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의 삶은 깊이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함께 하심을 영적으로 분별함에 따라 하나님의 깊이를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깊이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의 삶은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 가려고 하는 삶과는 다릅니다.
<깊이로 함께>
종교적으로 접근하면 신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절대자로 여깁니다. 그러니 신의 개념에는 전능하다는 뜻이 들어갑니다. 신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기에 신입니다. 물론 그런 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절대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절대자는 전지전능함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 절대자에 대하여 깊이의 뜻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자의 깊이의 뜻보다는 능력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풀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절대자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자신의 뜻이 절대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하나님을 말하게 될 때 예수님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이 생각으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보이게 되고 그것을 영적으로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성령 강림의 뜻을 찾게 됩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현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강림함에 따라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깊이를 들려주는 것으로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깊이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영 외에 하나님의 깊이를 들려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이는 하나님의 함께를 이야기할 때 의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뜻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함께는 깊이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깊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뜻을 의식하게 될 때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려고 하게 됩니다. 함께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뜻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뜻을 분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깊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함께는 깊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세상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니 있는 것에 적용하는 능력을 보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보입니다. 그런 경우 힘을 알아가는 것이지 깊이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하는데 '첫 원인(first cause)' 혹은 '전능(omnipotency)' 같은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에 임하는 힘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있음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는 원인이나 능력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이나 능력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는 깊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이유와 원인은 없습니다. 이유나 원인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나 원인으로 깊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는 영적으로 나아갑니다.
삶의 깊이는 함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은 원인과 결과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세로 결정되어 가는 삶은 설명이 되지만 함께로 깊어 가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깊이는 영적으로 분별>
깊이는 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깊이로 나아감으로 함께 하게 됩니다. 아무리 세로 사람들을 결집시킨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깊이로 나아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하나님의 깊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말은 깊이의 말입니다. 깊이를 분별하여 들려주는 말입니다. 종교적인 말은 깊이의 말이 아닙니다. 깊이는 깨달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는 분별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됩니다. 그러니 영적인 깊이는 종교적인 깨달음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함께 함으로 깊이를 분별하여 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깊이를 계시하심으로 영적으로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는 깊어 가는 것이지 순간 모든 것이 깨닫게 되는 것일 수 없습니다.
함께는 하나님의 깊이로 드러나는 함께 하는 생명력입니다. 함께의 삶은 사람의 내면에 의식하지 못하였던 것을 개발함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깊이의 생명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은사로 부어지며 분별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내면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일깨우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 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로 분별되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임하여 오는 것입니다.
함께는 깊이가 드러나는 함께입니다. 세상에 있어 가는 것을 움직이는 힘은 세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되면 권력을 보일 수 있고, 누구나 돈을 갖게 되면 금력을 구사하게 됩니다. 또 세상 것이 움직이는 이치를 알게 되면 그 이치를 적용함으로 있는 것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런 것은 있어 가는 것을 움직이게 할 뿐입니다.
깊이는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함으로 보이게 됩니다. 사랑이나 용서나 참이나 자유는 깊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깊이는 있어 가는 깊이가 아니라 함께 하는 깊이입니다.
있어 가게 되면 세상에 드러나는 힘만을 의식하려고 하게 되기에 현상에 머물게 됩니다. 세상의 지식을 동원하여 그런 힘을 의식하여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힘으로는 함께의 삶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힘은 더욱더 개인화하여 가고 있습니다. 개인으로 있어 가는 것이 기본이라고 삶이 결성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삶으로 세로 살아가려고 하게 됩니다. 이웃에게 세를 미치려고만 하게 됩니다.
이런 면은 마음이 의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뜻은 의도적으로 나아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깊이를 보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삶에서만 깊이를 보게 됩니다.
<사랑은 깊이로 나아감>
이웃에게 세를 미치어 가려는 삶에 예수님이 이웃에게 사랑으로 미치어 가라고 한 말씀을 의식하여야 합니다. 이웃에게 사랑으로 미치어 가는 것은 깊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세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깊이로 함께 하려는 것입니다.
개인으로 있어 가면 이웃에게 세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자리잡음으로 누리게 된 세입니다. 그것을 드러냄으로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은 자신은 감추고 자신이 지닌 세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는 깊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영으로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여 감으로 깊이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하게 될 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함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은 사람의 내면을 가설적으로 찾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게 되는 설명을 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적인 본능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있어 가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깊이의 생명력이 임하게 되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런 점으로 하나님의 깊이는 앎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와 새로움으로 임하는 생명력이라고 하게 됩니다.
<깊이로 말하는 구속>
그러므로 구속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야기되기보다 하나님의 깊이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이 지닌 성품으로 능력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이는 함께 함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속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구속이니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함으로 구속된 내용을 말하게 됩니다. 그런 점으로 복음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며 파급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깊이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이는 함께로만 드러나는 깊이입니다. 깊이는 능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능력은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지만 깊이는 함께 하여 가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깊이를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깊이입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들려주며 복음은 파급되어 갑니다. 함께 함이 파급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속된 삶은 깊이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깊이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의 정으로 깊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는 영으로 깊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정이나 인연을 말하는 것은 있어 가는 삶에 속박된 한계를 보입니다. 있어 가는 정이나 인연인 것입니다. 정이나 인연의 내용이 있어 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 사이의 내용은 이런 있어 가는 내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를 말하게 될 때 영적인 깊이를 말하게 됩니다. 영적인 은사로 드러나는 함께의 내용은 정이나 인연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속된 함께로 드러나는 깊이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보게 되는 깊이는 세상에 있어 가는 삶에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게 됨으로 교회를 이루게 되는 깊이입니다. 교회는 정이나 인연으로 엮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보게 되는 하나님의 깊이를 영적으로 분별하며 엮어진 몸입니다.
사람들이 인연으로 엮어지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있는 개인들의 인연입니다. 인연은 함께의 뜻이 없습니다. 개인들의 만남을 말할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으로 인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함께는 영적으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연이라는 줄로 이어졌다고 보기보다 한 생명력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생명력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런 생명력은 하나님의 깊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는 영적 생명력으로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을 엮어 가는 것으로 보기 보다 한 생명력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깊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있는 것을 관할하신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관할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하나님의 깊이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삶은 깊이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심리학은 마음을 있음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을 깊어 가게 합니다. 그런 깊어 가는 마음으로 함께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함께 하심은 깊이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에 아버지의 깊이의 내용이 드러납니다.
아버지의 뜻을 말하게 됩니다.
함께의 삶에서만 아버지의 뜻을 의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함께 하게 됩니다.
저희들로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며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