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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 레코드社에서 전화 통화 중인 李哲 사장. 일제시대 대중예술의 주체적 자립기반이 그에 의해 마련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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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제 강점기 전반을 통하여 오케 레코드社 설립으로 우리 민족 연예계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던 李哲(이철·본명 이억길·1903∼1944) 사장. 그는 탁월한 흥행사였고, 대중예술에 대한 품격 높은 안목을 갖춘 비평가였으며, 음반산업을 통하여 민족에 의한 주체적 자립기반을 갖추려고 노력했던 품격 높은 경영자였다.
이러한 李哲의 활동은 한국 대중연예史 중 식민지시대에 관한 기록 부분에서 단연 으뜸가는 활동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李哲에 관한 자료는 불과 몇 장의 사진을 비롯해 극히 소수의 제한된 자료뿐이었다. 더불어 오케 레코드를 이끈 주역은 그동안 李哲 사장 단독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매부 金成欽(김성흠)과의 공동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란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된 것은 우리 문화계의 커다란 수확이다.
최근 마산 MBC에서는 작곡가 박시춘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제작 담당인 김사숙 PD는 진행과정에서 매우 귀한 자료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 자료란 다름 아닌 李哲의 출생을 확연히 알게 해주는 호적부 사본을 비롯하여 李哲과 그의 매부 金成欽, 두 사람의 각종 사진자료들이다. 박시춘 특집 프로그램은 이미 전국에 방영된 바 있다. 프로그램 제작자의 동의를 얻어 관련 자료들을 공개한다.
李哲은 1903년 6월9일 충남 공주시 중동 294번지 출생이다. 부친은 전주 이씨 가문의 李昌淑(이창숙), 모친은 밀양 박씨 가문의 朴靑順(박청순)이며, 4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億石(억석), 누나 億元(억원), 여동생 恩淑(은숙)이 있었다.
李哲의 본명은 李億吉(이억길)이었으며, 哲(철)은 1938년(35세) 5월에 개명한 이름이다. 억길이 나이 스물셋 되던 해인 1926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1936년 본적지를 인천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으로 이적했다. 이억길은 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오케 레코드社 설립
가정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이억길은 신문배달 등의 고학을 하면서 밴드부에 들어가 색소폰을 불었다. 이번에 입수한 사진자료에 의하면 李哲과 金成欽은 연희전문 악대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창생이었다. 함께 색소폰을 메고 찍은 사진에는 李哲이 뒤에 서 있고, 金成欽이 앞에 앉아 있다. 교수로 보이는 외국인 여성도 함께 촬영하였다.
이억길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말았다. 그 후 생계를 위하여 활동사진 박스 악사, 즉 무성영화의 연주단에 취업하여 색소폰과 트럼펫을 부는 전속 악사로 일하였다.
이억길이 신문배달로 고학을 하던 중에 玄松子(현송자)란 처녀를 알게 되어 교제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익었고 드디어 1934년 6월, 억길의 나이 31세에 혼례식을 올렸다. 현송자는 延州(연주) 현씨 가문의 玄映運(현영운)과 李씨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李哲보다 네 살 아래였다. 도쿄 메지로(目白)의 일본 여자대학 출신의 인텔리 新여성으로 이억길과 결혼하여 서울 종로구 명륜동 4번지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이후 남대문통(현재의 남대문로) 104번지와 다옥동(현재의 다동) 92번지로 옮겨가 살았다. 자녀들은 미경, 영호, 미원, 미령, 미선, 영 등 2남 4녀를 두었다.
日本 데이치쿠社 조선영업소 사장 취임
한편 악대부 시절의 다정했던 벗 金成欽도 이억길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억길의 누이 恩淑과 친해지게 되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억길의 적극적인 중매로 혼례식을 올리게 된다.
이 무렵 미국에서 시작된 영화와 레코드 산업은 급성장하였고, 이러한 바람은 일본에까지 불어닥쳤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적인 추세였다. 비록 식민지 체제이긴 하지만 서울에도 이 신종산업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악대부 출신으로 음악적 소양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던 이억길은 바로 이 新種(신종) 산업에 착안하였다.
