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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 하 19;20-34. 이일,'wonder(경이로운)' 'massive(엄청난)' 'sizable(상당한)' 것들을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 2013.9.8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실망과 좌절의 늪에 빠져 폐인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늘 피에스타가 아닙니다. 굴곡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늘 피에스타가 아님을 스페인정부가 지금 깨달았습니다. 유럽의 경제 질서의 붕괴로 전 유럽이 시끄럽습니다. 어제 러시아 상태에부르크에서 G20 회의가 경제적 축구전략을 모색하면서 폐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에게 있어서 긴축재정의 목적이 스페인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해 국가 부도를 막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긴축의 목적이 경기회복과 성장이었다면 실패라고 봐야 합니다." 페데리코 스테인베르그 스페인 왕립 엘카노 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글로벌 금융 위기 후 5년을 평가해 달라는 주문에 이와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경제가 70년 전 스페인 내전 이후 최악"이라며 "스페인의 신용등급이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경제가 회복되려면 최소 3~4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현재 스페인 경제 상황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더블딥이라고 합니다. 스페인 정부는 올해 말부터 다시 성장할 것이라고 하지만 매우 느리고 고통스러운 성장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2002년 유로화 도입 후 온 나라가 뭐에 홀린 듯 도취 상태에 빠졌습니다. 은행은 지불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값싼 이자로 돈을 퍼줬고 너도나도 교외의 큰 주택과 휴양지 별장을 샀습니다. 그런데 세계 금융시장 충격으로 부동산과 건설업의 거품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스페인 경제 회복의 가장 큰 장애물은? "신용 경색 문제라고 합니다. 중소기업이 살아나고, 무역을 활성화하고, 소비를 늘리고,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가장 급한 것이 신용 회복인데 청년 실업률이 40%에 육박합니다. 실업보다 더 큰 문제는 젊은 세대가 느끼는 좌절감입니다. 1975년 프랑코 독재 정권이 끝난 후 스페인은 줄곧 성장을 했고 부모보다 자식 세대가 잘살게 되는 것이 당연히 여겨졌습니다. 계속해서 잘 살고 피에스타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젊은 사람들과 학생들은 처음으로 경제의 퇴행을 경험하고 있고, 똑똑한 인재들은 해외로 빠져나가는 '두뇌 유출'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상황, 금융 위기가 스페인에 남긴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생이 항상 피에스타(fiesta·축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았습니다. 자기들이 잘나서 잘살았던 것이 아니라는 현실 감각을 되찾게 해줬습니다. 아마 1997년 외환위기 때 일본이나, 한국 사람들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심정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항상 피에스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굴곡이 있습니다. 좋은 때가 있고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는 매일의 삶이 피에스타인줄 알았습니다. 그가 젊은 25세 때 왕위에 오르고 나라와 백성들을 잘 이끌어 갔습니다. 그가 마음에 두었던 예배 공동체 유다를 만들어 가는데 쉽게 진전이 잘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뻣고 항상 이렇게 승승장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 이스라엘을 정복 시켰던 앗 시리아가 남쪽 유다까지 넘봅니다. 앗 시리아가 유다의 거점지역의 성과 도시들을 점령하고 마지막 185000명의 위대한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적인 위기에서도 히스기아는 대승을 거두는데 어떻게 대승을 거두게 되는 가를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문제 해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히스기아는 massive, sizable, wonder를 위기 가운데서 절망 가운데서 경험을 합니다. 여러분, 문제와 위기 가운데서 엄청나고, 상당하고. 경이로움으로 현재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히스기아는 이것들을 경험합니다. 위대한 승리를 이룹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가? 먼저 본문의 내용입니다.
