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과천과 경계를 이룬 청계산을 오르다!
2015년2월4일엔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 5060의 산행동호회에서
수요산행지로 정하고 해진대장님이 안내하시는 청계산을 오르기
위해 버스로 1호선 전철로 창동에서 환승하는 4호선 지하철을 통해
남서울대공원역에 도착하니 소요시간이 한 시간 50분이였습니다.
2번 출구안에서 기다리는 1939년생부터 1959년생까지 20년터올
안에서 다양한 연령층을 이룬 30여분의 산우님들과 만나서 열시 반에
대공원역에서 출발 옥류계곡 방향으로 입산하여 청계사(淸溪寺)를
향해 가는 산길은 살아 온 인생사만큼이나 굴곡이 많아서
눈을 밟아서 얼음판이 되어 낙엽에 덮인 가파른 산길을
부축을 받으며 오른 분이 있기도 했지만 그런 순간들이
오히려 산행을 즐겁게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능선을 걷다가 주위에 소나무와 바위가 있고 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어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정성껏 마련해온 간식을 펼쳐놓고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는 나눔의 시간이 이뤄지니 평범한
삶의 작은 일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속에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큰 추억이 담기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청계산을 알게된 때는 여름체소와 가을 배추무우의
야채밭이었던 반포동에 살 때인 1969년부터였는데 청계산
정상에는 년중무휴로 레이더가 회전하는 미군부대가 있고
그 땐 배곺은 시절이라서 산 아랫 마을 주민들이 그 미군
부대를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해가던 때라 그 부대에 취직
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 역시도 그 곳에 취직을
해서 미군들을 상대하며 영어도 배워보자는 희망을 갖고
늘 선망의 대상처럼 청계산 정상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질없는 희망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올라오고 내려오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하산 중에
청계사에 들러 보는이의 마음을 압도하는 거대한 와불상
(臥佛像) 앞에 서있는 산우들 중에는 합장을 하고선
모든 중생(衆生)이 성불(成佛)하기를 기원하는 것 같은
경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청계사에서 십여분 정도를 내려오다가 뒷풀이 장소로
정해진 맛집에서 뒤풀이를 하고 맛집아래에서 마을버스로
인덕원역에 와서 지하철을 통해 귀가하니 밤 여덟시였습니다..
피눈물로 통곡하며 울고 넘은 ‘혈읍재’
하늘샘에 떼로 몰려든 이상한 짐승
청계산 정상 망경대와 매봉 사이에는 피울음을
뜻하는 ‘혈읍재’라는 고개가 있다.
조선 전기 정몽주, 김굉필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였던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은 성리학적 이상 국가 실현이 좌절되자 망경대
아래 하늘샘(금정수터)에 은거했다. 그가 은거지인 금정수에
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다 통분해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혈읍재라 명명했다.
정여창 선생은 1498년 무오사화로
함경북도 종성에 유배되어, 1504년(연산 10년)에
사사되었다. 그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시신이
찢기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가 머물렀다는
금정수는 청계산 최고봉 망경대 바로 남쪽 석기봉 절벽
1백m 아래, 즉 신선대 왼쪽 골짜기 상단부에 있는
굴로 행정구역상 과천시 막계동에 속하며,
청계산 서쪽 벼랑이 된다.
금정(金井)이란 금빛 우물이란 뜻으로, 바위틈에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질 때 그 물빛이 마치 금빛 같아서
금정수라 이름 지었다. 정여창이 참형을 당한 뒤
금정수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복권된 후 다시 황금빛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정수는 하늘 아래 있다 하여 하늘샘
이라고도 한다. 마왕굴샘, 오막난이굴샘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에 맥(貘: 짐승이름, 표범의 딴
이름, 북방민족)이라는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떼를 지어 이 굴로 들어갔다고 해 오막난이굴로
불린 것에 유래한다. 마왕굴은 마왕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나 내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그곳을 다녀온 과천시 답사팀은
하늘샘에 1급수에만 산다는 도롱뇽 알이
그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난히 새와 짐승이 많던 ‘왕의 사냥터’
역모 꾀한 8명 사로잡혀 죽임당해
현재 청계산 아래엔 동물원이 생겨 온갖 동물이 있지만,
청계산은 예로부터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짐승이 많아
‘왕의 사냥터’로 유명했다. 단종은 청계산에서 두 번
사냥했고, 세조‧성종은 청계산에 와서 주로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세조실록’에 보면 ‘짐승 잡은
것이 많았다’ ‘새를 잡은 것이 많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들이 잡은 동물의 종류로는 사슴 노루
멧돼지 토끼 등이 있다. 연산군은 청계산에서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즐긴 대표적인 왕이었다.
