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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원히 잘 사는법
설교 : 운타원 이운숙 원로교무님
일시 ; 원기 103년 10월 28일
부처님 말씀에 복 중에는 인연복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 자리에서 많은 분들과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쁜 마음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너와 나의 만남입니다. 인생은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없어집니다. 인연을 잘 만나면 잘 살 수 있고 잘못 만나면 잘 못사는 겁니다. 오늘 초대법회라서 교도 아니시고 처음 오신 분들이 있으실 듯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게 해준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을 초대받은 분도 기쁘게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인연은 부모입니다. 부모를 잘 만나야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부모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집니까? 내 맘대로 안되지요? 하지만 알고 보면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겁니다. 그 수없이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우리 부모를 만났을까요? 부모가 아무리 못해도, 나를 그냥 낳아놓기만 하셨고 내게 잘 못해줬던 부모라도 나를 낳아서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를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머니께서 뱃속에서 10달을 품었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는 사실 부모님한테 효를 안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갑니다. 작은 가시 하나가 손에 박혀도 신경이 쓰이고 불편한데 뱃속에 아이를 품고 열달을 참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우리가 아버지 은혜보다 어머니 은혜를 더 생각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인연은 정말 보통의 인연이 아닙니다. 그러한 소중한 인연을 만났기 때문에 철이 안들었을 때에는 부모님께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제는 효도를 해야 합니다. 부모의 은혜는 결혼 해보고 애를 낳아 보아야 안다고 하는데 시집 안가봐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정말 잘 해야 합니다.
정산종사님께서도 복중에서 인연복이 제일이고 인연복중에 불연이 제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복의 뿌리는 인연복이니 부지런히 선근자와 친하게 지내라 하셨습니다. 오죽하면 부처님하고 인연을 맺으려는데 잘 안맺어지면 침이라도 뱉어서 인연을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말이 그렇지 사람한테 침을 뱉으면 당한 사람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라도 인연을 걸으라 이 말입니다. 소중한 인연이라면 말이지요.
인연의 소중함을 느껴야 합니다. 법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인연을 잘 맺는 것이 가장 큰 복이며 그 중에서도 부처님하고 인연을 맺는 것이 가장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기 처음 오신 분은 부처님과 인연을 맺으신 겁니다. 얼떨결에 여기에 오신 듯 하지만 알고 보면 복이 있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겁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초대법회에 간다고 했다가도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복이 있는 사람은 안 갈려고 애써도 이상하게 비가와서 산에 못가서 여기에 왔을 겁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부부한테 왜 저 서방을 만나게 되었냐고 아내한테 물으면 우연히 남편을 버스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모르니까 우연이지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알고 보면 다 짓고 받는 겁니다. 그런 이치를 깨달아야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인연 관리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 공부를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인연이 와도 마음 공부를 안하면 인연들이 다 떠납니다.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이 교당에 오신 교무님들이 한 두분이 아닙니다. 5년 6년씩 다 살다가 가셨어도 스승의 날 전화 한통화만 해도 맥이 안 떨어지는데 그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인연관리를 하려면 인연을 잘 관리를 해야 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있긴 있습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생겼습니까?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지요. 마음이 어디 있나 싶어서 엑스레이를 찍어봅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나옵니까 안나옵니까? 뼛속이나 머리 속에 있는 아주 작은 것까지도 잡아내는 mri 도 마음은 못 찍어냅니다. 그래서 우리 대종사님께서는 마음의 형상이 안 잡힐 것을 미리 알고 마음은 이렇게 생겼다~ 하고 일원상으로 만들어 주신 겁니다.
