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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Amish(아미시)공동체
20.11.10 07:49
아미시파(Amish)는 기독교에서, 재세례파 계통의 개신교 종파를 말한다. 주로 17세기 이후 탄압을 피해 유럽에서 이주한 스위스-독일계 이민자가 많다. 창시자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야곱 아망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거주한다. 이들은 재세례파가 보수화되면서 등장한 교파의 성격답게 자동차나 전기·전자제품, 전화, 컴퓨터 등 현대문명 거부로 유명하며, 종교적 이유로 스스로 외부세계와 격리한 채 생활한다. 이들은 종교적 이유로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실천하여 군대에 가지 않고, 공적연금을 수령하지 않는 등, 정부로부터 어떤 종류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대부분 의료보험에 들지 않는다. 이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한 재세례파의 교리 추종으로 생각한다. 아미시파 교인들은 펜실베이니아 독일어로 불리는 독일어 방언을 사용한다. 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검은색 계통의 옷만 입으며, 대다수 교인은 전통 방식의 농축산업에 종사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설립한 마을내 학교에서만 교육하게 하며, 종교는 연구대상이 아니라는 신앙에 따라 종교와 과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읽기, 쓰기, 계산하는 법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지식만 배울 뿐이다. 대부분 학생은 중등교육만 배운다. 단지 소수의 우수한 학생, 가정형편이 매우 좋은 학생만 중학교를 마치고서 고등학교·대학교로 진학한다.
이스라엘의 Moshav 이스라엘의 촌락공동체 소농들의 연합체로 농토는 각자가 경작하되 그 밖의 것은 마을 전체가 공유한다. 철저한 자치 조직을 바탕으로 개인 소유를 부정하고 생산 소비 육아 교육 후생 따위를 공동으로 행한다.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2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3)
-'거룩한 실험의 땅',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로 -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의 식민지 건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할 즈음, 종교적 박해는 물론 흉작으로 인한 생계유지의 어려움, 끊이지 않는 전쟁과 징집, 그리고 높은 세금 등으로 시달리고 있던 유럽인들은 ‘꿈의 대륙- 아메리카’로의 이주를 꿈꾸기 시작하였다.
때맞춰 그들에게 날아 든 기쁜 소식은 신대륙에 건설된 식민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로부터였다.
자메이카를 정복하였던 영국 해군 제독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의 아들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 채권으로 얻게 된 신대륙의 광활한 땅에 1681년 식민지를 건설하고 ‘Penn의 숲(sylvania)’이라는 뜻을 가진 Pennsylvania로 명명하였다. 독실한 국교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퀘이커교도(the Quakers)가 되어 스스로 종교적 박해를 경험한 William Penn은 펜실베이니아 땅 위에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지상의 낙원’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William Penn 의 초상
그는 이러한 자신의 꿈을 알리기 위하여 식민지내 정착민들에게 종교적, 정치적 자유의 보장은 물론 이주자들에게 가족 수에 비례한 토지의 무상공여와 저렴한 가격으로의 양도 등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담은 안내 책자를 발간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이를 알리는 열성을 보였다.
William Penn은 이러한 ‘이상향(理想鄕)’ 건설에 기울이는 자신의 노력을 ‘거룩한 실험(the Holy Experiment)’이라 불렀으며, 퀘이커 교도들은 물론 아미쉬, 메노나이트 등 독일계 재세례파 교도들이 ‘거룩한 실험’의 대상이 되기를 자청하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이주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William Penn의 ‘the Holy Experiment'를 알리는 패널
(자료: http://www.quaker-tapestry.co.uk 에서 옮김)
아미쉬 교도들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에 관한 기록으로는 1736년에 Detweiler 와 Sieber 의 성(姓)을 가진 두 가족이 Pennsylvania 주 Berks County에 최초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아미쉬 전문가들은 그보다 빠른 1720년 경 Pennsylvania 주 Lancaster County에 최초로 정착한 것으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아미쉬들의 신대륙 이주는 크게 두 차례로 나뉘어 이루어졌으며, 1차 이주는 1720년부터 1770년까지. 2차는 1817년에서 1880년 사이로 비교적 많은 인원이 이 시기에 이주하였다.
