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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완영 시조 모음
조국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鶴처럼 여위느냐.
고향생각
정완영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極樂山) 위,
내 고향 하늘 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동구(洞口) 밖 키 큰 장승 십리(十里)벌을 다스리고,
풀수풀 깊은 골엔 시절 잊은 물레방아,
추풍령(秋風嶺) 드리운 낙조(落照)에 한폭(幅) 그림이던 곳.
소년(少年)은 풀빛을 끌고 세월(歲月) 속을 갔건만은,
버들피리 언덕 위에 두고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잊어 봄을 울고 갔드란다.
오솔길 갑사댕기 서러워도 달은 뜨네,
꽃가마 울고 넘는 성황당 제철이면,
생각다 생각다 못해 물이 들던 도라지꽃.
가난도 길이들면 양(羊)처럼 어질더라,
어머님 곱게나순 물레줄에 피가 감겨,
청산(靑山) 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뿌리고 거두어도 가시잖은 억만 시름,
고래등 같은 집도, 다락 같은 소도 없이,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더라,
빙그르 돌고 보면 인생(人生)은 회전목마(回轉木馬),
한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 밖에 저문다.
초봄
(정완영(1919~ )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 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 낸다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빛도 닦으리.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벽이라기보다 유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유리가 있다. 유리는 자주 닦지 않으면 앞을 가로막는 진짜 벽이 된다. 먼지 낀 유리창을 닦지 않는 것은, 타자를 거부하는 자폐증과 다름없다. 호호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자. 아니, 안경알부터 닦자. 마음의 창인 두 눈부터 씻자. 그래야 내가 보이고 네가 보인다. 그래야 문 밖에 와 있는 저 봄이 진짜 봄이 된다. 환한 새봄이 된다. -< 이문재 시인 >
어머니 콩밭
정완영
어머님 길 떠나신지 십 년 십 년 또 십 년
그 해 그 가을이 오늘에도 수심 겨워
콩밭에 누렇게 앉은 물 내 가슴에 다 실린다.
'관악산 봄'
정완영
산은 늙었는데 봄은 늘상 어린걸까
숲 속에 들어서면 구슬 치는 산새 소리
나무들 키 재는 소리도 내 귓 속에 들려온다.
묵로도(墨鷺圖)
정완영
외로울 때면 대해 앉는 묵로도(墨鷺圖) 한 폭(幅)이 내게 있다
갈대 한 잎이
천심(天心)을 견주었다.
어느 먼 세상 끝일까
외로 밟은 산 그늘이
홀로 꿈 여윈 그림자
너 묵로(墨鷺)가 졸립고나.
동자(瞳子)로 맑힌 호심(湖心)
가다 가만 구름도 멎고
연(蓮)잎에 실린 금풍(金風)
귀로 외는 구추성(九秋聲)이여
어쩌다 희야할 목숨이
먹물 입고 와 섰는가.
추서리면 나래깃에
몰려도 올 창공(蒼空)이련만
억새풀 서리밭에
낙월(落月)처럼 떨어졌나
내려 선 상심(傷心) 한자락
짚을 땅이 없던고.
너마저 날라 나면
가을이 또 놀라겠다
끊어진 퉁소 소리
비수보다 아픈 밤은
별 아래 한 발을 접고
적막(寂寞) 줍고 섰거라.
1972년
시인의 고향
정완영
경부선 김천에서 북으로 한 20리
추풍령 먼 영마루 구름 한 장 얹어두고
밟으면 거문고 소리 날듯도 한 내 고향 길.
한구비 돌아들면 돌부처가 살고 있고
또 한고비 돌아들면 이조백자 닮은 마을
땟국도 금간 자국도 모두 정이랍니다.
바위 틈 옹달샘에도 다 담기는 고향 하늘
해와 달 곱게 접어 꽃잎처럼 띄워두고
조각달 외로운 풀에도 꿈을 모아 살던 마을
널어논 무명베 같은 시냇물이 흘렀는데
낮달이 하나 잠기어 흔들리는 여울목엔
별보다 고운 눈매의 조약돌도 살았어요
두줄기 하얀 전선이 산마루를 넘어가고
쑤꾹이 울음소리가 그 전선에 걸려 있고
늦은 봄 장다리밭엔 노오란 해가 숨었지요.
고향의 봄
정완영
시냇가 수양버들 눈은 미처 못 떴지만
봄 오는 기척이야 어디서나 소곤소곤
별발로 잔뿌리 내리고 잠도 솔솔 내리더라,
고향의 여름
정완영
동구밖 정자나무는 대궐보다 덩그런데
패랭이 꽃만한 하늘은 골에 갇혀 혼자피고
금매미 울음소리만 주렁주렁 열리더라.