수소문해 보았더니 뜻밖에도 아내 현송자와 대학 동창이 되는 사람 중에 일본 데이치쿠 음반 중역 간부의 딸이 있었다. 이억길은 아내를 통해 데이치쿠社가 서울에 조선지사를 설립하도록 강력한 권유를 넣었다. 데이치쿠社는 요모조모로 사업 성격을 따져 보았고, 마침내 경성영업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데이치쿠社의 조선영업소는 발족 후 억길이 초대 소장을 맡게 되었다. 맨 처음 영업소가 문을 연 곳은 남대문로 1가였다. 데이치쿠社는 한국인 소장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하지 않았고, 데이치쿠社 간부 가시오를 파견하여 경영과 사업 일체를 감시 감독하였다. 데이치쿠 음반 서울지사의 활동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레코드 제작은 어디까지나 데이치쿠社에서 담당하고, 가수의 선발권과 운영권의 일부만 인정하는 선에서 협약이 되었다.
이억길은 데이치쿠란 회사명이 전체 한국인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심리적 거부감을 지적하면서 회사의 이름을 바꾸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본사에서는 이억길이 제의한 「오케(OKEH)」란 명칭으로 변경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레코드社의 모든 자본은 데이치쿠社에서 부담하였고, 가시오가 이를 감독하였으므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낙관적이고 재치가 뛰어난 이억길은 가시오의 감독 기능을 서서히 견제하고 무력화시켜 나갔다. 실질적 운영 주체는 이억길과 金成欽 두 사람의 단합된 의견과 실천이었던 것이다.
1932년 무렵부터 우리 음반을 내기 시작했는데, 15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12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20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200여 종 등 도합 10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데이치쿠 회사명으로 발매되었으나 오케 레코드社가 발족한 이후 줄곧 오케(OKEH)라는 라벨을 사용하게 되었다.
오케 레코드社는 점점 사업이 신장되고, 경영권도 확대되어 갔다.
일본의 여러 레코드社 지사가 서울에 문을 열었으나 녹음 취입실을 제대로 갖춘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대부분의 녹음은 가수를 비롯하여 취입 관계자 일행이 모두 일본에 건너가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포리도루나 콜럼비아社에 설치된 간이 녹음실이 전부였다. 레코드 제작의 실질적 마무리 단계라 할 수 있는 프레스 공정의 일체는 모두 일본에서만 가능했다.
매부 金成欽의 활약
그런데 오직 오케 레코드社만 유일하게 녹음 취입실을 갖추었다. 이런 조건은 金成欽의 집념과 투지가 있어 가능했다. 金成欽은 일본으로 건너가 레코드 제작기술과 프레스 공법을 낱낱이 배워 올 결심을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이러한 「위장취업」을 쉽게 허용할 리 만무했다.
金成欽은 일본으로 건너가 데이치쿠社의 하급직원으로 입사하는 데에 성공했다. 음반제작 업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일본인들은 제작기술이 누출될 것을 극도로 염려하였다. 얼마간의 세월이 경과하게 되자 음반제작 담당자들의 보안은 허술해지기 시작했다. 김성흠의 우직하고 성실한 자세와 겸손한 인품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金成欽은 틈틈이 레코드 제작과정에도 조금씩 참여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자청해서 음반제작과 관련된 비밀 기술까지 가르쳐 주게 되었다. 그는 불철주야 노력하여 음반제작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였다.
이후 金成欽은 서울로 돌아와 오케 레코드社에 즉시 음반제작실을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기름 짜는 압축기를 개조하여 레코드 프레스를 만들었고, 그야말로 원초적 기술과 방법으로 유성기 음반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음반의 원료인 파라핀을 즉시 구하지 못해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고물장수들이 수집해 온 중고음반에다 코팅을 하는 방식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오케 레코드社에서 제작된 레코드의 판매고가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재료 구입도 한층 수월해졌다.
