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파랑길 장흥 79코스 제2부
삼산방조제-정남진전망대-관덕방조제-신상마을-한재-덕산마을-회진항-회령진성
20220622
제1부에서 이어짐
1.정남진전망대와 한승원 소설문학길의 한재 고개
길게 이어지는 삼산방조제를 따라 걸었다. 방조제길에는 해안방풍림을 조성하여, 초록빛 맑은 빛을 뿜어내는 솔잎의 유년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서있다. 오른쪽으로는 방조제에 갇힌 드넓은 인공호수 삼산호가 고요한 적막을 이루고, 왼쪽에는 광활한 득량만 검푸른 바다가 몸을 뒤채며 맞은편의 고흥반도 그리고 소록도와 고금도의 소식을 보내온다. 득량도는 득량만 바다 전체를 지배하는 듯 수호신처럼 중심에 서서 바다를 거느리고 있다. 이 풍경을 천자의 관을 쓴 천관산이 억겁의 세월을 꿈쩍도 않은 듯 내려다 보고 있다. 길손의 눈길과 손길은 바쁘게 움직이고 감정은 파도를 일으키며 밀려온다.
정남진전망대는 솟아오르는 태양과 황포돛대와 파도의 형상을 하고 10층으로 솟아 있다. 정남진전망대 오르는 뎈 계단에서 걸어온 동쪽 방향- 삼산방조제, 삼산호, 득량만 바다의 조망은 길손이 천관산이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천관산의 당당하고 의젓한 함묵의 자세와는 달리 길손은 감정이 치솟아 폭발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 매었다.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남진전망대 10층으로 올라갔다. 서녘으로 기우는 햇빛이 유리창으로 비쳐들며 반짝인다.
남파랑길 득량만 코스를 걸으며 살피고 확인한 섬들이 득량만 바다에 크고 작은 새들이 되어 바다에 앉아 있다. 확인했던 섬들의 이름을 재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다. 섬들이 훨훨 날갯짓을 하며 바다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소록새, 거금새, 금당새, 금일새, 생일새, 조약새, 그 새들이 하늘을 날며 노래를 부른다. 하늘에 떠오른 섬들의 노랫소리가 고흥반도와 득량만 바다에 메아리친다. 섬들이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고 그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환상에 젖어 무아지경이었다. 이때다. 득량도가 소리를 잠재운다. 천관산이 빛을 밝혀준다. 환상을 지우는 현실의 소리와 빛, 정남진전망대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파도를 헤치는 황포돛배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간다.
보성과 장흥으로 이어지는 득량만, 그 입구의 보성방조제에서부터 그 끝의 장흥 덕촌방조제까지에서 최고의 풍경은 어디일까? 그것은 탐방객의 관점과 취미에 따라 모두 다를 것이다. 길손은 어리석게도 때이른 판단을 내렸다. 득량만 최고의 풍경 조망지는 단연 정남진전망대 10층 스카이워크라고. 걷지 않았지만 소등섬을 바라보는 장흥 남포마을 해안에서 시작하여, 걸어온 자라섬이 있는 상발마을 해안, 사금마을과 정남진을 거쳐 삼산방조제와 정남진전망대에 이르는 득량만 해안이 득량만 최고의 트레킹 코스라고. 이 어리석은 환상적 판단을 깨어나게 하는 득량만 전망지와 해안 트레킹 코스가 어디일까?
득량만 해안은 방조제로 인하여 굴곡진 해안선이 직선화된 곳이 많다. 정남진전망대가 있는 우산도와 돌의도, 신상마을이 있는 덕도 또한 섬이었다가 육지가 되었다. 득량만 해안과 헤어져 회진면 신상리 덕도의 신상마을로 올라갔다. 푸른 잎이 무성한 은행나무가 신상경로당 앞에 우뚝 솟아 있다. 수령 290년의 은행나무는 마을 당산목으로, 정월대보름과 팔월 한가위에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고 한다. 이 마을은 동학교도들이 흥성했던 곳인 것 같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자금을 헌성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이 우뚝하며, 동학교도인 항일독립운동가 성암 김재계 선생 환원 80주기 추모식 펼침막이 신덕마을 입구에 걸려 있다. 그 펼침막 아래 '바닷가의 삶을 주워담아 신화화한 소설가 한승원'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신덕마을은 한승원 작가의 탯줄이 묻힌 곳이다.