내 마음은 저렇게 둥글고 원만 구족하게 생겼습니다. 삐뚤어지지 않고 말이지요. 그런데 저렇게 둥글둥글하게 살으라고 했지만 화를 내고 삐뚤어진 마음을 냅니다. 그러면 누가 괴롭겠습니까? 자기가 더 괴롭습니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요즘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내 안에 있는 내 마음도 사실 자기 마음대로 잘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잘 되겠습니까? 잘 안되겠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운 겁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성자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저 사람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마음만 제대로 써도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 뜻대로 못하면서 남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그것이 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마음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마음을 깨치면 우리가 염원하는 행복이 나의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전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행복은 한 마디로 말하면 만족한 삶입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요 ? 돈 없는게 사실 천만 다행일 수 있습니다. 돈 많아서 건방지게 살아서 갑질을 하면서 살다가 온 가족이 모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요즘은 밝은 세상이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의 횡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좋을까요? 저는 사실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대통령도 잘한다고 하지만 지지도가 점점 떨어집니다. 그렇게 잘 하던 역대 대통령들도 임기를 다 하면 다들 한 번씩 감옥에 갑니다. 원하는 것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게 결국 행복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이유는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은 만족감에 있고 그 만족감은 마음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도 행복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아무나 올 수 있는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난(三難)이 있습니다. 첫 째는 사람되기 어렵고 둘째는 불법 만나기 어렵고 셋째는 온전한 몸 받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삼란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처님께서 어렵다고 하신 그 삼란을 다 통과해 내신 여러분이십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종교는 미신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다 믿는게 아닙니다. 분석을 해서 그렇다는 이치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람몸 받기 어렵다... 예전같으면 저도 그게 왜 어렵지 싶었을 겁니다. 저도 9형제중 막내입니다. 심지어 옛날에는 열 둘도 낳고 그랬습니다. 요새는 사람 몸 받기 정말 어렵습니다. 결혼 안하려는 사람들이 미혼인 사람들의 2/3 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니까 잘 모르겠지만 요새같은 때에는 사람 못 받기 어렵습니다. 만약 사람 몸을 받지 못하면 축생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요새는 정말 가정에서 개를 많이 키웁니다. 개를 너무 애지중지 합니다. 업고 다니기도 하고 병원에 데리고 가기도 하거나 장례를 치루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자신의 부모님들한테 그렇게 하고 있을 까요? 둘 다 잘 한다고 하면 저는 박수치고 응원할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가 아프다고 하면 돌보지 않으면서 키우는 개에게는 업어주고 않아주고 고기도 사다 먹입니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개고기를 금식 시킨 이유가 있는 듯 합니다. 개는 인간과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인연이 키우는 반려견으로 다시 잘 옵니다. 그 인연이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이웃에게도 잘 하면서 반려견에게도 잘 해야 합니다.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 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원불교 창시자이신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도 지혜있는 사람은 6/10만 자신의 뜻에 맞아도 만족하고 살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열가지를 다 갖는 것이 만족이 아닙니다. 달도 차면 기웁니다.
만족은 열 개를 다 갖는 것이 만족이 아닙니다. 달도 차면 기웁니다. 욕심 때문에 다 가지려고 하지만 그것은 만족이 아닙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잘해줄 때를 대비해서 만족해야 합니다. 자식이 잘 못해도 남편이 또 잘해주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분도 만족해야 합니다. 뭐든 만족을 해야 하는데 자식도 잘해야 하고 남편도 잘해야 하고 뭐든 다 잘하는 사람임을 상대방에게 욕심냅니다. 이게 될 리가 없습니다.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고와 락이 상반입니다. 고가 5번이면 락이 5번이 옵니다. 다섯 번 울면 다섯 번 웃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걸 하기 싫으면 천상에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원불교를 만나면 6번 7번 웃고 4번 3번만 울수 있습니다. 열 번 다 웃으려 하시는 분은 청량리 정신병원에 가야 할 지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항상 정도를 지켜야 합니다. 한 두가지 부족한 것을 감사생활로써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 가지 다 가지려고 하니 힘이 듭니다.