1. 본문의 내용입니다. 앗수르 왕의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정복한 앗수르는 그 여세를 몰아 반 앗수르 정책을 취하는 남왕국 유다를 침략합니다. 남왕국 유다보다도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앗수르는 유다의 변경지역에 있는 견고한 성읍들을 차례로 정복을 하고(왕하 18:13). 이제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읍들까지 다 정복합니다. 그런데 국가를 바로 세우고 종교 개혁에 힘쓰던 히스기야에게 있어서 앗수르의 침략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큰 재앙이고,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히스기아는 처음에는 외교적으로, 굴욕적으로 대처합니다.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에 다급해진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행하리이다"(왕하 18:14)라고 스스로 빌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 왕이 그 동안 반 앗수르 정책을 썼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렇게도 단호하게 반 앗수르 정책을 썼던 히스기아였지만 막강한 앗수르의 힘에 밀려 어떻게 보면 1차적인 항복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산헤립은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왕하 18:14) 자신에게 바치도록 했고, 이에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이 요구한 금액을 조달하기 위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심지어는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모든 기둥에 입힌 금까지도 다 벗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불행중 다행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스기아의 굴욕에도 산헤립의 침략이 계속됩니다. 유다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히스기야 왕으로부터 많은 공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은 계속되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이전보다 더 많은 군사를 보내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히스기야 왕을 나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군대 장군인 랍사게를 통해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이나 심히 허약한 유다의 군사력을 의지하지 말고 빨리 나와 항복하라고 합니다(왕하 18:21-24) 더 나아가 자신들이 이렇게 예루살렘을 멸하려 온 것은 '여호와의 뜻'에 의함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을 팔기까지 합니다(왕하 18:25). 히스기아의 열심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아의 열심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때서야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입니다. 성전에 들어가 기도를 했습니다. 앗수르 왕이 자신의 군대 장관인 랍사게를 통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왕하 18:34)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왕하 18:35)라고 했다는 말을 신하들을 통해 전해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에게 신하들을 보냅니다. 히스기야는 국가적인 위기를 당했을 때에 자기 자신만 성전에 들어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신하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내어 기도하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보낸 사자들은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랍사게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저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소서"(왕하 19:4)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어가 기도한 것을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해 세 가지로 응답해 주십니다.
먼저 열방을 정복한 앗수르 왕 산헤립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잠깐 사용된 도구에 불과한 것이요(왕하 19:20-28),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남유다인들)는 비록 2년간 추수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로 살아가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왕하 19:29-31).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이 절대로 앗수르의 손에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왕하 19:32-34).
여기서 하나님의 역할이 나오는데 승리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헤립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산헤립에게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왕하 19:27, 2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밤중에 사자를 보내어 앗수르 진에 있는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모조리 다 죽이셨습니다(왕하 19:35). 이것이 massive, sizable, wonder를 경험하고 대승리를 가져온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히스기아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1. 위기 앞에서 우리의 열심이 있습니다. 먼저 축복을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맡기신 일이면 열심을 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열심이 없으면 도전도 없고, 기도도 없고, 성과도, 실패도 없습니다. 일단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산헤립의 침공 앞에, 마지막 예루살렘의 함락 앞에 히스기아의 열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떻게 하든지 아름답고 선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어려움과 고난, 환난이 닥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낙심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러한 어려운 조건과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 성공의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성공과 실패, 승리와 좌절 앞에서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기초로 해서든지 아니든지 우리의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 기초하여 열심을 나타낸 사람이 있습니다. 1896년 6월4일 새벽 3시, 드디어 가솔린 엔진으로 가는 포드1호가 완성되었습니다. 포드는 전기 회사 직원이었는데 자동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포드1호에 들어간 대부분의 부품은 여기저기서 수집한 폐품이었습니다. 공기를 넣은 타이어를 끼웠고, 좌석은 자전거 안장이었으며, 헤드라이트는 없었고, 종소리로 경적을 대신했습니다. 브레이크가 없었기 때문에 차를 세우려면 엔진을 꺼야 했고, 후진 기능이 없었기에 뒤돌아올 때는 뒷바퀴를 들어 올려 방향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런 포드를 보면서 사람들은 모두가 비웃었습니다. 1896년 8월 뉴욕에서 에디슨 전등 회사의 총회가 열렸습니다. 포드는 미시간 주 대표의 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석을 했습니다. 만찬회에는 발명왕 에디슨도 자리를 같이했습니다. 미시간 주의 수석대표가 에디슨에게 포드를 소개를 하는데 “여기 가솔린 엔진차를 만든 청년이 있습니다.” 