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8. 둘째 주 예배
기원2. 시편2편
묵상기도 듣고, 깨닫고, 귀 기울이게 하소서
신앙고백
찬송 195 이 세상에 모든 죄를 (317,318,313)
기도 유에스더 집사
성경말씀 호세아5:1~7
찬양
설교 죄와 벌
찬송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 우리 가진 것 이것뿐입니다.
광고 익산역 앞 아침식사 봉사를위해 기도(3월), 2부 찬양예배설교, 박성한 목사,
새신자 김영순집사(천식 수술), 부반주 피아노공연)
찬송 317 어서 돌아 오오
축도
톨스토이가 말하기를 이 세상 모든 작품이 불살라질지라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남겨져야 한다고 극찬할 정도입니다.
18세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언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이란 신비입니다. 그것을 풀어 밝혀야 합니다.
만일 그것을 풀어 간다면 시간을 낭비했다고 비난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이 신비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 미하일은 다혈질 성격자였습니다.
아버지는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농노나 종을 때리고 신경질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미하일에게 매질을 당한 농부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체는 숲 속에 버려졌습니다.
아버지의 횡사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신경질적인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925년, 독일의 출판업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집을 간행하면서
프로이드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분석을 요청했습니다.
프로이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 발작은 충격적인 아버지의 죽음 후
스트레스 때문에 간질병으로 발전했다고 확신했습니다.
프로이드의 의견은 싫어하는 아버지가 은근히 죽기를 원했으나
그 사악한 악마의 소원이 의외로 빨리 실현 되었을 때
공포와 죄의식과 회환이 밀려 왔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죽인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도스키예프스키의 작품들에는 심리적이 글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대표작 <죄와 벌>도 살해범을 주제로 신과 인간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던 인색하고 까다로운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아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순가도 편안한 날이 없이 살았습니다.
본문은 ‘죄와벌’의 문제입니다.
1절입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제사장들아 들으라!
이스라엘 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사회전반에 많은 영향을 주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징그렇게 말도 안 들었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한 숨만 나옵니다.
국민은 굻어죽게 생겼는데 매일 쌈판입니다.
지금이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어려워 질것입니다.
원래 미스바와 다볼은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장소입니다.
미스바는 사무엘이 집회를 열어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도록 한 장소였습니다.(삼상7:5)
다볼은 여선지자 드보라가 가나안 야빈왕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물리친 곳입니다.(삿4:6)
그러데 미스바와 다볼이 우상숭배지로 변한 것입니다.
지금 변질된 우리의 마음을 제자리에 돌려놓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도울 김용욱 선생이 중용 강의를 하는데
매일 거울을 보면 병색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아침 세수를 할 때면 거울을 자세히 드려다 봅니다.
얼굴 모양새, 몸 가짐, 눈빛을 살핍니다.
마음이 불편 할 때면 얼굴에 나타납니다.
저는 어제의 나가 아닙니다.
많이 변했고 변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제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벌>이야기입니다.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졸업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백해무익한 고리대금업자 노인을 도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죄의식 때문에 매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앙심이 깊고 자기희생과 고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매춘부 소냐에게 찾아가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소냐에게서 영혼의 위안을 찾고 자수했습니다.
그리고 8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냐의 끝없는 사랑과 헌신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8년형을 받았을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 개운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살육죄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뿐만 아닙니다.
인권을 짓밟는 행위, 사람을 미워하는 행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반역한 행위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다 회개하고 개운하게 살아야 합니다.
3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4절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절,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다 압니다.
절대 은패 된 죄를 숨겨 놓을 수 없습니다.
요즘 학교 폭력으로 매우 소란합니다.
심지어 초등하교에서까지도 폭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죄의 속성은 어른에서 아이까지 매우 빠르게 전염됩니다.
죄의 속성은 매우 빠르게 우리를, 우리의 어린 자녀들까지도 함께 오염 시킴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죄성’때문입니다.
죄성은 덫그물망, 웅덩이와 같습니다.
죄악을 한번 저지르게 되면 그 죄는 나를 풀어주지 않습니다.
죄악이 한번 인간에 의해서 소유되면 그 죄는 인간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스스로 죄를 전혀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인식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에브라임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죄는 음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은밀한 일도 하나님께는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 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아실 수 없다는 듯 마음대로 행동 합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 즐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드러난 행위 이전의 은밀한 마음까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다 알고 있습니다.
6절,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여로보암 2세(주전793~753) 때는 마지막 이스라엘 번영기였습니다.
정치, 문화 성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국민들은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주전 930년에 분열왕국이 된 이례 최대의 번영기였습니다.
이러한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임에도 자신들의 노력의 댓가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제의적인 행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결합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소떼와 양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갔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이 만든 종교의식이나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려 합니다.
그러나 삐뚤어진 방법이나 노력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풍성하게 설비된 제단의 기교로는 헛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신실한 헌신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지금 무엇으로 예배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소와 양떼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려 하십니까?
헌금이 없을지라도 진심으로, 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일주일의 삶이 예배야 합니다.
7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간음한 여인은 본 남편이 아닌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이렇듯 제멋대로 행한 이스라엘의 종교는 혼합종교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은 제멋대로 일주일을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머리를조아리고 주둥이를 나불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바알, 우상을 닮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월 초 월삭에 예배드리는 첫날이 죄짓는 날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주 첫날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날이 죄짓는 날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지 못하면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아 들으라!
이스라엘 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라고
인색하고 신경질적인 아버지 때문에 평생 정신적 질환을 앓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우리들의 자녀가 나 때문에 삶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금 듣고, 깨닫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