어떤 집은 자식이 없어서 자식 하나만 있으면 좋겠는데 사은님이 안주십니다. 어떤 집은 이제 인연이 그만 와도 좋겠는데 계속 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인연따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욕심 때문에 괴롭습니다. 아까 영상에서 청년들을 보고 저는 참 좋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젊은이들이 열심히 마음공부를 할 수가 있나 싶습니다. 앞길이 훤하게 열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는 새로운 인간을 요구하고 새로운 인간은 새로운 종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원불교는 그러한 생명과 능력을 지닌 자아를 개발하는 종교입니다. <불자야 듣느냐 중생의 부름을. 건져주 살려주 우짖는 저 소리> 우리는 저 소리를 들을줄 알아야 합니다. 이 종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그저 저 사람의 일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사람들은 오직 더 많이 갖기를 원하고 더 많이 즐기기를 원하고 더 많이 대우받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즐기면 즐길수록 더 맘이 허전함을 느끼고 어떠한 좋은 대우도 그것이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워하고 허전해 하고 방황합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물론 저희때도 몸을 움직이면서 춤을 추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에너지가 넘쳐서 뛰는 것도 부족해서 머리를 땅에 대고 돌리면서까지 춤을 춥니다. 옷도 왜 청바지를 다 찢어입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갑니다. 참 희한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에 힘이 없어서 덩달아 하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이 밝아져서 양시대가 왔습니다. 요즘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화관계망이 발전하여 숨기려해도 모두 드러납니다. 인생을 사실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오늘도 잘 살고 내일도 잘 살고 영생을 잘 살아보고자 함입니다. 못살고 싶은데 여기 오신 분 계십니까? 가면 무슨 소리 할려나 궁금하시죠? 그래서 와서 들어보면 이런 생각도 있구나 싶습니다. 예전에는 원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릅니다. 오죽하면 국가에서도 국상이 나면 원불교에서 독경을 합니다. 사람들이 이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 궁금해하고 점점 알아갑니다.
잘 살고 싶다고 그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살아질 조건의 첫째가 마음공부입니다. 둘째는 도덕사업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면 영생을 잘 살수 있습니다. 마음 한 번 잘못써서 좋았던 인연이 깨지기도 합니다. 이 마음을 한번 잘 쓴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가 몇백년 밖에 안되는 종교가 역사가 몇천년이나 된 종교와 상대를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요새 불교에서 사고가 많이 나죠? 원불교가 그랬으면 아마 뿌리채 뽑혔을 겁니다. 불교는 역사가 깊어서 잘못을 해도 그랬네~하고 끝나버립니다. 천주교 신부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처음에 알려져도 그랬다~하고 잊혀집니다. 역사나 뿌리를 무시 못합니다. 우리는 이제 백년밖에 안되서 그런 잘못이 언론에 나돌면 뿌리가 흔들립니다. 선암사 큰 스님이 그러셨습니다. <불교는 바다의 죽은 고래요, 원불교는 살아있는 송사리이다.> 순간 이 말을 들으면서 고래와 송사리에 비유해서 좀 그랬습니다만 3000년 역사가 있어서 덩치는 크지만 죽었고 송사리는 이제 작지만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이 작은 불교가 육대주와 아프리카까지 가있어요. 안나가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송사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짧아도 알고 인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산 종사님께서 이 회상이 천지개벽후 처음 열린 회상이요 만고 불변의 회상이며 , 이 회상을 만난 우리도 보통 복으로는 만날 수 없는 종교를 만났으니 불변의 신심으로 열심히 적공하여 이 회상의 주인이 되어라 라고 하셨습니다.
원불교가 어떤 종교입니까? 원불교가 99개의 종교 중에 100개 채우려고 나온 종교입니까? 원불교는 현 시대에 맞는 고등 종교로써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당에 오실 때 교당간다 원불교 간다고 자신있게 말하십니까?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어디 가냐고 물으면 교회에 간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 앞으로 오기를 기도합니다. 까지 한다니까요. 절에 간다고 하면 절에 가는가보다. 성당에 간다고 하면 성당에 가는가보다 그러지 성당이 뭐냐 절이 뭐냐 묻지 않습니다. 근데 원불교 하면 원불교가 뭐냐고 꼭 물어봅니다.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이걸 대꾸해 주기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물어볼까봐 미리 겁먹고 저~기 간다 고 합니다.
