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감정 정치를 읽고
20204614 김지혜
세월호, 온 국민적 트라우마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구나 2014년 4월 16일을 기억한다. 2014년 4월 15일은 기억 속에 없지만, 그 다음날인 16일은 자신이 무얼 했는지 모두 다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영어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학년 연구실에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선생님에게서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을 태운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세 명의 교사들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 서둘러 휴대전화를 열어 포털 사이트에 뜨는 뉴스를 찾아 읽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디서 침몰한거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뉴스를 읽으며 “그래도 배인데 곧 구조하겠지.”란 대화를 나누었다. 점심 시간 이후에는 ‘다 구조되어서 다행이다’라는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퇴근 후 뉴스 앵커가 ‘아직 세월호에서 아무도 구조하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낮에 본 ‘전원 구조’ 자막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앞바다에서 500여명 남짓한 사람을 실은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그 배에서 아무도 못 구하고 있다고?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분명 낮에 ‘전원 구조’ 기사를 보았기에 대한민국의 뉴스 업데이트 속도가 느려서 뉴스 데스크에서 아직 구조 소식을 전달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전원구조가 아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 티비 리모컨으로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보고, 인터넷 신문 기사를 확인해 봤지만 모든 내용들이 세월호에 아직 학생들이 타고 있음을 증명했다. 너무나 황당했다. 1912년도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빙산과 충돌한 타이타닉 호에서도 승객 700여명을 구조했는데, 그로부터 100년 후, 달나라에 간다는 2014년도에 우리나라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는데, 타고 있던 승객들을 아무도 구조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도 조선 산업이 세계 1위라는 나라에서?
자고 일어나면 전원 구조가 현실이 될 줄 알았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 이후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정부는 세월호를 바다에 수장 시켜 놓은 채 배가 침몰한 원인은 ‘유병언’, 구하지 않은 사람은 ‘선장’, ‘해경’은 무능력하니 해체한다는 책임론으로 사건을 종결시킬 심산이었다. 단지 본인 눈만 살짝 가리는 듯한 조치로 304명을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종결시킬 수 있다는 정부의 발상이 놀라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답이 없는 나라였다는 현실을 깨달으며 화가 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기력했다.
세월호 관련 유언비어를 퍼트리지 말라는 공문이 학교로 전달되었다. 과연 어떤 것이 유언비어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유언비어를 퍼트리지 말라니. 교사들의 사고(思考)까지 차단하려 하는 정부의 꼴에 더 화가 났다. 모든 정부 청사들에 ‘유언비어’를 퍼트리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는 걸까? 정부가 온 사회 구성원들에게 협박을 하는걸까?
‘세월호 침몰’이라는 한 장면보다 나를 더 분노케 만들었던 것은 배도 수장시키고 사건도 수장시키는 정부와 언론들의 비윤리적 행태였다. 아무리 살기 팍팍한 사회일지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성이 사회 속에 존재하여야 한다. 적어도 진상을 규명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권력기관에서 드러내놓고 진상 규명 방해를 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뻔뻔함과 악함에 치를 떨었다. 국정원은 민간 사찰을 하였고, 갖은 마찰 끝에 만들어진 세월호 특조위는 박근혜 정부의 전방위적인 방해 공작으로 인하여 소기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였다. 온 사회의 전방위적 민낯을 드러내어 보인 세월호 사건은 모든 국민들의 아픔과 트라우마이며, 차근히 풀어가야 할 얽힌 실타래의 한 꼭지이다.
세월호 정치와 감정
다른 이를 불쌍히 여기는 연민과 사회적 불의에 분노하는 감정은 공통적으로 공동체의 유대와 연대를 생성한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은 정의감과 저항으로 연결되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반면, 타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피로감이 누적되기 때문에 운동 및 행동의 지속성이 짧다. 정치 권력은 이 점을 잘 이용하였다. 아들, 딸을 잃은 부모라는 사실로, 유가족은 국민들에게 연민과 동감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약자화되어 혐오가 쉬운 대상이기도 했다. 피해자를 쉽게 혐오하게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 이다.
① 피해자의 약점을 잡는다. 피해자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조건이 필요하다. 단순히 피해를 받았다고 해서 피해자로 인정 받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사람들은 피해자가 의도가 ‘순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피해자의 행동이나 발언 속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모습이 비춰진다면 피해자의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한다. 피해를 받기 위해서 노력한 것도 아닌데,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받았다고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의 순수성은 언제나 의심받는다. 가장 심한 경우가 바로 성폭력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꽃뱀이 아님을 증명해 내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순수하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고,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피해자는 사생활에 문제가 없어야 하며 도와주고 싶은 인격을 지니고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 ‘평소 애도 안 돌봤던 사람이 보상금 받을려고 시체팔이하네’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말이다.
