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박으로 살기로 했다
강 동 구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떡 방앗간에 자주 오시는 단골손님이 읽어 보라며 건네주신 책의 제목이다.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 손님이 일방적으로 선택되어 예정에 없던 독서를 강요받은 손님이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 책을 빌려준 사실조차도 잊고 있을 즈음 손님은 빌려 간 책과 또 한 권의 책을 가져와 내게 건네준 책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라는 조금은 생뚱맞은 제목의 책이다. 아니 그럼 내가 나로 살지 다른 사람으로 산다는 말인가? 궁금증이 발동하여 책을 펼쳐보니 사실은 내가 나로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나로 살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니 나는 나로 살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생업이 떡 방앗간 주인인데 40여 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떡 방앗간을 치켜왔으니 나는 나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리는 또 다른 이름 떡 방앗간 아저씨! 그 정겨운 이름 때문에 아직도 떡 방앗간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꿈꾸는 세상 내가 바라는 세상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늘 입버릇처럼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하면서 자기 부정을 되풀이한다. 친구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자학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세상 누구도 친구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어쩌다 살다 보니 지금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친구는 보통 사람들처럼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살면 되지 꼭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친구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는 지금의 내가 내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항변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가 아무리 부인해도 지금의 그가 그다. 호박이 수박이 되고 싶어 아무리 줄을 잘 그어도 호박은 호박이다. 호박에 줄 그어 수박으로 살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호박으로 사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은 왜 호박을 수박으로 만들지 못하여 안달할까? 수박이 호박보다 낮다고 여겨서일까? 하지만 호박이 수박보다 결코 못 하지 않다. 수박은 여름 한철 시원하고 달콤한 맛을 제공하는 것 말고는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애호박은 뚝배기에 풋고추 두부 된장을 넣어 바글바글 끓이면 온 식구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보리밥에 호박잎을 된장에 찍어 먹으면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소화도 잘되고 변비에 이만한 음식이 없다.
가을이 되면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에 찹쌀을 조금 넣어 호박죽을 끓이면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디 이뿐이랴? 출산 후 산모에게 호박 중탕은 피를 맑게 하고 원기회복에 그만이다. 겨우내 잘 말린 호박고지는 서리태 콩과 밤 대추 등을 넣고 찹쌀 영양 떡을 해 먹으면 그야말로 영양 만점이다. 이렇게 좋은 호박을 수박으로 만들지 못하여 애를 쓰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죄 없는 수박을 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수박은 수박대로 호박은 호박대로 쓰임새가 다를 뿐이다. 호박이 아무리 좋은 역할을 하여도 수박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호박으로 살면 삶이 너무 편안하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고 화장하고 포장하여도 나이는 숨길 수 없고 잘난 척 유식한 척하여도 본색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던가? 뛰어난 인재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보기 마련이다.
얼마 전 정신과 의사 신영철 박사가 쓴, 그냥 살자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신 박사는 그냥 살면 삶이 편안한데 너무 잘살아 보려고 무리수를 두다 보면 오히려 삶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허다 하다고 지적한다. 지나친 욕심을 못 이겨 범죄를 저지르거나 일확천금을 노려 허황된 꿈을 꾸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기가 십상이다.
양이 하루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왜 나는 예리한 뿔이 없어 맹수에게 도망 다녀야 하냐고 불평하였더니 하나님은 예리하고 커다란 뿔을 만들어 주셨다. 양은 너무 기뻐서 뿔을 뽐내려고 머리를 들어보니 뿔이 무거워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양은 또 불평하면서 무거운 뿔 말고 날카로운 이를 달라고 하니 하나님은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를 주셨다. 양은 풀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하는데 사자의 송곳니로는 풀을 뜯어 먹을 수가 없어 그냥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수박은 수박으로 호박은 호박으로 살아야 삶이 편안하다.
혹자는 자포자기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 그럭저럭 살라는 주장이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아니다. 쥐구멍에 볕들 날 있고 음지가 양지 될 수 있고 개천에 용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사람의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이루어지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별이 되어 빛나고 싶지만, 별도 캄캄한 밤이 있어야 빛을 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일인자가 아닌 이인자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박수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등이 있으니 일등이 있다. 호박이 있기에 수박이 돋보인다. 그래서 나는 호박으로 살기로 했다. 애호박을 넣어 끓인 된장찌개처럼.
첫댓글 글이 구수합니다
마치 팔팔 끓고있는 뚝배기를 마주하고 있는것처럼 읽었습니다
또한 호박이 수박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되겠지요
인생은 제멋이니까요
잘읽었습니다
종종 글이 올라와서 읽는 즐거움이 많았으면 합니다
줄 이 간 수박은 그냥 날 것으로만 먹을 수 있지만 호박은 그 용도가 다양하지요.
약도 되고 보약도 되고 맛도 여러가지 맛을 내구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팀장님이 호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둥글둥글한듯 단단하고 울퉁불퉁 제멋대로이지만 나름대로의 멋이 들어있는 품격이 느껴지네요. 누구에게는 양식이, 누구에게는 기호식품이, 누구에게는 약이 되는 팀장님의 삶이 존경스럽습니다. 참 재미있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