세상에 쉬운게 원불교입니다. 원자가 무슨 원자입니까. 둥글원자입니다. 둥급니다. 부처불자 가르칠 교 자입니다. 깨닫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고 원불교는 하나 더 붙여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교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교학과 다닐 시절에 사람들이 항상 물어봅니다. 불교는 뭐고 원불교는 뭐냐고 맨날 물어봅니다. 사람들이 하도 물어보니 저 불자를 빼버리고 원교로 합시다 그랬었지요 ? 그러나 정산종사님께서 원자도 뺄 수 없고 불자도 뺄수 없고 원불교다 라고 그러셨습니다.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 공부를 합니다. 원불교는 진리를 믿고 깨닫고 실천을 하자는 종교입니다. 진리가 뭐냐? 진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참진, 이치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 졌습니다. 참기름 하면 다 아는데,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하니까 참참참기름 팝니다. 라고 써놓을 정도입니다. 가짜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인과입니다. 왜 원불교를 어려워 하나 봤다니 오자마자 일원상 서원문에서 언어도단의 입정처요부터 가르치려고 듭니다. 언어도단의 입정처는 철학박사도 모릅니다. 진리 덩어리부터 먹이려고 하니 그게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불교도 반야심경을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려워 하니까 요즘은 독경도 풀어서 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일원상 서원문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연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원불교에 왔는데 배울줄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자 잘 가르칠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자 (일상수행의 요법중 하나)이런 사람을 하길래 뭐 저런 애기같은 소리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까요, 가르쳐주는게 쉬운 일이 아니고요, 배우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라고 합니다. 원불교를 오래 다녔어도 감사 생활을 하지 않으면 신앙의 뿌리가 안내린 겁니다. 이유 불문하고 감사를 해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미용실에서 미용사가 손님 머리를 고대를 하다가 깜박 졸아서 불에 달군 고대기로 머리하는 손님의 눈썹에 상처를 냈습니다. 미용사가 너무 놀래서 쩔쩔매니 이 손님이 <아이고 눈이 아니기를 천만 다행이지 않느냐, 괜찮다> 고 말합니다.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을 한 미요용사가 그 이후로 이 사람이 원불교 교도인 것을 알고 같이 교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실생활에 활용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원망생활을 한다면 그는 진정한 교도가 아닙니다. 여기와서 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인과를 깨치면 감사 생활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감사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의 열매가 열립니다. 저는 이렇게 뚱뚱해도 안아픕니다. 왜 안아플까요? 감사 생활을 하니까 안아픕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아이고 다리님, 애썼네> 이러니까 얘가 아프고 싶어도 못아픕니다.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를 못합니다. 과학적으로 규명이 안됩니다. 이렇게 뚱뚱하면 병이 많고 기타등등 뭐가 많이 비정상이어야 하는데 저는 이렇게 뚱뚱해도 날씬한 분들은 다리 아프다고 할 때 저는 다리가 안 아픕니다. 그 이유가 어디있는지 제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결론은 감사 생활을 하니까 아프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복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프다가도 금요일 토요일이 되면 싹 낫습니다. 법회갈라고 말이지요. 신앙심이 없는 사람은 안 아프다가도 토요일 일요일이 되면 슬슬 아픕니다. 그리고 법회를 안가지요. 이유가 없습니다. 다 마음가짐에 있는거지요 . 교당가야지 생각하고 있어보세요. 아프다가도 낫습니다. 그런데 교당에 가기 싫으면 요핑계 저핑계 대집니다.
제가 소록도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건강보를 받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건강하려면 건강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건강해 지고 싶으면서 남한테 해꼬지 하고 아픈 사람 도와주지 않고 하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하는 인간극장을 봤더니 93살 드신 할머니가 의사 선생님인데 버스를 세 번 네 번 갈아타면서도 병원에 가십니다. 그 양반도 기독교라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습니다.
할머니 욕심도 없으십니다. 1억을 상금으로 받으셨는데 좋은 일에 쓰라고 모두 기부하셨습니다. 마음가짐이 그렇데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원불교 교도는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믿고 알아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내세운 종교는 없습니다. 다들 그렇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모든 종교들이 신앙의 대상은 진리, 또는 절대자라고는 하지만 진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내세운 종교는 원불교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도 억울하다고 합니다. 저 일원상을 우리가 먼저 썼어야 하는데 , 하고 말이지요 . 절에가도 목우십도송 있습니다. 그런데 끝에가면 일원상으로 딱 떨어집니다. 성철스님 책을 사서 보니까 그 분 책 속에 화선지에 일원상 하나 딱 그러셔 넣어두셨습니다. 우리는 근기가 높아서, 복이 있어서 얼떨결에 원불교에 와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떨어지면 쓰겠습니까? 어떻게 만난 회상인데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 내가 보통 내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사회에서도 원불교 교도가 온다고 그러면 면접에서 무조건 통과입니다.