신덕마을 한승원 작가의 생가를 들렀다. 생가는 一자형 양철지붕 집으로 지붕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작가가 가끔씩 집에 들러 집안을 정리하는 수준이라고 할까. 현재 한승원 작가는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의 '해산토굴' 당호를 지닌 집필실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호 '海山'은 태생지 마을인 이곳 신덕(新德)을 이르는 지명에서 따온 것 같다. 그는 소설가로 출발했지만 뒤에 시집을 발행하여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활동한다. 장흥에서는, 이청준과 한승원을 장흥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청준 작가는 2008년 세상을 떠났고, 현재 한승원 작가만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한승원 작가의 아들 한동림과 딸 한강이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강 작가는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했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콩쿠르상과 함께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권위있는 상이다.
한승원 소설문학길을 따라 한재 고개를 오른다. 한재 고개 바로 아래에는 '아래 번덕지'라는 쉼터가 있다. 이곳은 한재 고개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쉼터, 역사적인 쉼터였다고 한다. 현재는 넓은 쉼터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벤치와 정자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승원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 중 '겨울 폐사'의 한 대목이 적혀 있는데, 절골에 숨어 있는 조카뻘 윤길을 잡으러 간 주언을 찾아가는 주철의 마음을 서술하고 있다. 하얀 눈이 뒤덮인 밤중의 한재 고개를 힘겹게 넘어가는 주철은 주언을 경찰의 끄나풀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윤길은 좌익운동을 한 청년으로 보인다. 이 소설을 읽지 않아 전체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이 대목을 통하여 보면, 이 소설은 해방 이후 좌우익의 갈등정국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번덕지' 위에서 뒤돌아보면 신덕마을과 바다 건너 고흥반도, 소록도와 거금도가 흐릿하게 보인다. 하얗게 반짝이는 소록대교와 거금대교는 그 증표가 된다. 소록대교는 길손의 체험이 되어 추억으로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어디서 보든 그 추억이 떠오르며 소록대교에는 언제나 밤비가 내린다.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고 보슬비가 내리는 소록대교에서 고흥반도 비봉산의 실루엣과 불빛 화려한 녹동항을 바라보며 감격한 그 모습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뒤돌아서서 득량만과 장흥 천관산의 실루엣을 바라보았었다. 밝은 날이었다면 아마도 신덕마을 위 한재 고개도 어림하였을 것 같다. 지금 이곳 한재 고개에서 비 내리는 소록대교를 추억한다.
한재 고개에 올랐다. 한재 고개는 공원으로 조성되어서 한승원의 여러 시비들, 한재의 내력을 알리는 안내판과 표석, 조형물,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한재 고개가 왜 이리 중요할까? 한재 고개는 황순원의 소설 '목넘이마을의 개'의 목넘이 역할을 하는 듯하다. 이곳은 현재는 육지이지만 예전에 덕도라는 섬이었다. 덕도는 현재 '신상리'와 '대리'로 나뉘어 있지만, 예전에는 신상리, 신덕리, 바닷가의 대리로 각각 독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한재 고개는 섬인 덕도에서 육지인 회진과 대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할 목넘이였다. 이 목넘이 고개 한재는 북쪽의 큰재산과 남쪽의 한재 사이의 안부이다. 이 고개에는 덕도 주민들의 삶의 애환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흔적을 작가 한승원은 그의 소설로 담아냈다. 그의 소설에는, 한재 고개를 넘나드는 인물들의 모습과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을텐데, 길손은 그 소설들을 읽지 않아 오직 상상으로만 그려낼 뿐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년들,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외치는 동학군들, 독립운동의 애국지사들, 좌우익 갈등 속에 공격과 방어를 위한 좌익과 우익 세력들, 생활을 위한 일상의 마을 사람들, 그들이 덕도를 오가며 한재 고개를 넘나드는 모습과 소리들이 한승원 소설 속에서 웅숭 깊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 목넘이 한재 고개를 넘는다. "길손이여, 그대의 삶을 후회하는가?" 소리가 들려왔다.
꼿꼿이 쳐들고 온 머리부터를 모래톱에 처박고/ 온몸을 양파 껍질처럼 말면서 곤두박질치고/ 울부짖는 그대
멀고 먼 세상에서 흰 거품 빼어문 채 내내/ 사랑하고 악다구니 쓰며/ 줄기차게 살아온/ 그 삶을 후회하는가
-한승원의 시 '파도' 전문
제1부에서 이어짐
2.걸은 과정
왼쪽의 가슴앓이섬은 신선들이 가야금 선율에 따라 춤을 춘다고 하여 가금도라 불린다고 한다. 가금도 뒤의 고흥반도가 길게 이어져 중앙의 소록대교와 소록도, 그 오른쪽에 거금대교와 거금도가 모두 조망된다. 소록대교 왼쪽의 산은 비봉산이다.
