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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제16권 / 구묘문(丘墓文)
우참찬(右參贊) 청천군(淸川君) 한공(韓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공은 휘는 준(準)이요, 자는 공칙(公則)이요, 별호(別號)는 남강(南崗)이요, 성은 한씨(韓氏)이니, 본래 상당(上黨 충청북도 청주의 옛 이름) 사람이다. 상당 한씨는 기자(箕子)에서 비롯되었으며, 기자씨의 세대가 기울어지자 마한(馬韓)이 되었는데, 그 자손이 상당에서 살았으며 한씨로 불렸다.
공의 고조는 청평군(淸平君) 한언(韓堰)이요, 증조는 증 승정원 좌승지 한홍주(韓弘澍)고, 조부는 증 이조 참판 한진(韓鎭)이요, 부친은 돈녕부 정(敦寧府正)으로 증 의정부 영의정이 된 낭성부원군(琅城府院君) 한수경(韓守慶)이다.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유씨(柳氏)는 진주(晉州)가 본적이요,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조의(祖誼)의 따님이다.
공은 명 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21년 임인년(1542, 중종37) 12월 1일에 출생하였다. 명 세종 말년으로 우리나라 공헌왕(恭憲王 명종) 21년 병인년(1566)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예문관에 들어갔으며, 임신년(1572, 선조 5)에 대교(待敎)로 승급되었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봉교(奉敎)에서 형조 좌랑에 전직되었으며, 갑술년(1574, 선조 7)에 병조 좌랑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을해년(1575, 선조8)에 예조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에 들어갔다. 인성태후(仁聖太后 인종의 비)의 상을 당하자 교서를 받들어 명정(銘㫌)을 쓰고 신주를 썼으며, 형조 정랑에 승급되었다.
정축년(1577, 선조10)에 병조로 돌아왔으며,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옮기고, 여러 차례 전직되어 다시 지평이 되고, 얼마 있다가 장령으로 승급되었다. 병으로 체직되어 종부시 첨정에 제수되어 호남 지방을 순무(巡撫)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돌아와서 사간원 정원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성균관 사예에서 사성으로 올랐으며, 옥당에 등록되었다.
이듬해(1580, 선조 13) 통정대부로 승급되고, 온성 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로 나갔다. 청렴한 정치로 백성의 마음을 얻었으며, 모든 북쪽 변방의 야인들이 기쁘게 복종하였다. 1년 만에 승지로 소환되자 부로(父老)들이 눈물을 흘리고, 변방의 추장(酋長)들이 모두 국경을 넘어와 늘어서서 절하고 말하기를, “후덕한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하였다.
그해 다시 외직으로 나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솔선하여 절검(節儉)하고 폐정(廢政)을 바로 다스리고 저축에 힘쓰니, 부고(府庫)가 가득히 넘쳐 많은 재물이 쌓였다. 때마침 반조사(頒詔使 경사가 있어 포고하는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가 왔는데, 이이(李珥)가 원영사(遠迎使)로 이곳에 와서 보고 이를 장하게 여겨 사실대로 상에게 아뢰니, 상이 가상히 여겨 상으로 표리(表裏 은사로 내리는 의복의 안팎 옷감)를 하사하였다. 임기가 찼으나 정치를 잘하여 1년 더 유임되었다.
갑신년(1584, 선조 17)에 들어와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권세를 잡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 거듭 진주(晉州), 순천(順天), 호서와 호남 두 성(省)의 후보자로 추천되자, 상이 오래도록 외직에 노고하였다 하여 다시 정원에 불러들였다. 을유년(1585, 선조 18)에 도승지에서 다시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뒤에 연이어 호서와 호남(湖南) 지방을 안찰하였는데, 그때 특별히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무자년(1588, 선조 21)에 성절(聖節)을 축하하고 돌아와 해서(海西)를 안찰하였다. 서읍(西邑 황해도 지방)에서 정여립(鄭汝立)의 음모를 보고한 일이 있어 그 공으로 특별히 자헌대부에 가자되었고 지중추부사를 연임하게 되었으며, 얼마 있다 우참찬에 옮겨지고 추충분의협책평난 공신(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졌다.
당시에 아들 둘이 다 함께 진사에 급제하자 문희연(聞喜宴)을 베풀었는데, 상이 경회루(慶會樓)에서 멀리 등촉불을 보고 그 사유를 물은 뒤에 곧 궁중의 귀인(貴人)을 시켜 선온(宣醞)하였으니, 이 정도로 총애하고 우대하였다.
