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함평군 해보면 진주정씨보공공파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다은 정상기
문묘배향(文廟配享) 동국18현(東國十八賢)
우리나라 문묘 제도는 중앙에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각 고을에 향교(鄕校)가 있으며, '대성전(大成殿)'에서는 공자(孔子) 이하
고대 중국 이래의 성(聖) 현(賢) 제위(諸位)와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하는데, 중앙 '성균관'에서는
5성(五聖),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중국 역대제현(歷代諸賢)
94위 및 동국 18현 도합 133위를 봉향(奉享)한다.
그리고 각 고을 향교 중에서 주(州), 부(府), 군(郡) 곧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위 중설위(中設位)라 하여 '5성,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등
39위를 봉향하며, 현(縣) 곧 현령(縣令),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설위(小設位)로 '5성, 송조 4현(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 동국 18현'
등 27위만 봉향한다.
성명. 관향. 아호. 관직 및 기타.
1 薛 聰 경주 雨堂 신라 고승 元曉의 子로 神文王 때 翰林으로 弘儒侯로 追封
2 崔致遠 경주 孤雲 신라 때 唐나라로 건너가 修學하고 돌아와 翰林學士로
시호는 文昌侯
3 安 裕 순흥 晦軒 고려 忠烈王 때 修文館太學士로 시호는 文成公
4 鄭夢周 연일 圃隱 고려 恭愍王 때 관이 門下侍中으로 시호는 文忠公
5 金宏弼 서흥 寒暄堂 刑曹佐郞. 조선 中宗 때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公
6 鄭汝昌 하동 一蠹 縣監이었고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獻公
7 趙光祖 한양 靜菴 大司憲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8 李彦迪 여주 晦齋 左贊成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元公
9 李 滉 진성 退溪 大提學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純公
10 金麟厚 울산 河西 弘文館校理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11 李 珥 덕수 栗谷 吏曹判書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成公
12 成 渾 창녕 牛溪 左參贊이었고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簡公
13 金長生 광산 沙溪 刑曹參判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元公
14 趙 憲 백천 重峯 僉正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公
15 金 集 광산 愼獨齋 判中樞府事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公
16 宋時烈 은진 尤菴 左議政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17 宋浚吉 은진 同春堂 吏曹判書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18 朴世采 반남 玄石 左議政이었고 시호는 文純公
(1) 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 650~740
설총은 신라 경덕왕 때 활동하던 유학자로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아들이기도 하며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설총은 처음에는 불교에 입문하였으나 후에는 유학에 전념하여 통일 신라 이후에는 귀족의 자제를 중심으로 가르치어 국학을 세워 유교의 발전을 꾀하였다. 유학정신에 입각한 도덕 정치의 실현을 추구한 정치가로서, 그리고 유교의 대중화에 기여한 학자로서 신라 시대 유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고려 顯宗(현종) 13년(1022년)에 홍유후의 시호를 받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2) 문창후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
최치원의 자는 고운 (孤雲)이며 경주 최 씨의 시조이기도하다.12세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크게 이름을 떨치기도 한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유교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나 당나라에서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에 대한 토벌을 격려하기 위하여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이웃나라인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고려조에 들어와 문창후에 봉해졌으며, 현종11년(1020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고운집(孤雲集), 규원필경(桂苑筆耕)등의 저서가 전해진다.
(3)문성공 안향 (文成公 安珦) 1243~1306
안향은 고려 말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소개하였다. 그는 특히 주자학 가운데에서도 일상생활에 있어서 실천 도덕과 관련된 내용을 강조하였다,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 안향이 세상을 떠난 뒤 고려 충숙왕의 命에 의하여 그의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보존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32년 (1306년)에 문성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공로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19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4) 문성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1337~1392
고려 공양왕 때의 유학자로 호는 포은(圃隱)이며 목은 이색(李穡), 야은 길재(吉再) 등과 더불어 고려 유교를 대표하는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정몽주는 1389년,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날로 쇄 퇴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국가의 장래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하여 서로 대립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개성의 선죽교에서 반대파에 의해 시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이미 국립대학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성균관 이외에 개성에 오부학당을 설치하여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였으며 지방에도 향교를 세워 유교 진흥에 힘썼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자, 대학자로서 대쪽 같은 선비의 절개를 지키며 고려와 그 운명을 함께함으로써 후세의 귀감이 되어 조선 태종(太宗) 원년에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고, 중종 1년(1517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5) 무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1454~1504
조선 성종, 연산군 때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호느 한훤당(寒暄堂)이다. 김종직의 제자로서 유학의 생활화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귀양살이를 하였으며,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유교의 입문서라고 볼 수 있는 소학을 중요하게 여겨 평생토록 이 책을 곁에 지니며 <소학>에 제시된 생활 규범을 하나하나 실천하였다. 선조 7년에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2년)에는 유학의 생활화, 실천화에 힘쓴 공로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6)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1504
정여창은 조선 연산군 때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호는 일두(一蠹)이다. 젊은 시절 관직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고 유교에 몰두하였으며 41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로 인하여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으며,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처형하는 극형)의 잔혹한 형벌을 당했다. 그는 이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학문적으로는 정몽주,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의 정통을 전수 받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학문의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둔 정통파 유학자였다. 선조8년에 이르러 문헌의 시호가 내려졌고, 광해2년(1610년)에 유교 교육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문묘에 종사되었다.