오케 레코드社가 있었던 곳은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부근이었고, 이후 1937년 다옥동에 독립건물을 지으면서 본격적 사업과 활동 체제를 갖추었다. 1층은 문예부와 영업부, 2층은 취입실 전용이었다. 이억길은 오케 레코드社 사장의 신분으로 우수한 가수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편 金成欽이 제작한 레코드를 직접 자전거에 싣고 음반가게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이러한 광경이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각 음반가게에서는 맨 처음 오케 레코드社에서 제작한 음반을 신뢰하지 않아 거의 애원조의 설득을 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수의 가요곡들이 인기를 얻어 가기 시작하자 오히려 공급물량이 부족할 정도였다.
경영권을 빼앗기다
오케 레코드社는 다른 음반회사들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음반을 공급하여 식민지 음반시장에서 장기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케 레코드社의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유성기 음반의 대중화로 광범하게 이어졌다. 민요, 판소리, 창극, 가야금 병창 등의 국악 음반과 유행가, 신민요 등의 가요 음반을 다수 제작하였고, 만담·동요·성악 등의 음반도 제작하였다.
한편 일본 데이치쿠 레코드 본사에서는 서울의 오케 레코드社가 자력으로 음반을 직접 생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했다. 더불어 金成欽이 음반제작 기술을 익히기 위해 몰래 위장취업을 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데이치쿠社 측에서는 무척 당황하고 분노감을 표시하였으나 속으로는 기술을 빼내 간 金成欽에 대하여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조선인」이라는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데이치쿠社의 감독역으로 파견된 가시오는 명석하고 재치 있는 이억길과 金成欽 두 사람의 협동적 노력으로부터 많은 견제와 제약을 받았다. 오케 레코드社의 잇따른 음반 발매 성공, 이에 힘입어 악극단 발족으로 활동이 확대되자 깜짝 놀란 데이치쿠 본사 측에서는 1938년 이를 견제하려는 작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것은 오케 레코드社에게 빼앗긴 경영권의 탈환을 위한 공작이었다. 일본으로 일단 돌아간 가시오는 데이치쿠 중역진들과 비밀회의를 수차례 가진 뒤 회심의 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오케 레코드社 사장 이억길은 어느 날 일본 데이치쿠社로부터 호출 전보를 받았다. 이억길이 데이치쿠社에 도착하자 미나미 사장은 냉랭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채 일어서지도 않았다. 회의장에 들어간 이억길은 거의 강압이나 협박과 다름없는 삼엄한 질책의 분위기를 견디며 앉아 있어야만 했다.
데이치쿠社 측 대표로 회의장에 나온 가시오는 도도한 자세로 「일본에서 제작한 레코드 판매 잔액을 지불할 때까지 조선의 오케 레코드社에 대한 판권은 일본제국 축음기회사 사장인 미나미 쿠니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각서에 날인하기를 요구했다. 이억길은 가시오의 요청 이면에 들어 있는 흑막을 알 길이 없었다.
이억길, 문예부장으로 강등
단지 판매금 잔액만 지불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이억길은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은 채 서명과 날인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며칠 뒤 이억길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오케 레코드社에는 이미 일본 데이치쿠社가 급히 파견한 새로운 지사장 이무라 료호(井村良瑞)가 사장 이억길의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사장 이억길의 직함은 문예부장으로 강등되었고, 책상도 훨씬 아래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피와 땀으로 쌓아올렸던 오케 레코드社의 경영권은 이렇게 하여 일본의 데이치쿠社에게 완전히 탈취당하였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불쾌한 충격이었다. 뒤늦게 이억길은 일본인들의 야비한 속셈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마침내 이억길은 오케 레코드社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오직 조선악극단을 조직하는 사업에만 골몰하였고, 기존의 오케 연주단을 오케 그랜드 쇼로 발전시켜 나갔다. 너무도 정들었던 오케와의 인연을 매몰차게 단절할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던 것이다. 상심한 가슴을 안은 채 이억길은 원정 공연단을 이끌고 다녔다.
이제 오케 레코드社와 인연을 가졌던 이억길의 인맥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李哲은 일찍이 연희전문 악대부에서 색소폰을 불던 관악기의 연주자로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므로 훌륭한 잠재력을 지닌 가수와 히트송을 판단하는 명수였다. 이러한 李哲의 천부적 감각은 그동안 오케 레코드社를, 모든 가수들이 스스로 전속되기를 갈망하는 명망 높은 회사로 발돋움시켰다.