1차시기 초기에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모두 지금의 Pennsylvania 주 Lancaster, Chester, Lebanon, Berks County에 정착하였으며, 이 지역이 정착지로 택해진 이유로는 이주민들이 처음 도착한 항구 필라델피아에서 내륙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일 뿐더러, 기후와 토양 등 자연환경이 아미쉬 교도들의 전통적 삶의 근본인 농사에 적합하고, 특히 이주 전에 살았던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농촌 환경과 매우 흡사한 데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차시기 후반에 이주한 아미쉬들의 일부는 Pennsylvania 주 중부지역인 Mifflin County와 남서부 지역인 Somerset County까지 들어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펜실베이니아 주 중부지역 Mifflin County의 아미쉬 마을 전경
아미쉬 교도들의 2차 이주는 1차시기보다 수적으로 많은 약 3,000명 정도의 아미쉬 교도들이 이주하였으며, 이 때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에 정착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Illinois, Indiana, Iowa, Missouri, New York, Ohio 주와 캐나다의 Ontario 주에 정착하였다.
이 때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단추가 달린 코트를 입고, 마차에 장식을 하거나 피아노를 소유하고, 치장된 가구와 무늬가 있는 접시를 사용하는 등 1차시기에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에 비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개방적이고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교리의 해석이나 종교의식과 일상생활에서도 보다 유연성을 보이며 공동체 모임별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1701년 William Penn이 Conestoga 방문 길에 잠시 앉아 쉬어간 바위로
Lancaster County Gap에 보존되어 오고 있는 'William Penn Rock'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4)
- 끊임없는 마찰과 분란 -
‘거룩한 실험의 땅’ 펜실베이니아 주를 시작으로 ‘꿈의 대륙’아메리카 곳곳으로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유럽에서 받았던 탄압과 박해의 고초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신앙적 터전을 마련해 나가는데 따르는 시련과 역경은 신대륙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시련과 역경은 크게 ‘교파 밖의 외부 세계와의 마찰’과 ‘소리 없이 이어진 교파안의 분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재래적인 방법으로 밭을 갈고 있는 아미쉬 교도 (Pennsylvania 주 Lancaster 지역)
외부 세계로부터 받은 시련은 주로 그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삶의 관습과 외부의 환경, 법과 제도, 그리고 일반적 사회 관습 등과의 상충에서 야기되는 문제들로써,
- 비폭력 평화주의에 따른 무저항과 전쟁 참여 거부,
- 정부 조직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정부 기능의 제한적 수용,
-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일상관습과 상충되는 사회제도의 수용 거부,
- 문명화와 도시개발에 따른 전통적 삶의 기반 위축 등이 그 주된 요인이 되었다.
다양한 아미쉬 공동체가 있음을 보여주는 각기 다른 색깔의 마차
(Pennsylvania주 Mifflin 지역)
내부적으로는 이주시기와 정착지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변화의 욕구를 표출한 공동체들을 효율적으로 통괄 조정할 수 있는 단일 협의체 구성에 미온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교도들의 공동체 단위 이탈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교파의 결집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 교파 밖의 외부 세계와의 마찰 >
경매 행사장에 나온 아미쉬 소년들
Pennsylvania 주에 정착한 아미쉬 교도들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으로 1755년부터 1763년까지 있었던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에서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음을 들 수 있으며, 독립전쟁 당시에도 반전 평화주의와 중립주의를 고집한 아미쉬 교도들은 독립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국 황실에 충성을 다짐한 세력 양측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1720년경부터 30여 년간 미 대륙 식민지를 휩쓴 개신교의 부흥운동 당시 아미쉬 교도들은 침례교(Baptist), 감리교(Methodist), 모라비아파(Moravian) 등 개신교파의 순회 목사와 전도사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아미쉬 공동체는 많은 교도들이 공동체를 이탈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1861년부터 5년 동안 지속된 남북전쟁 중 징집을 거부한 아미쉬 교도들은 징집 유예를 받는 대신에 당시로써 거액인 1인당 300달러씩을 납부하여야만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구촌 전쟁에 주도적 역할을 한 미국으로써 수차례에 걸쳐 강행된 징집에 아미쉬 교도들은 반발하고 불응하였지만 일부 젊은 아미쉬 교도들이 전쟁터로 내몰리는 상황에 처했다.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끈질긴 저항 끝에 아미쉬 교도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 지위를 확보하였지만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대신 ‘대체 복무’를 위해 많은 젊은 교도들을 일정기간 공동체 바깥세상으로 떠나보내야만 하였다. 그로써 상당수의 젊은 교도들이 복무를 마친 뒤 공동체로 되돌아오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1,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계 미국인들이 받은 의심의 눈초리와 반독일 정서에서 아미쉬 교도들 또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미쉬 학교 - One Room School (Pennsylvania 주 Lancaster 지역)
자녀들에 대한 고등학교까지의 의무 교육 이행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신앙적 삶의 보호와 가치관의 확립을 위하여 자체적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아미쉬 학교 운영을 주장한 아미쉬 교도들은 197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법적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주 정부로부터 피소를 당하고 벌금, 징역 등의 처벌을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1955년부터 실시된 미국 내 ‘사회 보장 제도(Social Security Program)’에 대하여도 아미쉬 교도들은 그들의 공동체내 이미 뿌리 내려져 있는 자체적 상호 부조와 협조 정신에 상치되는 불필요한 제도로 여겼으며 정부 주도의 그러한 제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며 이에 대한 세금 납부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연방정부로부터 농지, 주택 등의 가압류 조치는 물론 밭을 갈고 있던 말과 농기구를 압수당하고, 강제 경매처분을 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어야 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은 아미쉬 교도들은 끈질긴 노력을 통하여 의회로부터 Medicare와 Social Security로부터 예외로 하는 결의를 얻어냈다.