고향의 가을
정완영
부어떼 피라미떼 살오르던 시냇물이
밤이며 꼬리치며 하늘로도 이어지고
그물이 은하수 되어 용마루에 흐리더라.
고향의 겨울
정완영
아랫목 다 식어도 정이남아 훈훈하고
쌀독쌀 떨어져도 밤새도록 내리던 눈
삼이웃 둘러만 앉아도 만석 같은 밤이더라.
대흥사
정완영
산은 하늘 끝에
절은 또한 그 땅 끝에
적막은 어느 끝에
사무치어 우는 걸까
두륜산
대흥사 범종
피를 쏟는 동백꽃.
아내
정완영
한 잔 술 등불아래
못 달랠 건 정일래라
세월이란 풀 섶 속에
팔베개로 지쳐 누운
당신은
귀뚜리던가
내 가슴에 울어 쌓네.
채춘보·1―봄의 수인
정완영
까마득 겨울을 살고
볕살 속에 나와 서니
나는 봉발(蓬髮)의 수인(囚人)
이 불사의 죄값으로
한 가슴 벅찬 새 봄을
외려 선사 받누나.
세월이 간다
정완영
고속버스 정류장까지 이십 리길 따라 나와
손 흔들며 배웅해 준 팃기 없는 고향 친구들
그날 그 주름진 얼굴이 햇살처럼 번져온다.
거름 냄새 물신 풍기는 자라 같은 손을 흔들며
인생이 반은 허물인 날 보내는 인사법들
"조카 니 언제 올래?" 먼 하늘에 솔개가 돌데.
세월에 핑계가 많아 돌아 못 간 수 삼 년에
더러는 이미 산자락 熱界열계처럼 떨어지고
생각만 고향 까치집 동그맣게 걸려 있다.
적막한 봄
정완영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 풀에 지쳐 오도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 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정완영 '적막한 봄' 전문 (유심, 2007년 봄호)
시암의 봄
정완영
내가 사는 초초(艸艸) 시암(詩庵)은 감나무 일곱 그루
여릿여릿 피는 속잎이 청이 속눈물이라면
햇볕은 공양미 삼백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놓은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은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
만 냥 빚 갚은 하늘
정완영
녹음도 짐이던가
지친 여름 다 부리고
산국 감국 쑥부쟁이
흩어 피는 이 가을은
만 냥 빚
다 갚은 하늘을
이고 길 나섭니다
날카로운 새가 휙 지나간 하늘에 티 한 점 없다. 미련도 빚도 다 갚은 하늘이 빈 나뭇가지 위로 드리웠다. 그것도 보통 빛이 아니라 억만의 빚 다 갚고 온 표정의 하늘이라니! 사는 게 모두 빚 갚아 가는 일이다. 가을 되면 다 갚고 편안해져야 하리라. 아무 거리낄 것 없을 때 그게 자유다.! 그렇게 길 나선다? 오, 나는 멀었어라! -(시인 장석남)
세월은 가도
정 완 영
복사꽃
두멧골 외딴집에 복사꽃 혼자 핀다
사립문 열어놓고 물소리도 열어놓고
사람은 집 다 비운 채 복사꽃만 혼자 진다
감꽃
감나무 짙은 그늘이 우물처럼 괴는 한낮
외딴집 봉당방에는 아기 혼자 잠이 들고
뻐꾸기 울적마다에 감꽃 하나 떨어진다
창포꽃
돌 하나 던져볼까 아니야 그만 둘래
바람 한번 불러볼까 물잠자리 잠을 깰라
창포꽃 포오란 생각이 오월 못물을 열고 섰다
한 세상 이야기
정완영
우리가 손을 놓고 헤어지는 그날 밤도
못 다한 말 있더라도 돌아보지 말 일이다
자꾸만 뒤돌아보니까 달이 따라 오는 거다
귀뚜리 울음소리도는 창밖에만 놓아두면
울다가 하늘에 올라가 모두 별이 되는 건데
자꾸만 데리고 다니니 옷자락이 젖는 거다
고향이 별 것도 아닌데 그냥 그 산 그 물인데
정 주고 눈물 준 이들 떠나가고 다 없는데
기러기 울면서 가니까 눈물이 따라 가는 거다
이 세상 풀과 나무들 모두 부처 어머니고
누른 꽃 붉은 열매들 약 아닌 것 하나 없는데
사람은 절 지어 놓고 절만 자꾸 하는 거다
미소는 여리기 때문에 눈물이나 가서 닿고
통곡은 아프기 때문에 종소리도 우는 건데
청산도 할 수가 없어서 엿듣고만 있는 거다
석촌호수
정완영
우리 동네 석촌호수 창포꽃이 피는 날은
바람도 꼼작 못하고 꽃만 보고 섰습니다
구름도 물속에 들어와 꽃만 보고 섰습니다
감꽃
정완영
아무도 없는 날 보는 이도 없는 날에
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이 세상은 환하다
을숙도(乙淑島)
정완영
세월도 洛東江 따라 七百 里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河口에선 지쳤던가
乙淑島 갈대밭 베고 질펀하게 누워 있데.
