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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yoga) ― 유가(瑜伽)의 의미>
요가(yoga)와 유가(瑜伽), 같은 말이다.
요가(yoga)를 한역한 것이 유가(瑜伽)이다.
그런데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라 하는데, ‘요가(유가)’라는 말이
거기에 왜 들어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요가’라고 하면,
여성들이 몸매를 가꾸기 위한 건강체조의 일종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요가를 몸을 비비꼬는
묘한 자세를 취하는 인도에서 전해진 특이한 운동으로 알고 있다.
특이 요즘 요가 운동이 유행하고 있어서 불교학에서 말하는
유식학파라는 말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이해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인도에서 ‘요가(yoga)’라는 말의 의미는 광범위하다.
때문에 요가에는 ‘운동’이라는 일면이 없지 않으나
요가의 근본은 고도의 정신집중 수행법이다.
요가는 육체적 수행뿐만 아니라, 정신적 그리고 초자연적 수행이요, 훈련이다.
원래 요가는 명상과 호흡 등의 전신 수련과 스트레칭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심신수련방법인데, 그 중의 일부인 스트레칭 부분을
확대시켜 일반사회에서는 체육활동의 한 종류로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요가의 종류는 다양하며, 특히 철학 혹은 종교와 결합된 요가는
체육과는 거리가 먼 정신수양의 영역이다.
부처님께서도 처음 출가하신 후에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 라는 두 명의 스승 밑에서 선정을 배워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의 최고 단계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이르렀다.
그 때 싯다르타 태자를 지도한 스승들이 바로 요가수행자들이었다.
싯다르타가 그들 곁을 떠난 것은 비상비비상처의 경지까지 얻었지만
그 이상의 경지에서 성취할 수 있는 궁극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승 곁을 떠난 것이지
결코 그 수행법이 잘못됐다거나 올바르지 않은 길로 인도하는
수행법이라서 스승 곁을 떠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사무색정(四無色定) 수행법의 최고 단계인
비상비비상처선을 넘어선 멸진정(滅盡定)의 경지를 추가해서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는 수행법을 정립한 것만 봐도
요가수행이 정신수행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원래 요가(yoga, 瑜伽)는 고대 인도의 명상법으로서
선정(禪定)이 요가에서 비롯됐으며, 여기에 부처님의 명상과
정각(正覺)을 통해 새로운 불교의 실천수행법이 이루어진 것이다.
요가의 기원은 B.C. 3000년 경 고대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시됐다.
그러므로 요가 명상인 선(禪)은 약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B.C. 1000년경에 이루어진 힌두교 계통의 고전 <바가바드기타>에는
요가의 종류와 실천방법이 적혀 있고,
요가라는 용어는 기원전 600년경 <우파니샤드(Upanisad)>에서
처음 쓰였으며, 외부에서가 아닌 내부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참된 자기[진아(眞我)]를 찾으려는 실행법으로 해석됐다.
요가(Yoga, 瑜伽)라는 용어는 ‘결합한다’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유즈(Yuj)’에서 나왔는데, 마음을 긴장시켜
어떤 특정한 목적에 상응(相應) 또는 합일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요가라는 말은 사유 또는 명상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명상을 통해 오감(五感)을 제어하고 산란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
즉 모든 감각기관을 움직이지 않고 집중해서 마음을 통일시켜
적정 상태에 머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요가는 삼매(三昧, samadhi) 혹은 선나(禪那, dhyana)라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선나(禪那)로 사용돼 오다가 선(禪)이라는 말로 일반화됐으며,
대승불교에서는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설하는 브라만교에서는
요가의 명상을 통해 브라만(Brahman, 梵)과 아트만(Atman)이
본래 하나라고 하는 梵我一如의 경지를 체득함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붓다의 선정(禪定)은 제법의 본질인 연기(緣起)의 법을
깨닫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이후 여러 유파로 발전해 그 종류가 많아졌지만,
어떤 수행방법과 철학을 중점적으로 수련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그 중 고행(苦行)과 선정(禪定)이
결합된 요가는 인도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고대 인도의 육파철학(六派哲學)의 하나로
요가(瑜跏)학파가 형성돼, 철학 방면에서는 여기에 기원을 둔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학파는 그 실천방법으로서 요가를 수련했고,
불교에서의 무념(無念)ㆍ무상(無想)ㆍ무심(無心)의 참선이나 결가부좌(結跏趺坐)도
바로 요가에서 온 것이다.
부처님의 좌법인 연화좌(蓮華座)가 바로 결가부좌법을 말하는데,
불교에서 행하는 명상의 대표적 요가형 좌법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시대에 유가(요가)가 불교사상에 채용돼
중관파(中觀派)와 쌍벽을 이룬 유가유식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유기유식학파’라는 명칭은 유가행(瑜伽行)이라는
수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한 직접적으로는 유가유식학파의
개조 미륵(彌勒, 270~350?)이 지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라는
논서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즉, 요가의 실천(瑜伽行)이
이 학파의 성격을 특징짓는 명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굳이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도의 유명한 육파철학(六派哲學)의 하나인 요가(Yoga, 瑜跏)학파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요가파를 불교에서는 외도로 보며, 유가외도(瑜伽外道)라고 한다.
