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⑤
김○○은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고 하더라고. 근데 당시 대전교도소 특사에는 다수의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복역 중이었거든. 특사는 1.2평 정도의 독방으로 되어있어. 바로 옆방과는 교도관의 감시만 없다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 공교롭게도 김○○ 오른쪽 방이 김남주 시인의 방이었다는 거야. 김남주 시인과 통방을 하면서 고향이 해남이라고 하자 혹시 ○○대학교 철학과 다니던 박○○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해. 나는 김남주 시인을 독서모임에서 뵙기도 하고 ○○서점 뒷방에서 막걸리를 함께 마시기도 했어. 내가 ○○○○사건으로 들어갔다 나온 후에도 한두 번 뵈었어. 그러니 동향의 후배를 기억하고 있었을 수는 있겠지.
김○○은 그 사람 5・18 때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느냐고 다시 물었대. 김남주 시인은 잘은 모르지만 죽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는 거야. 81년이니 답답한 시절이었잖아. 김남주 시인은 당시 5・18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을 거야. 면회도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고 면회에서 대화도 시국 문제는 저지당했을 거야. 소문이 무성한 시대였지. 희생자가 600명이다, 2,000명이다. 해남에서도 광주에서 내려간 시위대가 우슬재를 넘다 여러 명이 죽었거든. 이 사건은 과장되어 전국으로 퍼지기도 했어. 해남 출신 시국사건 관련 대학생이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해. 그저 못 죽어서 미안한 시절이었지. 트라우마센터에 와서 상담을 받기 전에 오○○ 교수에게 대뜸 해남 출신 철학과 학생 박모를 아느냐고, 살아있느냐고 물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나 봐.
6.
어쩌다가 이런 모임을 하게 되었을까? 김○○은 아람회 사건의 아람이 아빠랑 같은 동네에 살았대.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아람이 아빠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빼보더니 빌려달라고 했다는 거야. 그 이후 그 장교와 자신이 그 책을 갖게 된 사연도 이야기하고 시국 이야기도 하면서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거야. 모임에서 5・18 관련 자료를 보고 자료를 따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할 때도 자신이 아는 해남 출신 대학생이 어쩌면 죽었을 것 같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대.
마지막 상담을 받으러 온 날 우리는 창평국밥집에서 막걸리를 한잔했어. 몇 순배가 돌아가자 그는 35년 전 산이면 황톳길을 걷던 일을 추억하더라고.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김남주 시인에게 그 황톳길 이야기를 했더니, 김 시인이 대번에 김지하의 외갓집이 그 부근이라고 하면서 “황톳길” 전편을 읊어대더란 거야. 김 시인의 시 낭송은 이전부터 유명했거든. 막걸리 가득한 잔을 한 손에 들고 낮은 톤에 깐깐한 목소리로 읊는 시는 대단했어. 김○○은 김 시인에게 배워달라고 해서 전문을 둘이 번갈아 낭송했다고 해.
그 얘기를 마치고 그는 갑자기 큰소리로 제법 긴 그 시 전문을 외우는 거야.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 … 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은 곳/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나는 울컥했어. 중년을 넘기면서 그 시를 나는 이미 까마득히 잊고 있었거든. 이 짜잔한 놈이 뭐라고 한 사람의 영혼을 이렇게까지 흔들어놓았더란 말인가. 두렵고 부끄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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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김○○을 더 만날 수 없었어. 정당이 해산된 마당에 정치 활동을 계속했는지도 모르겠어. 상담이 상당한 효과를 보았지만, 가정불화가 있었던 모양이야. 오○○ 교수 말로는 이혼하게 되었대. 상태가 더욱 안 좋아져서 결국 대전에 있는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바로 연락해서 대전에서 만나보리라 차일피일 미루다 10년이 훌쩍 지났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