왼쪽에 금당도, 그 뒤 오른쪽에 금일도(평일도), 오른쪽에 바다로 툭 삐쳐나온 덕도, 그 뒤 왼쪽에 백운산이 솟은 생일도, 그 오른쪽 뒤로 삼문산이 살짝 보이는 조약도가 가늠된다.
"숲이 잘 보전될 때 문명사회는 발전하였고, 숲이 망가지면 문명은 쇠퇴한다."
왼쪽에 바다로 툭 튀어나온 장환도, 왼쪽 뒤에 흐릿한 일림산, 바다 중앙에 가슴앓이섬 가금도, 그 오른쪽에 득량도, 그 오른쪽에 고흥만이 길게 이어진다.
정남진전망대가 서있는 곳은 간척지가 조성되기 전 우산도라고 불리는 섬이었던 모양이다.
수문교를 건너 예전에는 섬이었던 우산도로 들어간다.
우산도 관광안내도를 살피면 예전의 섬 모양을 상상할 수 있다.
서울의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위치한 나루터인 정남진 우산도관광지구 안에 정남진전망대가 있다. 10층 규모로 높이는 45.9m이다. 위쪽은 떠오르는 태양을, 중간은 황포돛대를, 아래쪽은 파도를 형상화했다. 2~8층에 북카페, 문학영화관, 추억여행관, 축제관, 트릭아트포토존 등이 있다. 10층 스카이워크와 9층 카페에서 득량만의 화려한 섬 풍경을 볼 수 있다. 통일광장에 있는 한반도 모양의 바닥분수와 정남향을 표시한 높이 7m의 조형물 '율려(律呂)-어울림의 시작'이 볼거리다.
방조제와 배수갑문 맞은편 고흥반도 끝에 솟은 비봉산, 고흥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오른쪽 끝에 보인다. 왼쪽 뒤에는 장환도, 그 왼쪽에 가슴앓이섬 가금도, 그 오른쪽에 득량도가 이 모두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형상이다.
삼산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그 왼쪽에 인공호수인 삼산호를 조성했고, 방조제 오른쪽은 남해 바다와 득량만이 멀리 보성 오봉산 앞에서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왼쪽 앞에 소산봉, 중앙 뒤에 흐릿한 노승산, 중앙 맨 뒤에 일림산이 모두 가늠된다. 중앙 오른쪽 바다로 쑥 삐쳐 나온 장환도, 그 앞 왼쪽에 정남진해안로의 모래미해안, 그 오른쪽에 가슴앓이섬 가금도가 뚜렷하다.
맨 위쪽의 떠오르는 태양과 아래쪽의 파도의 형상은 가려져 있고, 중간의 황포돛대 형상이 전체 인상을 지배한다.
고흥반도 끝의 비봉산 앞에 하얀 색의 소록대교와 소록도, 그 오른쪽에 거금대교와 거금도가 분명히 가늠된다.
왼쪽에 거금대교와 거금도, 오른쪽에 금당도, 그 뒤 오른쪽에 금일도(평일도)가 보인다.
정남진전망대로 입장하여 10층 전망대로 올라가 풍경을 조망한다.
삼산항과 삼산방조제 배수갑문이 아래에 보인다. 득량도, 중앙 오른쪽의 비봉산, 소록대교와 소록도, 그 오른쪽에 거금대교와 거금도가 모두 분명히 확인된다.
금당도와 그 오른쪽 뒤 금일도, 맨 오른쪽에 덕도, 그 뒤에 생일도가 가늠된다.
맨 뒤 왼쪽에 백운산이 솟은 생일도, 그 오른쪽에 삼문산이 펼쳐진 조약도가 분명히 보인다. 삼문산 바로 앞에 노력도, 노력도 앞, 바다 왼쪽으로 삐쳐나온 덕도가 가늠된다. 오른쪽은 육지화된 돌의도, 바다의 동그만 섬은 소회도이다. 돌의도와 회진면 신상리를 잇는 관덕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다.
우산도와 돌의도를 잇는 우산도방조제, 그 뒤로 드넓은 관산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천자의 관을 쓴 천관산 품새가 넓다.
통일광장에 있는 한반도 모양의 바닥분수에 정동진, 정남진, 정서진, 중강진이 표시되어 있다.
