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그분의 말씀
한 주간 안녕하셨는지요. 며칠 사이에 겨울 날씨도, 코로나 바이러스도 꽤나 순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물러가기 전에는 이렇게 순해지는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때를 기다리고 있던 봄이 느긋이 다가오겠지요. 꽃샘 추위도 기꺼이 밀어내면서 말이지요.
지난 며칠 수유리 한신 대학원에 다녀왔습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러니까 1984년 봄 제 나이 스물다섯 되었을 때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이끌려서 그 낯선 땅을 밟았는데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저를 따라다녔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일까?” 늘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다가 다른 학형들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어떤 이는 남다른 소명을 받고 여기에 왔노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학문적으로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역사를 좀 바꿔보고 싶은데 ‘기장 신학’이 맞아서 왔다고 했고, 어떤 이는 완전 보수적인 신학공부를 하다가 이것은 아니다 싶어 우리 쪽으로 ‘전향’한 친구들도 꽤 여럿 있었는데 대단한 결심을 했다고 박수를 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질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뭐지?”. 그러던 중 사순절 어느 날인가, 채플 시간이 되어서 저는 조금 일찍 예배당에 앉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 귀에 들리는 그분의 조용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네가 아니고 나다. 내가 너를 불렀다.” ‘나’로부터가 아니고 ‘그분’으로부터였고 그분이 정하신 때에 그분의 방법대로 저는 그렇게 거기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기까지 저를 있게 한 것도 바로 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저만 그러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모든 사물이 다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보는데 본관 앞 잔디밭 아래쪽에 큰 돌기둥이 세워져 있어서 가보았더니 만우 송창근 목사님의 기념비가 서있고, 그분의 유언이 잔디밭에 비석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뼈를 우리 朝鮮神學校(조선신학교)에 들어가는 門(문)턱에 묻어서 우리 學校職員(학교직원)들이, 그리고 學生(학생)들이 내 뼈를 밟고 넘나들게 해주게” 바닥에 새겨진 그분의 말씀을 차마 두 발로 밟지는 못하고 한 발로만 밟고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한신 진보신학의 초석으로 죽어서까지 자신을 바쳤던 깊은 뜻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 만우 송창근 목사(1898~?)는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인 신학교육을 꿈꾸며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신학교 교수, 학장으로 봉직하며 경건한 기독교 신앙과 성빈사상에 입각한 인재양성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그는 1950년 6.25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
첫댓글 한신대가 장공 김재준목사님도 함께 세운데가 맞지요?
저번에 주신 책에 그 분의 생활 십계명중 최저 생계비 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라는 말씀 .기억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