일본 음악학교에 다니다가 여름방학 중 고향에 돌아와 학생복 차림으로 연주하는 孫牧人(손목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李哲이었다. 이 회사 전속 작곡가인 文湖月(문호월)은 손목인의 사촌형이었다. 그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손목인은 오케 레코드社에 입사했다. 이후 손목인은 李哲 사장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일생 동안 그리움을 지니고 살았다.
1990년대 후반 필자가 한국아코디언협회 정기 모임에 참석한 자리에서 작곡가 손목인은 특유의 베레모를 쓴 모습으로 노구를 이끌고 나와 축사를 하였다. 이 축사에서 손목인은 李哲 사장의 권유로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아코디언을 익히게 되었던 기억을 술회했다(그로부터 불과 2개월 뒤에 선생은 타계하였다).
李哲은 손목인에게 부탁하여 高福壽(고복수)를 오케 레코드社로 옮겨 오도록 설득하였고, 결국 전속 계약을 맺었다. 작곡가 손목인은 1934년 신인가수 고복수의 입사에 따라 오직 고복수의 음색과 창법을 감안하여 불후의 명곡 「타향살이」와 「梨園哀曲(이원애곡)」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잠재력 지닌 가수 발굴에 일가견
李蘭英(이난영)도 李哲 사장에 의해 발탁된 가수였다. 1935년 손목인은 이난영으로 하여금 「목포의 눈물」을 작곡하여 무려 5만 매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당시 인구비율과 경제수준으로 볼 때 일본에서의 30만 매 이상에 필적하는 판매량이라고 한다(박찬호, 한국가요사, 276).
南仁樹(남인수)는 본명이 姜文秀(강문수)로 「눈물의 해협」을 내었고, 1936년 12월 「비 젖는 부두」라는 곡도 발표한 신인가수였다. 강문수의 노래에 주목한 오케 레코드社 사장 李哲과 작사가 강사랑은 그를 설득해 기어이 스카우트에 성공했다. 오케에서의 데뷔곡은 「범벅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였고, 1936년 송년특별신보로 제작하였다. 강문수는 오케 레코드社로 이적한 뒤 남인수란 예명으로 再등장하여 「인생극장」, 「물방아 사랑」을 크게 히트시켰다. 1938년 남인수는 불후의 명곡 「애수의 소야곡」을 내놓아 자신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다.
李花子(이화자)는 원래 뉴코리아레코드를 통해 데뷔했으며 포리도루를 거쳐 오케에 입사하였다. 李哲은 거액의 전속료를 제시하여 이화자를 오케로 이적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후 李哲은 「스카우트의 명수」란 별명을 듣게 되었다. 이화자는 1938년 가을 오케 그랜드 쇼에 참가했다.
張世貞(장세정)은 평양에서 태어나 생후 2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바람에 조부의 손에 자란 장세정은 평양 일대에서 노래 잘 하는 소녀로 이름이 높았다. 1936년 11월 평양방송국 개국기념무대에 올라 갈채를 받았는데, 많은 레코드 회사에서 탐을 내었으나 李哲이 장세정을 오케 레코드社에 입사시켰다. 오케의 연주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이억길은 노래 잘 부르는 소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란봉의 망월장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오케 레코드社에서는 즉시 녹음시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뛰어난 사업감각을 지녔던 李哲은 콩쿠르대회를 열어 가수를 선발한다는 광고를 내었다. 그 결과 장세정이 1등, 宋達協(송달협)이 2등이었다. 이는 광고 및 선전효과를 노린 이억길의 기획이었던 것이다. 장세정은 「항구의 무명초」를 취입하여 큰 반응을 얻었다. 이후로 오케 레코드社 전속 여성가수 중에서 李哲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가수가 되었다.
黃錦子(황금자)도 李哲이 발탁한 가수였다. 오케의 문예부장 대리인 金尙振(김상진)은 황금자를 손목인과 박시춘에게 소개하였다. 손목인은 「지는 석양 어이 하리」를, 박시춘은 신곡 「왜 못 오나요」를 만들어서 그녀에게 주었다. 신보 발매시에 예명을 황금자로 하였다. 황금자는 뒤에 黃錦心(황금심)으로 예명이 바뀌었다.