근래 들어서는 공장 건설과 택지 개발 등으로 농경지가 침범 당하고 또한 농지 가격의 상승 등으로 전통적 삶의 기반을 위협받는 아미쉬 교도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미개발 벽고지로 떠나가야 하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질 숭상, 쾌락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 이웃의 일반인들과의 관습 차이가 커지면서 불거지는 크고 작은 시비 거리와 그들의 삶에 호기심을 보이며 눈요기를 찾아 자신들의 안마당까지 밀려들어오는 관광객들로부터의 사생활 침해, 그리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극성을 부리는 관광업계 등의 상업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아미쉬 교도의 일하는 모습을 사진찍고 있는 관광객
< 소리 없이 이어진 교파안의 분란 >
진한 밤색의 옷을 입고 있는 아미쉬 교도 (Pennsylvania주 Mifflin 지역)
아미쉬 공동체는 이주 시기와 정착지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긴 하였지만 2차 이주가 한창 진행 중이던 1800년대 중반까지는 비교적 결집된 교파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뒤이어 이주해 온 교도들의 진보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하였고, 1849년에 이르러 가장 보수적인 공동체로 알려진 Pennsylvania Mifflin County 공동체 교도들이 이탈하여 여타 공동체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아미쉬 교파 내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교리와 관습을 지키고 공동체들의 결집을 위하여 1862년에서 1878년 사이에 개최지를 옮겨가며 여러 차례 지도자 회의를 가졌다.
이러한 일련의 지도자 회의를 통하여 메노나이트 교도가 아미쉬 공동체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고, 다른 종교나 개신교의 다른 교파에 합류한 자에 대하여는 추방하며, 사진의 금기와 군복무 거부 그리고 기타 비밀단체 등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결의하는 등 각 공동체 간에 조화를 이루어 가는 듯 하였다.
하지만 전통적 관습을 고수하는 보수파와 시류에 보다 개방적이기를 바라는 진보파간에 보이는 틈을 좁히지 못하였으며, 진보파 내에서도 교회 건물을 세우는 문제, 실용화되는 문명의 이기에 대한 수용문제, 용모와 복장 문제 등에 관한 세부적인 실행에 있어 각가지 다른 의견들이 표출되면서 진보적인 경향을 보인 공동체들이 하나 둘씩 주류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1880년 경 아미쉬 교파는 1개의 보수파와 4개의 진보파 그룹으로 크게 분리되는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보수파 그룹인 Old Order Amish 여인의 모습
이때부터 보수파 그룹은 ‘the Old Order Amish'라 불리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이후부터 지도자회의에 참석을 거부하고, 아미쉬 교파의 정통성을 고수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으면서 오늘 날까지 실질적인 아미쉬 교파의 본류로써의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나머지 진보파 그룹에 속하는 'the Amish Mennonite'’the Egly Amish' 'the Stuckley Amish' 'the Sleeping Amish' 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는 Mennonite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the Old (Order) Mennonite'에 합류하였으며, 일부는 Mennonite 본류에 흡수되었다.
그 이후에도 1927년에 Pennsylvania 주 Somerset에서 ‘the Beachy Amish'가, 그리고 1966년에 Pennsylvania 주 Lancaster에서‘the New Order Amish'가 ‘the Old Order Amish' 본류에서 떨어져 나오는 등 진보적 경향을 띤 공동체들의 이탈이 이어졌다.