(7)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1519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자 진보적인 정치가이기도 했던 조광조의 호는 정암(靜庵)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여려 관직을 두루 역임 하였으며 국가 발전을 위하여 참신한 인재의 등용이 필수적이라 보고 현량과를 설치하여 많은 새로운 인재를 발굴 등용하였다. 또한 그는 유교의 지치주의(至治主義)에 기반을 둔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던 훈구대신(勳舊大臣)의 특혜를 깎아 내리고 부패한 관리를 제거하는 등의 과감한 개혁 조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보수 세력에 부딪혀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누명을 쓴 채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선조 1년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광해2년(1610년)에 스승 김굉필과 더불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8)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1553
이언적의 호는 회재(晦齋)로서 조선 중종 시기에 활동하던 성리 학자였다. 그는24세에 관직에 나간 이후 국사(國事)를 돌보다가 당시 부당한 권세를 누리고 있는 김안로(金安老)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15년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유학의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유교의 민본사상(民本思想)에 근거하여 도덕 정치구현을 주장하였는데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뒤 이조판서와 한성부 판윤(判尹)등을 지냈다. 그는 그 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향 생활 속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지만 훗날 그 당시 여려 갈래로 나뉘어 발전해온 성리학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 공로로 선조 38년에 문원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9)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1501~1570
이황의 호는 퇴계(退溪)이며 조선 중종 때에 활동하던 유학자이다. 관직보다는 유학연구에 더 뜻을 두고 있던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유교 경전 저술 활과 제자 교육에 힘썼다.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고매한 인격자로 잘 알진 그는 60세 되던 해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여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유교의 실생활과 관련된 윤리 도덕을 우리나라의 토양에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공로로 선조 9년에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년)에문묘에 종사되었다.
(10) 문정공 김린후(文正公 金麟厚) 1510~1560
김인후의 호는 하서(河西)이며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 등과 함께 공부하며당시의 유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그는 중용<中庸>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근본원리를 알리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모습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보존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이황 등과 함께 조선에서 주자학의 이념을 확립해 나가는데 많은 공헌을 인정받아 현종 10년에 문정의 시호를 받게 되었으며, 1796년(정조 20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11)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1536~1584
이이는 조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시기에 걸쳐 활동했으며 호는 율곡(栗谷)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던 그는 과거에 9번 장원급제한 조선왕조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는 각별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던 어머니 사임당 신씨(申氏)가 돌아가시자 더욱 더 유학에 몰두하여 조선 유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하여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왜란에 대비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시대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유학자인 그에게는 인조 2년에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어 숙종 8년(1682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12) 문강공 성훈(文簡公 成渾) 1535~1598
성혼은 조선 때의 성리학자로서 호가 우계(牛溪)이다. 그는 당시의 저명한 유학자들과 교류하여 높은 유교적 지식을 쌓았고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이르러서야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을 모시고 피난을 갔는데 난이 평정된 뒤 일본과 화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특히 유학자로서 그가 도덕적 행위와 그 근거인 사단칠정<四端七情>를 놓고 벌인 이이(李珥)와의 수준 높은 진지한 토론은 조선조
유학 사상 손꼽을 만한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조11년에 문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8년(1682년)에는 문묘에 종사되었다.