어떤 왕자가 산택의 이익을 독차지하자 거민(居民)들이 직업을 잃고 원망이 자자했는데, 공은 세 차례에 걸쳐 상에게 불가함을 극언(極言)하자, 상이 마침내 윤허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이 천거하여 이조 판서를 삼고자 했으나 영의정이 이를 저지하였다.
임진년에 왜구가 침입하니, 나라가 태평한 지 2백 년 만에 졸지에 난리를 만나서 주(州)ㆍ군(郡)은 와해되고 상주(尙州), 충주(忠州) 두 주가 연달아 패하여 함락되었다. 공은 상에게 아뢰어 각지에서 병졸을 크게 징발하여 왕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서쪽으로 행차하고, 광해군 이혼(李琿)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감국(監國 태자의 소임으로 국사(國事)를 감독함)하게 하고, 모든 왕자를 각지에 나누어 보냈다.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 선조의 6남(男))는 관동(關東)으로 나아갔는데, 공은 명을 받아 순화군을 따랐으며, 영평(永平)에 이르러 상으로부터 행재소(行在所)로 따라오라는 명이 있었다. 평양에 이르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다. 적이 평양에 박두해 오자 상이 다시 영변(寧邊)으로 행차하고 세자는 강동(江東)으로 나갔는데, 이때 공은 빈객(賓客)으로 세자를 따르게 되었다.
상이 시급히 다시 상을 따르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정원에서 미처 전달을 못하였다. 양덕(陽德)에 이르러서야 왕명을 듣고 시급히 의주에 이르러 상을 뵙고 사죄드리니, 상이 다시 세자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왜적이 물러가자 공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상이 특별히 공을 사절로 보내어 평양 수복을 주달(奏達)하도록 하고 영하(寧夏 중국 지명)가 평온함을 하례(賀禮)하고, 이어서 뒷일을 선처하도록 부탁했다. 황제(皇帝)가 유정(劉綎)에게 군사 5천을 머물게 하여 일을 마치도록 허락하였으며, 왕세자는 앞으로 호조ㆍ병조 판서와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에 가서 군사를 총괄하도록 칙명(勅命)을 내렸다. 공은 호조 판서가 되어 곧 임지로 떠났다.
갑오년(1594, 선조 27)에 복명(復命 왕이 명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함)을 마치고 강서(江西)에 피난 가 살고 계신 늙은 부모를 뵙기를 청하니, 상이 장남인 한여숙(韓汝淑)을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삼고 편히 봉양토록 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다시 표문(表文)을 받들어 사절로 파견되어 세자의 책봉(冊封)을 허락할 것을 간청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중도에서 발병하여 위급하게 되자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어 간호하게 하였다. 복명을 마치고 병이 더욱 위독해져 다시 벼슬하지 못하고 6년을 지냈다.
경자년(1600, 선조 33) 봄에 아버지가 별세하였고, 다음해(1601, 선조34) 10월 모일(某日)에 공이 별세하니 향년이 60세요, 모친의 나이 82세의 고령이었다. 부고를 듣고 상이 조회(朝會)와 민간의 저자를 이틀 동안 파하도록 했다. 그해 모월(某月)에 예식대로 인천(仁川) 계곡(桂谷)의 선영(先塋)의 묘가 있는 곳에 장사하였다.
공은 장대(長大)하고 위의(威儀)가 있으며 중후(重厚)하고 말수가 적어 당시 사람들이 장덕거인(長德巨人)이라 불렀다. 교유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성과 위세를 피하고 검약을 좋아하고 자기의 맡은 직책을 근면히 처리하여 일이 잘 풀릴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이 처하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공을 ‘산악(山嶽)에 비길 만하다.’고 말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최씨(崔氏)는 완산군(完山君) 최재(崔宰)의 후손이요,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최정수(崔貞秀)의 따님이다. 공보다 6년 전 모년 모월에 별세하였으며, 같은 언덕에 장사하였다.
8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첨지중추(僉知中樞) 한여숙(韓汝淑), 창수(倉守)인 한여징(韓汝澂), 형조 좌랑 한여옥(韓汝沃), 호조 정랑 한여흡(韓汝潝), 시령(市令) 한여철(韓汝澈), 예조 판서 한여직(韓汝溭), 부사과 한여제(韓汝濟), 진잠 현감(鎭岑縣監) 한여형(韓汝泂)이요, 사위로는 첨지중추(僉知中樞) 윤기빙(尹起聘)과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김인룡(金仁龍) 두 사람이 있다.