아직 원불교 교도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 사고 칠 사람도 별로 없긴 합니다만 다른 종교와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 진리만큼 영원하고 원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왜 신앙 생활을 하는가? 나는 왜 기도를 하고 왜 법회를 보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한번 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교당에 있으면서 가만히 보면 교무님들에 대해서 설교를 잘하네 못하네
이런 이야기들을 교도님들이 하십니다. 절대로 그런 말 하면 안됩니다. 제가 이건 꼭 여러분들게 가르쳐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서울대 법대 교수 하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서울대 의대나와 의사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 서울법대는 육법 전서만 달달달 외우면 됩니다. 의사도 예전과 다르게 자신의 전문 분야만 파고드는 사람 많습니다. 예전에는 크게 외과 내과 로만 대부분 분류해서 진료했는데 요즘은 각종 분야별로 자신의 전문 분야만 질료 합니다. 원불교 교무는 그렇게 한 분야만 잘 할 수 없습니다. 교도님들만 보시더라도 입교하신지 50년 40년 등 천차만별입니다. 심지어 오늘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 학벌도 다 다릅니다. 대학원 나온 분, 대학 나온 분, 아니면 초등학교도 안나오신 분도 계십니다. 어디에다가 맞추어 설교를 해야 하는 걸까요? 어디에 맞추어야 설교를 잘 한다고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 오늘은 등 긁어주시는 가보다 오늘은 손바닥 긁어주시는가보다 이래야 하는데, 등, 발, 손 한꺼번에 모두 긁어달라고 하는데 그게 긁어지겠습니까?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취향을 다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못알아 듣는 이야기를 하면 이 소리 들을 사람이 왔나보다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오늘 무슨 말씀 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원불교를 많이 아는 분이 그러실 때도 있습니다. 새로 오신 분이 그러시면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데 법호까지 받으신 분이 그러면 당황스럽습니다.
교당에 오시면 욕심 부리시면 안됩니다. 일원상 서원문 독경하고 일상 수행의 요법 독경만 하셨어도 본전은 한겁니다. 어쩌다 내 마음에 맞는 설법을 들으면 오늘은 보너스 받았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교도님들이 자꾸 그렇게 평을 하니까 교무님들이 교당에 배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안해도 되는 기관으로 더 가려고 합니다. 요즘은 또 매스컴들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까? 그래서 교도님들도 설교가 자신의 양에 안차니까 재미없어 합니다. 교무님들이 총부에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종법사님께서 설법하시고 각 교당에 영상을 내보내자, 우리는 목탁치고 기도만 할란다. 교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서 교당에 안나가고 교학과에도 안들어갑니다. 다 복지관으로 가려고 합니다. 거기는 법회 안보고 용금도 더 받아요. 교화직이 생명이다 하고 하지만 교화직으로 안갈려고 합니다. 가면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가면 대접을 잘 못받아서 그럽니다.
