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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차분했다.
자신이 인터뷰를 할 만한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말이 많지 않으니 질문을 많이 해달라고 부탁했다.
인터뷰를 위해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별 질문을 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내는데
정진하씨는 묻는 질문에 짤막하게 대답하며 멋쩍게 웃는다.
조금 뒤에 생각났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진다.
어쩔 수 없이 나와 아내가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는데 순간, 인터뷰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질문을 하기를 반복했다.
차분한 그녀는 로모 코리아(한 때 유행했던 필름 똑딱이 카메라!)에서 2007년부터 2012년까지
홍보 마케팅 일을 하다 2013년 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세계여행을 다녔다.
“2개월 정도만 미리 계획을 짜고 다니고 나머지는 머물고 싶은 곳에 오래 머물렀어요.”
북미와 아시아는 여행하지 않았고 총 13개국을 돌아다녔다. 총 경비는 1,300만원 정도 들었다.
이동을 적게 했고 저가항공을 많이 이용했으며 카우치 서핑을 해서 숙소비도 절감한 결과다.
좋았던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풍경으로는 쿠바와 페루,
친절한 사람들로는 아일랜드와 브라질을 꼽았다.
다른 곳엔 가보지 않더라도 남미는 꼭 가보라고 추천했다.
남미의 소박한 사람들이 좋아서 석 달을 넘게 보냈다.
제주에는 작년 7월부터 정착했다.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다.
출근시간은 자전거를 타고 단 1분.
서귀포시 대포동에 있는 에리두 카페 앤 배드즈(Eridu Cafe n Beds)에서 홍보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인터뷰도 이곳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제주에 살게 된지 이제 반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제주생활에 만족한다.
“세계 여행을 다녀와서 막연하게 서울 말고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중 하나가 제주였지요. 직장 다닐 때에도 제주는 제가 좋아하는 곳이라 자주 왔어요.
마침 직장 선배 부부가 펜션과 카페를 이곳에 열어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리두 카페 앤 배드즈는 작년에 오픈했지만 에어비엔비 행사를 할 만큼 알려졌다.
출근 시간은 11시 퇴근 시간은 10시, 만만찮은 근무시간에다가 월급도 육지에서 받는 것 보다 적지만
생활수준은 향상되었다.
일단 제주에서는 돈을 쓸 일이 별로 없다.
자동차와 퇴근 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실 일도 없다.
쉬는 날에는 마라톤을 한다.
지난 11월에는 서귀포에서 열린 감귤 마라톤 대회에도 참여했다.
젊은이들이 제주에 내려오고 싶어도 무턱대고 내려올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자신의 일을 찾는 게 중요한데 제주는 특히 서귀포는 아직 문화 예술인들을 엮어주는 기획자가 부족하다.
카페 공간을 활용해서 뮤지션들의 공연(요조, 재즈밴드, 라이너스의 담요 등)을 한 달에 한 번씩 기획하고 있다.
올해에는 실크 스크린 수업을 개설했고 앞으로 각종 전시나 워크샵을 열어볼 계획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쌓은 서울 쪽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서 제주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노력한다.
제주에 정착하는 이주민과 예술가들도 늘어나고 있고,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싶은 예술가도 많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봐도 할 일이 많다.
정진하씨는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성
공과 실패를 쉽게 나누는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제주에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혹시, 제주하고 비슷한 지역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아일랜드 북서쪽의 슬라이고, 라는 지역이 있어요.
제주하고 닮아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니까요. 돌집과 돌담, 들판도 제주하고 비슷해요.”
여행을 많이 했던 지인에게도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제주의 어떤 곳은 아일랜드하고 깜짝 놀랄만큼 닮았다고.
나는 하와이에 자주 가기 때문에 산록도로를 달릴 때 가끔씩 여기가 빅 아일랜드 어디쯤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바다와 산, 숲과 들판, 구릉과 평야. 제주에는 모든 것이 작은 섬 안에 다 있어서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게다가 말이 통하기 때문에 제주를 잘 여행한다면 세계여행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정진하씨는 로모 코리아에서 일을 한 만큼 사진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여행을 할 때에도,
제주도에 와서도 계속 사진을 찍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아직까지 필름 카메라를 이용한다.
기회가 되면 작은 사진 전시도 하고 싶다.
대학에서는 문예창작도 복수전공했다.
글을 쓰고 싶지만 너무 많이 배운 탓인지 쉽게 시작할 수 없어서 아쉽다.
거창한 미래의 계획 보다는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지내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다.
그녀는 느긋하다.
천성이 그런 건지, 여행을 통해 다져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제주와 어울린다.
제주를 빙글 빙글 돌면서 3박 4일을 보내는 사람보다는 하루 종일 멍하게 같은 자리에 앉아서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사람이 제주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녀는 당분간은 제주에 머물 생각이라고 했지만 어쩐지 오래 머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제주에 오래 남아 육지의 좋은 것들과 제주의 좋은 것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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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서진
여행을 다니며 소설을 쓴다. 지난 여름 제주에 석달간 머물게 되면서 제주의 매력에 빠졌다. 아내와 반려견 보동이와 함께 올해에는 제주에 정착할 계획이다. 땅은 마련했고, 집은 직접 지을 것이다. 지은 책으로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제12회 한겨레 문학상)', '하트브레이크 호텔','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파라다이스의 가격','청춘 동남아' 등이 있다.
http://3nightsonly.com
http://facebook.com/bookwanderer
▷사진/ 강선제
※ 이 글은 제주특별자치도와 다음카카오 협력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스토리텔링형 뉴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의 하나로 다음카카오의 모바일플랫폼 '다음 스토리볼'(storyball.daum.net/story/324)과 포털 다음(http://storyball.daum.net/story/324)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저리도 제주에서 창작생활을 하고픈 예술인들이 많은데 산남지역에 예술대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부영, 신라호텔, 롯데 등의 기업에서 속히 서귀포 관내 지역에 각종시설이 잘 되있는 명문 예술대학교 하나를 설립 운영한다면 기업 이미지가 지역사회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아주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멀지 않은 시기에 좋은 소식이 들려오리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