측실(側室) 소생으로 2남이 있는데, 첨절제사(僉節制使) 한여필(韓汝泌)과 무과에 급제한 한여홍(韓汝泓)이다. 또 세 딸은 최승서(崔承緖)와 김득현(金得賢)의 처, 그리고 현감(縣監) 심정세(沈挺世)의 첩이다. 이들 자매의 차례는 심정세의 첩이 된 딸이 둘째이다.
장자인 첨지 한여숙은 아들이 없어 조카 한무(韓楙)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한무는 현감으로 3남 3녀를 두었다. 한오상(韓五相), 한오필(韓五弼) 두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한오상은 증(贈) 주서(注書)이다. 셋째 아들 한태상(韓泰相)은 출계(出繼)하였다. 사위로는 신상(辛㫾), 홍만시(洪萬始), 종실(宗室)인 청평군(淸平君) 이전(李洤)이 있다.
한오상이 한균(韓均)을 낳았으나, 한균 또한 일찍 죽어 아들이 없으므로 당질(堂姪) 한연(韓埏)을 후사로 삼았다. 창수인 한여징에게는 서출자 한익(韓杙)이 있는데 한익은 한오악(韓五岳), 한오명(韓五明)을 낳았다. 한오명은 무과 출신이다. 좌랑인 한여옥은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휴(韓休)와 한보(韓保)인데, 한휴는 부사를 지냈다. 사위는 승지인 이유성(李惟聖)과 참봉 황회(黃淮)가 있다. 한휴의 아들 한순상(韓舜相)은 생원인데 딸이 셋이 있으며 사위는 생원 이질(李耋), 진사 이하명(李夏命)과 윤정린(尹挺麟)이다. 한보(韓保)는 아들이 없어 한태상(韓泰相)을 후사로 삼았다. 한순상은 한재(韓載)를 낳았다.
정랑 한여흡은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절(韓梲), 한결(韓𣚃), 한필(韓榓)이다. 한절은 사의(司議)를 지냈고, 한결은 무과 출신이요, 사위 김정(金埥)은 현감이다. 서출자 한격(韓格)은 양자로 갔다. 한절은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오휘(韓五徽), 한기상(韓夔相), 한명상(韓命相)이다. 사위는 정계주(鄭繼胄), 종실 능평수(綾平守) 한신(韓信), 권대균(權大均)이다. 한오휘(韓五徽)는 자녀가 없으며, 한기상(韓夔相)은 출계하였다.
한결은 한옥(韓(沃+土), 한방(韓埅), 한승(韓陞)을 낳았는데 한옥은 생원이다. 한명상(韓命相)이 한증(韓增), 한육(韓堉), 한감(韓堪)을 낳았고, 한필(韓榓)은 한오익(韓五翊)을 낳았으나, 일찍 죽어 아들이 없다. 사위는 최기준(崔基峻), 남익(南翊)인데, 남익은 진사이다.
시령인 한여철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빈(韓彬)이고, 사위는 최도원(崔道源)과 심지헌(沈之瀗)인데 심지헌은 현감이다. 한빈은 4남을 두었는데, 한오복(韓五福), 한오장(韓五章), 한오희(韓五喜), 한오왕(韓五王)이다. 한오복은 두 아들이 있는데 한양(韓量)과 한중(韓重)이다.
판서인 한여직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혜(韓橞)요, 사위는 심정(沈靖)과 윤강(尹堈)인데, 윤강은 사평(司評)으로 있다. 서출 한복(韓樸)은 무과 출신인데 절충장군이다. 한혜는 한오규(韓五奎)를 낳았으며, 한오규는 한숙(韓塾)을 낳았는데, 한숙은 생원이다. 윤강이 윤세장(尹世章)을 낳았는데, 윤세장은 군수이다.
사과인 한여제는 아들이 없고 딸 하나가 있는데, 사위는 채정후(蔡鄭後)인데, 진사다. 현감 한여경은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인 한무(韓楙)는 백부인 한여숙의 후사가 되었으며, 한허(韓栩)와 한후(韓𣖔)가 있는데, 한후는 진사다. 사위는 정칙(鄭侙), 성섬(成燂), 종실인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이다.
한허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진사인 한정상(韓定相), 한응상(韓應相), 한유상(韓有相), 한득상(韓得相), 한임상(韓任相)이고, 사위는 이경(李經)이다. 한후는 사위가 셋인데, 윤이필(尹以弼)과 양승(梁昇)과 정선(鄭璿)이다. 양승은 생원이다. 한정상은 한점(韓坫)과 한훈(韓塤)을 두었으며, 한응상은 한연을 낳아 한오상의 후사로 삼았다.