요가의 원래 의미는 수행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부처님도 수행자일 때는 요가수행을 하셨다.
그리하여 특히 불교에서 ‘요가’라 하면, 넓게는 불교의 진리를
지적(知的)으로 이해한다거나 또 다양한 대ㆍ소승의 수행법을
몸소 닦는다거나 혹은 그런 행위로 인해 생겨난 결과들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지만, 좁게는 지관(止觀)을 가리킨다.
즉, 유식학파에서 요가는 일반적으로 지관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사마타(śamatha)와 위빠사나(vipaśyanā) 수행을 의미한다.
한역해서 선정(禪定)ㆍ심일경성(心一境性) 등과 동의어로 쓰인다.
따라서 <해심밀경>에서도 이 ‘지관’에 국한시켜
‘요가의 완전한 의미에 대한 가르침[瑜伽了義之敎]’을 설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대표적인 수행법인 사마타(śamatha)와 위빠사나(vipaśyanā) 수행도
요가(yoga) 실천법의 한 종류이다.
그런데 요가 실천의 체험을 묘사하는 가운데
‘유식(唯識)’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선구적인 유가사(瑜伽師, 요가수행자)들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 자각한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일 뿐이라는
지각이 ‘유식(唯識)’이고, 이 유식에 바탕 해 현상계의 모든 것은
마음을 반영하는 표상(Vijñapti)에 불과하므로,
오직 表象識일 뿐이라는 명제가 이 학설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즉, 외계의 존재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식론사상이다.
요컨대 “요가를 닦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자각적(自覺的)인 체험이야말로
유식설을 형성한 내면적인 원동력이었다.
그리하여 유식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본래 공적함을 얘기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하고,
일체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다고 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말들이 유식설을 상징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그전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덤덤하게 보던 사물도
이제 심미안을 갖추고 바라보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국보 몇 호라고 하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떠들어도,
보는 사람이 그걸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는 것이다.
유가(요가)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바른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하며,
이를 통해 현상들이 마음 작용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미륵(彌勒, Maitreya)에 의해 유가행유식학(瑜伽行唯識學)이 시작됐다고 하지만
이를 확립시킨 사람은 4세기 무착(無着)이다.
3세기 용수(龍樹)가 창시한 중관학파(中觀學派)와 함께
유가행유식학파는 대승불교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중관파가 현상의 공성(空性)을 설파한 것에 비해,
유식파는 현상의 발생근거에 대한 정밀한 고찰을 전개했다.
즉, 현실존재는 공(空)에 기초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중관파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단지 이 현상세계가 일시적인 가상일지라도 현실에서
차별의 모습을 띠면서 존재하는 것은, 일정한 원인이 될 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종자(種子)라고 했다.
이 종자는 순수한 정신작용으로서의 식(識)이고,
모든 현상은 단지 이 식에 의해 현현(顯現)한 것[유식(唯識)]이라고 했다.
"유식(唯識)"에서 유(唯)는 "오직"이며 식(識)은 의식(意識) 또는 마음을 뜻한다.
즉, 유식(唯識, 산스크리트어 vijnapti-matra)이란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는 사상이다. 유식이란 단지 표상(表象)이
있을 뿐이고 외계의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이 유식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먼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심식(心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두 단계가 많은 논서에 서술돼 있다.
유식(唯識)이란 말은 오직 식(識), 알 뿐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차별 현상 일체는 오직 인식하는 마음작용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동일한 사건이나 대상을
서로 다르게 알고 다르게 경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아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내면으로는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견(我見), 아치(我癡),
네 가지 자아의식을 자각하고, 밖으로는 연기적 관계성을 자각해야 한다.
자아의식이라는 색(色)안경을 연기성이라는 공(空)안경으로 바꾸어 끼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행이고, <금강경>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바다.
유식이 현대적 해석으로는 일종의 심리학이자 뇌 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유식학파에서는 유가행의 체험을 바탕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새로운 심식(心識)과 이에 따른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중관파에서 주장된
반야의 공사상(空思想)의 불충분한 점을 보충하고,
일체의 존재는 심식(心識)의 변전이며 심식(心識)만이 실재라고 보는 유식설(唯識說)을 세워
대승의 교리적인 발전을 기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이 유가행파의 근본 경전이라 하겠는데,
그 외에 미륵(彌勒)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더불어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 세친(世親)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십지경론(十地經論)>,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등이
유가행파의 주요 소의 논서이다.
또한 세친의 <유식삼십송>에 대한 세친 문하의 십대 논사들이 펼친
학설을 취합한 <성유식론(成唯識論)>도 주요 소의 논서에 포함된다.
당나라 현장(玄奘)은 이를 호법(護法: 530-561)의 학설을 중심으로 해서
재편집 번역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발간했다.