1.장흥의 지명 유래 : "임금이 길이 흥할 고장이라 하여 '長興'이라 이름지어 하사하다." 장흥은 고려 17대 임금 인종(仁宗)이 자신의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던 이자겸을 귀양 보내고 새로 맞아들인 셋째 아내 공예태후 임(任)씨의 고향이다. 원래는 정안현으로 영암군에 속해 있었으나 인종이 왕자를 여럿 낳은 왕비를 치하하기 위해 그녀의 고향 정안을 "길이 번창하길 바란다"를 뜻하는 장흥(長興)으로 개칭하고 지부사(知府事)로 승격시켰다.
2.장흥의 어머니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 : "장흥 출신 '공예태후' 세 임금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고을의 명칭을 장흥으로 하고 부사 고을로 승격되게 한 장흥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공예태후는 1109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중서령을 지낸 임원후(任元厚)의 딸이자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고, 고려 17대 임금 인종의 비이며, 의종(毅宗 18대)·명종(明宗 19대)·신종(神宗 20대)의 어머니이다. 112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종의 총애를 받아 5남 4녀를 출산했는데 아들 의종이 즉위하자 왕태후에 오르고 전(殿)을 후덕(厚德)이라 높였다.
삼한시대 마한의 건마국, 삼국시대 백제의 오차현, 통일신라 오아현, 고려초 정안현, 고려 인종 때 장흥부, 고려 원종6년(1265) 회주목으로 승격, 충선왕10년(1310) 장흥부로 강등, 조선 고종 32년(1395) 장흥군이라 함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正동쪽에는 정동진(正東津), 정북쪽에는 중강진(中江鎭), 정서쪽에는 정서진(正西津), 정남쪽에는 정남진(正南津)이 있다. 우리나라 정남쪽에 있는 나루터로 알려진 정남진은 장흥군이 발굴한 지역 이미지 브랜드이다. 북쪽의 추운 지방인 중강진과 남쪽의 따뜻한 정남진은 일직선 위에 있어 남북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성이 있다.
'율려(律呂)-어울림의 시작' 작품은 정남향을 표시한 높이 7m의 조형물이다.
제목 : 율려(律呂) - 어울림의 시작
규격 : 지름 7m, 높이 7m, 두께 1m
재질 : 스테인리스 스틸, 도자판(유리안료), 스테인리스 주물
조형물의 의의 : 전망대의 방향 축을 설정하는 상징적인 조형으로, 전망대 전체 부지 축에서 이용객들에게 전망의 방향과 정남향이라는 핵심 요소를 강조하는 기능을 하며, 태평양 시대에 걸맞은 진취적 진행성을 강조하며 장흥의 미래지향 발전적 이미지를 구현한다.
작품 설명 : 조형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원형 구조는 바다, 하늘, 땅을 의미하는 색채와 이미지들로 3등분 되어 있으며, 태극의 원리에 따라 하나로 융합되는 통합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내부면의 인물 군상들은 지구촌 각 지역의 어린이들이 어울려 율동감 있게 행진하며 하나된 세계를 표현한다. 아울러 바닥의 나침반 형상은 정남향의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여, 전망대의 목적성을 대변한다. 조형물과 내부의 인물 군상은 내구성이 뛰어난 스테인리스 스틸판으로 제작하고, 외면의 묘사 부분은 유리도자 타일로 제작하여 현대적인 질감과 조화를 이루게 구성했다.
한반도 모양의 바닥분수에 정동진, 정서진, 중강진, 정남진 표시가 되어 있다.
정남향을 향하여 한 척의 배가 태양을 싣고 바다를 떠가는 형상 같다.