(13)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1631
김장생의 호는 사계(沙溪)로서 율곡(栗谷)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바 있으며, 당시의 유학 발전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특히 례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국가적 의전이나 주요 행사가 있으면 그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그는 당시 어지러운 난세를 극복하고 유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가례 <家禮>를 부분적으로 고치고 널리 보급하는 일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그의 론어<禮論>은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례의 규범이 되었고, 그 공로로 효종으로부터 문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43년(1717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14) 문렬공 조헌(文烈公 趙憲 ) 1544~1592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조헌의 호는 중봉(重峰)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그를 따르는 1,6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힘을 모아 왜적에 맞서 싸웠다. 그는 의병 활동을 통하여 국가를 위해서는 초개같이 몸을 버린다는 유교의 의리 정신을 실천하였고,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금산에서 수많은 왜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장열하게 최후를 마쳤다. 이러한 그의 애국애민(愛國愛民) 정신을 기려 인조 27년에 문열의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20년(1883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15) 문경공 김집(文敬公 金集) 1574~1656
김집의 호는 신독재(愼獨齋)이고 례학(禮學)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장생의 아들이기도하다. 그의 호인 신독재는 론어<論語>의"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 하여 조심한다 군자필신기독{君子必愼其獨也}"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개인의 내면적 도덕정신을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생활 속에서의 유교적 례를 적극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그는 부친과 함께 한국 유학의 독창성을 빛내준 례학(禮學)의 기본적 틀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효종 10년에 문경의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20년(1883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16)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1689
송시열의 호는 우암(尤庵)이고 조선 인조(仁祖), 효종(孝宗)년 간에 활동하던 유학자이다. 그는 병자호란 후 효종을 도와 청나라의 화의를 거절하고 북벌을 주장하다가 화의패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란만장한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이이(李珥)의 학설을 이어 받은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전란 속에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는 숙종 21년에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32년(1675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17)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 1606~1672
송준길의 호는 도춘당(同春堂)이며 조선조 례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에게 성리학과 례학(禮學)을 전수 받았다. 송시열과 함께 효종을 도와 북벌을 시도하다가 좌절되자 물러나 낙향하는 절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럐학(禮學)에 정통하였던 그는 유교의 생활 예절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는 문장에도 뛰어나 <충열사비문>을 비롯하여 명륜당의 여러 현판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숙종 7년에 이르러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영조 32년(1756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18)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1631~1695
박세채는 조선 숙종(肅宗) 때의 유학자로 호는 남계(南溪)이며 송시열 등과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당쟁의 그릇됨을 지적하고 당쟁의 중재에 전력하였으며, 나아가 당쟁의 근절을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가 유학의 역사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신라에서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학자들의 師弟 관계와 교류 상황들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학술적으로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숙종 24년 문순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어 영조 40년(1764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 참고 : 대성전에서 봉향하는 고대 중국 이래의 성현
1. 5성(五聖)
(1) 공자孔子(구丘, 중니仲尼)-노인(魯人)
(2) 안자顔子(회回, 자연子淵)-노인(魯人)
(3) 증자曾子(삼參, 자여子輿)-노인(魯人)
(4) 자사子思(급伋, 자사子思)-노인(魯人)
(5) 맹자孟子(가軻, 자여子輿)-추인(鄒人)
2. 공문10철(孔門十哲)
(1) 민손閔損(자건子騫)-노인(魯人)
(2) 염경(冉耕(백우伯牛)-노인(魯人))
(3) 염옹冉雍(중궁仲弓)-노인(魯人)
(4) 재여宰予(자아子我)-노인(魯人)
(5) 단목사端木賜(자공子貢)-위인(衛人)
(6) 염구冉求(자유子有)-노인(魯人)
(7) 중유仲由(자로子路)-노인(魯人)
(8) 언언言偃(자유子游)-오인(吳人)
(9) 복상卜商(자하子夏_-위인(衛人)
(10) 전손사 顓孫師(자장子張-진인(晉人)
3. 송조6현(宋朝六賢)
(1) 주돈이周敦頤(주자周子,무숙茂叔, 염계濂溪)-도주인(道州人)
(2) 정호程顥(정백자程伯子, 백순伯淳, 명도明道)-하남인(河南人)
(3) 정이程頤(정숙자程叔子, 정숙正淑, 이천伊川)-하남인(河南人)
(4) 소옹邵雍(소자邵子, 요부堯夫, 안락安樂)-하남인(河南人)
(5) 장재張載(장자張子, 자후子厚, 횡거橫渠)-봉상인(鳳翔人)
(6) 주희朱熹(주자朱子, 중회仲晦, 회암晦菴)-무원인( 婺源人)
조선시대를 주도한 양반관료들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신봉하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춘추시대의 공자가 집대성하고 남송 대의 주희가 재정리한 유학,
즉 주자학을 종교적 정열로 신봉했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주자학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공자를 모신 건물을 문묘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자로 상징되는 유교가 중국문화권에서 문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문의 대표자는 공자였고, 무의 대표자는 관우였다. 관우를 모신 건물은
문묘에 대응하여 무묘라고 하였다.