1506년(중종 1년) 경기 관찰사 윤금손이
“청계산 기슭에 나무가 빽빽해 도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나무를 베어 소통시키소서”라고 아뢰니 왕이
그리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30세의 송유진이란 자가
속리산에서 나와 도적의 무리를 모아 청계산에서
주로 머물렀다. 당시 그를 따르는 무리는 무려
2000여 명에 달했다. 서울의 서얼 출신이었던
송유진은 자칭 의병대장이라 칭하며 “나라에서
소인들만 등용한다” “어진 수령은 쫓겨나고 무능력한
사람이 등용된다”며 역모를 꾀했으나 송유진을
포함해 주도자 8명(오원종, 김천수, 유춘복,
김언상, 송만복, 이추, 김영)은 모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반면 청계산은 고려 충신 조윤이나 정여창 선생의
일화에서 보듯 충신과 대학자가 머물던 ‘은둔과 지조의
땅’이기도 했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말년을 지냈다.
‘청계’, 사라진 마을 ‘막계리’서 유래
막계리와 함께 사라진 ‘장막성전’
청계산 자락을 대표하는 마을은 막계동이다. 과천 소재
막계동은 맑은 개울이 있다 해서 ‘맑은 개울’ ‘맑은
계곡’이라 한 것이 ‘막개’가 되고 한자로 ‘청계’가 되었다
.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또는 시내가 있는
산’이라는 뜻인 청계산의 이름이 ‘막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초가집이 많은
농촌지역으로 ‘막계1~3리’로 불렸다. 현재
서울대공원 내 동물원과 식물원이 자리한 곳이 막계1리,
서울랜드가 있는 곳이 막계2리였다. 그러나 1977년
서울대공원 지역으로 고시돼 마을은 없어지고,
막계동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현재 한자표기는 음을
따 ‘막’은 莫(없을 막)으로 ‘계’는 뜻을 빌려 溪(시내 계)로
쓴다. 막계2리는 당시 신흥종교 ‘장막성전’ 신도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거에 저항했으나,
과천 문원동으로 대부분 이주했다.
과천시지(果川市紙)에 실린 막계리 이주과정에
관한 글을 통해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대공원과 서울랜드 건설 때문에 막계1리와
2리에서 농사를 짓던 가구 160호는 문원1동의
75평 이주단지 택지를 추첨을 통해 분양받았다.
그리고 문원2동은 세입자들에게 소위 40평 ‘입주딱지’
가 분양되었는데, 약 500호 정도가 지난날 주로
막계2리에 정착했던 신흥종교 장막성전 신도들에게
분양된 곳이다. 두 개의 이주단지 모두 지하철 과천역에서
보행으로 10분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에 있다.
사실상 지금은 호화주택 단지와 다르지 않을
만큼 변모해 있다. 지난날의 장막성전은
위풍당당한 새 교회로 바뀌었고, 그 이름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삭 중앙교회’가 되었다.
그 어디에서도 지난날 막계2리에서 철거에
저항하던 신흥종교 장막성전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유난히 물 맑고 나무가 많아 짐승과 새가 많았던 청계산.
역모를 꾀하던 도적도 나라를 걱정하던 충신도 청계산에
들어와 사연을 남겼다. ‘하늘이 감추어 놓은 영산’이라는
청계사에 기록된 글 때문인지, 지금도 청계산엔
신령한 기운을 받으러 오는 종교인이 많다.
청계산에 올라 봉우리마다 골짜기마다 담긴 사연에
귀 기울인다면, 혹여 그 옛날 정여창 선생이 왜
그토록 피울음 소리를 내며 통곡했는지, 하늘샘에
왜 갑자기 이상한 짐승 ‘맥’이 출현했는지
더 깊은 사연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행이 청계산이 들려준 사연을 뒤로하고 하산하는
길에 만난 맑은 시내 淸溪, 그 물줄기는 피로는
물론 마음 속 묵은 때까지 씻겨줄 만큼 넉넉하고 힘찼다.
2015년2월4일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