장흥 죽산 안씨 문중의 안재성 씨가 안 의사가 서거한 지 100주년이 되던 2010년 5000만 원을 기부하여 이듬해인 2011년에 안중근 의사 동상이 정남진 전망대 통일동산에 높이 4m로 세워졌다. 동상은 안중근 의사가 단지(斷指)한 왼손으로 태평양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동상 건립문에는 “국권이 회복되거든 나를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대한민국 남쪽 끝 태평양의 큰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정남진 관문에 위풍당당한 안 의사의 동상을 세우니, ··· ”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문림의향 장흥군의 유림인사이던 안홍천씨는 안중근 의사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국내에 없음을 알고 1955년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만수마을에 해동사를 건립하여 안중근 의사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모심으로써 장흥군민의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안중근 의사의 국내 유일한 사당인 해동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26일 추모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전라남도 지정문화재자료 제291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0년 죽산 안씨 문중의 한 독지가가 동상건립비 전액을 기탁하겠다는 헌정이 있어 이에 민족의 표상인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전라도 천년 가로수길 표석 뒤에는 광주·전남·전북의 상징목인 은행나무를 본따 만든 전라도 천년 가로수길 조성기념비가 세 개 세워져 있다. 1.전라도 천년 가로수길 2.전라도 천년의 발자취 3.전라도 천년 기념 새천년 전라도의 도약을 위한 선언문
전라도는 고려 헌종 9년(1018)에 전북 일원의 강남도와 전남 광주 일원의 해양도를 합쳐 탄생하여, 2018년에 전라도 정도(定道) 천년이 되었다고 한다. 전라도 정도 천년을 기념하여 전라도 천년 가로수길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전라남도는 전국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빼어난 풍광을 지닌 해안의 길과 길이 한데 모여 이제 '전라도 천년 가로수길'로 다시 태어난다. 전라도 정도(定道) 천년을 기념하고 희망찬 새천년을 열어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광군 홍농부터 광양시 진월까지 16개 시·군 총522km, 해안길과 마을길, 자전거길 주변에 지역별로 특색 있는 가로수를 심는다. 가던 길 멈추고, 아름다움에 취해 보도록 곳곳에 쉼터를 만든다."(기념조성비에서)
공원을 내려오며 조각상을 멀리서 보았는데, 대중스타 조각상인 것을 모르고 지나왔다. 어떤 대중스타가 조각상으로 세워져 있을까? 한류스타 배용준, 최지우, 김희선, 이병헌 등 29명의 실물 조각 동상을 조각가 정진홍씨가 기부하였다고 한다.
우산도와 돌의도가 방조제로 이어져 육지가 되었다. 왼쪽 끝에 회진면 대리 덕도가 바다로 삐쳐 나와 있다.
방조제 위로 올라가 걸었다. 우산도와 돌의도는 관산읍 삼산리에 속한다.
바다 건너편에 소록대교와 거금대교 하얀 다리를 경계로 고흥반도, 소록도, 거금도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돌의도인데 우도경로당이라는 표지판이 달려 있다. 그렇다면 돌의도를 예전에 우도라고 불렀을까? 아니면 우산도를 줄여 우도라 부르는가? 이유가 궁금하다. 경로당 앞의 바위에는 여러 사연이 있을 것 같다.
남파랑길은 배수장 왼쪽으로 나가 관덕방조제로 이어진다.
돌의도 앞 우산배수장을 뒤쪽으로 돌아 관덕방조제로 나왔다.
관덕방조제 왼쪽의 작은 섬은 회진면 신상리의 소회도, 방조제 중간 어름에서 회진면 신상리로 넘어간다.
왼쪽 뒤에 소산봉, 중앙에 우산도의 정남진전망대, 관산읍 삼산리 돌의도와 회진면 신상리를 잇는 관덕방조제가 왼쪽에 길게 이어지고 오른쪽에는 회진면 신상리의 소회도가 얌전하게 앉아 있다.
왼쪽에 득량도, 그 맞은편에 고흥만이 길게 이어지다가 고흥반도 끝에 비봉산이 솟아 있고, 그 앞에 하얀 색 소록대교와 소록도, 그 오른쪽에 하얀 거금대교와 거금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금당도가 왼쪽에 길게 늘어져 있다. 앞은 회진면 신상리 신상마을이다.
오른쪽 회진로를 따라 고개로 오른다.
중앙에 소산봉, 그 앞에 돌의도와 소회도, 관덕방조제가 바다를 가로막고 있다. 득량만의 방조제는 해안선의 굴곡을 직선화하면서 갯벌습지를 빼앗아 농토를 만들었다.
오른쪽 회진로를 따라 이어간다.
앞에 신상경로당 황토색 지붕이 보인다.