문치주의 하에서의 조선에서는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반드시 문묘를
설치했지만, 무묘는 설치하지 않았다.
무묘는 임란시에 명나라 병사들이 건설한 이후 관왕묘란 이름으로 몇몇 세워졌지만,
문묘에 비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는 문치주의로 불릴 정도로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주자학을 편향적으로 숭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건설된 문묘에는 유학의 발전에 기여한
중국과 한국의 유명학자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학생들의 사표로 삼았다.
나아가 성균관과 향교에 모셔지는 학자들을 문묘배향공신이라고 불러 최고의 영예와
권위를 부여했다.
조선시대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존경받았으며,
국가에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그 후손들을 특채했다.
조선시대의 문묘는 공자를 모신 중앙의 대성전과 그 앞의 좌우에 세운
동무와 서무로 이루어졌다.
중앙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중국의 유학을 상징하는
총 21명의 학자들을 모셨다.
동무와 서무에는 그 외의 중국학자들과 우리나라 출신의 유학자들을 모셨다.
한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한국 사람을 문묘에 배향한 것은
고려 현종 11년(1020) 8월이었다.
당시 최치원을 문묘에 배향했는데, 신라사람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유교 실력으로 이름을 떨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2년 후인 현종 13년(1022) 1월에는 신라의 설총을 문묘에 배향했다.
불교가 성행하던 신라에서 유교를 학습하고 실천한 설총의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이로써 최치원과 설총은 한국의 유교역사에서 태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 말인 충숙왕 6년(1319)에는 안향이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주자학을 학습하고 국학을 진흥시킨 공로가 평가된 것이다.
고려시대 문묘에 배향된 최치원, 설총, 안향은 사실상 신라와 고려시대의 유학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문묘배향공신의 지위와 영향력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조선사회가 유교 화될수록 유교를 대표하는 문묘배향공신의 중요성이 급속도로
증대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공신은 정몽주였다.
조선개국 이후 정몽주, 권근 등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요구가 줄기차게 있었지만,
결국은 정몽주가 중종 12년(1517) 9월 17일에 배향된 것이다.
정몽주의 신위는 최치원의 신위 다음에 자리했다.
중종 당시 조광조로 대표되던 사림 세력은 조선건국의 주체세력이었던 권근보다는
고려왕조에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친 정몽주가 조선유교의 태두라고
존경해 마지않았다.
정몽주가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조선시대의 유교는 권근 계열의 실용적 유교보다는
정몽주 계열의 도학과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은 모두가 정몽주를 연원으로 내세우는 도학자들이었다.
예컨대 광해군 2년(1610) 7월 16일에 문묘배향공신으로 결정된 이른바 5현인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은 자타가 공인하는 도학자이며 의리학자들이었다.
임란 이후 당쟁이 격화 되면서 문묘배향 공신도 당쟁의 대상이 되었다.
즉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의 당파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을
문묘에 배향시키고자 하였다.
이 결과 당파가 바뀔 때는 문묘배향공신까지 바뀌는 일도 있었다.
예컨대 서인의 연원으로 상징되는 이이와 성혼은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중앙권력을
장악한 후 문묘배향공신이 되었지만,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힘을 잃으면서
문묘에서 축출되었다.
이이와 성혼은 갑술환국에서 서인이 남인을 축출한 이후 다시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숙종 때 이후 문묘배향공신은 박세채를 제외하면 모두가 노론계 인물들이었다.
이는 숙종 때 이후 노론이 당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박세채의 경우는 탕평을 모색하던 숙종이 일찍이 탕평론을 주장한
박세채를 높이 평가하여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한 인물들, 즉 김인후,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노론 계열의 학문적, 정치적 연원을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문묘배향공신은 학문적 업적을 정치, 군사적 업적 못지않게 중시한 조선시대
문치주의의 결과였다.
문묘배향공신은 한국의 유학사 및 학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로서 정공신이나
종묘배향공신보다도 더 높은 명예를 누렸다.
학문과 문화를 중시한 조선시대의 특징이 문묘배향공신 제도 극명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문묘 대성전 전경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조 39년(1606)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중당과 양옆에 있는 익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서재는 기숙사 공간으로 성균관(成均館)이라 알려져 있다.
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출처] 보물 제141호 서울문묘
종묘배향공신 95위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왕실의 위기를 극복한
공신들 이외에 정치와 학문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도 공신이라고 불렀다.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이 그들이다.