朴庭林(박정림)과의 인연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함경도 주을 출신의 술집 아가씨였다. 오케 연주단이 주을 온천으로 공연을 갔을 때의 일이다. 한 소녀가 무대 뒤로 박시춘을 찾아왔다. 박시춘이 직접 반주를 하여 테스트했는데, 작곡가의 마음에는 들었으나 이억길은 별반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뒤 기다리다 지친 박정림은 서울로 올라가 다시 오케 레코드社로 찾아갔으나, 박시춘과 李哲 사장의 반응은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결국 연락이 없자 박정림은 태평 레코드를 찾아가 즉시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후 예명도 朴響林(박향림)으로 개명했고, 소속도 콜럼비아 레코드로 이적했다.
계속되는 히트에 놀란 오케 레코드社 측에서는 박향림을 찾아가 이적을 제의하였으나 박향림은 냉담하였다. 하지만 줄곧 거액의 이적료를 제시하며 제의해 오자 박향림은 1939년 드디어 오케로 이적하였고, 「코스모스 탄식」과 「순정특급」 등의 빅 히트작을 내놓았다.
「조선 악극단」을 이끌고 순회 공연
1935년 10월15일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오케 대연주회가 막을 올렸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가수들을 발탁하여 세상에 내보내고 레코드 업계의 중심적 존재로 군림해 온 오케 레코드社는 1938년 「오케 그랜드 쇼」를 설립하였다.
李哲이 그랜드 쇼의 모든 기획 역할을 도맡았다. 가요 쇼, 레뷰(revue·음악 무용을 섞어 연출하는 무대예술), 가요극을 곁들인 본격적인 쇼 무대였다. 1936년 2월에는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재류 조선인 동포위안--오케 순회 대연주회」가 도쿄, 오사카, 고베, 교토, 나고야 등지에서 순회공연으로 열렸다.
4월 중순에는 李哲이 기획하고 주관한 영화 「노래 조선」이 상영되었다. 金陵人(김능인) 구성으로 최호영이 지휘하는 오케 재즈밴드가 연주를 담당하였다. 출연진은 고복수, 김해송, 이난영, 임생원, 임방울, 김연월, 강남향, 나품심 등 당대의 일급 가수들이었다.
1939년, 李哲은 조선악극단을 본격적으로 발족시켜 성공적인 일본 공연을 수행하였다.
李哲은 김상진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일본공연을 모색하였고, 요시모도 흥행 측에서는 「오케 그랜드 쇼」라는 명칭을 트집잡았다. 여기에도 어떤 방해공작이 개입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에 따라 李哲은 공연단 명칭을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이라 변경하였다.
드디어 1939년 3월11일부터 열흘간 조선악극단은 일본 도쿄 아사쿠사의 가게츠(花月) 극장에서 공연하여 관중들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등 오케의 쟁쟁한 전속들이 총출동하여 조선의 민족적 색채를 배합한 공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
이 공연에 대한 반향은 참으로 크고 높은 것이어서 당시 일본의 저명한 문화비평가 가와가미(河上徹太郞)가 격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가와가미는 칭찬에 몹시 인색한 비평가였다고 한다. 일본의 신문기사들은 「일본 예능계의 진로를 再검토하자」는 반성의 기사를 실었다. 이 일본 공연에서는 이난영과 金貞九(김정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도쿄 공연 이후 조선악극단은 오사카, 나고야, 교토, 고베를 비롯하여 일본의 여러 지역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조선악극단」 사업에 몰두
일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조선악극단은 1939년 6월20일부터 부민관에서 귀환보고 공연을 열었다. 이때 무대에 오른 李哲이 『게다짝 따위가 우리 조선인을 이길 수 없다』는 위험성 발언을 하여 엄청난 물의를 빚었고, 결국 종로경찰서로 호출되어 20일간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李哲은 경찰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워낙 반향이 드높았던 일본 공연은 같은 해 12월 제2차 渡日(도일) 공연으로 이어졌다. 도쿄 공연을 필두로 오사카에서는 47일 동안의 장기공연이 열렸다고 한다.