교무님들이 한 교당에서 보통 6년을 교화를 합니다. 6년을 교화 하다 보면 설교한 내용이 반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삼학이 뭡니까 ? 수양, ,연구, 취사이지요 ? 여러분들은 그래도 공부를 해서 알지만 처음 오신 분은 <삼학? 소주를 말하나? >
합니다. 사은은 뭡니까 ?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 이지요 ? 원광대학교에서 학교 다닐 때 1학년때 교학개설을 가르칩니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교양필수입니다 그러면 교무님들께서 학생들에 쉽게 점수를 주기 위해서 삼학이 뭔지 쓰라거나 사은이 뭔지 쓰라고 하는 시험을 냅니다. 그러면 우리 학생들 중에 사은이 뭐냐고 답할 때 죽을 때 까지 은혜를 갚는 거라고 합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사은사요 삼학 팔조 이외에는 설교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자신이 아는 이야기가 나오면 조는 교도님들도 있습니다. 법회에 와서 아무리 모르는 이야기가 나와도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지지만 콩나물이 자라듯이 우리도 교당에 와서 설법을 듣다 보면 자연 바르게 살아집니다. 졸아도 교당에 와서 졸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룬 것들을 종합해보면 재산 명예 자식 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재산은 묻어두고 가고 명예는 걸어두고 가며 자식은 흩어두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할머니가 가난이 싫어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통장 10개를 만듭니다. 죽을 때가 되니 다 가져가지도 못하여 어찌할까 하다가 이 통장을 다 태워서 그 물을 마십니다. 여러분들 복을 지으라 하면 대부분 그럽니다 <내가 언젠가는 갈테니 이것좀 하고 나서 그 전에 복을 지으련다 > 그러지요 . 그런데 언제 가게 될줄 아무도 모릅니다. 맛있는 음식 안비싸니까 먹고 사십시오. 어찌 하던지 재밌게 사십시오. 욕심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인과가 소소영영하기 때문에 하나가 나가면 하나가 들어옵니다. 귀신같습니다. 내가 베푼 것만이 내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가져가는 영원한 나의 소유물은 사는 동안에 남을 위해 노력하고 베풀기도 많이 해서 복과 덕을 쌓아두고 가는 것이 진정한 내 실력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기가 가진거 어떻게 놓고 갈지 걱정이 됩니다. 천도하기도 어렵습니다. 욕심부리지 마시고 영리하게 살아야 합니다. 욕심부리다고 삶이 소화가 안됩니다. 누구에게나 수없이 많은 만남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기회를 놓쳐버리고 객의 삶을 살지 마시고 이 기회를 잘 이용하여 황금의 탑을 이루는 주인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기회가 다 있습니다.
미국의 일화입니다. 어느 착하게 사는 부부에게 신이 말합니다. 너희들 너무 착하게 살았으니 소원을 세가지만 말하면 내가 들어주마.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설마 그럴까 싶어서 <소세지 나와라>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 소세지가 하나 따르르 나옵니다. 그랬더니 그 착한 할머니도 욕심이 나왔는지 할아버지가 벌인 경계에 마음이 동해서 할아버지랑 다툽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소세지 할머니 코에 붙어라> 하고 말합니다. 마지막 한번의 기회는 결국 소세지를 할머니 코에서 떨어지게 하는데 씁니다.
인생의 기회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기회를 잘 포착해서 잘 활용한 사람은 좀 앞장서서 가는겁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알아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앞길이 열리고 업장이 녹습니다. 그런데 들었어도 무슨 소리인지 못알아듣고 기회를 놓치면 발전을 못합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니 이 기회 포착을 잘 하셔야 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아는 것을 실천하자는 것이며 안되는 것을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안되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을 뿐이지 자기가 원하는 만큼 모두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고 다 죽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록도 환자들 나병에 결렸다고 다 죽으려고 약도 먹고 목도 메달고 물에도 뛰어들어 보지만 죽어지지가 않습니다. 할 수없이 소록도 까지 오게 됩니다. 왔으면 이제 팔다리도 없으니까 80,90이 되면 다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잘 안되는 일입니다. 병들었다고 죽는게 아니고 나이들었다고 죽는게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업을 받아야 가는 겁니다. 우리도 안아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가 아프면 업장을 소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잘 고쳐나가면 됩니다.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지만 무엇이든지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인과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이 잘 된다 안된다의 원인은 모두 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를 해서 그걸 이루면 됩니다. 된다된다 하면 안될 일도 되는데 안된다안된다 하시면 될 일도 안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같은 값이면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로 인해서 복이 가야지 해가 가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 다 함께 새 시대 새 종교인 원불교를 만난 것을 감사를 드리고 새로운 각오와 신념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마음공부와 도덕사업의 주인공이 되셔서 이 생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모두 다 함께 잘 살아 봅시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은혜롭습니다~^^*
정말 가슴깊이 남았던 설법이어서, 요즘도 운타원님 말씀을 남편과 주고 받았는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꼼꼼히 다시 볼수있고 음성지원 되는거 같고 참 좋네요 정성스레 작성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