김 도사(金都事 김인룡(金仁龍)의 관직)에게 3남 1녀가 있다. 아들은 김진해(金震海), 김기해(金起海), 김제해(金濟海)이고, 사위인 윤개(尹塏)는 첨지(僉知)이다. 김진해의 아들 김익창(金益昌)은 문과 출신(文科出身)으로 현감이다.
윤 첨지(尹僉知 윤기빙(尹起聘)의 관직)는 2남 1녀가 있다. 아들은 윤완(尹浣), 윤순(尹淳)인데, 윤순은 선전관이다. 사위 유임(柳琳)은 통제사(統制使)이다. 첨사 한여필의 계후(繼後)는 한격(韓格 한여흡(韓汝潝)의 서출자(庶出子))인데, 한격은 3남을 두었으니 한치상(韓致相), 한취상(韓就相), 한의상(韓義相)이다. 한여홍은 1남 1녀가 있다. 아들은 한역(韓櫟)이요, 사위는 유배(柳培)이다. 최승서에게 1남 4녀가 있다.
아들은 최길(崔趌)이요, 사위 정기태(鄭基泰)는 문과 출신이요, 윤익(尹瀷)은 종실로 충릉령(忠陵令)이며, 길원(吉元)과 유이화(柳以華)가 있다. 김득현은 2남이 있는데 김창수(金昌壽)와 김중수(金重壽)다. 심정세의 첩이된 서녀는 아들이 없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뛰어난 재주 훌륭한 덕은 / 魁才長德
나라의 호걸이요 / 邦國之傑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렸으니 / 許身駈馳
충성하는 절개이다 / 匪躬之節
돌에 새기고 정에 새김은 / 勤銘彛鼎
어진 신하의 공이로다 / 良臣之烈
<끝>
[각주]
[주01] 문희연(聞喜宴) : 중국에서 새로 진사가 된 사람을 위해 예부가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것이 후세에 와서 진사에 급제한 사람을
위한 연회를 의미하게 되었다. 《宋史 選擧志》
ⓒ한국고전번역원 | 최순희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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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右參贊淸川君韓公神道碑銘
公諱準。字公則。別號南岡。姓韓氏。本上黨人。上黨之韓。出自箕子。箕子氏世衰。爲馬韓。子孫居上黨。稱韓氏。高祖淸平君堰。曾祖贈承政院左承旨弘澍。祖贈吏曹參判鎭。父敦寧府正贈議政府領議政琅城府院君守慶。母貞敬夫人柳氏。籍晉州。掌隷院司議祖誼之女也。世宗皇帝嘉靖二十一年壬寅十二月一日公生。其末年我恭憲王二十一年丙寅。登第。補成均學諭。庚午。入翰苑。壬申。陞待敎。癸酉。以奉敎轉刑曹佐郞。甲戌。改兵曹佐郞。乙亥。移禮曹。復爲兵曹。仁聖太后之喪。奉敎書銘旌 。及立主。又書之。陞刑曹正郞。丁丑。改兵曹。遷司憲府持平。累轉復爲持平。尋陞掌令。以疾遞。授宗簿寺僉正。有巡撫湖南之命。還拜司諫院正言。己卯。以成均司藝。陞司成。錄玉堂。明年。加通政。出爲穩城都護府使。政淸。得吏民心。諸藩胡皆悅服。▣年。以承旨召還。父老皆涕泣而藩胡諸酋長追出境。皆羅拜曰。厚德無以報。其年。又出爲義州。躬節儉。修廢政。務蓄積。府庫充溢。至累巨萬。時有頒詔使者來。遠迎使李珥。見而多之。以實白上。上嘉之。賜表裏以賞之。及苽。以治理仍任者一年。甲申。入爲戶曹參議。以不悅於當路者。連備擬晉州,順天湖西南二省。上以爲久勞於外。復入政院。乙酉。以都承旨。改判決事。後連按兩湖。湖南時特加嘉善。戊子。賀聖節。旣使還。出按海西。西邑有鄭汝立上變事。公特加資憲。