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고개의 유적비#
기미년 삼일만세 운동 104주년을 맞은 양양에서
만세고개에 있는 유적비를 소개하겠습니다.^^
동해안 7번 국도변.
38휴게소와 가까운 위치입니다.
1919년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양양지방에선
4월4일 장날에 7일간 만세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날의 집결지를 만세고개라고 명명하고 유적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군요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에 있는 만세고개의 유적비>
강원도 산골까지 파급되어 온 기미 만세 운동은
독립선언서 입수가 실마리였습니다.
조화벽 감리교 여신도가 버선목에 몰래 숨겨 온 독립선언서는
양양감리교회의 청년 지도자인 김필선과 김주호 등에게 전달되어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한편
유학자 설초 이석범선생은
동지들과 매일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독립선언서를 빼앗기고,체포되는 등 여러 어려움을 당했지만
1919년 4월 4일 장날
6개면 82개 동리의 남녀노소 6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립만세운동을 7일간 계속했다고 합니다.
물론 13명의 사망자와 7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양양의 여성 조화벽#
만세운동 이후
조화벽은 양구로 피신해 신분을 숨겼습니다.
누에고치를 하는 등 은신한 뒤 다시 학교로 복귀해서 호수돈여학교의 고등과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공주 영명 여학교 교사로 부임하는데,
이때 공주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유관순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관순의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인연이 되어 1925년 혼인을 했습니다.
이후 조화벽은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성 운동, 노동자 권익 보호, 교육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민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올바른 국가 의식과 민족 의식을 키우는 것이 중요 하다고 보고 애국 계몽 활동에 투신.
여러 여 학교 교사로 전전하며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전파했습니다.
상하이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을 내놓기도.
훗날
고향 양양으로 돌아 와서 정명 학원을 설립해 애국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정명학원은 1935년 4월에 개원한 뒤
일제의 탄압으로 1944년 폐교 할 때 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 했습니다.
일생을 독립 운동가로 헌신. 애국 계몽 활동가로 바친 조화벽 지사님을 기리기 위해
양양 남문리에 조화벽거리를 조성했답니다.^^
따끈 따끈한 직촬한 이미지 입니당.^^
양양에 살고 있기에 가능한 답사기였습니다.
초딩 때 부터 유관순 누나 노래 부르면서 존경 했었는데
양양에 거주하면서 양양 삼일 운동의 주역/조화벽 언니를 알게 되었네요.^^
고매한 인격에 감동 했으며 아래 책을 읽어 보시면 더욱 .....^^
조화벽 지사는 늦도록 양양을 위해서 헌신한 분입니다.
긴 시간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