교회에 가는‘the Old Order Mennonite’교도들
(Pennsylvania 주 Lancaster 지역)
암만파 다른 표기 언어 Amish
요약 이들은 야코프 암만의 추종자들로서 유럽에서 탄생했다. 암만파 교도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720년경의 일이었으며, 첫 이주지는 동부 펜실베이니아였다. 이곳에는 오늘날까지 대규모 이주민 집단이 살고 있다. 구역마다 감독 1명과 2~4명의 복음 전파자 및 1명의 장로가 있지만 총회나 선교단체 또는 협력단체, 교회 건물은 없다. 남자들은 테가 넓은 검은 모자를 쓰고 콧수염은 깎지만 턱수염은 기르며, 집에서 만든 옷을 입는데 단추 대신에 호크를 사용한다. 여자들은 보닛 모자에 긴 옷을 입고, 어깨 위에는 케이프와 숄을 걸치며, 검은 신과 스타킹을 신는다. 이것은 17세기 유럽의 시골에서 유행하던 복장이었다. 암만파 사람들은 전화나 전등 사용을 피하고, 자동차보다는 말이나 4륜마차를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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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파(Amish)
암만파 사람들은 말이나 4륜마차를 이용한다.
ⓒ TheCadExpert/wikipedia | CC BY-SA 3.0
원래는 구(舊)암만메노파 교회(Old Order Amish Mennonite Church)의 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야코프 암만의 추종자들로서 유럽에서 탄생했다. 야코프 암만은 17세기 메노파 장로였으며, 1693~97년에 스위스, 알자스(지금은 프랑스에 있음), 남부 독일 등지의 메노파들에게 논쟁과 분열의 씨가 되는 교훈을 가르쳤다. 암만은 주장하기를 모든 메노파 사람들은 출교당한 적이 있는 메노파 사람들을 누구든 상대하지 말고 피해야 하며, 거짓말을 한 사람은 누구든지 파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배 의식 가운데 세족식(발을 씻는 의식)을 새로 포함시켰으며, 교회 회원들이 일정한 제복을 입어야 하고 수염을 깎지 말고, 국가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암만은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메노파교도들과 화해하려고 애썼지만, 출교당한 메노파 사람들과 상대하지 말라고 계속 주장했으므로 화해의 시도는 실패했다.
암만파 정착촌과 교회들은 스위스·알자스·독일·러시아·네덜란드 등지에 있었지만, 19, 20세기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해가거나 메노파 그룹에 동화되어감으로써 유럽의 암만파교도들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암만파교도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720년경의 일이었으며, 첫 이주지는 동부 펜실베이니아이다. 이곳에는 오늘날까지도 대규모의 이주민 집단이 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암만파 집단들은 서부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중앙 일리노이,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캔자스, 온타리오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구파'인 전통적인 암만파 사람들과 '새로운 체제', 곧 진보적인 방법과 조직들을 도입하고자 한 사람들 사이의 긴장 상태로 인해 1850년 이후 암만파는 분열과 혼란에 휩싸였다. 그뒤 50년 동안 암만파 교도들 가운데 2/3가량이 분리되어 작은 교회들을 형성하거나 메노파 교회나 메노파 총회에 가입했다(→ 메노파).
암만파교도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그대로 준수한 사람들은 원래 구암만메노파 교회의 교도들이었다.
1950년대 중엽 미국과 캐나다에는 대략 50군데에 구 암만파 집단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집단은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인디애나·아이오와·일리노이·캔자스 등에 있다. 이 집단들은 세례교도 75명가량으로 구성된 자치 교구들로 나누어져 있다. 만일 이 구역이 더 커지면, 구성원들이 각각 다른 가정에서 모여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나누어진다. 교회 건물은 전혀 없다.
각 구역마다 감독 1명과 2~4명의 복음 전파자 및 1명의 장로가 있지만, 총회나 선교단체 또는 협력단체 등은 전혀 없다. 암만파의 교리 체계는 메노파와 약간 다르다. 성례는 매년 2번 거행하며, 세족식은 두 파가 모두 시행한다. 세례는 교회 정회원 가입이 인정된 17~20세의 성인에게 베푼다. 예배는 팔츠 독일어로 진행된다. 영어가 섞여 있는 이 언어는 펜실베이니아 네덜란드어라고도 불린다.
암만파 사람들은 복장이 매우 소박하고 비순응적인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로 유명하다.
