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당은 나치당이나 소련 공산당처럼 국가 위에 군림하는 권력집단이 아니었고, 국민의 사상을 개조하며 ‘열성 집단’을 박멸한다는 목표를 추진하지도 못했다.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와준 자본가들과 국가관료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힘을 유지했으며 이름뿐이라 해도 국왕과 그의 대권도 유지되었다. 이들은 21년 후 결국 무솔리니를 “용도폐기”하게 될 것이었다.
무솔리니의 권력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로 유지되었다. 검은 셔츠(가리발디를 본뜬), 로마식 경례(단눈치오에게서 빌린), 원수 군복(그는 장교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등에다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유의 웅변술로,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해외 원정으로 그 허풍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 했다. 그래서 국제연맹 탈퇴를 불사하며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1935년), 알바니아도 병합했으나(1939년) 이탈리아 군대의 허약체질은 개선되지 않아서 거의 두 손을 들고 있었던 알바니아를 점령하는 데도 한껏 힘이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에는 독일에게 압도당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고전했고, 그리스와 이집트 침공은 도리어 반격당해 독일군의 힘을 빌리는 치욕을 겪었다.
어릿광대의 최후
히틀러는 권력을 잡으며 무솔리니를 많이 본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히틀러가 무솔리니를 아랫사람 대한 듯하는 관계가 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국력 차이와 나치와 파시스트의 국민 장악력 차이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어려움에 부닥친 무솔리니를 여러 번 도와주었으나, 1939년의 ‘강철 협정’에 명시된 조항에도 불구하고 타국과 전쟁을 벌일 때 무솔리니와 협의는커녕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되며 히틀러가 무솔리니에게 바라는 것은 지중해 쪽에서 연합군을 막는 방패막이, 그리고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솔리니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소련 전선에 병력을 보내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고, 1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얼어붙은 땅에서 쓰러져갔다.
이렇게 되자 “공연히 히틀러의 전쟁에 말려들어, 막강한 미국, 영국, 소련과 적이 되면서 실리는 전혀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높아져 갔다. 화려한 쇼도 하루 이틀이지, “일 두체”의 황제놀음과 호언장담도 점점 식상해지고 있었다. 1943년, “비밀병기로 적들을 끝장낼 테니 두고 보라”는 무솔리니의 말을 비웃듯 시칠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로마에 폭탄이 떨어지자, 결국 파시스트 중에서도 배반자가 나왔다. 1943년 7월 24일, 파시스트 평의회에서 측근이던 디노 그란디와 사위인 치아노 등이 앞장서서 무솔리니를 당수에서 끌어내렸다. 그 다음 날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이 그를 수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여 은밀한 곳에 가둬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