종묘배향공신은 왕과 함께 종묘에 모셔지는 공신들이었으며,
문묘배향공신은 유교의 교주 공자를 모신 성균관과 향교에 모셔지는 공신들이었다.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으 제도는 고려 이래로 시행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발전했다.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은 조선시대 정치와 학문을 대표하는 공신들이었다.
종묘배향공신은 국왕을 가장 잘 보필하여 왕도 정치를 구현하게 한 공로로
책록되었는데, 이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관료였다.
문묘배향공신은 조선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유학의 발전에 크나큰
공로를 세운 공로가 인정되는 학자들이었다.
정공신이나 원종공신이 위기상황에서 책봉되는 것에 비해,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은 평화 시에 책봉된다는 점에서 달랐다.
종묘배향공신은 조선시대 관료들의 꿈과 같은 존재였다.
양반관료의 최대 이상인 왕도적치 구현에 기여했다는 평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예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가문으로 존중되었으면 그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았다.
종묘배향공신은 보통 국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그 왕의 신주를 종묘에 종안하기
보름이나 한 달 전쯤에 결정되었다. 배향 당사자는 선왕이 살아 있을 때
보좌하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관료들이었다.
예컨대 조선의 건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신주는 태종 10년(1410) 7월 26일에
종묘에 모셔졌는데, 태조의 배향공신인 이화, 조준, 이지란, 조인옥 등 4명은
약 보름 전인 7월 12일에 결정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핵심 참모로서 조선건국에 절대적인 공훈을 세웠던 정도전은
태종이 일으켰던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므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태종은 약 10년 후에 남은, 남재, 이제 등 3명을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추가하게 하였다.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의 배향공신이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 최 응 등 6명 이었으므로 이보다 더 많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결과 고종 이전에는 국왕의 배향공신이 7명을 넘어가지 못했다.
실제 왕 노릇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추존된 왕이나 복위된 왕에게는
원래는 배향공신이 없었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추존왕인 덕종, 원종, 진종, 장조, 문조, 그리고 복위된 단종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고종 대에 장조와 문조에게도 배향공신을 정해서 올렸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던 흥선대원군이 강행한 것으로서 조선건국 이래의
전통은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은 추존왕의 배향공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친과 관료들을 배향공신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실제 왕 노릇을 했지만 축출된 왕, 예컨대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당연히 배향공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아예 종묘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종묘배향공신은 살아생전 국왕으로 군림하다가 사후에 종묘에 모셔지는 왕에게만 해당하는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망국의 왕인 고종과 순종에게도 배향공신은 있었다.
비록 일제 강점기이기는 하지만 고종이나 순종도 종묘에 모셔졌으며, 국왕으로 재위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배향공신은 박규수, 신인조, 이돈우, 민영환 이렇게 4명 이었다.
순종도 고종과 마찬가지로 4명이 배향공신으로 선정되었다.
처음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추천된 사람은 9명이었다. 즉 일제 강점기에 이왕가를
관장하던 이왕직에서 추천한 배향공신 후보자는 이유원, 서 당보, 송 근수, 김병시,
정 범조, 송병선, 이경직, 이완용, 서 정순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이왕직 장관 한 창수, 후작 박영효, 자작 윤덕영, 남작 한규설 등
20명이 창덕궁에 모여 각자 추천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 아래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 결과 송 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 정순 4명이 배향공신으로 선정되었다.
매국노로 지탄받던 이완용은 동그라미 1개만을 받아서 탈락되었다.
이렇게 하여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으로 선발된 사람은
총 95명에 달했다.
배향공신으로 결정되면 별도의 신주를 봉상시라고 하는 관청에서 미리 제작했다.
다만 신주에는 해당자의 이름을 쓰지 않은 상태였다.
봉상시는 조선시대 제사 및 시호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부서였다.
국왕의 삼년상 이후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시기가 가까워지면 봉상시는 제작했던
신주를 공신가의 사당에 보내 제사를 지냈다.
왜냐하면 배향공신으로 선정된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그의 후손이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향공신의 신주를 모시고 사당으로 갈 때는 의장을 갖추었다.
공신의 신주는 어깨에 메는 가마에 넣어서 가지고 갔는데, 국왕의 교서,
제사에 쓸 제문 및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신주 등도 행렬에 포함되었다.
공신의 사당에 도작하면 먼저 국왕의 교서를 먼저 읽었다.
이 교서는 배향공신으로 선정된 사실을 알리며 아울러 그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로서 예문관에서 작성했다.