남자들은 테가 넓은 검은 모자를 쓰며, 콧수염은 깎지만 턱수염은 기르며, 집에서 만든 평이한 옷을 입는데 단추 대신에 호크를 사용한다. 여자들은 보닛 모자를 쓰고, 긴 옷을 입고, 어깨 위에는 케이프와 숄을 걸치며, 검은 신과 스타킹을 신는다. 장신구는 일체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비순응주의적인 문화는 암만파 사람들이 성서의 교훈에 순종하려는 뜻에서 생각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17세기 유럽 시골에서 유행하던 복장이었다.
암만파 사람들은 전화나 전등 사용을 피하고, 자동차보다는 말이나 4륜마차를 이용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유능한 농부들로 인정되지만, 현대적인 농경 기계 사용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들을 공립 초등학교에는 보내지만 고등학교에는 보내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의무교육법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암만파 사람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몇몇 암만파 부모들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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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amishstory/10001601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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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시 공동체 특징과 이들에 대한 평가 및 문제점
2017. 9. 21. 17:21
아미시 공동체 특징과 이들에 대한 평가 및 문제점
아미시 공동체는 펜실베니아 중부에 위치한 개신교 재새례파 계통의 종교공동체로
1693년 스위스와 알자스에서 유럽종교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재세례파 신도들의 후손들입니다.
(참고로 미국 아미시 공동체 지역은 펜실베니아 랭커스터, 오하이오 홈즈, 인디애나 란그란지 입니다)
이들 아미시 공동체는 현대 문명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동을 마차로 할정도며
이곳에서 수염을 기르고 특유의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볼수 있죠
그리고 아미시는 결혼전 깔끔하게 면도를 해야하며 결혼후에는 콧수염만 면도하고 턱수염을 기르는 문화가 있으며
추가로 버클달린 벨트를 거부하고 있는데 이유는 유럽에서 이들을 탄압했던 병사들의 상징이
콧수염과 버클달린벨트였기 때문이죠
물론 최근에는 트렉터 같은 농기구도 사용하고 있으며 마차대신 택시를 이용하기도 하며
스마트폰, 컴퓨터 사용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강요하는 분위기 아니라 자유의지로 교회에 나와 세례받는 사람들을 교인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주로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를 보내기 보다
홈스쿨링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바라보는 아미시 공동체를 이야기 하자면 사고치지 않고 조용히 자기들 끼리 살면서
동물이나 사람의 힘으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보니 정직한 농부의 이미지로 좋은편이죠
아미시 공동체가 주로 시골에 살면서 농사등을 짓고 사는 이유는 전기없이 할수 있는일이
한정되어 있다보니 그런거고
단순히 보면 폐쇄적으로 볼수 있지만 사실 다른 동네 사람들하고도 교류 좋은편이라
그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을 다른 동네에 팔기도 하죠
또한 아미시 공동체에는 그들만 모여서 사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믿지않은 일반 평범한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다보니 도시 전체가 전기없이 살지는 않습니다 (즉 암만파를 믿는 사람들 비율이 높은것일뿐)
아미시 공동체 인구는 현재 31만명으로 지난 25년간 인구증가는 150% 증가했으며
매년 5%의 높은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19세기 전통방식으로 살고 있다보니
결혼 연령대가 빠른 동시에 여성 출산율이 매우 높고 평균적으로 7명의 자녀를 두는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토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증가율을 빠르다보니 지대 상승으로
일부 지역은 상업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효율을 위해 IT기기 사용이 늘어나는
이유죠
그렇타보니 아미시 공동체 내에서도 혼란이 적지 않죠
아미시는 재세례파 계열의 분파로 500여개 커뮤니티로 나뉘어 있어며 집단에 따라서
어떤 집단은 18세기 생활을 고집하는곳이 있는가 하면 가스로 취사난방을 하거나 자가발전으로
전등을 사용하는것 정도 허락하는 집단도 있습니다
그렇타보니 아미시도 개혁파와 원리주의자로 나뉘어 이들간 강력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미시 공동체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자면
먼저 근친강간등의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며 이런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공동체 내에서 외부에 이러한
사실을 막고 약한 처벌로 자기들 끼리 처벌하기 때문에 이들 안 성범죄가 자주 일어날수밖에 없는 분위기죠
특히 아미시 공동체에서 탈출한 여성의 증언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들의 모습을 영화속에서 본다면 해리슨 포드 주연의 위트니스에서 주인공이 도주해 숨은곳이
아미시 마을 입니다.
Amish
The Amish (Pennsylvania Dutch: Amisch) are a group of traditionalist Christian church fellowships, closely related to but distinct from Mennonite churches, with whom they share Swiss Anabaptist origins. The Amish are known for simple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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