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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간 수요일; 2016.6.22.
2열왕 22,8-13; 23,1-3; 마태 7,15-20
중앙 보훈 성당; 이기우 신부
어제는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夏至였습니다. 이제부터 점차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밤의 길이가 조금씩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다가 冬至가 되면 밤이 가장 길어지고 낮은 가장 짧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낮과 밤은 길어지고 짧아지기를 주기적으로 되풀이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생기는 이유는 지구가 태양에 대해서 23.5도 기울어진채로 자전을 하면서 공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똑바로 돌지 못하고 약간 기울어진채로 돌게 된 까닭은 그 옛날에 달이 지구에 부딪치면서였습니다. 그 바람에 지구의 바닷물은 달의 인력에 끌려 밀물과 썰물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게 되었고, 바다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기 중 산소가 바다에 들어가게 되자 플랑크톤이 번식하기 쉬워졌고 이를 먹이로 온갖 물고기가 바다마다 우글거리에 되었습니다. 지구라는 별에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이것이었습니다. 어류가 갑각류로, 양서류로 또 다시 포유류로 진화하면서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유인원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 중에서 두 발로 서서 걷기를 각오한 유인원이 나타나서 오늘날 현생 인류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두 발로 걷는 생명체가 출현한 것은 획기적인 진화였습니다. 두뇌용적이 커지고 두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이른바 문명이 발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인류는 불을 발명하고 농사도 짓고 글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네 발로 걷는 짐승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질병도 생겼습니다. 각종 장기 질환과 암, 심장 질환과 두뇌 질환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동물들은 절대로 걸리지 않는 병에 많이 걸리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다시 네 발로 걷는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진화의 방향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진화하고 있는 인간의 역사에 새로운 진화를 시도하셨습니다. 바로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을 먼저 실천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권고하셨기 때문입니다. 독신은 자발적으로 성생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모 마리아께서도 평생 동정으로 사신 데다가 예수님께서도 이를 따라 사셨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범을 따라 서원을 합니다. 그 표지가 로만 칼라입니다. 그러므로 독신서원을 하지 않고 부부생활을 하는 개신교회의 목회자들이 로만 칼라를 하고 다니는 일은 명백히 스캔들이 됩니다. 이른바 위장인 셈입니다.
창세기에도 나와있듯이 사람은 때가 되면 자기 짝을 찾아서 혼인은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성적으로 여러 가지 애로를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원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희망 때문입니다. 마치 네 발을 걷는 짐승에서부터 두 발로 걷는 인간으로 진화를 이룩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생활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문화를 전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자유를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선물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가정을 이루고 살기는 하지만,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모범으로 나타나는 봉헌생활을 본받으라는 부르심을 듣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사제단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세우라는 엄청난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독신으로 살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실제로도 가난하게 살아가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셨고,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시면서라도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오늘날 복음사가들이 증언하고 있는 그 수많은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그래서 병들고 무시받는 소외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습니다만,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많고 또 늘어나고 있습니다. 번영의 그늘이 대단히 짙습니다. 제가 빈민사목을 하던 시절에 가난한 이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사노라면’이라는 노래입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날도 날이 새면 해가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데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한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좍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간주***********************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한숨일랑 쉬지말고 가슴을 쫙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가난한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한국 가톨릭 교회가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소명이며, 거두어야 할 열매입니다. 힐키야 대사제가 발견한 율법서를 큰 소리로 읽어주던 바로 그 심정으로, 교우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너희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하는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가톨릭 교회로부터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올 수 있으리라는 가난한 이들의 소박한 희망을 가톨릭 교회가 자신의 소명으로 떠 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