이상과 같은 유식학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의 유식학이고,
제2기는 세친(世親)의 유식학이며,
제3기는 호법(護法)과 안혜(安慧) 등의 10대 논사의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이 주체가 돼 삶의 현상을 창조한다는
대승적인 학문이며, 동시에 인간의 심성을 세분화해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 사상의 핵심을 보면,
• 번뇌로운 마음을 중심으로 한 선악의 개념과 윤회하는 중생의 심성을 설명하는 학설,
• 청정무구한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 진여심(眞如心)을 설명하는 학설,
• 선악의 범부심을 정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추구하는 보살도 수행을 설명하는 학설이다.
• 용수(龍樹)의 중관사상 또는 공(空)사상이 지나치게 공허한 사변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그리하여 유식학파의 사상은 불교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동아시아의 불성(佛性)사상과 조사선(祖師禪)을 중심으로 한
선불교의 바탕이 되는 학설이 유식학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유식학을 몰라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유식학은 상당히 어려운 교의이다.
교학과 함께 실참 수행도 함께 해야만 접근 가능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경전에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고
마음이 고뇌하면 중생도 고뇌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마음이 생기면 여러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여러 법이 멸한다.”라고도 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유식사상과 상통한다.
그런데 보다 대승적인 유심사상이면서 유식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화엄경>의 유심사상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마음은 화가나 공예사와 같이 갖가지 오온(五蘊)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오온은 몸과 마음의 체성과 작용이 집합해 이루어진 인격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인격체는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다[심위법본(心爲法本)].
이와 같이 유식학은 <해심밀경>ㆍ<유가사지론> 등의 만법유식(萬法唯識) 사상과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유식사상의 중요한 세 가지 개념은 훈습(薰習), 종자(種子), 유가행((瑜伽行)이다.
훈습(熏習, 산스크리트어 vāsanā)에서 ‘훈(熏)’은 냄새가 밴다는 의미이고,
훈습은 내가 과거부터 익힌 오래된 습관을 말한다.
그래서 습기(習氣) 또는 종자(種子)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습관적인 행동에 따른 잠재 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것에 계속해 자극을 줄 때, 그것이 점차 그 영향을 받는 작용을 말한다.
처음 갈아입은 옷엔 냄새가 없지만 옷을 오래 입으면
입은 그 사람 체취가 배서 독특한 냄새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마치 향냄새가 옷에 스며들 듯,
몸과 말과 뜻으로 일으킨 행위의 기운과 생각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력으로 이식되는 현상을 말한다.
즉 현행(現行)은 반드시 그 인상(因相-습기, 종자)을
마음의 본체인 아뢰야식에 남긴다고 했다.
우리 마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같은 말이나 행동 또는 선악의 생각들을 반복하면 습관처럼
자신의 심체(心體)에 머무르는 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진여가 원래 물든 것이 아니지만
미혹(迷惑)한 무명(無明)이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면
그 마음이 망념으로 물들게 된다.
반면에 미혹에 물든 마음이 깨끗하지 않더라도
진여(眞如)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면
본래의 깨끗한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이것이 모두 훈습의 작용이다.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ija)란 업력(業力)을
식물종자가 가진 잠재적인 힘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단지 선악의 업에만 종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가 종자형태로 바뀌어 존속한다고 봤다.
그 종자가 저장돼 있는 곳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아뢰야식에 ‘아뢰야’란 ‘간직한다’는 뜻이다.
종자를 소장하고 있는 식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독자부)에서 무아와 윤회의 상충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푸드갈라(pudgala-보특가라-個我)’라는
윤회의 주체를 고안했듯이, 업의 상속을 설명하기 위해서
‘종자(種子)’의 비유를 도입한 것이다.
종자(種子)란 아뢰야식 속의 '특수한 심적인 힘'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특수한 심적인 힘이란 과거의 업(業)에 의해
아뢰야식에 훈습된 습(習)을 말하며, 이 습기가 바로
현재와 미래의 모든 현상을 산출하는 잠재력으로서의 씨앗이다.
이 씨앗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산출하는 씨앗인 명언종자(名言種子)와
미래세 자기를 형성하는 씨앗인 업종자(業種子)로 나누어진다.
현재의 모든 현상을 산출하는 씨앗을 '명언종자'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심적 활동의 본질을
명언(名言) 즉, 언어를 써서 개념적 사고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을 포함한 제1식에서 제8식까지의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아뢰야식 속에 저장돼 있는 씨앗
즉 습기(習氣)가 직접원인 인(因)이 되고,
그것에 간접원인 연(緣)이 작용해서 생겨난다.
유가행은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것을 말한다.
유가수행은 <해심밀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논서論書로는 <유가사지론>이다.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 같은 유가 논장에서는
마음을 식識이라고 통칭하면서 마음의 활동에 대한 분석이 상세하다.
그리고 <화엄경>이 수행체계를 제시했다면
<안반수의경>과 <능엄경>은 실질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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