당초에는 방풍림으로 식재하였는데 나무가 성장할수록 마을이 풍요하고 번영한다고 하여 정월 대보름과 팔월 한가위에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아주 먼 옛날에 힘이 좋은 메주할멈이 살았다.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 십리 밖 계곡으로 약초를 구하러 가서 둥근 모양의 돌을 발견하여 귀하게 여기고 치마폭에 싸들고 와 모래사장 어귀에 놓았다. 그후 마을 청년들은 여가를 이용하여 돌 앞에 모여 힘 자랑을 하면서 서로의 우의를 다지는 시간을 가져왔다. 아마 이때부터 역도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들돌이야기)
1130년경 제주 고씨가 마을 북편 빈터에 터를 닦았으나 성촌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살았다는 흔적으로 고초 등의 지명이 있으나 기록은 없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1600년경 경주 김씨 홍철이 용산면에서 입촌하여 마을 이름을 잿몰이라고 지명하고 생활해오다 인천 이씨, 김해 김씨, 광산 김씨, 수원 백씨가 입촌하니 신상리로 개칭했다. 그후 밀양 박씨, 남양 홍씨, 수성 최씨가 입촌하였고, 1960년 산업화 농경산업으로 관덕농장이 조성되니 광산 노씨, 평택 임씨, 장수 황씨가 입촌하여 농수산업을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은 1920년 김덕호, 김상동, 김영익이 천도교에 입교하여 이 고장 주민에게 문맹을 퇴치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1927년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전 주민이 참여하여 금, 은, 동, 장으로 생활환경에 따라 헌성하였으니 이 고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말할 수 있다. 현대사 인물에는 김해 김전현 회덕농협조합장, 경주 김형규 목포지방 항만청장(국공3급), 경주 김대종, 장흥군수협 조합장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이틀바위 : 잿물 모래사장 선착장 입구에 있는 큰 바위로서 바위 사이에 딸각돌이 있으며 이 바위가 울면 이틀만에 비가 내린다 하여 이틀바위라 한다.
*범바위(똥바위) : 서북 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의 액운을 막아준다는 유래가 있다.
표지판에 女·男敬老堂이라고 적혀 있다. 女·男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될까? 반대로 읽어야 할까?
6.25 전쟁 중 나라를 위해 순국한 신상1구 출신의 군경 호국용사를 기리는 현충비. 1996년 9월 건립.
동학교도들이 독립자금을 헌성한 기념탑과 독립운동의 유지 235명을 기리는 정자이다.
235명의 유지를 기리는 이삼오 정자이다.
1910년 경술년 국치는 우리 민족의 큰 수난인 동시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의병의 봉기와 해외망명 결사들의 목숨을 건 헌신으로 세계만방에 민족자존의 혼을 심어 주었다. 독립운동 영도자 손병희 선생의 강력한 영도 아래 전국 각지에서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 파리 강화회의, 연해주 독립군 등 각처에 전달되었으며, 의암성사(손병희 선생)의 유지에 따라 본 은‧동장 훈장은 표창창인 동시에 먼저 독립자금을 헌납한 후 포덕 57년(1917년) 대훈장을 발급하였고 후에 교부하는 식으로 특신 교인에게 증장하였다. 모금된 자금은 남자교인은 감시가 심하여 내소부인이 전달하였으며 이는 애국충절에 불탄 결사대였다.
-독립자금헌성 기념탑 유족회 일동
항일독립운동가 성암 김재계 선생 환원 80주기 추모식 펼침막이 걸려 있다. 남파랑길은 버스정류소 오른쪽 볼록거울이 있는 골목 신상1길로 이어진다. 이곳은 신상 버스정류소가 있지만 신덕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신상마을 버스 정류소 옆에 설치되어 있다.
꼿꼿이 쳐들고 온 머리부터를 모래톱에 처박고/ 온몸을 양파 껍질처럼 말면서 곤두박질치고/ 울부짖는 그대
멀고 먼 세상에서 흰 거품 빼어문 채 내내/ 사랑하고 악다구니 쓰며/ 줄기차게 살아온/ 그 삶을 후회하는가
신상女·男경로당 표지판과 달리 신덕男·女敬老堂이라 적혀 있다.
자칫 한승원 작가의 생가를 지나칠 뻔하였다. 전봇대 방향으로 들어가 한승원 생가를 들렀다가 되돌아 나온다.
아무도 살지 않은 채 버려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한승원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그는 1939년 음력 8월 26일 아버지 한용진과 어머니 박귀심 사이에서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의 역사적 현실과 숙명에 천착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 초기에는 남해 바닷가의 풍경을 토착어가 살아있는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삶에 대한 토속성과 한(恨)의 세계를 다루다가 나중에 인간의 내면심층을 파고들었다. 명덕초등학교, 장흥중·고등학교를 거쳐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김동리에게 배움. 1968년 <대한매일신보>에 <목선(木船)>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
2006년 장흥군 안양면 여닫이 바닷가에 시비 30기를 세웠다. 현재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해산토굴>에서 집필 중이며 아들 한동림과 딸 한강이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건너편에 고흥반도의 고흥만이 보인다.
한승원 작가의 생가 들어오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꺾어 한재 고개를 향해 오른다.
건너편 중앙에 소록대교와 소록도가 보인다.