교서를 읽은 다음에는 가지고 온 신주에다 직함과 성명을 썼다.
교서를 읽거나 신주를 쓰는 것은 모두 봉상시의 관원과 함께 온 관리의 몫이었다.
이어서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문을 읽은 후 직함과 성명을 쓴 배향신주를
모시고 돌아갔다.
배향신주는 국왕의 신주를 모시는 날까지 궁궐안의 적당한 곳에 모셔두었다.
그러다가 국왕의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는 날 배향신주를 종묘의 공신당에 모셨다.
종묘는 기본적으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정전과 그 앞의 좌우에 있는 공신당,
그리고 칠사당으로 이루어졌다.
정전은 살아생전의 국왕과 마찬가지로 북쪽에서 남쪽을 향했다.
이에 비해 공신당은 좌측 즉 왼쪽에 있으며, 칠사당은 우측 즉 오른쪽에 위치했다.
마치 왕의 좌우에서 모시는 동반과 서반처럼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의 혼령을
공신당과 칠사당의 영령들이 모시는 것이었다.
종묘배향공신은 자신이 보좌한 국왕의 신주가 종묘에서 나가면 같이 나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것도 왕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갔지만, 배향공신의 신주는 후손에게 주어서
불태우도록 했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도는 제후의 체제에 입각한 5묘제, 즉 다섯 명의 왕만 모시는
제도였다.
즉 태조 이성계와 현왕의 직계 4대까지만 모시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왕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종묘를 건설했을 때에 5칸의 정전을 지은 것은 바로 다섯 왕을 모시기
위한 5묘제의 종묘제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종묘 정전 앞의 공신당에는 태조 이성계 및 현왕의 4대까지 다섯 왕의
배향공신만이 있을 수 있었다.
최초의 공신당이 3칸이었던 것은 그것만으로도 다섯 왕의 배향공신을 모시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묘에 모셔진 국왕이 불후의 공덕이 있을 경우에는 종묘에서 옮겨지지 않았다. 이런 국왕의 신주를 불천위라고 하였다.
종묘배향공신이 영원히 종묘에 머물려면 자신이 보좌한 국왕이 불천위가
되어야 가능했다.
즉 자신이 국왕을 잘 보좌하여 불후의 공덕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현재 종묘 정전은 19위의 왕을 모시는 19칸인데,
이는 최초의 5칸 봐 몇 배나 늘어난 규모이다.
이는 5왕을 제외한 14위의 왕이 불천위가 된 결과였다.
따라서 19위의 왕을 모시는 배향공신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최초의 3칸이었던 공신당은 현재 16칸으로 늘어나 있다.
조선시대의 종묘배향공신 제도는 국왕을 잘 보좌한 관료들을 위한 최고의 포상제도이며 동시에 국왕을 잘 보좌하게 하기 위한 최고의 동기부여 정책이기도 하였다.
태조조(太祖朝) 묘정 배향 공신
조 준(趙 浚) 평양인(平壤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이 화(李 和) 전주인(全州人) 양소공(襄昭公) 의안대군(義安大君)
남 재(南在) 의령인(宜寧人) 충경공(忠景公) 영의정(領議政)
이 제(李 濟) 전주인(全州人) 경무공(景武公) 태조부마(太祖駙馬)
이지란(李之蘭) 청해인(靑海人) 양렬공(襄烈公) 청해백(靑海伯)
남 은(南誾) 의령인(宜寧人) 강무공(剛武公) 절제사(節制使)
조 인옥(趙仁沃) 한양인(漢陽人) 충정공(忠靖公) 이 판(吏 判)
정종조 (定宗朝)묘정 배향 공신
이 방의(李芳毅) 전주인(全州人) 안양공(安襄公) 익안대군(益安大君)
태종조 (太宗朝) 묘정 배향 공신
하 륜(河 崙) 진주인(晉州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조영무(趙英茂) 한양인(漢陽人) 충무공(忠武公) 우의정(右議政
정 탁(鄭 擢) 청주인(淸州人) 익경공(翼景公) 우의정(右議政)
