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함선 2010년 8월호 특집 주제가 지난 50년간의 미일 해군 협력입니다.
해자대가 림팩 훈련에 처음 참가한 것이 1980년이라는데, 그때 방공구축함 DDG-163 아마츠카제의 함장 코레모토 노부요시(是本信義)씨의 회고(pp.100-103)를 발췌하여 날림으로 옮겨봤습니다.
큰 소동을 빚은 첫 참가
나는 1980년, 해자대로서 최초로 림팩(Rim of the Pacific Exercise) 80에, DDG 아마츠카제의 함장으로서 참가했다.
지금은 림팩 참가가 해자대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는 "림팩이 뭐냐?" "뭐하는 거냐?"라는 분위기였고,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좀 거친 표현이지만, "가면 뭔가 되겠지" "일단 가보자"라는 식의 분위기였다.
게다가 림팩 80의 참가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저촉되어, 위헌적이라는 야당의 반대로 중대한 정치문제가 되어, 좌파세력의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었다.
이런 와중에 1월 25일, 파견부대의 호위함 DDH 히에이와 DDG 아마츠카제는 파견부대장을 맡은 51호위대군 사령 요시오카 대령(一佐)의 지휘하에 요코스카를 출항했다. 출항을 저지하겠다고 달려드는 해상시위대, 이를 저지하는 해상보안청, 상공에는 언론사 취재 헬기가 난무했다.
당시 림팩은 미 해군 제3함대가 주최하여, 태평양 주변국 해군을 초청하여 행하는 "해군합동훈련"으로서 격년제로 실시되었다. 1980년 첫 참가한 해자대 전력은 호위함 외에 P-2J 초계기 8기가 있었다.
미 해군과의 괴리에 놀라다
우선 진주만에 기항하여 주최자인 3함대와 합류하고, 시설이용훈련을 거쳐서 림팩의 실태를 대강 알게 되었다. 당시 림팩 80은, 미국/일본/호주/캐나다/뉴질랜드 5개국, 함정 41척, 항공기 약 200기, 인원 2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로서, 청군(Blue Forces)과 오랜지군(Orange Forces)으로 나뉘는 대항훈련이었다.
공부를 해갈수록 느낀 것은, 미 해군과 해자대간의 전술상의 큰 괴리를 - 사실은 낙후성 -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진주만 출항으로 훈련을 개시하여 샌 디에고로 향하던 중, 무선통신을 통해 청군 지휘관/제1항모그룹 사령관으로부터 작전계획을 받았을 때가 결정적이었다.
미 해군의 전술/전법에 대해서 해자대가 모르고 있던 점은 다음 2가지이다.
제1은 부대의 지휘통제시스템으로서, 그때까지 듣지 못했던 "CWC(Composite Warfare Commander) concept"였다. CWC concept은 작전수행중 발생하는 각종전투의 실시를 적임자인 부하 지휘관에게 전면적으로 위임하는 것으로, 기업풍으로 표현하자면 "대폭적인 권한 위임"이었다. 당시 훈련에서 청군의 예를 들어보자.
최고지휘관/CWC : 미국 제1항모그룹 사령관
대공전지휘관(AAWC) : 미국 항모 컨스텔레이션 CV-64 함장
대잠전지휘관(ASWC) : 미국 제17구축함전대 사령
제17전대 사령은 자신의 기함을 놓아두고 항모에 승함, 작전실 일부를 차지하여 청군 전체의 대잠작전을 관장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의외였다.
제2는 철저한 "Silent Operation"으로서 다음과 같은 요소로 되어 있다.
완전한 전파관제(EMCON): 그 와중에서도 미군은 Link16과 위성통신을 활용할 수 있었다.
대잠전은 완전한 Passive Operation: 청음으로 원거리에서 잠수함을 탐지, 공격 전 확인용으로만 능동 탐신.
이에 비하면, 원거리 탐지용 패시브 소나/Link16/위성통신기를 갖지 못한 우리의 정보입수수단은 수신만 가능한 비효율적인 Link14와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은 ESM이니, 과연 미 해군과 제대로 보조를 맞출 수 있을지 불안했다.
드디어 훈련
당시 대항훈련 시나리오는, 호주 해군의 경항모 멜버른을 중심으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해군으로 구성된 오랜지군이 탈취한 하와이 부근의 모 섬을, 항모 컨스텔레이션을 중심으로 한 청군 기동부대가 탈환하는 것이었다.