以知中樞仍任之。尋遷右參贊。賜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號。封淸川君。時有二子同榜進士。設聞喜宴。上在慶會樓。望見燈燭光。問之。卽令中貴人宣醞。寵待之如此。有王子專山澤之利。居民失業者多怨。公拯言其不可。三啓。上乃許。左相柳成龍欲薦爲銓曹。爲首相所沮。壬辰。有倭寇。國家昇平二百年。卒有亂。州郡瓦解。尙,忠二州連敗陷沒。公白上。大徵四方兵勤王。於是上西幸。冊光海君琿爲世子監國。分遣諸王子順和君𤣰出關東。公受命從之至永平。上命追至行在所。至平壤。加正憲。賊旣薄平壤。上幸寧邊。世子出江東。公以賓客從世子。上令之從上而急。政院不及傳。至陽德。乃始聞有命。追至義州。上謁請罪。上還遣世子所。癸巳。寇退。公爲漢城府判尹。上特遣公。奏收復平壤賀平寧。夏。仍請善後事。帝許留劉綎兵五千竣事。勅我王世子。同戶, 兵曹前往全, 慶摠理軍事。公以戶曹判書。乃行。甲午。旣復命。以父母年老避亂江西乞行。見上。令其長男汝淑 。爲龍岡以便養。乙未。又遣公奉表謝。仍請冊封世子。帝不許。公在道疾甚。上遣太醫問之。旣復命。疾益沈。不復仕者六年 。庚子春。先府君歿。明年十月某日。公卒。春秋六十。太夫人八十二。訃聞。上爲之罷朝巷市二日。其年某月。以禮葬仁川之桂谷從先兆之次。公長大有威儀。重厚寡言。一時稱長德巨人。性不喜交遊。歛避聲勢。好儉約。勤已任職。夷險不貳。鶴峯金誠一擬之山嶽云。貞敬夫人崔氏。完山君宰之後。而中樞府都事貞秀之女也。先公六年某月某日卒。而葬於同原。生八男二女 。男僉知中樞汝淑,倉守汝澂, 刑曹佐郞汝沃, 戶曹正郞汝潝, 市令汝澈, 禮曹判書汝溭, 副司果汝濟, 鎭岑縣監汝泂。壻二人 。僉知中樞尹起聘, 儀賓府都事金仁龍。側室二男。僉節制使汝泌, 武擧人汝泓。又三女崔承緖,金得賢妻。縣監沈挺世妾。其姊妹之次。爲人妾者爲中女。僉知無子。以從子楙爲後。楙縣監。生三男三女。男五相, 五弼。皆早殀。五相贈注書。少男泰相 。出繼。壻辛㫾,洪萬始,宗室淸平君洤。五相生均。亦早殀。無子。以堂姪子埏爲後。倉守有庶出子杙。杙生五岳,五明。五明武科佐郞 。二男二女。男休, 保。休府使。壻李惟聖承旨,黃淮參奉。休生舜相。生員有三女。壻李耋生員, 李夏命進士, 尹挺麟。保無子。所後子泰相也。舜相生載。正郞。三男一女。男梲,𣚃,榓。梲司議。𣚃武科。壻金靖縣監。有庶出子格。出繼 。梲三男三女。男五徽,夔相, 命相。壻承旨鄭繼胄, 宗室綾平守信, 權大均。五徽無子。夔相出繼。𣚃生 (沃+土) , 埅, 陞。(沃+土) 生員。命相生增, 堉, 堪。榓生五翊。早殀。無子。壻崔基峻,南翊。翊進士市令。一男二女。男彬。壻崔道源, 沈之瀗。之瀗縣監。彬四子。五福,五章, 五喜, 五壬。五福二子。量,重。判書一男二女。男橞。壻沈靖, 尹堈。堈司評。庶出子樸。武科折衝。橞生五奎。五奎生塾。生員。尹堈生世章。郡守。司果無子。有一女。壻蔡鄭後。進士。縣監三男三女。男楙爲伯父後。栩, 𣖔。𣖔進士。壻鄭侙, 成燂, 宗室嶺陽君儇。栩五子。定相。進士。應相, 有相, 得相, 任相。壻李經。𣖔三壻。尹以弼, 梁昇,鄭璿。昇生員。定相生坫,塤。應相生埏。爲五相後。金都事三男一女。男震海,起海,濟海。壻尹塏。僉知。震海子益昌。文科縣監。尹僉知二男一女。男浣,淳。淳宣傳官。壻柳琳。統制使。僉使繼後子格。格三子。致相,就相, 義相。汝泓一男一女。男檪。壻柳培。崔承緖一男四女。男趌。壻鄭基泰, 文科尹瀷, 宗室忠陵令吉元, 柳以華。金得賢二子。昌壽, 重壽。沈挺世妾。無子。銘曰。
魁才長德。邦國之傑。許身驅馳。匪躬之節。勒銘彝鼎。良臣之烈。<끝>
記言別集卷之十六 / 丘墓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