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식렴(王式廉)은 삼중대광(三重大匡) 왕평달(王平達)의 아들이며, 태조의 사촌 동생이다. 사람됨이 충직하고 용감하며, 부지런하고 신중하였다. 처음에 군부서사(軍部書史)가 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태조가 평양(平壤 : 지금의 평양특별시)이 황폐하였으므로 백성을 이주시켜 그 곳을 채우고, 왕식렴에게 명령하여 그 지방에 가서 지키게 하였으며, 또한 안수진(安水鎭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과 흥덕진(興德鎭 :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등지에 성을 쌓도록 하였다.
왕식렴이 이 일에 공을 세웠으므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佐丞)이 되었다.
왕식렴은 오래 동안 평양을 진수하였으며, 항상 사직을 보위하고 국토를 개척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혜종이 병들고 왕규(王規)가 반역의 뜻을 가지게 되자, 정종이 왕식렴과 함께 변란에 대응할 계책을 은밀히 세웠다.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평양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서 호위하니, 왕규가 감히 준동하지 못하였다. 이어 왕규 등 3백여 명을 처형하자, 왕은 왕식렴을 더욱 굳게 믿고 의지하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왕식렴은 삼대(태조·혜종·정종)의 으뜸되는 훈신(勳臣)으로 한 나라의 기둥이나 주춧돌과 같으며 그 도량은 바다와 산악을 삼킬 듯하고 기개는 바람과 구름을 온축한 것 같도다. 지난날 선왕의 병환이 위독하던 당시는 앞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던 때였는데, 그대는 충의를 간직하고 변함없는 절개를 발휘하여 어린 나를 추대, 왕위를 계승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도다.
얼마 뒤 간신과 포악한 역도들이 흉폭하고 완악한 무리들과 손을 잡고 대궐 내부에서 변란을 일으켰다. 옥이 불에 들어가면 더욱 차가워지고 소나무가 눈에 덮이면 더욱 푸르듯이, 경은 적개심을 불태우며 칼을 잡고서 목숨을 걸고 국난을 극복하였도다. 흉악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와해되고 역적들이 죽음을 당하니, 조정의 기강이 떨어지려다가 다시 일어났으며, 종묘 사직이 기울어지려다가 다시 바로 서게 되었도다.
공이 나라를 위해 죽기를 무릅쓰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에 이르렀겠는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참된 신하를 알아보고 센 바람이 불 때 굳센 풀을 알아본다.’라는 말을 예전에 들었더니, 오늘에야 그에 걸맞는 사람을 보았도다.
만석(萬石)의 봉작(封爵)을 주고 구주(九州)의 장관 자리를 줄지라도, 어찌 그 공적에 충분히 수응하고 공명에 보답하리오? 이제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의 칭호를 내려주고 대승(大丞)으로 품계를 높여 나의 마음을 표함으로써 영원히 공훈을 표창하고자 하노라.
이는 군신(君臣)의 의리와 명분을 펴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함께 살고 같이 죽기를 바람이기도 하노라. 나는 저 밝은 해처럼 식언하지 않으리. 또 바라는 바는, 나는 자신을 책망하여 검소하길 잊지 않고 공은 만족한 것을 알아 청렴한 마음을 기르는 일에 항상 힘쓰는 일이라. 백성을 소중히 보살피고 상과 벌을 공평히 하여 국운이 하늘과 땅처럼 장구하게 하고, 자손 대대로 부귀를 누리도록 하라.”
정종 4년(949)에 죽자 시호를 위정(威靜)이라 하고, 호기위(虎騎尉)·태사(太師)·삼중대광(三重大匡)·개국공(開國公)으로 추증하였으며, 정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들은 왕함윤(王含允)·왕함순(王含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