그래서 목노 酒店주점엔 대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落日낙일 앞에 받아 놓으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밭처럼 서걱이는 老沙工노사공도
강물만 江이 아니라 하루 해도 江이라며
金海 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江을 보데.
내 귀에는
정완영
우리 집 좁은 뜨란을 지켜 섰는 늙은 감나무
주먹 같은 굵은 먹감이 주렁주렁 열렸는데요
내 귀도 먹감이 열렸나 세상만사가 먹먹합니다.
그래도 여름이 떠나고 가을빛이 찾아들면
볕바른 우리 집 장독대 익어 가는 장맛하며
내 귀엔 감 익은 소리가 뚝뚝하고 들리겠지요
귀경열차
정완영
세월을 지고 왔다가 지고 가는 꿈이라서
고향에 갔던 열차가 달을 싣고 돌아온다.
울고 난 종소리 같은 텅 빈 세상 한 복판을
달과 나무
정완영
쓸쓸한 밤 하늘을
말없이 외로 떠 가다
달도 나무가지에 걸려야
비로소 둥글어진다.
한 세상 홀로인 이 마음
너를 만나 익은 설움
능소화
정완영
부박한 세월이라 정 줄 곳이 없었는데
능소화 피는 아침 창문 열고 바라보니
절로는 손 모아 집니다 세상 환희 빛납니다
주황만도 아닌 꽃이 분홍만도 아닌 꽃이
우리들 사람들만 보라고도 안 핀 꽃이
하늘로 이어진 길목에 등불 내다 겁니다
살얼음
정완영
인간의 미움 위에는 죽음의 재가 나리어도
천지의 말씀으로 조아려 선 立冬 철은
목숨은 설움이던가 살얼음이 조인다.
오늘밤 무서리는 등불들을 익후는데
단란한 집을 얽는 조그만 곤충처럼
우리도 입김을 모아 고된 꿈을 재우자.
피맺힌 손끝들은 朝夕으로 따가워서
한 자락 애정 위에 흐르는 돛배고저
강물은 멀기도 해라 끝 간 데를 모르네
시조시인 백수 정완영
온몸으로 앓는 呻吟 悽絶한 苦惱의 江
신음 처절 고뇌
피 끓여 불 밝히는 지지-지 타는 燈盞
등잔
時調는 당신의 祖國 품에 안고 묻힐 山河.
一歸何處
정완영
나뭇잎 물들기 전에 바람 먼저 물이 들고
낙엽이 지기 전에 하늘이 먼저 떨어진다
가을은 天下秋라거니, 다 거두어 어딜 가나.
강(江)
정완영
설움도 애정인양 멍이 드는 가슴 안고
손짓하는 하늘 따라 울어예는 연연한 강아
푸른 꿈 펼친 옷자락 거둘 길이 없구료.
갈수록 설레이는 허구한 나달이요
그 누가 엎질러 논 죄 모습의 거울 앞에
어룽진 구비를 돌아 나 여기를 왔구나.
스스로의 목메임을 다스리긴 인고런가
푸나무도 못 자라는 물모의 유역에도
누우침 뉘우침처럼 돋아나는 민들레꽃.
2006년 3월-落僧 雪嶽山 霧山 曺五鉉 합장
千江에 천의 달 그림자
정완영
푸른 산 바라보면 흰 터럭이 잘 비치고
고향 길 앞에 서면 긴 강물이 흔들린다
千江에 천의 달 그림자, 일렁이는 내 그림자
겨울 나무
정완영
조금은 수척해 있어야 겨울새가 앉는 거래
조금은 비워 두어야 눈발이 와 닿는 거래
아니래 가득해 있어야 冬風이 와 우는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