이 천우(李千祐) 전주인(全州人) 양도공(襄度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 래(李來) 경주인(慶州人) 경절공(景節公) 지 사(知 事)
세종조(世宗朝) 묘정 배향 공신
황 희(黃 喜) 장수인(長水人) 문경공(文景公) 영의정(領議政)
허 조(許 稠) 하양인(河陽人) 정렬공(貞烈公) 좌의정(左議政)
최윤덕(崔潤德) 통천인(通川人) 정렬공(貞烈公) 좌의정(左議政)
신 개(申 槩) 평산인(平山人) 문희공(文僖公) 좌의정(左議政)
이 제(李 禔) 전주인(全州人)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讓寧大君)
이 보(李 補) 전주인(全州人) 정효(靖孝公) 효령대군(孝寧大君)
이 수(李 隨) 봉산인(鳳山人) 문정공(文靖公) 이 판(吏 判)
문종조(文宗朝) 묘정 배향 공신
하 연(河 演) 진주인(晉州人) 문효공(文孝公) 영의정(領議政)
세조조(世祖朝) 묘정 배향 공신
한 확(韓 確) 청주인(淸州人) 양절공(襄節公) 좌의정(左議政)
권 람(權 擥) 안동인(安東人) 익평공(翼平公) 좌의정(左議政)
한명회(韓明澮) 청주인(淸州人) 충성공(忠成公) 영의정(領議政)
예종조(睿宗朝) 묘정 배향 공신
박원형(朴元亨) 죽산인(竹山人) 문헌공(文憲公) 영의정(領議政)
성종조(成宗朝) 묘정 배향 공신
신숙주(申叔舟) 고령인(高靈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동래인(東萊人) 충정공(忠貞公) 영의정(領議政)
홍 응(洪 應) 남양인(南陽人) 충정공(忠貞公) 좌의정(左議政)
중종조(中宗朝) 묘정 배향 공신
박원종(朴元宗) 순천인(順天人) 무열공(武烈公) 영의정(領議政)
유순정(柳順汀) 진주인(晉州人) 문성공(文成公) 영의정(領議政)
성희안(成希顔) 창녕인(昌寧人) 충정공(忠定公)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 동래인(東萊人) 문익공(文翼公) 영의정(領議政)
인종조(仁宗朝) 묘정 배향 공신
홍언필(洪彦弼) 남양인(南陽人) 문희공(文僖公) 영의정(領議政)
김안국(金安國) 의성인(義城人) 문경공(文敬公) 대제학(大提學)
명종조(明宗朝) 묘정 배향 공신
심연원(沈連源) 청송인(靑松人) 충혜공(忠惠公) 영의정(領議政)
이언적(李彦迪) 여주인(驪州人) 문원공(文元公) 좌찬성(左贊成)
선조조 (宣祖朝) 묘정 배향 공신
이준경(李浚慶) 광주인(廣州人) 충정공(忠正公) 영의정(領議政)
이 황(李 滉) 진보인(眞寶人) 문순공(文純公) 찬성(贊 成)
이 이(李 珥) 덕수인(德水人) 문성공(文成公) 찬 성(贊 成)
인조 (仁祖朝) 묘정 배향 공신
이원익(李元翼) 전주인(全州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신 흠(申 欽) 평산인(平山人) 문정공(文貞공) 영의정(領議政)
신경진(申景禛) 평산인(平山人) 충익공(忠翼公) 영의정(領議政)
이 귀(李 貴) 연안인(延安人) 충정공(忠定公)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 보(李 俌) 전주인(全州人) 정효공(貞孝公) 능원(綾原大君)
이 서(李 曙) 전주인(全州人) 충정공(忠正公)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김 류(金 瑬) 순천인(順天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효종조(孝宗朝) 묘정 배향 공신
김상헌(金尙憲) 안동인(安東人) 문정공(文正公) 좌의정(左議政)
김 집(金 集) 광산인(光山人) 문경공(文敬公) 예 판(禮 判)
송시열(宋時烈) 은진인(恩津人) 문정공(文正公)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 여흥인(驪興人) 문충공(文忠公) 좌의정(左議政)
민유중(閔維重) 여흥인(驪興人) 문정공(文貞公) 영돈녕(領敦寧)
이 준(李 濬) 전주인(全州人) 충경공(忠敬公) 인평대군(麟平大君)
현종조(顯宗朝) 묘정 배향 공신
김좌명(金佐明) 청풍인(淸風人) 충숙공(忠肅公) 예 판(禮 判)
정태화(鄭太和) 동래인(東萊人) 익헌공(翼憲公)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 안동인(安東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김만기(金萬基) 광산인(光山人) 문충공(文忠公) 대제학(大提學)
숙종조(肅宗朝) 묘정 배향 공신
