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 시달리던 증권노동자가 자살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지난 13일, 강원도 원주시 국립공원 치악산에서 굿모닝신한증권에서 영업을 하던 현모(40) 씨가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등산객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현모씨는 지난 달 25일 가출한 이후 가족과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주변인들은 "이미 고인에게는 개인 부채가 8,000만 원에 이르고, 사채나, 공개되지 않은 부채들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출하기 전에 누군가 몇 번씩 직접 찾아와 빚 독촉을 여러 차례 했었다. 결국 빚을 못갚아 비관 자살한 거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아직 고인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계속된 증권노동자 죽음의 행렬
증권업계에서 현모 씨와 같은 사례는 그리 드문 예가 아니다. 증권노동자의 자살 및 과로사로 공론화 된 사건만 해도 하나증권, 메리츠증권 ,동원증권 등 이미 10건이 넘는다. 회사 이미지를 이유로 사건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증권사의 관행을 고려했을 때 이런 사건은 더욱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 50을 앞둔 만년 대리 영업맨이 빚에 쫓겨 자살을 하고, 책상에 엎드려 있던 영업맨이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 아예 유서도 없이 여관에서 약을 먹고 자살을 하는 등 죽음을 택하는 증권노동자들의 사건이 줄을 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성학 증권노조 선전부장은 "결국 이러한 결과는 증권업계의 구조적인 시스템에 기인한다. 약정 강요로 불법적 일임매매를 하다가 고객분쟁에 엮이거나, 약정을 채우기 위해 개인 부채를 내 매매를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특히 IMF 이후 확산된 성과급 제도는 이러한 증권노동자들에게 빚을 내 약정을 채워야 하는 족쇄를 채우는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라는 지적이다.
김성학 선전부장은 "기본급이 낮고, 성과급이 높은 기형적 임금 구조는 결국 은행이나 카드현금 대출, 사채를 끌어다 써서라도 약정을 채워야 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책임이 고스란히 개인에게 떨어진다. 노동자 개개인이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지점에 다달아 '죽음' 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되는 거다"라며 상황적 특성을 설명했다.
증권업 시스템은 증권노동자가 얼마만큼의 약정을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 증권사의 수입에서 수수료 수입이 50%에 이르기 때문에 수수료 수입과 증권사 존립 여부는 직결된다. 따라서 증권사는 BEP(손익분기점)에 맞춰 다양한 방법으로 증권노동자에게 약정을 강요한다.
어떤 증권사의 경우는 기본급에 정기 상여금 없이 약정에 연동한 성과급을 지급하는데, 이와 같은 성과급과 연동된 임금구조는 더욱더 증권노동자들을 매매와 약정에 목을 멜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예를 들어 대형사 A증권사의 경우 BEP가 사원 23억, 대리 27억, 과장 30억, 차장 32억, 부장 35억이나 되고, 중형 B증권사의 경우는 사원 18억, 대리 24억, 과장이 29억에 이른다. 증권 영업 직원들은 직급별로 제시된 BEP를 채우지 못하면 급여가 삭감되거나 실적부진자로 관리된다. 반대로 약정을 많이 할수록 지급 받는 성과급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할당된 약정고를 채웠더라고 성과급을 많이 받아가기 위해 더 많은 약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같이 경제 상황이 나쁠 경우, 성과급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 증권의 현실이다.
그리고 B증권사의 경우는 개인별 월 수수료 수입이 1천만 원 이하일 경우 10%의 성과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회사에 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수수료 수입을 내 줬다 해도 개인 증권노동자에게 떨어지는 성과급은 100만원이다. 결국 이러한 성과급제도는 '영업 직원의 밥줄을 담보로, 고객의 예탁자산을 볼모로 매매회전율을 높이도록 만들어 증권노동자의 고혈을 짜는 정교한 시스템'이라는 지적이다.
나아가 최근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증권사들은 과도한 수수료 인하 경쟁에 돌입했다. '누드 수수료', '와이즈 클럽' 등이 이러한 이벤트성 행사로 증권사들간의 무리한 수수료 인하 경쟁이 확산됐다. 약정은 그대로 인데, 수수료 수익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줄어든 파이에 대한 부족분은 증권노동자가 채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약정 강요에서 기인한 악순환의 고리가 증권노동자를 죽음에 이르는 벼랑으로 내몬다는 얘기다.
곽상신 대우증권노동조합 정책국장은 "증권업계에서 자기 월급의 3∼5배 이상의 수익을 내야 하는 게 영업 관행이다. 증권시장의 상황이 어떠하던간에 이러한 불문율은 변함이 없다. 결국 이 과정에서 약정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이 깎이는 것을 넘어, 약정을 쪼는 상사들에 의해 인간적인 모독도 당하게 되고, 결국 빚더미만 끌어안고 도태되게 된다"라고 말하며 "증권업종의 악질적인 구조가 결국 증권노동자를 죽음으로 모는 것이다"이라며 개선책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한모 씨의 자살과 관련해 오준영 굿모닝신한증권지부 수석부지부장은 "명확한 물증이 없다 해도 이는 명백한 산업재해이다. 이와 관련한 보상을 회사 측과 공단에 요청할 계획이다"라며 "본사에 분향소를 설치해 조합원들의 애도의 맘을 모으고 있다"라고 상황을 밝혔다.
증권노동자의 자살, 산재로 봐야 하나
산업재해는 예방되어야 한다. 또한 자살은 없어야 한다. 자살의 경우 산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물론 산재 여부를 결정하는 근로복지공단의 경우도 '업무기인성, 업무수행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연결성을 찾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증권업종 내에서는 '증권노동자들의 자살이 업종의 특성적인 산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나증권의 경우 올해 2건의 사망 사건이 있었다. 한 명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고, 다른 한 명은 객장에서 '잠시 쉬겠다'라면 책상에 엎드린 이후 깨어나지 못해 결국 사망했다.
그러나 산재 신청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자살한 고인은 유서를 통해 부채에 대한 심적인 괴로움을 토로했으나 회사에서는 '업무상 사망으로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나왔다. 결국 일정 액수의 위로금과 장학증서 등의 보상으로 마무리 됐다고 한다. 후자의 사건은 '사업장 내에서의 사망'을 근거로 산재 신청을 했으나 3개월에 걸쳐 근로복지 공단과 '산재 인정 여부'와 관련해 협의가 이뤄지고 있고,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홍지훈 하나증권지부 부지부장은 "자살이나, 과로사의 경우도 딱 보면 업무상에 의한 문제고, 증권업 하다보니 생긴 빚 때문이다. 다 증권업의 업무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솔직히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증권업의 한 관계자는 "증권사는 쉬쉬 하며 숨기기에만 급급하다. 그러나 단지 자살을 택하지 못할 뿐이지 더 절박한 현실에 처한 증권노동자도 많다. 구조적인 시스템이 변하지 않고서는 죽음을 택하는 증권노동자를 막을 수가 없다. 출혈적인 수수료 경쟁과, 약정 강요 시스템, 그리고 기형적인 임금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고인의 죽음이 제도적 개선을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