에디슨은 포드를 반기며 옆자리에 앉힌 뒤 포드에게 가솔린 자동차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포드는 위대한 발명왕 에디슨에게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설명한다는 것이 무척 기뻤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에디슨을 배려해 종이에 그림을 그려 가며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포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던 에디슨은 “훌륭합니다. 전지는 차에 달기에는 너무 무겁고, 증기차는 안에서 불을 때야 하니 틀렸는데 자네의 가솔린차는 무겁지도 않고 불을 땔 필요도 없잖은가? 자! 믿음으로 하면 되네. 포드, 더욱 열심히 해 보게.” 그러던 어느 날 에디슨 전기회사의 책임자가 그를 불렀습니다. “포드, 자네의 전기 기술은 참으로 훌륭한데 그 좋은 머릿속이 가솔린 자동차로 꽉 차 있으니 안타까운 일일세. 만일 자네가 자동차를 잊어버리고 전기 사업에만 전념한다면 회사 전체를 맡기고 싶은데. 어떤가?” 당시 전기회사는 번창일로에 있던 가장 유망업종이었습니다. 그런 회사의 총지배인 자리는 포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높은 지위였습니다. 포드는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드디어 1899년 8월15일 직장을 포기한 그는 “포드”라는 자동차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포드는 성공적 삶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포드의 열심입니다. 그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 당시 가솔린 엔진 자동차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황당무계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해내고 말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친구들, 그리고 회사에서도 모두가 어리석은 짓이라 치부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퇴근하고 늦은 밤까지 작업을 해야 했기에 옆집에서 “잠 좀 자자”고 할 정도로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번 집을 옮겨 가면서까지 자동차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을 위해 더 큰 것을 포기했습니다. 일생일대에 다시 올 수 없는 에디슨 전기회사 총지배인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이미 소유한 모든 기득권을 단 번에 포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뤄질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변변치 않은 작업도구와 쓰레기더미에서 주어온 물건들이 전부였지만 가솔린 엔진 자동차의 돌파구를 찾아 나갔습니다. 여러 번 실패가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반대도 심했지만 “가능성” 하나만 믿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포드는 그의 열정으로 massive, sizable, wonder를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열심도 무엇을 만들어 냅니다. 히스기아도 열심이 특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은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대항하는 열심은 우리의 한계를 비웃듯 합니다. 히스기아의 열심히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이렇게 비참한 실패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산헤립을 믿었던 히스기야는 더 큰 고난에 직면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열심은 massive, sizable, wonder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으로는 될 것 같은데, 생각으로는 해결할 것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문제 해결에 우리의 열심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은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185000명의 군사를 이길 수가 없고 풍전등화 앞에 놓인 것을 되돌려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열심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massive, sizable, wonder를 경험하는 첫 단계입니다.
2. 그러면 우리의 열심이 무너질 때 믿는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얻습니다. 여러분, 왜 포기 합니까? 위기를 돌파 하는 것 보다 포기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쉽고, 편안하고, 힘들지 않는 일에 길들여지면, 인생에 있어서 항상 피에스타면 괜찮은데 갑작스런 위기와 고난 앞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쉽고 가볍고 편안한 길에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좁은 길을 말씀합니까? 왜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까? 위기 앞에서 굳건히 세워지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히스기아가 왜 위대한 인물이 됩니까? 모든 문제 앞에서 포기를 하지 않습니다. 쉽고, 편안하고 힘들지 않은 길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반 앗시리아 정책 때문에 겪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수로를 건설하기 위해서 대 토목 공사를 합니다. 자기의 죽음 앞에서도 결단코 쉬운 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로 환난 중에 우리들이 취해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성전에서 히스기야가 옷을 찢은 것은 극한 슬픔과 원통함을 나타낸 것이고 베옷을 입은 것은 그가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한 것을 의미합니다. 히스기야가 이토록 심하게 원통함을 느낀 것은 자신이나 유다가 모욕 받은 것보다도 산헤립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될 때에 심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히스기아는 자기의 한계가 무너지고 방법이 없을 때 쉬운 길을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열심이 실패하고 그리고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은 히스기야의 형편을 소상히 아시고 히스기아가 미쳐 구하지 못한 것까지도 정확히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면에서 실패 가운데서도 먼저, 믿음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의존적인 삶, 성경 의존적 삶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믿음의 목표가 있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장사되었고 그와 함께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롬6:4)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겠다고 하는 분명한 믿음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실패 앞에서도 열정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딤전1:5)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열정도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형제들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살전2:17)고 했습니다. 열정은 하나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합니다. 주님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실패 앞에서 massive, sizable, wonder를 위해서, 위엣 것을 위해 땅엣 것을 버려야 합니다.(골3:2)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빌3:13-14) 히스기아는 왕의 자리를 내어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massive, sizable, wonder가 이루어 질 때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최선을 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롬12:2), 열심으로 선을 행하되(벧전3:13),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살후3:13) 왜냐하면 때가 이르면 분명히 거둘 수 있기(갈6:9)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히스기아의 피난처와 힘이 되십니다. 