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년) 6월 3일 ~ 1879년(고종 16년) 12월 29일
부안(扶安)을 관향으로 둔 임씨(林氏)는 대체로 평택(平澤)으로부터 분봉(分封)하였다. 호서(湖西)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최고 번성하니 호남은 이에 미치지는 못하나 역시 군의 망족(望族)은 될 만하다.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서 옛날에 일찍이 족보를 합하였으나 씨족이 성대하고 힘이 고단하여 분편(分編)하게 되었다.
임상호(林相皞)가 서문을 지어달라고 요청한 것은 호남의 족보이다. 그 현조(玄祖) 서하 선생(西河先生) 문집 두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는데, 정진(正鎭)은 어지러움에 빠져서 감히 붓을 인간의 문자에 적시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니 이 문장과 이 문집을 열람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였다.
시험 삼아 책을 한번 들춰보니, 고색(古色)이 창연하여 바야흐로 아조(我朝) 성한 때의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완연히 양한(兩漢)에 대한 선진(先秦)이었다. 손에서 며칠 동안 책을 놓지 않다가 이윽고 다 읽었다. 임생(林生)에게 말하기를 “나는 특이한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호랑이와 바람맞은 돛대를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이른바 ‘성쇠와 상관된 일로 호연하다.’는 것이다. 다만 가령, 이 문집이 늘 전한다면 나는 자손들에게 청전(靑氈)이 없는 것을 근심하지 않겠다. 잇고 밝혀서 확장하고 키우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는 듯한데, 임씨가 어찌 또한 힘쓸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들으니, 문장은 기를 나타낸 것이라 한다.
서하의 문장이 이와 같으니, 기를 모은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베푼 것이 크지 못하고, 나이 또한 길지 못했으니 무슨 일인가? 기가 진실로 재능에는 두터우나 천명에 인색한 것이 있어서인가. 또한 들으니, 뿌리가 깊은 것은 가지가 높고 형체가 큰 것은 소리가 크다고 한다.
서하가 재능에는 두터우나 천명에 인색한 것을 가지고 오직 후세에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었으나 아직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혹시 오랫동안 굽혔다가 장차 크게 펴고자한 것인가. 나는 듣건대, 임씨 된 사람은 자못 본분을 지키고 문자를 업으로 한다고 하니, 이는 아마도 여록(餘祿)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나는 장차 펼치기를 기다리겠다.
서하의 후손에 판서공(判書公)이 있고 증손에 전서공(典書公)이 있어 모두 명성이 있었으나 서술이 이미 만족스러워 여기서는 생략한다. 가지고 온 선물에 답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파계(破戒)하고 이를 쓴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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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扶安林氏族譜序
林氏有貫扶安者。蓋自平澤分封也。居湖西者最蕃衍。湖南不及焉。然亦優保郡望矣。兩湖舊嘗合譜。以族大力單而分編。林生相皞所請弁卷者湖南譜。摯以厥玄祖西河先生文集二冊。正鎭昏墊。不敢滋毫於人家文字久矣。此文此集。是願閱而未得者。試一開卷。古色蒼然。方諸我朝盛際作家。宛然先秦之於兩漢也。不釋手者累日。旣卒業。復諸生曰。吾見異焉。吾見活虎風檣矣。是亦所謂關盛衰而浩然者。但使是集常傳。吾不憂子孫之無靑氈矣。若夫紹明而張大之。在乎其人。爲林氏者盍亦知勉。抑吾聞之。文者氣之發也。西河之文如是。非氣之鍾能然乎。其不大厥施。秊又不永何歟。氣固有厚於材而嗇於命者歟。又聞根深者枝峻。形大者聲宏。以西河之厚於材嗇於命。惟有顯於後爲可望。而姑亦未及。豈久屈將所以大伸歟。吾聞爲林氏者。頗能守本分業文字。此蓋餘祿之未艾也。吾竢其將伸焉。西河之孫有判事公。曾孫有典書公。皆有聲蹟。叙述已足。故此畧焉。摯不可無答。破戒書此云。<끝>
노사집 제17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