李哲은 이미 경영의 일선을 떠난 상태였지만 새로운 가수를 발굴하는 열정은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타고난 그의 감각이었던 지도 모른다.
오케 그랜드 쇼가 북부 조선에서부터 만주 일대로 순회공연을 할 때의 일이다.
회령을 거쳐 청진에 도착했을 때 작업복 차림의 청년 하나가 찾아왔다. 李哲과 박시춘 앞에서 그는 「꼬집힌 풋사랑」을 원래의 남인수 못지않은 뛰어난 기량으로 불렀다.
당시 남인수가 오케 레코드社에서 身病(신병)으로 취입을 현저히 줄이고 있던 시절이라 李哲은 즉시 그 청년을 발탁하여 무대에 서도록 했다. 그 함경도 청년이 바로 李寅權(이인권)이다. 워낙 남인수의 모창을 잘 해내어 청진의 남인수란 별명을 얻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인권의 인기는 1940년 12월에 발매된 趙鳴岩(조명암)의 「꿈꾸는 백마강」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이 곡을 발매금지시켰다.
高雲峰(고운봉)은 원래 태평 레코드 전속으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히트곡을 내었다. 李哲은 이미 사장직을 일본인에게 탈취당하고 조선악극단 사업에 몰두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러나 잘 생긴 용모의 고운봉에게 호감을 느껴 그를 기어이 오케 레코드社로 스카우트될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 고운봉은 이후 李哲의 요청으로 조선악극단에서 주연급 배우로 활동하게 되었다. 1941년 8월 오케 레코드社 신보로 「船艙(선창)」을 발매하여 가수 고운봉의 인기는 한껏 치솟았다. 그러나 일제 말의 제반 상황은 점차 험악해져만 갔다.
李哲은 뮤지컬 대본 방식으로 오케 그랜드 쇼를 계속 이끌었다. 「만리장성」, 「맹강녀」, 「아편전쟁」 등을 위시하여 「부여회상곡」을 무대에 올렸다. 뛰어난 작사가 조명암이 李哲을 도와서 이 작품들의 대본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다.
李哲은 다시 일본식 이름인 靑山哲(청산철)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이것은 항시 감시 형사가 뒤따르는 그가 총독부에 자진 협조하는 듯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연예 조직을 이끌고 전개하는 활동에 불필요한 검열의 제한이나 활동의 구속을 걷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심리가 작용한 결과였다. 더불어 이러한 태도는 李哲의 자유주의적 기질과도 깊이 관련된다.
41세에 죽다
이렇게 얻어진 소폭의 자유를 바탕으로 李哲은 작품 「부여회상곡」을 통하여 망국의 삼천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만들어 내었다. 그 장면은 가련한 꽃잎이 파도를 타고 흩어져 가는 상징적 광경으로 이 극을 관람하던 관객들은 이심전심으로 망국의 설움을 자아내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볼 때 李哲의 일제시대 말기의 행보는 단순히 親日로서만 다룰 수 없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0년 동짓달에 모친 박영순 여사가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회의 모든 분위기가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제 말로 접어 들면서 李哲은 오케 싱잉팀이나 신생악단을 설립하고, 무용수 전문양성기관을 운영하는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워낙 뛰어난 무대기획 능력과 안목을 가졌던 탁월한 흥행사 李哲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스테이지 마스터」란 영예로운 칭호가 붙었고, 이후로 이 별명은 줄곧 그의 뒤를 따라 다녔다.
1944년, 李哲은 만주공연을 떠났다. 新京(신경)에서의 공연이 마감되기 전, 다음 공연 준비를 위해 그는 중국 上海를 향하여 열차 편으로 먼 길을 달릴 때였다. 고달픈 강행군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 여행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열차 속에서 여러 날을 보내야 하는 고단한 여정을 이기지 못하고 李哲은 기어이 급성폐렴에 걸렸다. 급거 서울로 돌아왔으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1944년 6월25일 오후 3시, 서울 종로 6가 12번지의 자택에서 李哲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불과 41세였다. 요절 이후 역사적 격동의 혼란 속에서 식민지 문화계의 거인 李哲의 존재는 차츰 잊혀져 갔고, 마침내 전설적 실루엣으로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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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공부 잘 했읍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