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를 얼마 전에 읽었었다. 그때의 즐거움이 아직 기억 속에 생생한데 다시 그의 다른 책이 한권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저절로 그 책으로 손이 갔다. 이 책 역시 ‘류’처럼 도입부는 두서가 없는 듯해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의 책은 독특하다. 마치 옆집 일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구석구석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림 그리듯 하다. 그렇게 하자면 이야기가 제자리를 맴돌 것도 같은데 그것은 또 아니다. 오히려 다루는 이야기의 폭은 30년을 오르내린다.
저자는 일부러 독자의 시선을 흐리려 했는지 등장인물의 이름이 정식 이름에서 애칭으로 수시로 바뀌는가 하면 장면도 앞뒤로 흔들어댔다. 그런가 하면 전혀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는가 하면, 아주 작은 기억들이 다시금 슬며시 중요한 단서였던 것처럼 코를 들이민다.
이야기의 행간은 교묘해서 책을 몽땅 외워도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다. 앞에서 은근슬쩍 지난 일이 뒤에서는 무슨 단서처럼 태연하게 꺼내어지고, 그때의 낯선 상황이 뒤늦게 다기 퍼즐 맞추기처럼 만들어진다. 그러니 소설을 뒤쪽을 먼저 읽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은 혼란스럽다. 소설은 1984년의 대만과 2015년의 미국을 무대로 소년 네 명의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내고 있다. 이야기는 2015년 미국에서 소년 납치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 ‘색맨’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려다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색맨의 변호를 위해 유능한 국제변호사가 나섰다. 그는 과거 1984년 대만에서 색맨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제이였다. 제이는 아강을 통해 색맨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가 그들의 어릴 적 친구인 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이는 면회실에서 윈을 만나 그의 과거 기억을 되살리려 애쓴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소설의 전반부는 주로 윈이 ‘나’의 자리를 차지하며 소설을 이끌어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제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후반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색맨이 어떤 사람인지, 왜 일곱 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납치해 살해했는지를 추적해간다. 결국 전반부 전체 이야기는 윈의 과거를 더듬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먼저 이야기의 출발은 1984년 대만이다. 윈, 아강, 다다, 그리고 제이가 있다.
윈의 어머니는 얼마 전 윈의 형이 군대 휴가 중 살해돼 우울증에 걸렸다. 아강의 어머니는 소고기국수집을 운영하고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내에 기대어 빈둥거린다. 아강의 동생은 늘 날의 이야기를 엿듣는 다다이다.
제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게 저마다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 서로 다투기도 하고 자잘한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지낸다. 그런 아이들이 서로의 우정을 믿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파국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은 제이를 괴롭히는 새아버지를 죽이기로 모의하고 그 도구로 뱀을 이용하기로 한다. 어렵사리 독사를 구해 뱀술로 만들어 가지고 오지만 그 뱀에 의해 엉뚱하게 아강의 아버지가 물려 죽고 만다. 파국은 그때부터 심하게 소용돌이친다.
아강은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며 괴로워하고 있고 윈은 그건 우연한 일이라고 의미를 축소하려 애쓴다. 결국 아강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경찰서에 가서 모든 것을 실토하겠다고 하자 윈은 결국 그를 벽돌로 내리치고 옥상으로 끌고 간다.
그를 죽이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 그는 분명히 극도의 흥분 상태였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옥상에서 떨어진 것은 아강이 아니라 윈이었다. 아강의 동생 다다가 그 상황을 목격하고 윈을 아래로 민 것이다.
다행히 윈은 나무에 걸려 떨어지는 바람에 죽지는 않았지만 2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병원에서 지냈다. 퇴원을 하기는 했지만 그 바람에 그의 기억은 열 네 살에 갇혀 버렸다. 1984년 소년들의 일상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낳은 어두운 그림자는 30년을 넘어서까지 이어지다가 마침내 2015년의 사으로 새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소설은 수시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더 먼 과거 사이를 비틀거린다.
여기서 1984년은 상징처럼 보인다. 조지오웰의 ‘1984년’ 바로 그 해이다. 조지오웰이 그린 ‘1984년’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작용한다. 모두들 그 힘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네 아이들의 운명도 그러함을 그 소설로 얼핏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소설은 전반적으로 우울하다. 범행 동기는 모호하고 이야기는 전후를 오르내린다. 독자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소설은 색맨의 살인 동기를 그저 어렴풋이 보여준다. 퍼즐을 맞추고 그 퍼즐을 해석해서 보다 확실히 드러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공간에는 저자 특유의 날 것 같은 언어들로 가득 채워놓았다. 작가의 이런 오만에 나는 행간을 따라가느라 헉헉댔다. 소설 속 아이들의 말은 어른을 닮았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멈춘 곳에서 윈의 머릿속에 오롯이 떠오른 것은 그의 만화 속 이야기들이었다. 주인공이 죽여야 할 이름들이 주섬주섬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들을 살해했고 포대자루에 담아 유기했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색맨(sack man)이다.
이 소설을 청춘소설 또는 성장 소설로 읽어야할지, 아니면 스릴러물로 읽어야 할지, 또는 소설을 앞에서부터 읽어야할지 아니면 뒤에서부터 읽어야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신기하게도 문득문득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죽인 사람’과 ‘나를 죽인 사람’이 희미해진다. 나는 아직도 누가 ‘나’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내가 죽인 사람’도 당연히 모른다. 마찬가지로 ‘나를 죽인 사람’ 또한 모른다. 어쩌면 ‘나’라는 인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일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황당한 일이 한두 가지씩 있기 마련이다. 닭서리도 하고, 남의 집 장독도 깨뜨리고 그러면서 자라는 것이다. 자잘한 사건, 사고들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들이다. 이 네 아이 역시 그랬다.
아강의 아버지가 죽지않았다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아이들의 짓궂은 놀이였다. 죽음 앞에서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제이는 그 복잡한 방정식을 나름대로 풀어헤쳐 서로의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자 했다. 특히 윈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