샌 디에고에서 준비를 마친 청군은, 2월 25일 적을 기만하기 위해 각자 따로따로 출항하여 대기지점으로 향했다. 대기지점에서 집결한 부대는 전투진형을 갖추었다.
우선 항모 컨스텔레이션을 중심으로 inner circle이라 칭하여 DDH 히에이를 포함한 대잠함정이 둘러싼다. 이 바깥으로는 outer circle이라 칭하여 전방에는 직접 지원을 담당한 SSN이, 양측면에는 TASS를 장비한 TASS함이 배치되었다. 전방 약 100해리에는 아마츠카제를 포함한 DDG가 방공을 맡았다.
상공에는 CAP을 맡은 F-14와 E-2C 편대, inner circle을 초계하는 SH-3 대잠헬기, outer circle을 초계하는 S-3가 상시 배치된 물 샐 틈 없는 포진이었다.
아마츠카제의 전투
진형을 정돈한 청군은 공격개시점을 향해 항진했다. 속도는 24노트, 항모는 함재기를 이착함할 때 바람을 맞는 방향으로 30노트 전속 항진했다. 이런 항모의 움직임에 대응하자면, 호위함들은 변침과 가감속을 반복하면서 동분서주하니 어려운 일이었다.
대항훈련기간 풍속 30노트 이상, 해상상태는 6~7의 황천이었는데 이 속을 고속으로 항진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출렁거리는 함선의 선체가 충격을 받으면서 비명을 지르듯 소음을 내고, 그때 천정의 페인트 조각이 우수수 떨어지는 사관실에서는 "(선체가)부러지지 않을까" "부러질지도 모르지" "부러지면...?" "확실히 침몰하겠네" 같은 대화를 태연하게 주고받았다.
취사작업이 위험해졌기 때문에, 3일 연속 비상식량으로 떼워야했다.
이런 황천 속에서 청군은 공격개시지점에 도착했을 때 오랜지군의 항공공격을 받았다. 오랜지군은 항모 멜버른 탑재의 A-4 공격기와 원잠으로 대응했다.
A-4의 공격에 의해 컨스텔레이션이 대파되어 일시적으로 아찔한 상황이 빚어졌지만, 이때 소형 항모라도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통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마츠카제는 어떻게 활약했는가.
1. 정보 입수에 고심
완전한 전파관제(EMCON) 하에서 작전정보를 입수하는 수단은 암호 전문 형태로 Link14를 통해 들어오는 통신뿐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부사관 2명을 전담시켜,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전문을 받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2. 완벽한 대공전투
아마츠카제는 대공전투(AAW) 상황이 4번 있었다. Link14로 정보를 입수, 전파관제 해제-병기사용 자유(Weapons Free) 확인-대공 레이다 가동-탐지한 적항공기를 사통레이다로 Lock on-미사일 발사에 이르는 공격이었는데, 4회 모두 명중 판정을 받았다. 일단 방공함으로서 합격했다.
3. 수훈을 세운 대잠훈련
3월 6일, 주력의 전방 100해리에서 방공임무 수행중, 갑자기 주력으로 합류하라는 긴급한 지령이 들어왔다. 바로 반전하여 24노트로 증속하여 달려갔다. 이때 컨스텔레이션은 오랜지군의 항공공력으로 대파되었으며 오랜지군의 원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츠카제가 inner circle에 도착하자 액티브 소나 탐신을 명령했다. 탐신 몇 회째에 거대한 수중 목표를 포착, 오랜지군 원잠임을 판정했다. 바로 ASROC으로 3회 공격, 상대방이 "공격효과 HIT" 통보를 보냈다.
이때 함교에는 나와 당직 근무자가 다수였는데, HIT을 표시하는 잠수함으로부터의 황색 조명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 원잠 - SSN-583 Sargo였다 - 격파는 큰 평가를 받아, 기동훈련 후 사후평가모임의 석상에서 제3함대사령관이 "컨스텔레이션을 구해주어 고맙다"라며 악수를 청했다.