세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반석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아의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꼭 도움이 필요할 때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모든 고난을 아시고 합당한 조치를 강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십니다. 히스기아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제나 항상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의 영혼을 안전케 하시며 마음을 평안케 하기 때문에 사람을 괴롭히는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 있을 때 누리는 담력과 평안입니다. 주님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여러분, 포기 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많습니다. wonder, massive, sizable 을 얻습니다. 히스기아처럼 실패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은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massive, sizable, wonder를 누가 만들어 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엇이 이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냅니까?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열왕기하19;31, 이사야9;7, 사37;32, 고후12;2 에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바울 사도가 일찍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고후서 11;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말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셨던 것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약속의 민족을 시작하게 하신 것,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노예에서 자유케 한 출애굽의 사건, 역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을 주신 것, 또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나타낼 수 있게 하신 것,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 곧 인간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열심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관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바울 사도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신부로 살아가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깨닫고 그렇게 강조했던 하나님의 열심, 바로 구약의 표현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그런면에서 비전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우리교회의 부흥의 발자국 소리는 첫째로, 사방에서 몰려오는 영혼과 일꾼들입니다. 이 복음의 불모지에서 영혼과 일꾼들의 부르심, 이것이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둘째로, 강력한 중보 기도자들의 눈물의 중보기도입니다. 1년 365일 매일 매일 예배와 기도시간마다 울고 통곡하며 기도하는 영적간구 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주께서 주권적으로 부으시는 경제적 축복입니다. 물질로 말씀드리면 사람도 작은 일을 맡길 때는 작은 돈을, 큰일을 맡길 때는 큰돈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히메지 비전교회에 하늘 보고의 문을 활짝 열으셨습니다. 엄청난 물질의 축복이 몰려오고 우리의 권석들이 바라는 massive, sizable, wonder의 결과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데 이런 것을 누가 이루어 갑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주를 의지하고 믿는 것이 곧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의 성취는 단순히 우리들의 열심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달려 있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성취하는 여호와의 열심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모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영혼을 향하여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분의 심장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열심은 이기심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분의 열심은 정결하고 거룩합니다. 사랑의 표현이요,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올리거나 공로를 들이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써주시는 것으로 감사해야 하며 모든 영광을 그분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을 향하여 예언된 일들을 이루실 것이고, 하나님의 열심이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이며, 바다의 풍부와 열방의 재물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적인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으로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우리의 증인인 앞서간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고 뾰족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탄과 모든 귀신들에게 선포하노라. 우리가 아니고,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심이! 히메지 비전교회 위에 열린 하늘 문을 둘 것이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시적인 강력한 말씀과 신선한 기름부음을 공급하실 것이다. 열방의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그것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열심이 사람들을 비전교회로 이끌 것이며 열방의 재물을 가져다 부을 것이며 그리고 강력한 부흥을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모든 방해와 계략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존귀한 이름으로 너희들의 패배를 선포한다. 영혼들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불같은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이루어집니다.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왕하19:31),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37:32)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 모든 것들을 기필코 이루십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18만5000명이나 되는 앗수르, 연합군이 하룻밤 사이 몰살당하는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셨습니다. 풍전등화 같은 국난의 위기의 반전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wonder, massive, sizable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하나님의 열심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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