남구만(南九萬) 의령인(宜寧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윤지완(尹趾完 ) 파평인(坡平人) 충정공(忠貞公) 우의정(右議政)
박세채(朴世采) 반남인(潘南人) 문순공(文純公) 좌의정(左議政)
김만중(金萬重) 광산인(光山人) 문효공(文孝公) 대제학(大提學)
최석정(崔錫鼎) 전주인(全州人) 문정공(文貞公) 영의정(領議政)
김석주(金錫冑) 청풍인(淸風人) 문충공(文忠公) 우의정(右議政)
경종조(景宗朝) 묘정 배향 공신
이 유(李 濡) 전주인(全州人) 혜정공(惠定公) 영의정(領議政)
민진후(閔鎭厚) 여흥인(驪興人) 문충공(文忠公) 병 판(兵 判)
영조조(英祖朝) 묘정 배향 공신
김창집(金昌集) 안동인(安東人) 충헌공(忠獻公)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 해주인(海州人) 충정공(忠貞公) 영의정(領議政)
민진원(閔鎭遠) 여흥인(驪興人) 문충공(文忠公)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 풍양인(豊壤人) 문충공(文忠公)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 청풍인(淸風人) 정충공(靖忠公) 영의정(領議政)
장조실(莊祖室) 묘정 배향 공신
민백상(閔百祥) 여흥인(驪興人) 정헌공(正獻公) 우의정(右議政)
이종성(李鍾城) 경주인(慶州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정조조(正祖朝) 묘정 배향 공신
김종수(金鍾秀) 청풍인(淸風人) 문충공(文忠共) 우의정(右議政)
유언호(兪彦鎬) 기계인(杞溪人) 충문공(忠文公) 우의정(右議政)
김조순(金祖淳) 안동인(安東人) 충문공(忠文公) 영돈녕(領敦寧)
순조조(純祖朝) 묘정 배향 공신
이시수(李時秀) 연안인(延安人) 충정공(忠正公) 영의정(領議政)
김재찬(金載瓚) 연안인(延安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김이교(金履喬) 안동인(安東人) 문정공(文貞公) 우의정(右議政)
조득영(趙得永) 풍양인(豊壤人) 문충공(文忠公) 이 판(吏 判)
조만영(趙萬永) 풍양인(豊壤人) 충경공(忠敬公) 영돈녕(領敦寧)
이 구(李 球) 전주인(全州人) 충정공(忠正公) 남연군(南延君)
문조실(文祖室) 묘정 배향 공신
공철(南公轍) 의령인(宜寧人) 문헌공(文憲公) 영의정(領議政)
김 로(金 鏴) 의령인(宜寧人) 문헌공(文獻公) 이 판(吏 判)
조병귀(趙秉龜) 풍양인(豊壤人) 문숙공(文肅公) 이 판(吏 判)
헌종조(憲宗朝) 묘정 배향 공신
이상황(李相璜) 전주인(全州人) 문익공(文翼公) 영의정(領議政)
조인영(趙仁永) 풍양인(豊壤人) 문충공(文忠公) 영의정(領議政)
철종조(哲宗朝)묘정 배향 공신
이헌구(李憲球) 전주인(全州人) 충간공(忠簡公) 우의정(右議政)
김수근(金洙根) 안동인(安東人) 정문공(正文公) 판돈녕(判敦寧)
이 희(李 羲) 전주인(全州人) 충정공(忠正公) 익평군(益平君)
고종조(高宗朝) 묘정 배향 공신
신응조(申應朝) 평산인(平山人) 문경공(文敬公) 우의정(右議政)
박규수(朴珪壽) 반남인(潘南人) 문익공(文翼公) 우의정(右議政)
이돈우(李敦宇) 전주인(全州人) 문정공(文貞公) 판의금부사(判議禁府事)
민영환(閔泳煥) 여흥인(驪興人) 충정공(忠正公) 참 정(參 政)
순종조(순종조) 묘정 배향 공신
이경직(李景稷) 전주인(全州人) 효민공(孝敏公) 우의정(右議政)
서정순(徐正淳) 달성인(達成人) 효문공(孝文公)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송근수(宋近洙) 은진인(恩津人) 문헌공(文獻公) 좌의정(左議政)
김병시 (金炳始) 안동인(安東人) 충문공(忠文公) 영의정(領議政
종묘 공신당 전경
공신당(功臣堂)은 정전의 정문 담장 안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맞배지붕 건물로 창건 당시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불과하였으나 공신이 늘어남에
따라 나중에 9칸으로 늘렸고, 현재는 정면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서쪽의 칠사당(七祀堂)과 같은 구조 형식으로 매우 간소하게 되어 있다.
왕의 신실(神室)과 한 울타리에 있어서 일부러 형식을 간소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