② 피해받은 자들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공격한다. 세월호에 대한 국민 정서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한 부분은 바로 ‘보상’ 때문이다. 유가족이 희생자의 몫으로 8.2억씩 받았고, 유가족들이 더 많은 보상금을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농성과 삭발식을 거행한다는 관점의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실제로 세월호 배·보상금은 총 4억 2천만원이다. 이와 비교하여 같은 해 고양 버스터미널 화재 사고로 인한 고등학생 희생자의 배·보상금은 총 6억 2천만원이었고,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사고로 희생된 대학생의 배·보상금은 총 6억원이다. 언론이 연이어 보도한 8억 2천만원의 보상금은 국민들이 유가족들을 위해 마련한 성금(1288억원, 희생자 한 명당 3억원)과 동부화재 여행자 보험(사망시 1억원)을 합친 금액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보상금은 다른 사고의 보상금보다 훨씬 낮은 금액으로 측정되었다. 막노동자 수준의 월급으로 아이들의 평생을 계산하였고, 위자료는 교통사고 수준이다. 또한 이 배·보상금을 받으면 국가와의 화해가 성립한 것으로 취급하여 앞으로 세월호에 대한 국가의 잘못이 밝혀져도 유가족은 국가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9273.html) 언론은 이와 같은 사실은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단지 유가족들이 경제적 보상을 받았으니 이제 ‘지겹다. 그만하라’고 요구했다. ‘경제적 보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취약한 고리이다. 경제적 보상을 받으면 아이들이 죽은 원인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지극히 자본중심적인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유족이 동의하지 않은 경제적 보상이다. 세월호 유가족은 ‘돈이 아니라 진실을’ 요구하는 농성을 진행하였지만 이는 언론의 렌즈를 통하여 ‘과도한 요구를 하는 부모들’로 비추어졌다.
생존 학생들에 대한 공격도 잇따랐다. 생존 학생들이 대학 특례 입학을 한다는 거짓 뉴스가 조직적으로 퍼졌고, 이는 학벌주의 경쟁 사회에서의 형평성 문제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세월호 유족들은 대학 특례입학을 요구한 적도, 의사자 지정을 요구한 적도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과도한 요구’라는 프레임에 유가족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많은 이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혐오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언제까지 세월호냐?’, ‘박근혜 탄핵했으면 됐지 왜 또?’라는 발언은 세월호 유가족의 ‘진실규명’ 요구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세력들의 연장선상에 선 언어이다.
③ 피해자의 요구로 또 다른 피해를 받는(것 같은) 사람이나 상황을 내세운다. 피해자가 처음 요구했던 바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바뀌지 않았음에도 ‘당신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사회적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부채감을 가졌던 이들은 유가족이 과한 요구를 하며, 유가족 때문에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근거로하여 다른 노선을 선택하는 정당성을 갖출 수 있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다른 피해가 생기므로 피해를 외면하겠다는 선택은 비의도적이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도덕적 위안감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또한 권력 집단에서 의도적으로 연출해 낸 장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 단원고에 근무했던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세월호 기억 교실 때문에 교실이 부족하다고 대서특필되었던 단원고는 사실 그 당시에 교실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부족하긴 했지만 기억 교실을 학교 내로 수용하려면 충분히 조정할 수 있었던 정도라고 한다. 단원고는 원래 한 교실에 있었던 교무실을 두 교실로 나누고, 교실 및 특별실 배치를 다시 하는 등 교실이 부족한 상황을 연출하고, 교장실을 운동장 한 구석 컨테이너 박스로 옮긴 뒤, 기자들을 불러 ‘기억교실 때문에 교실이 부족하다.’고 인터뷰했다. ‘희생당한 아이들의 교실을 보존해야 한다’던 여론은 언론 보도 후에 ‘남아있는 학생들을 위하여 교실을 옮기자’는 여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기억 교실 협약 후 갑자기 쓰러진 교장.... 쓰러진 후에 급속 승진을 하였던..
내게 일어난 슬픔은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발생한다.
내게 일어난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아픔은 언젠가 곧 나의 아픔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아픔에 대한 연대가 필요하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한다면 나중에 그와 비슷한 일이 내 일로 닥쳐도 나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아픔을 위해 모두가 노력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 쯤은, 사회 공감대를 얻는 하나 둘 쯤은 다 같이 노력해서 바꿔야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 많은 비리들, 많은 아픔들이 하루 걸러 하나씩 탄생한다. 이는 오늘 새로 태어난 신생 사건이 아니다.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는 2020년에 갑자기 생겨난 코로나 병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구조에서 늘 존재했던 열악한 고리들이 하나씩, 둘씩 끊어 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그 국가는 이미 국가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국가의 권력이 소수의 기업가들에게 집중되어 ‘이익’과 ‘효율’만을 창출하려 한다면 이미 그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기업의 슬로건을 국가의 가치로 내세운 신자유주의의 정책의 결과는 국민들의 불행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비용’과 ‘효율’의 측면이 최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이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자본과 기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인간의 살 권리, 즉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국가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비용’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택배 노동자가 일주일 간격으로 사망을 하는 까닭은 개인의 체력이나 건강 상태에 기인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인간의 노동과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고, ‘자본’만 중시하는 극자본주의 가치관에 따라 인간을 도구로써 취급하기 때문이다. 위험은 점점 약자에게로, 개인에게로 떠넘겨진다. 그 위험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도 개인이 각자 해결해야 할 생존 서바이벌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무려 7년 가까이 규명되지 않았던 진실이 하루 빨리 밝혀져야 하고, 4.16에 대한 사회의 약속이 필요하다. 사회의 안전망을 제고하고, 정부의 역할을 상기하고, 비용과 효율보다 ‘인간’이 더 중요함을 약속해야 한다. 사회 전반‘가만히 있으라’는 권위주의·순응 교육에서 탈피하여 학생 스스로 사고하고 비판적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