삶의 행로였던 길목의 쉼터 : 이곳은 한재 고개 밑에 있는 '아래 번덕지'라는 쉼터이다. 장에 갔다가 한재 고개를 넘어온 사람들이 쉬는 곳이고, 한재 고개에서 땔나무를 해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쉬는 곳이다. 소를 뜯겨 가지고 오는 목동들도 소 고삐를 잡은 채 쉬는 곳이다. 한승원 소설의 주인공들도 이 길을 오르내리다가 이 자리에서 쉬곤 했다. 이곳은 이 고장 역사의 쉼터이다. 의병들도, 동학군들도, 경찰들도 이 길을 지나다녔다. 군대엘 가려면 이 길을 오갔다. 이 마을 청소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밟고 넘어가는 많은 이야기가 수런거리는 길이다.
이 땅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교감하는 이야기 : 발목이 묻힐 정도로 눈이 쌓였다. 절골로 가는 자드락길은 미끄러웠다. 흰 눈이 어둠의 농도를 묽게 해주고 있었지만 주철은 눈구덩이에 발을 헛디디고 거꾸러지기도 하고 미끄러져 뒹굴기도 했다. 속세를 버리고 새햐얀 눈의 세계로 접어든 듯 두렵고 불안했다. 이제 그는 전에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하늘은 검고 우중충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주철은 눈사람처럼 온몸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주언이란 놈은 왜 하필 이날 밤 이 폭설을 무릅쓰고 험준한 절골엘 갔을까. 주언이는 경찰의 끄나풀이 틀림없다. 절골에 숨어 있는 윤길을 붙잡으로 간 것이다. 그놈은 왜 기어이 조카뻘 되는 윤길이를 제 손으로 붙잡아 넣으려고 갖은 획책을 다하는 것일까.
-장편소설 <아버지와 아들> 중의 '겨울 폐사' 중에서
한재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이곳을 '아래 번덕지'라고 이른다고 한다. 한승원의 '겨울 폐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바다 건너편에 하얀 색 소록대교와 거금대교가 모두 보인다.
한재 고개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남파랑길 79코스 안내도가 출발점에 있지 않고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남파랑길 79코스에 속하지 않는 한승원 작가의 <해산토굴> 집필실을 소개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이 덕도라는 섬이었다. 이 한재 고개는 덕도의 동쪽 마을인 신덕리와 대리와 신상리 사람들이 회진과 대덕으로 나들이하는 통로였다. 천관산으로부터 뻗어온 산맥은 북쪽에는 큰재산, 서남쪽에는 한재산을 만들었는데, 한재고개가 그 두 산 사이에 놓여 있다. 남쪽으로는 고흥반도와 소록도 등 많은 섬들을 품은 득량만 바다가 짙푸르다.
이 섬 남쪽 대리에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어 덕산리 학동생들은 이 길을 따라 통학을 했고, 신덕리와 신상리와 대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장에 다니고 관공서의 일을 보러 다녔고, 이곳 청소년들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기 위해 넘어가던 고개였다. 특히 신덕리 마을 청소년들은 이 고개의 벌판에서 소를 놓아 뜯기고, 꼴을 베고, 땔나무를 하러 와서 씨름, 달리기, 공치기, 자치기, 유희를 즐기고 소들의 뿔싸움을 시켰다. 가끔씩 덕산리와 장산리와 신상리 청소년들이 소를 끌고 와서 신덕리 소들과 뿔싸움을 붙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씨름을 하면서 야망과 꿈을 키운 고개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란와서 이 섬에 정착한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과 싸우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고, 갑오년엔 동학군들이 이 고개를 넘었고, 3.1운동 때에는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고, 6.25를 전후해서는 인민군과 경찰이 번갈아 서로 상대쪽에 가담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묶어끌고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일제말기와 6.25 전후에는 모든 남녀가 공출나락 가마니를 이고지고 이 고개를 넘어가기도 한 눈물과 의분의 고개이다.
큰재산 뒤쪽을 도둑골이라 하는데 그곳에는 도망친 동학군들이 숨어 살았던 곳이다. 신덕리에 최초로 들어와 살던 고씨들이 망하여 나가게 한 바위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신화 서린 고샅바위에는 여우들이 살았는데, 청소년들은 진도개나 잡종 쉐퍼트를 끌고 와서 여우 사냥을 시키곤 했다.
이곳 신덕리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한승원의 소설 "앞산도 첩첩하고", "안개 바다", "까치 노을", "어머니", "당신들의 몬도가네", "그 바다 끓며 넘치며", "동학제" 등의 모든 주인공들이 넘어다닌 한재 고개는 뜻있는 이곳 청소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큰 세계로 나아가는 고갯길이다. 최근에는 우리 민족의 슬픈 신화 서린 할미꽃이 자생하고 있는 드넓은 꽃단지로서, 풍광 좋은 체육공원으로서, 한승원 선생의 문학공원으로서 관광의 명소가 되어 있는데, 얼마전에는 이 고장 출신 김선두 화백이 이곳의 풍광을 화폭에 담고, 진목리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이 할미꽃 단지를 소재로 아름다운 동화를 쓴 바 있다.
