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국립광릉수목원
(國立光陵樹木園)을 다녀와서!
광릉 숲 시련의 역사
세조는 1468년 자신의 능이 들어설 자리를 능림으로 정한 뒤 능 주변과 진입로
에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를 심고 능원과 산직을 두어 관리했다. 광릉에 당시의
나무가 살아남은 것은 없다. 현재 가장 오래된 활엽수는 졸참나무로 수령 200
년 직경 113㎝이다. 침엽수 가운데는 전나무가 직경 120㎝, 수고 41m로 가장
크다. 광릉 숲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로 383호선 길가에 있는 전나무도 직경
70~90㎝의 거목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는 광릉 숲의 최대 시련기
였다. 풀 뿌리까지 캐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었고 도벌이 횡행했다. 임업연구원
(현 산림과학원)이 2003년 펴낸 [광릉시험림 90년사]를 보면, 1965년 광릉
출장소의 주 임무는 도벌꾼으로부터 나무를 지키는 일이었고, 초막을 짓거나
잠복 근무를 하면서 지켰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도벌꾼과 폭력배가 임업
시헙장 안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1930년대까지 천연림이 90%를 차지하던 광릉 숲은 1960~70년대 솔잎혹파리
가 창궐하면서 소나무가 대부분 고사해 그 자리에 리기다소나무, 잣나무, 낙엽송을
심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엔 인근 군부대가 숲 115㏊를 군사시설
터로 내놓으라고 해 빼앗기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휴양지로 숲을 이용하고
개발하려는 욕구가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1989년 시험림 일부가 산림욕장
으로 개방됐고 수목원, 산림박물관, 야생동물원이 개장됐다. 관람객이 몰리면서 광릉
숲 주변에 식당, 노래방, 놀이동산, 술집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마침내
1997년 광릉 숲 보전 종합대책에 따라 산림욕장과 동물원이 폐쇄되고 수목원의
예약제와 관람 인원 제한 조처가 시행됐다. 국립수목원은 1999년 광릉 숲의 절반
면적을 관할하면서 독립했고, 나머지 숲은 현재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산기술
연구소가 관리하고 있다.
광릉에서 처음 알려진 식물들
‘광릉’이란 접두어를 가진 식물과 광릉에서 처음 발견돼 학계에 보고된 식물이
10종에 이른다. ‘광릉’으로 시작하는 식물로는 광릉요강꽃을 비롯해 광릉골무꽃,
광릉물푸레나무, 광릉제비꽃, 광릉개고사리 등이 있다. 광릉에서 처음 발견돼
학계에 보고됐기 때문이다. 이 식물의 고향이 광릉이라고 할 수 있다. 광릉이란
이름이 붙지는 않지만 광릉에서 처음 발견된 식물도 적지 않다. 노랑앉은부채,
개싹눈바꽃, 털음나무, 흰진달래, 털사시나무 등이 그런 예이다. 이들 식물은
나중에 광릉 이외의 장소에서도 자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병천 국립수목원
식물보전복원연구실 박사는 이처럼 적지 않은 식물이 광릉에서 처음 학계에
알려진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식물의 약 30%를 기재한 일본 식물학자인 나카이
가 광릉 시험림에서 촉탁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사를 하러 다닌 결과”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