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 대신 신랑신부 앞에 선 양가 부모들이 오랜만에 쓴 편지를 낭독한다. 곧 이어 신랑신부가 써온 사랑의 서약을 번갈아 읽는다. 이후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읽는다. 부모 자식 간에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테지만 자식을 가장 잘 알고 아끼는 부모가 직접 쓴 편지는 어떤 주례사보다 감동적이었다. 양가가 자녀의 결혼식에 부모가 덕담을 해준다는 뜻 깊은 의미도 더해진다.
조선시대는 주례(主禮)가 없었다. 조선조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아 주자의 성리학을 도입함으로서 관(冠)·혼(婚)·상(喪)·제(祭)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를 <주자가례>에 따랐다. 처음에는 왕가와 조정 중신에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으로, 다시 일반서민에까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주자가례란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의 범절에 관해 저술한 책으로 관혼상제에 관하여 자세히 정리해 놓았다.
전통혼례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의식을 치루는데, 먼저 신랑이 기러기를 신부의 집에 올려 다산하고 화목하게 살 것을 다짐하고 신랑과 신부는 처음으로 만나 상견례로 맞절을 하고 천지신명에게 부부로 열심히 살겠다고 서약을 한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좋은 부부가 될 것을 서약하는 의식을 올리고 표주박 술잔을 나누어 마심으로서 혼인식은 막을 내린다.
이 의식에 주례는 없다. 다만 오늘 날 사회자 격으로 신부의 당숙이나 가까운 친척이 의식의 진행을 맡을 뿐이다. 전통 혼례 절차는 그 시대에 따라,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차이점이 있으나 기본은 주자가례에 뿌리를 두었다.
대한제국(조선)의 말기에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고 갑오경장을 거쳐 서양문물이 들어 오면서 사회가 개혁되어 결혼시 문화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허용되어 서양식으로 성당과 예배당에서 신부나 목사가 종교예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점증했다. 물론 그 경우 신부나 목사가 주례인 셈이다. 근래에는 교수, 은사, 국회의원, 직장 상사 등 다양한 사람이 주례를 선다. 주례를 구하는 것은 신랑의 몫으로 주례로 모실 분을 찾지 못하면 돈 주고 직업주례를 세우기도 한다. 아마도 이래서 주례없는 결혼식이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조선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일본 순사가 신랑, 신부의 결혼예식을 관여했다고 하며 그것이 주례의 시초라고도 한다.
다음은 신랑 입장 장면이었다. 신랑은 어찌나 씩씩하고 명랑한지 입장하면서 좌우 하객에게 허리굽혀 인사하며 주레석 앞까지 갔다. 그리고 음악은 피아노나 바이올린 4중주가 일반적인데 섹스폰 연주였다. 섹스폰이 감성적이고 축하하는 자리에서는 흥이 나는 악기임에는 틀림없으나 이것도 내가 보기에는 파격적이었다.
백미는 축가 차례였다. 축가를 신랑 남동생이 불렀는데 그는 대학가요제에 입상한 경력이 있다고 사회자가 소개하였다. 거기 까지는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신랑과 동생이 신부를 앞에 두고 듀엣으로 노래를 열창하였다.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사 말이 좋았고 노래도 잘 불렀으며 아주 긴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신부 아버지의 인사말이 있었는데 그는 주례석에 올라 사위와 딸이 잘 살기를 바란다는 덕담과 결혼생활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사항에 대하여 자상하게 당부하였다.
결혼은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통과 의례 가운데 하나다. 결혼풍습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달랐고, 결혼의 의미 또한 변하였다.
모든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변해야 한다. 또 그래 왔다. 결혼식도 과거의 인습과 틀에 억매일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의 결혼풍습 변천사를 살펴보면 고구려에서는 혼담이 성립되면 여자 집 근처에 집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여자측의 몫이고, 남자 집에서는 고기와 술을 보낼 뿐인데 이를 서유부가라고 하여 혼인한 부부가 자녀를 낳아 어느 정도 크면 그제야 비로소 처자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제도는 조선조 중반기까지 이어져 내려와 퇴계나 율곡 그리고 우암 등도부친이 이 명현들이 자랄 때 까지 처가살이를 하였다.
또 다른 풍습으로는 혈족 혼인을 꼽을 수 있다.혈족 혼인이란 같은 친촉 간의 혼인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혼인은 근친혼이 많았는데, 귀족 계급일수록 그 현상이 심했다. 그 이유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함이며, 골품제 등의 신분사회를 중시하는 귀족 계급이 자기방어 수단으로서 결혼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친혼은 민간에까지 널리 성행하다가 고려말기에 들어와 유교의 영향으로 점차 금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결혼에 있어서 또다른 특징 중 하나는 불교식의 화혼례가 많았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였고 상례도 불교식이 많았다. 특히 상류사회에서는 품위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불교식을 따랐다. 고려시대에는 이혼이 자유로웠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재산권 행사가 가능했던 시대였던 만큼,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이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칠거지악 조건이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아들을 못 낳은 이유로 이혼을 당하지는 않았다.
조선 초기까지는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지 않았지만, 1477년(성종 8) 과부재가금지법(寡婦再嫁禁止法)이 제정ㆍ시행되면서, 양반층은 물론 차츰 일반 서민들까지도 여성의 재혼을 금기시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취수혼은 시동생과 형수의 결혼이었고, 고려시대까지는 이모와 조카, 남매간의 결혼도 가능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친혼인은 조선시대에 와서 금지되었다. 또한 동성동본(同姓同本) 혼인도 금지되었다.
이와같이 결혼풍속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는데 ,주례가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느냐 그리고 결혼 당사자 아버지가 주례를 서도 되는냐는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주례에 대한 아버지의 철학에 따라서 하면 되는 것이지 과거의 인습과 관례에 억매이는 것은 진부한 생각이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