2004. 12
한재공원 안쪽에서 고갯길을 바라보았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그 한복판에 수직으로, 수직으로만 상승하고 있는 새 아닌/ 새/ 한 마리가 거기 있어서입니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빛/ 하나가 거기 떠 있어서입니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내가 최후에 남겨야 할 말 아닌/ 말/ 하나가 거기 있어서입니다.
한재고개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한승원 시비들과 한재 안내비, 조형물들, 그리고 왼쪽에는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공원으로 조성된 한재 고개 북쪽 기슭은 자연관찰 및 환경보전을 위해 특별히 관리되고 있는 할미꽃 야생화 군락지이다.
공지산은 학이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형상이다. 공지산 아래 선학동마을과 공지산 왼쪽 뒤에 조약도가 가늠된다.
깐닥깐닥 읽어서 맛있게 다가오는 소설 : 이 가파른 한승원 문학길은 한승원의 단편소설 <어머니>의 주인공과 장편소설 <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들이 오르내린 길이다. 한승원은 이 가파른 고갯길을 <아버지와 아들>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소나무 숲길은 좁은 데다가 가팔랐다. 돌자갈이 많이 깔려 있어 미끄러웠다. 이 해변 지방 사람들의 말대로 '싸목싸목' 오르거나 '깐닥깐닥' 올라야 했다. 주철은 고향에 살면서 뼈의 마디가 굵어졌고, 그러는 동안 이 고개를 넘을 만큼 넘어본 터였다. 그 고개야말로 '깐닥깐닥' 오르거나 '싸무욱 싸무욱' 오르거나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면서 호흡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래에 보이는 마을은 장산마을이다. 공지산이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 듯,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상으로 들어온다. 뒤쪽에 구름에 가린 생일도와 그 오른쪽에 약산도를 가늠한다.
남파랑길은 직진하여 고개를 넘어 덕산마을로 내려간다.
왼쪽은 큰재산, 오른쪽은 한재산, 그 사이로 한재 고개가 있다.
남파랑길은 왼쪽 덕산신상길을 따라 이어간다.
1391년 하동 정씨가 덕산 노둣바위 위 비폰지역 막골에 맨 처음 기착하였고,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장수 황씨와 김해 김씨가 들어왔고, 높이 273m의 산이 사자가 좌측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며 사자의 유방인 지점에서 청수가 솟아나와 흐르므로 그 청수 터가 수백 년 전부터 식수정을 중심으로 현 위치에 마을이 조성되어 마을 전체의 흡족한 식수로 음용되고 있다.
예전 덕도는 섬이었으나 마을 북편과 관산을 잇는 유일한 교통편이 십리 도로였다. 축조연대는 임진왜란 후로 여겨지며 바위돌을 운반하여 놓은 징검다리로 역사 깊은 교통로였다. 1961년에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2년여에 걸쳐 회진과 덕산을 잇는 방조제가 1962년 12월에 성황리에 준공식을 가졌으며 1965년에 용수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재정리되어 전천후농장으로 발전하였다.
우리 마을은 경로효친의 사상을 생활화하고 질서와 예의를 전통으로 계승해 오는 마을이므로 미풍양속의 윤리가 후대에 영원히 유지 발전하여 마을 중흥의 계기가 되고, 후손들에게 길이 보존되어 값진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진행하여 오른쪽으로 꺾어 회진1교를 건너 회진로를 따라 회진항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뒤에 노력도, 그 앞에 작은 탱자섬, 그 뒤에 희미하게 솟은 생일도의 백운산, 오른쪽에 공지산이 보인다.
이곳에 회령진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오른쪽 뒤에는 회령진성이 있다.
회진항 거리에 조성되어 있다.
회진항을 앞에 보고 회진항 넓은 터에 조성되어 있다.
천관농협 왼쪽으로 이어간다.
뒤쪽에서 천관산이 듬직하게 내려보고 있다.
천관산이 저녁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회령진성 아래 소공원으로 들어간다.
회진시외버스터미널 앞 회령진성 아래 남파랑길 80코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남파랑길 79코스를 마친다.
뎈 계단 입구 난간에 남파랑길 80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회진로를 따라와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회령진성 아래 소공원에서 남파랑길 79코스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