원잠 격파는 최고의 수훈으로 꼽혀, 아마츠카제가 최우수함으로 선정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1일(3월 1일~11일)간 약 10분 정도의 능동소나 탐신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미 해군에선 큰 평가를 받은 실적에 대해 해자대에선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 지금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4. 걱정한 것보다는 쉬웠던 해상보급
대항훈련기간중, 4번의 해상보급(UNREP)을 받았다. 언제나 황천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특히 3월 9일 고속군수지원함 AOE-1 Sacramento로부터 받을 때가 심했다. 황천 속에서 무리하게 고속 기동을 하여 연료는 40% 남짓 했는데, 복원성을 유지하기 위해 밸러스트 탱크에 해수를 주입할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일각이 여삼추 같이 기다려지던 해상보급이었지만, 막상 실시할 즈음 동북동 30노트 이상의 바람에 파고 6m, 해상상태 6~7, 함은 좌우로 40도 이상의 롤링을 하여 함교에도 바닷물이 밀려오던 때였다.
스스로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해도 몇 명 죽는 것 아닌가" "에잇, 그럼 귀국해서 할복이라도 해야"라고 각오를 다지면서 보급함과의 회합 지점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보급함의 양현에 미 구축함들이 파도를 뒤집어 쓰면서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처럼 요동치면서도 보급중이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미 해군도 하는데 우리가 못할 수 있나!"하며 각오를 다졌다. 순서가 되자 보급함 좌현 45m까지 접근하여 작업을 개시했다. 잘 준비했고 4만 톤의 거함이 바람을 막아주는 위치에 있었던 행운도 더하여 사고 없이 끝난, 생각보다는 쉬웠던 해상보급이었다. - 중략 -
5. Direct Hit, Grand Slam 미사일 사격
대항훈련이 끝난 3월 12일과 13일은 대공미사일 사격훈련을 하였다. 참가함정은 미국 해군이 컨스텔레이션 이하 6척, 일본은 DDG 아마츠카제, 호주의 구축함 2척으로 총 9척이었다. 각국간의 미사일사격 경연대회 같은 상황이었다. 12일, 처음으로 경험하는 전투사격에 임할 때 300m 떨어진 히에이에는 일본에서 본 언론취재진이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게, "Take it easy"를 훈시하며 사격에 임했다. 아음속 표적기 BQM-34에 사격한 결과, 보기 드물게 Direct Hit을기록했다. 파견부대 지휘관이 "미사일 사격 종료, 이상 없음, Direct Hit, Grand Slam"이라고 보고했을 때 내심 득의양양했다.
다음날 13일 초음속 표적기 AQM-37에 대한 사격도 지근거리를 통과한 명중. 명중률 100%를 기록하여 면목을 세웠다.
림팩 80에서 얻은 교훈
1. 전술, 장비의 낙후성
전술과 장비가 미 해군보다 현저하게 낙후되었다는 것은 먼저 언급했다. 다행히 모든 인원이 노력하여 핸디캡을 극복하여 미 해군에 손색 없는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런 낙후성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자대 스스로 깨닫고 있지 못한 "용병술상의 폐쇄성(쇄국)"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 해군을 배워 따라잡기에 열중했고 이제는 추월했다고 자부하는 우물안 개구리적인 사고가 세계의 군사정세로부터 정보를 단절시키면서 이러한 곤경을 초래한 것이 아닐까.
2. Seamanship이 모든 것의 기초
대항훈련기간중 격렬한 황천이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함을 안전하게 운행하고 확실하게 임무를 달성하는 것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 걸친 Seamanship의 기량, 적극성, 과단성, 의지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고도의 전술, 진보한 무기체계, 우수한 두뇌도 탁월한 Seamanship의 기량이 없다면 사상누각이요 그림의 떡임을 절감했다.
3. 미국 해군의 대단함
림팩 80에서 다시 한 번 미 해군의 대단함을 알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졸렬한 면도 있는 것 같지만, 일단 바다에 나가 임무행동에 들어간 모습을 접하고 인식을 새롭게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굳세게 야성적인, 터프한 모습에서 "이것이 진정한 Ocean Navy이며 전투부대"라는 존경의 염을 금할 수 없었다.
첫댓글 요 부분 "오랜지군은 항모 멜버른 탑재의 A-4 공격기와 원잠으로 대응했다. A-4의 공격에 의해 컨스텔레이션이 대파되어 일시적으로 아찔한 상황이 빚어졌지만, 이때 소형 항모라도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통감했다." 재미있네요. 역사 게시판으로 옮겨도 될까요?
실전도 아니고 훈련 회고라서 일단 자게에 올렸지만, 옮기셔도 무방합니다.
한국 해군의 최초 참가 경험담이 이런 식으로 나올수 있을까요? 아마도...나오긴 하겠죠? 언젠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