들의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동양학보}에 실린 이병도의 '청양촌(淸陽村)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읽은 경성제대 교수 다카하시(高橋亨) 박사가 이 학보 편집자인 안확(安廓)에게 "이병도는 사학 연구를 하는 사람인데 왜 유학에도 손을 대느냐, 앞으로 손대지 마라고 일러라"라고 한 말을 이병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일인에게 학문 연구와 관련한 제재와 모욕을 당한 이병도는 이윤재의 주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후원을 얻어 진단학회를 만들게 된다. 이것은 이병도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진단학보}를 통해 그동안 발표하지 못했던 논문을 국한문으로 고쳐 발표하였다. 한인 중심의 진단학회의 창립과 학보 발간은 일인 관헌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초기에는 직접적인 탄압은 없이 사전 검열만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전문적인 내용인지라 검열에서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진단학보}는 창간, 계간으로 14집까지 계속 발간되었다. 이병도는 이곳을 통해 역사 지리에 관한 기본적인 과제로서 [삼한문제(三韓問題)의 신고찰(新考察)]을 발표하게 된다. 이병도는 이 논문으로 일본 사학계의 모순이 많던 고대사의 제문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 합리적인 해석을 얻게 되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그뒤 그는 '삼소고(三蘇考)'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을 읽은 이케우치 박사가 그때까지 미개척 연구 부분인 지리도참 사상을 밝혀나가기를 그에게 종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병도는 그의 권유에 따라 그 방면의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지리도참 사상의 기원으로부터 그것이 우리 나라에 전수된 경로와 배경을 연구하게 되고, 이러한 문제를 핵심으로 삼아 풍수도참과 시대와의 상호관계성을 해명하는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 연구의 성과는 {고려 시대의 연구}로 발표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진단학회'가 형식적인 면에서는 한인 중심의 학회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독자적인 조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사관 연구로부터 벗어나서 국사를 연구하는 단체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님을 입증시켜 준다.
또한 당시 일제가 관변 학술 단체 이외에 민간 단체의 결성을 오히려 독려하면서 국사 연구의 영역 확대를 꾀했다는 점으로 볼 때 진단학회의 창설 자체를 일인에 맞선 학문적 투쟁의 의미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병도가 이끌었던 '진단학회'는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하자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김성수(金性洙) 등 찬조위원의 도움을 받으며 학보 제14호까지 발행하였다.
그러나 1943년 9월 일제 말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글 사용이 극도로 탄압을 받는 가운데 진단학회 회원과 이병도는 "스스로 학회를 해체하고 학보 발행을 중지" 하였다.
진단학회는 해방 후 다시 재조직되어 학보 제16호까지 발행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중지, 그후 다시 발족되어 학보는 계속 발간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국사연구학회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진단학회는 조선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정치에 좌우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평가 위에서 볼 때 '진단학회'는 조선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 위한 장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그 내용은 식민 지배의 틀 속에 머무른 것으로서 '조국애'의 발로라기보다 '학자들의 이해 관계'를 담아냈다는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진단학회의 발단과 배경은, 이병도 개인의 자존심상처에서 비롯된, 일제치하에서, 일제식민사관확립을 도와주는 또다른 역사연구 집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